가난하다는 것은
가난은
가난한 사람을 울리지 않는다.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오직 한 움큼만 덜 가졌다는 뜻이므로
늘 가슴 한 쪽이 비어 있어
거기에
사랑을 채울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므로
사랑하는 이들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개망초꽃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 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꽃을 개망초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때
눈물 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것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들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꽃이라 부르겠는가
겨울 숲에서
참나무 자작나무 마른 잎사귀를 밟으며
첫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왠지 그대가 올 것 같아
나는 겨울 숲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이 계절에서 저 계절을 기다리는
헐벗은 나무들도 모두
그래서 사랑에 빠진 것이겠지요
눈이 쌓일수록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송두리째 버리는 숲을 보며
그대를 사랑하는 동안
내마음 속 헛된 욕심이며
보잘것없는 지식들을
내 삶의 골짜기에 퍼붓기 시작하는
저 숫눈발 속에다
하나 남김없이 묻어야 함을 압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따뜻한 아궁이가 있는 사람들의 마을로
내가 돌아가야 할
길도 지워지고
기다림으로 부르르 몸 떠는
빈 겨울 나무들의 숲으로
그대 올 때는
천지사방 가슴 벅찬
폭설로 오십시오
그때가지 내 할 일은
머리 끝까지 눈을 뒤집어쓰고
눈사람되어 서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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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를 기다리며...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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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색 바지에 대하여
저 벽에 걸린 바지는
국방색이다
단단한 청춘의 허벅지가 쑥 빠져나갔다
나는 후줄그레한 저 바지를 볼 때마다
우리들의 뒷골목을 돌아가야 빠꼼하게 간판불을 달고 있는
여인숙을 생각한다
그리운 냄새가 킁킁, 날 것도 같다
휴전선 이남에서 국방색 바지 입고 좆뺑이친 사내들 중에
50년대 이후 거기 누워 옆방에서
힘쓰는 소리, 욕지거리 한번 들어보지 않은 놈 있으면
나와 봐라, 국방색 바지가 걸려 있는 모든 방은
그래서 붉은 유곽이며
우리는 유곽이 키운 자식들이다
빳빳하게 다린 바지 훌러덩 벗고 그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누구도 어른이 될 수 없는 나라에서
그 바지 속에다 팽팽한 두 다리를 밀어 넣고
헌 자전거 타고 연대본부에 출근하던 나는
방위병이었다, 그때
군용트럭 위에서 여자만 보면 주먹감자를 먹이던
현역들의 성욕을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국방색 바지 속에 숨어 있는
욕망의 종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짬밥을 퍼먹을 때
나는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마다 어이 물방위, 하고 불러서는 차렷, 열중쉬어 시키던
한참이나 어린 상병의 낯짝에 침 한번 뱉지 못했던 것도
계급 때문이 아니라
내가 국방색 바지를 그보다 먼저 벗게 되기 때문이었다
생전에 우리 아버지는 군에 가면 밥도 주고 옷도 주고
그래야 사람이 된다, 하셨지만
나는 내 아들에게는 다시는 입히지 않을
녹슨 못대가리에 달랑 매달려 있는
치욕의 빈 껍데기 같은
저 국방색 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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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괴로움으로 하여
그대는 울지 마라
마음이 괴로운 사람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니
아무도 곁에 없는 겨울
홀로 춥다고 떨지 마라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세상 속으로
언젠가 한번은 가리라 했던
마침내 한번은 가고야 말 길을
우리 같이 가자
모든 첫 만남은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커서
그대의 귓불은 빨갛게 달아오르겠지만
떠난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더 많은 우리가
스스로 등불을 켜 들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있어
이 겨울 한 귀퉁이를
밝히려 하겠는가
가다 보면 어둠도 오고
그대와 나
그 때 쓰러질듯 피곤해지면
우리가
세상속을 흩날리며
서로서로 어깨 끼고 내려오는
저 수많은 눈발 중의 하나인 것을
생각하자
부끄러운 것은 가려주고
더러운 것은 덮어주며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찬란한 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우리
가난하기 때문에
마/음/이/ 따/뜻/한/ 두/ 사/람/이 되/자
괴로움으로 하여 울지 않는
사/랑/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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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가는길
그대가 한자락 강물로 내 마음을 적시는 동안 끝없이 우는 밤으로 날을
지새우던 나는 들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밤마다 울지 않으려고 괴로워하는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래오래 별을 바라본 것은 반짝이는 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어느 날 내가 별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헬 수 없는 우리들의 아득한
거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지상의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길들을 내기 시작
하였습니다
해 뜨는 아침부터 노을 지는 저녁까지 이 길 위로 사람들이 쉬지 않고
오가는 것은 그대에게 가는 길이 들녘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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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차를 위하여
기관차야, 스스로 너는 힘을내 달린다고 생각하겠지
하찮은 일에서부터 세상을 움직이는 큰일까지
혼자힘으로는 될 수 없는게 너무 많다는 것을 모르고
기관사가 타고 서울역에서 출발하기만 하면
어디든 닿을 수 있다고 너는 생각하겠지
그래서 떠나기도 전에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구나
가령 객차에 한사람의 손님도 타지 않았다면
화물칸에 라면상자 하나 싣지 않았다면
비록 떠난다해도 너는 우스운 쇳덩어리일 뿐
그 누구에게도 추억이 될 수 없을 거야
이세상 끝에서 끝까지 얼마나 많은
철길들이 서로 어깨끼고 있는 줄도 모르고
부산이나 목포까지 갔다 왔다고 기적을 울리며
플랫포옴으로 들어오는 기관차야, 자만심을 버려야해
국경을 건너고 거친 대륙을 횡단하기 전에는
한반도는 슬픈 작은섬일 뿐이야
내 어린시절, 기차를 몇번 타 봤는지
얼마만큼 먼곳 까지 타고 갔다 돌아왔는지 내기할 때마다
시골뜨기인 나는 미리 주눅이 들곤 했었는데
나중에 커서야 알았지 세상을 많이 아는것도 어렵지만
세상하고 더불어 사는건 더욱 벅차다는 것을
이제 슬쩍 너에게만 말해줄게 있는데
기관차야, 요즈음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삶은 계란을 잘 사먹지 않는 까닭은 말이야 그것은
삶으로 부터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란다.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간이역의 이름름처럼
앞으로 많은 날들이 너를 녹슬게 하겠지만
기관차야, 철길위에 버티고 서있지 말고
새길을 만들어 달릴때 너는 기관차인 것이다.
끝이다. 더는 못간다 싶을때 힘을내
달릴수 있어야 모두들 너를
힘센 기관차로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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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누가 나에게 꽃이 되지 않겠느냐 묻는다면
나는 선뜻 봉숭아꽃 되겠다 말하겠다
꽃이 되려면 그러나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겠지
꽃봉오리가 맺힐때까지
처음에는 이파리부터 하나씩
하나씩 세상 속으로 내밀어 보는 거야
햇빛이 좋으면 햇빛을 끌어당기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흔들어보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도 오겠지
그 밤에는 세상하고 꼭 어깨를 걸아야 해
사랑은
가슴이 시리도록 뜨거운 것이라고
내가 나에게 자꿈 할해주는 거야
그 어느 아침에 누군가
아, 봉숭아꽃 피었네 하고 기뻐하면
그이가 그리워하는 모든 것들의 이름을
내 몸뚱어리 짓이겨 불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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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후광과 거산의 싸움에서 내가 지지했던 후광의
패배가 아니라 입시비리며 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이 아니라
대형 참사의 근본원인 규명이 아니라 전교조 탈퇴확인란에
내손으로 찍은 도장 빛깔이 아니라 미국이나 통일문제가
아니라 일간신문과 뉴스데스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이를테면,
유경이가 색종이를 너무 헤프게 쓸 때,
옛날에는 종이가 얼마나 귀했던 줄 너 모르지?
이 한마디에 그만 샐쭉해져서 방문을 꽝 걸어 잠그고는
홀작거리는데 그때 그만 기가 차서 나는 열을 받고
민석이란 놈이 후레쉬맨 비디오에 홀딱 빠져있을 때,
이제 그만 자자 내일 유치원 가야지 달래도 보고
으름장도 놓아 보지만 아 글쎄, 이 놈이 두 눈만 껌뻑이며
미동도 하지 않을 때 나는 아비로서 말못하게 열받는 것이다
밥 먹을 때, 아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시장을 못 갔다고
아침에 먹었던 국이 저녁상에 다시 올라왔을 때도 열받지만
어떤 날은 반찬가지수는 많은데 젓가락 댈 곳이 별로 없을 때도
열받는다 어른이 아이들도 안 하는 반찬투정하느냐고
아내가 나무랄 때도 열받고 그게 또 나의 경제력과 아내의 생활력과
어쩌고 저쩌고 생활비 문제로 옮겨오면 나는 아침부터 열받는다
나는 내가 무지무지하게 열받는 것을
겨우 이만큼 열거법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한테 열받는다
죽 한그릇 얻어 먹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열거는 궁핍의 증거이므로
헌데
열받는 일이 있어도 요즘 사람들은 잘 열받지 않는다
열받아도 열받은 표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요즘은 그것이 또한 나를 무진장 열받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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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 이 꽃
네가 등을 보인 뒤에 냉이꽃이 피었다
네 발자국 소리 나던 자리마다 냉이꽃이 피었다
약속도 미리 하지 않고 냉이꽃이 피었다
무엇 하러 피었나 물어보기 전에 냉이꽃이 피었다
쓸데없이 많이 냉이꽃이 피었다
내 이 아픈 게 다 낫고 나서 냉이꽃이 피었다
너의 집이 보이는 언덕빼기에 냉이꽃이 피었다
문득문득 울고 싶어서 냉이꽃이 피었다
눈물을 참으려다가 냉이꽃이 피었다
너도 없는데 냉이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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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이 푸른 이유
대숲의 푸른 머리카락을 빗질하려고
바람이 대숲으로 들어가네
댓잎들이 배때기를 일제히 뒤집은 채
바람을 밀어내려고 버티네
이것 좀 봐 화가 잔뜩 난 바람이
한 손으로 대숲의 머리채 휘어잡고
한 손으로 대숲의 종아리 후려치네
대숲이 왜 저렇게 푸르냐 하면
아으, 한평생 서서 매맞은 탓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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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밤
아,고 잡거들이 말이여,불도 한점 없는 거 뭣이냐 깜깜한 뮛동가에서 둘이서
불이 붙어가지고는 누가 왔는지 ,누가 지나가는지 , 누가 처다보는지 모르고
말이여, 여치는 싸랑싸랑 울어댓쌓은디 내가 어떻게나 놀라부럿는가 첨에 는
참말로 귀신들이 아닌가 싶어 대가리 털이 바짝 서두만 가만히 본께 두 년놈들이 깨를
홀라당벗고는 메뚜기같이착싹 붙어가지고는 일을 벌이는디,
하이고매 숨이 그만 탁 막혀 나는 말도 못하고 소리도 못지르겠고 그런다
좋은 구경 놔두고 꽁무니 빼기도 그렇고 마른침을 꼴딱 삼켜가면서눈알이 빠져라
쳐다보는디 글쎄, 풀들이 난데없이 야밤에 짓뭉개져가지고는 푸르딩딩 멍든
자죽처럼 짓뭉개져가지고는 아한 냄새를 피워올리는 바로 고것들이 무슨 죄일까 싶어
나 참별 생각도 다해봤는디 말이여,그때 말이여 반딧불하나가 눈을 깜빡깝빡하면서
싸가지 없이 나를 빤히 보고있었던 거 아니겄어, 한마디로 챙피해두만 눈을
깜빡깜빡하면서, 내가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지가 다 봤을거 아녀, 처음부터
끝까지 저도 다 보고있었으면서 말이여, 하이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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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집
세상 가득 은행잎이 흐득흐득 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늦가을이었다
교복을 만두속같이 가방에 쑤셔넣고
까까머리 나는 너를 보고 싶었다
하얀 김이 왈칵 안경을 감싸는 만두집에
그날도 너는 앉아 있었다
통만두가 나올 때까지
주머니 속 가랑잎 같은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무슨 대륙 냄새가 나는
차를 몇 잔이고 마셨다
가슴을 적시는 뜨거운 그 무엇이
나를 지나가고 잔을 비울 때마다
배꼽 큰 주전자를 힘겹게 들고 오던
수학 시간에 공책에 수없이 그린
너의 얼굴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귀 밑에 밤알만한 검은 점이 있는
만두집 아저씨 중국 사람과
웃으면 덧니가 처녀 같은
만두집 아줌마 조선 사람사이에
태어난 화교학교에 다닌다는 그 딸
너는 계산대 앞에 여우같이 앉아 있었다
한 번도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고
미운 단발머리 너는
창밖 은행잎 지는 것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날 만두값도 내지 않고 나와버렸다
네가 뒤쫓아오기를 바라면서
왜 그냥 가느냐고 이대로는 못 간다고
꼭 그 말이라도 듣고 싶었는데
너는 지금까지도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그 이후로 네가 보고 싶어도
매일 가던 너의 만두집에 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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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
길가에 민들레 한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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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어회 한 접시
눈이 오면, 애인 없이도 싸드락싸드락 걸어갔다 오고 싶은 곳
눈발이 어깨를 치다가 등짝을 두드릴 때
오래된 책표지 같은 群山, 거기
어두운 도선장 부근
눈보라 속에 발갛게 몸 달군 포장마차 한 마리
그 더운 몸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거라
갑자기, 내 안경은 흐려지겠지만
마음은 백열 전구처럼 환하게 눈을 뜰 테니까
세상은 혁명을 해도
나는 찬 소주 한 병에다
숭어회 한 접시를 주문하는 거라
밤바다가, 뒤척이며, 자꾸 내 옆에 앉고 싶어하면
나는 그날 밤바다의 애인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이미 양쪽 볼이 불콰해진
바다야, 너도 한 잔 할래?
너도 나처럼 좀 빈둥거리고 싶은 게로구나
강도 바다도 경계가 없어지는 밤
속수무책, 밀물이 내 옆구리를 적실 때
왜 혼자 왔냐고,
조근조근 따지듯이 숭어회를 썰며
말을 걸어오는 주인아줌마, 그 굵고 붉은 손목을
오래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라
나 혼자 오뎅 국물 속 무처럼 뜨거워져
수백 번 엎치락뒤치락 뒤집혀 보는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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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 한 장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들선들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을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듯이
연탄은, 일단 제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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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고여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가끔씩 두레박이 내려온다고 해서
다투어 계층상승을 꿈꾸는 졸부들은 절대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누군가 목이 말라서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철철 피 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것은
고여 있어도 어느 틈엔가 새 살이 생겨나 그윽해지는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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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이웃집 감나무가 울타리를 넘어왔다
가지 끝에 오촉 전구알 같은 홍시도 몇 개 데리고
우리집 마당으로 건너왔다
나는 이미 익을 대로 익은 저 홍시를
따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몇 날 며칠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은 당장 따먹어 버리자고 했고,
딸은 절대로 안 된다 했다
이웃집 감나무 주인도
월경(越境)한 감나무 가지 하나 때문에
꽤나 골치 아픈 모양이었다
우리 식구들이 홍시를
따먹었는지, 그냥 두었는지
여러 차례 담 너머로 눈길을 던지곤 했다
그때마다 아내는 감나무 가지에서
홍시가 떨어질까 싶어 마음을 졸였다 한다
밤중에 변소에 가다가도
감나무 가지에 불이 켜져 있나, 없나
먼저 살핀다고 한다
아,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감나무 때문인가
홍시 때문인가
울타리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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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세월에게
홍매화 꽃망울 달기 시작하는데 싸락눈이 내렸다
나는 이제 너의 상처를 감싸주지 않을 거야
너 아픈 동안, 얼마나 고통스럽냐고
너 아프면 나도 아프다고
백지 위에다 쓰지 않을 거야
매화나무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나뭇가지 속이 뜨거워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너를 위하여 내가 흘릴 눈물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거야 쿨룩쿨룩, 기침을 하며
싸락눈이 봄날을 건너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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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에 대하여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
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
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
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
자줏빛을 톡 한번 건드려봐
흔들리지?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봄은,
제비꽃을 모르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지만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
그냥 가는 법이 없단다
그 사람 앞에는
제비꽃 한포기를 피워두고 가거든
참 이상하지?
해마다 잊지 않고 피워두고 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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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
혼자 가는 길보다는
둘이서 함께 가리
앞서지도 뒤서지도 말고 이렇게
나란히 떠나가리
서로 그리워하는 만큼
닿을 수 없는
거리가 있는 우리
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리
사람이 사는 마을에 도착하는 날까지
혼자 가는 길보다는
둘이서 함께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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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엽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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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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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밤에 시 쓰기
연탄불 갈아보았는가
겨울 밤 세시나 네시 무렵에
일어나기는 죽어도 싫고, 그렇다고 안 일어날 수도 없을 때
때를 놓쳤다가는
라면 하나도 끓여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벌떡 일어나 육십촉 백열전구를 켜고
눈 부비며 드르륵, 부엌으로 난 미닫이문을 열어 보았는가
처마 밑으로 흰눈이 계층상승욕구처럼 쌓이던 밤
나는 그 밤에 대해 지금부터 쓰려고 한다
연탄을 갈아본 사람이 존재의 밑바닥을 안다,
이렇게 썼다가는 지우고
연탄집게 한번 잡아보지 않고 삶을 안다고 하지 마라,
이렇게 썼다가 다시 지우고 볼펜을 놓고
세상을 내다본다. 세상은 폭설 속에서
숨을 헐떡이다가 금방 멈춰선 증기기관차 같다
희망을 노래하는 일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는 일인가를 생각하는 동안
내가 사는 아파트 아래 공단 마을
다닥다닥 붙은 어느 자취방 들창문에 문득 불이 켜진다
그러면 나는 누군가 자기 자신을 힘겹게도 끙, 일으켜 세워
연탄을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리 수출자유지역 귀금속 공장에 나가는 그는
근로기준법 한줄 읽지 않은 어린 노동자
밤새 철야작업하고 왔거나
술 한잔하고는 좆도 씨발, 비틀거리며 와서
빨간 눈으로 연탄 불구멍을 맞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 타버린 연탄재 같은 몇 장의 삭은 꿈을
버리지 못하고, 부엌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연탄냄새에게 자기 자신이 들키지 않으려고
그는 될수록 오래 숨을 참을 것이다
아아 그러나, 그것은 연탄을 갈아본 사람만이 아는
참을 수 없는 치욕과도 같은 것
불현듯 나는 서러워진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눈발 때문이 아니라
시 몇 줄에 아등바등 매달려 지내온 날들이 무엇이었나 싶어서
나는 그동안 세상 바깥에서 세상 속을 몰래 훔쳐 보기만 했던 것이다
다시, 볼펜을 잡아야겠다
낮은 곳으로 자꾸 제 몸을 들이미는 눈발이
오늘밤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불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나는 써야겠다,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지금 내가 쓰는 시가 밥이 되고 국물이 되도록
끝없이 쓰다 보면 겨울 밤 세시나 네시쯤
내 방의 꺼지지 않는 불빛을 보고 누군가 중얼거릴 것이다
살아야겠다고, 흰 종이 위에다 꼭꼭 눌러
이 세상을 사랑해야겠다고 쓰고 또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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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이 오면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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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위하여
그대를 만난 엊그제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내 쓸쓸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개울물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던 까닭은
세상에 지은 죄가 많은 탓입니다.
그렇지만 마음 속 죄는
잊어버릴수록 멀어져 간다는 것을
그대를 만나고 나서야
조금씩 알 것 같습니다.
그대를 위하여
내가 가진 것 중
숨길 것은 영원히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하여
아픈 가슴을 겪지 못한 사람은
아픈 세상을 어루만질 수 없음을 배웠기에
내 가진 부끄러움도 슬픔도
그대를 위한 일이라면
모두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대를 만나고부터
그대가 나를 생각하는 그리움의 한 두 배쯤
마음 속에 바람이 불고
가슴이 아팠지만
그대를 위하여
내가 주어야할 것들을 생각하며
나는 내내 행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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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으로 하나로 무잔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서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 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스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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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사람에게
기다려도 오지않는 사람을 위하여
불 꺼진 간이역에 서 있지 말라
기다림이 아름다운 세월은 갔다
길고 찬 밤을 건너가려면
그대 가슴에 먼저 불을 지피고
오지않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비로소 싸움이 아름다운 때가 왔다
구비구비 험한 산이 가로막아 선다면
비껴 돌아가는 길을 살피지 말라
산이 무너지게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
함성이 기적으로 울 때까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는
그대가 바로 기관차임을 느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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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그대에게 가는 길이
세상에 있나 해서
길따라 나섰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끝없는 그리움이
나에게는 힘이 되어
내 스스로 길이 되어
그대에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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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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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지
내 사는 마을쪽에
쥐 똥 같은 불빛 멀리
가물거리거든
사랑이여
이밤에도 울지 않으려 애쓰는
내 마음인 줄 알아라
우리가 세상 어느 모퉁이에서
헤어져 남남으로
한 번도 만나지 않은듯
서로 다른 길이 되어 가더라도
어둠은 또 이불이 되어
아픔을 덮고 슬픔도 가려주리라
그대 진정 나를 사랑하거든
사랑했었다는 그 말은 하지 말라
그대가 뜨락에 혼자 서 있더라도
등뒤로 지는 잎들을 내게
보여 주지는 말고
잠들지 못하는 밤
그대의 외딴집 창문이 덜컹댄다 해도
행여 내가 바람되어 문 두드리는 소리로
여기지 말라.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알 수 없는 그윽한 기쁨에
돌아 앉아 몸을 떠는 것이
사랑이라지만
이제 이 세상을 나누어 껴안고
우리는 괴로워 하리라
내 마지막 편지가
쓸쓸히 그대 손에 닿거든
사랑이여,
부디 울지 말라
길 잃은 아이처럼 서 있지 말고
그대가 길이 되어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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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우체국
바다가 보이는 언덕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들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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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죄 짓는 일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로 하여 그이가 눈물 짓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못 견딜 두려움으로
스스로 가슴을 쥐어뜯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내가 쓰러져 죽는 날에도
그이를 진정 사랑했었노라 말하지 않게 하소서
내 무덤에는 그리움만
소금처럼 하얗게 남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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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 지붕에 대하여
양철 지붕이 그렁거린다, 라고 쓰면
그저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 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래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
날아가지 않으려고
몸에 가장 많이 못자국을 두른 양철이
그놈이 가장 많이 상처 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
다는 것을
너는 눈치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
쉽게 꺼내지 말 것
너를 위해 나는 녹슬어 가고 싶다, 라든지
비 온 뒤에 햇볕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는
않겠다, 라든지
그래, 우리 사이에는 은유가 좀 필요한 것 아니냐?
생각해 봐
한쪽 면이 뜨거워지면
그 뒷면도 함께 뜨거워지는 게 양철 지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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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싸우는 것
내가 이 밤에 강물처럼 몸을 뒤척이는 것은
그대도 괴로워 잠을 못 이루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창 밖에는 윙윙 바람이 울고
이 세상 어디에선가
나와 같이 후회하고 있을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이런 밤 어디쯤 어두운 골짜기에는
첫사랑 같은 눈도
한 겹 한 겹 내려 쌓이리라 믿으면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누우면
그대의 말씀 하나하나가 내 비어 있는 가슴속에
서늘한 눈이 되어 쌓입니다
그대
사랑은 이렇게
싸우면서 시작되는 것인지요
싸운다는 것은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 벅찬 감동을 그 사람 말고는 나누어 줄 길이 없어
오직 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인 것을
사랑은 이렇게
두 몸을 눈물 나도록 하나로 칭칭 묶어 세우기 위한
끝도 모를 싸움인 것을
이 밤에 깨우칩니다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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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편지
스무 살 안팎에는 누구나 한번쯤 연애 편지를 썼었지
말로는 다 못한 그리움이며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은 외로움이 있던 시절 말이야
틀린 글자가 있나 없나 수없이 되읽어
펜을 꾹꾹 눌러 백지 위에 썼었지
끝도 없는 열망을 쓰고 지우고 하다 보면
어느날은 새벽빛이 이마를 밝히고
그때까지 사랑의 감동으로 출렁이던 몸과 마음은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리곤 했었지
그러나 꿈 속에서도 꿨었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고
그런데 친구, 생각해보세
그 연애 편지 쓰던 밤을 잃어버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타협을 배우고
결혼을 하면서 안락을, 승진을 위해 굴종을 익히면서
삶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하겠는가
민중이며 정치며 통일은 지겨워
증권과 부동산과 승용차 이야기가 좋고
나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야 썩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친구, 누구보다 깨끗하게 살았노라 말하겠는가
스무 살 안팎에 쓰던 연애 편지는 그렇지 않았다네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집안에 도둑이 들면 물리쳐 싸우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가진 건 없어도 더러운 밥은 먹지 않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씩 찾으러 떠나는 거라고
그 뜨거운 연애 편지에는 지금도 쓰여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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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늦은 참회를 너는 아는지
내가 술로 헝클어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어둔 길가에
개나리꽃이 너무 예쁘게 피어 있었지요
한 가지 꺾어 들고는
내 딸년 입술 같은 꽃잎마다
쪽, 쪽 뽀뽀를 해댔더랬지요
웬걸
아침에 허겁지겁 나오는데
간밤에 저질러버린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내 잘못이
길바닥에 노랗게 점점이 피를 뿌려 놓은 것을
그만 보고 말았지요
개나리야
개나리야
나는 고쳐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인간이다 인간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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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 무렵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
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 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
오래오래 그렇게 앉아있다가 보면
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로 알았습니다
흘러가서는 되돌아 오지 않는 물소리가
그 애와 내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그애는 날이 갈 수록 부쩍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었고
나는 손 한번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먼산의 어깨를 짚어가며
강물이 적시고 갈 그 고장의 이름을 알려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강물이 끝나는 곳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여태 한번도 가보지 못한 큰 바다를
그애와 내가 건너야 할 다리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날마다 어둠도 빨리 왔습니다
그애와 같이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하고 생각하며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늘 어찌나 쓸쓸하고 서럽던지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애의 여린 숨소리를
열 몇살 열 몇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공식을
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만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일 줄을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 알것도 같습니다
안도현 시 모음
2020. 8. 12.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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