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의 백미는
예나 지금이나 시시비비 따지기다
선악과 범법의 끈질긴 후유증은
인류의 역사 전체를 관통한다
대립과 갈등이
논쟁으로 봉합되는 경우는 희박하다
오히려 분열의 골만 깊어진다
그렇게 지혜자의 말은 진실로 확인된다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그런데도 이기려고 선을 넘어간다
논적의 은밀한 것까지 찾아 꼬집는다
이는 상대방의 동일한 처신을 촉발하고
급기야 서로의 역린을 건드린다
끝장을 보자는 앙심이
눈동자를 뻘건 분노로 물들이고
줄 세우기와 편 가르기 문화라는 피멍이
공동체를 시퍼렇게 도색한다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싸움의 승리는 이김이 아니라 화목이다
용서는 화목의 자궁이다
에세이
한병수
비전
비전이 뭐냐
아브라함 하나님이 지시한다 그럴따 생긴다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
마음인가? 기도하면서 듣는 것인가? 분노인가? 뭘까요
만나면 무조건 주는 것 무슨 마음이지?
여러가지 방법 우리 은사 경험 고민 등등 모든 것들을 아우러서 하는 것인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
주시라고 규해야 한다 구해야 한다 더 이정호ㅓㄱ허게 달라고
여리고에서 보듯이 있듯이
자기가 뭘 할것인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만큼 멋있는 사람이 므없다 자기 지전이 머ㅝㄴ지 뭐를 가지는 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가지지 않으냔 없다
노트n
신론 170420
하나님의 속성 attributes, 성실, 성품, 完城완성, 덕들 virtue (남자다움 – 좋은 표현은 아니나 사람다움에서 온말)
1. 이것을 파악하는 잘못된 방식들
하나님은 이러하시다는 예상 (주로 중세의 스토아 철학자들)
1) via negationis 부정의 생각 –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를 부정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겠다는 생각
사람은 유한하다. finite
왜냐하면 사람은 언제가 죽기 때문에. mortal
사람은 몸을 가졌기에 mense
corpse
이를 부정하면
하나님은 infinite, immortal, immense, incorpse
2) via eminentiae 우월 혹운 우수의 방도
사람은 아는 것 science(scientia) 지금은 과학이라고 한다. 능력을 가진다(potence) 실제한다 (presence). 선의가 있다(benevolence)
이것을 하나님의 우월함에 적용해서
하나님은 ommi-science(전지), omni-potence(전능), omni-presence(전제 혹은 무소부재), omni-benevolence(전선)
3) via causalitatis 인과율의 방도 – 세상의 모든 것은 원인이 있다. 하지만 원인에 대한 무한한 역 추론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가서는 unmoved mover (자신이 시작이 되어서 다른 것들을 움직이게 한 것. 부동의 동작)
이 방법을 처음 발명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 그러나 그의 스승인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와는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님은 한분뿐임을 생각해내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 기도하고 경배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렇게 생각해내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과는 다르다. [파스칼은 철학자들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삭의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다] 유신론의 하나님 theism – 철학자들이 정리한 하나님. 아리스토텔레스의 머리 안에만 있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앉아서 생각한다고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이런 방식으로 알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발견한 알아낸 하나님의 속성을 정리하는 것에 이러한 중세의 방식을 사용하는 것은 유익하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경험해보면 안다. 그런데 그 경험, 체험만 가지고 하나님을 말하게 되면 사람마다 가지각색의 하나님이 되어버린다. 이 체험이 전체는 아니다. 하나님 외에는 전체를 포괄할 것이 없다.
[모든 것들은 다 정치적인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모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 가운데 계신다. 1 acts of God 행하심 2 words of God 말씀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한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하나님의 행동과 말씀을 통해서 아는 것이다. 이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보다 먼저 있었으나 현재 계시가 이미 성경으로 완성되었다. 물론 지금도 하나님의 행동과 말씀은 전파되어진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성경에도 일치하는 행동과 말씀이어야 한다. 구속사적 역사 가운데 있는 것이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배우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 확증 받는 것. 우리의 경험과 성경이 다르다면 경험을 버려야 하는 것.
계시의존사색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이전에 설명하신바 그런 것들을 살펴서 알게되는 것.
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가..는 다음주에..
2. 하나님의 속성을 어떻게 분류할 수 있는가 더 좋은 방법
1) communicative attributes 공유적 incommunicative attributes 비공유적 으로 나뉜다.
하지만 이런 나눔은 상대적인 나눔이다. 하나님은 질적으로 다르시다. 공유적속성도 결국은 비공유적이다.
(1) 비공유적 속성
A. 하나님은 aseity (자존성) - 출애굽기 3장 14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 속성, 존재자체 등을 의미한다. 고대 사회에서는 신의 이름을 알면 그 신의 이름을 가지고 축복과 저주를 할 수 있다. 그 이름을 가지고 조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예흐에 아세르 예흐에
3가지 번역
1) I am that I am = 나는 나다, 알려고 하지 말라
2) I am = 나는 존재하는 자이다 70인경
3) I will be what I will be = 나는 나일 것이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하다면 같이 가보자. 이 구원의 여행에 동참해보라. 그러면 나를 알게 될 것이다.
세 가지 번역 중 더 좋은 것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신학을 하다보면 성경을 근거로 함을 발견하게 되는데 성경의 구체적 기록은 없으나 전체적 사상을 통해서 증명되는 것들이 있다.
causa sui (스스로 존재하심),
독립성(우리에게 의존하지 않으신다, 반면 피조물은 하나님께 의존한다, 그런데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9W1
에니어그램에서는 성격은 기본적으로 인간 성격의 근간을 장(본능) 중심, 가슴(감정) 중심, 머리(사고) 중심으로 크게 3가지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J님은 장(본능)의 에너지를 많이 쓰는 것으로 나왔어요.
장형은 기본적으로 '영역'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분노'하기 때문에 공격적인 사람들로 보이고, 환경에 저항하고 통제당하는 걸 싫어합니다.
'현재중심적'이기 다른 중심들보다 행동력이 강합니다.
중심아래에는 3가지 유형으로 나뉘며, J님은 9유형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유형이 좋고 어떤 유형이 나쁜게 없습니다. 에니어그램에서는 자기의 힘과 유형을 자각하는게 중요합니다^^)
9유형은 '평화주의자', '중재자'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조화와 평화를 바라는 유형으로 포용하고 믿을 줄 알고 안정적입니다.
대체적으로 창의적이고 낙관적이며 남들을 잘 지지합니다.
그런데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남들과 좋은 관계에 지나치게 집착할 수도 있고,
모든 일을 불화없이 순조롭게 되길 원하는 특징이 있어 결점이나 문제를 축소시키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게으름이나 외고집이 문제가 될 수 있어요.
9유형의 장점은
평화적이고,
침착하고,
위안을 주고,
인내심이 강하고,
온순하고,
끈기가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유형다음에는 흔희 보조적으로 많이 쓰는 성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J님의 날개는 1로 나왔습니다.
1유형은 원칙을 준수합니다. 완벽을 좋아하고, 윤리적이죠.
9유형의 1번날개를 가진 사람의 별명은 '몽상가'입니다.
9와 1은 모두 장중심에 있는 성격입니다. 장유형의 특징인 활력, 우선순위 세우기, 심각한 상황을 피하기 보다는 직면하기, 책임감있고, 정확한 사람이 됩니다. 건강한 상태에서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창조적이기 때문에 다양한 사상이나 관점으로 이상적인 세상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어요. 이사람들은 친절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시만 목표 의식이 분명하고 이상이 높습니다.
평균 상태일때는 내면세계정돈과 외부 질서를 동시에 원해서, 불필요한 활동을 지나치게 할 수 있는 데, 9의 힘을 많이 쓷보면 소극적인 태도로 장기목표를 추구하기 어려울 수는 있어요.
존경 받는 것에 관심이 많고, 최고와 완전함 청교도적인 성향 등을 가치있게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날개는 양쪽이 다 있어야 똑바로 날라가듯이 8번의 날개도 가끔씩 사용해주세요.
8번은, 현실적이고 활발하고 자신감 있고 겁없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9유형의 특징으로 가보겠습니다.
9유형은 평화주의자라고 했죠? "기다리면 모든게 잘 될 거야"라고 생각하고, 나는 평화로운 사람이라는 자아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들은 이들에게 안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들이 잘하는 건 '입장바꿔 생각해봐!'입니다.
왜 이런 특징을 보이는 걸까요?
이들은 갈등이 싫습니다. 그래서 아닌걸 아니라고 말 못할 때도 있죠. 중요한 일인데 말안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스스로 '상관없다' 고 생각하는 방어기제가 있습니다.
안정 평화를 중요시하기 때문에(집착) 불만이 있을 수 있는 상황도 그대로 흘러가는데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어떨때는 옆사람의 속을 터지게 만들 수도 있어요.
그리고 자신을 하찮은 존재, 사랑받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에니어그램은 사람의 성격을 진단하고 끝이 아니라,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발전하기 위한 방향을 확인하는데, 9번 유형의 경우는 3번 유형으로 가는 방향이 통합방향이고, 6번으로 가는게 분열의 방향입니다. J님은 현재 6번을 향하고 있어 분열상태로 나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분열상태이니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나아가야될 방향이 3번이라는 것만 일단 기억해두시면 됩니다.
3번의 장점은,
성취적이고,
효율적이고,
실용적이고,
부지런하고,
긍정적이고,
목표지향적입니다.
왜 3번으로 의식적으로 가려고 노력해야되는지 눈치 채셨나요?
3번은 해야할 일에 집중을 합니다.
9번의 단점인 여러일에 평화롭게 똑같이 걸쳐있는 상황에서 될 것에 힘을 쏟고 성과를 거둬내는 거죠.
그러면서 자아상이 긍정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6번이 분열방향이긴 하지만 6번의 좋은 능력을 쓸때는 장점이 됩니다. 6번은 용기 있게 문제를 직면할 수 있죠.
마지막으로 전체 다이나믹을 보겠습니다.
에너지를 골고루 쓰는 게 건강한 건데, 전반적으로는 평균이하로 에너지를 쓰는 건 없기 때문에 건강한 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처] [로빈의 HR] 에니어그램 진단결과 (J님) 9w1|작성자 로빈
예전노트 11년1월
들국화의 음악을 듣는다
그들의 음색을 듣는다
나의 슬픔을 이들이 노래해주고잇다
슬프다
정말슬프다
아정말슬퍼서정말그렇다
시대적 아픔과 개인의 존재적 아픔
그속의 젊은이의 고민 고뇌 그것이 뼈로 사무친다
살같을 후벼판다
갈비사이를 후벼판다
그것은 정말 아프다
날카러워서 숨이막혀온다
그것ㄱ이 그들의 노래에대한 기억이다
나는 그들의 노래에 동감한다
그들의 회ㅢ와 고뇌
사랑 불같은사랑 그것을 꺼내들고싶은 갈망
그것이 그들의 음악에 잇다
현실에 안주하고싶은
지쳐서 그만하고싶은 마음과
쓰러진자신에대한 미움과 분노 자책
이것도 저것도 안되는
그야말로 갈등의 상황
그것이 그들이 표현하고자하는 마음이다
나는 만약에
가수가된다면
싱어송라이터가된다면
그들과같은 글을쓰고 노래를 할 것이다.
나는 그런노래밖에 하지 못한다
정말로 나는 이제 그런노래밖에 하지 못하게되었다.
그속에서히미하게보이는희망이라는빛
그것을붙잡으러가는것이다
당연히 사람들이생각하는그길과는다를수박에없다
좁은문으로가는길은 정말 좁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살았던 삶이며
내가 살아가고싶은 삶이다.
그런 삶에 나의 청춘과 나의 노년을 바쳐야할것같다
30세의 그리스도와같이
자신의 불꽃을 남김없이 태워버리고 살아가야한다
정말그렇다
나는 나의 모든 것들을 불태우며살아가야한다
정말로 나는 그렇게 살아가야한다.
160131
말씀이 우선되어 살지 못하는 이유
1 율법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령이 이미 임재하셔서 모든 것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없고 그냥 성령이 행하시는 것을 받아들이고 가면된다.
2 도덕적 판단이 우선한다
하나님보다 자신의 도덕 판단이 우세한다 성경에 말하는 것 그리고 영적 리더가 하는 것을 자신의 도덕적 기준이 잣대가 되어 판단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바위를 쳐서 물을 얻은 것을 가지고 도덕적 판단을 한다 그러나 고린도후서를 보면 그 반석이 예수님을 가르킨다
3 자기 생각 가치관 철학 등이 우선한다.
자기 생각이 더 우선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계획 생각들이 우선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요약하면 자신이 하나님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가 그것이 자신을 드러내서이거나 자신을 부정적으로 내세워서든지간에 말이다
무튼 이런 모습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편하게 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완전히 내려놓고 성령의 일하심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팔복 논문
성경개관 코멘트
에스겔은 제사장의 아들이었으며 여호야긴 포로된지 5년에 삼십살이었으며 마지막 신탁은 여호야긴 포로 27년으로 보아 22년동안 최소 사역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제사장 가문 출신은 성전 및 성전에서의 제의에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드러난다. 제사장들은 삼십세쯤부터 사역을 시작했으나 포로생활을 했기에 제사장의 직무를 할 수 없었고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 이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멸망을 선포하시고 계획하시고 감독하실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상류 계층 출신들로서 과거 선지자들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집단이었으며 포로생활 후 부귀한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들은 에스겔에 적대적이었으며 무시하였다.
문학적인 분석
이사야서, 스바냐서, 칠십인경 예레미야는 모두 선지자 자신이 살던 시기 심판과 관련된 신탁으로 시작되고 이방 나라들의 방대한 신탁을 나열하고 먼 미래에 대한 축복의 예언으로 끝나게 된다. 이 선지자의 부름에 대한 기록 및 예루살렘의 임박한 멸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화에 대한 말씀들은 에스겔의 아내가 죽기까지 되었고 이 소식이 포로로 잡힌 자들에게 전해질 것을 예고한다. 그리고 주변 나라들의 신탁들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멸망을 예언한다. 이러한 이방 나라들에 대한 예언 후에는 이스라엘의 축복된 미래에 대한 묘사를 한다. 에스겔 선지자가 파수꾼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 개인의 도덕에 대한 설교, 아내 죽음과 벙어리 시절의 마감으로 시작된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에스겔 초점은 미래 도성과 하나님 백성에 맞추어진다. 에스겔 벙어리 생활 기간은 많은 논쟁을 가져왔는데 그는 완전한 벙어리는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할때만 말을 했다.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그의 입을 여셨고 축복과 소망의 이야기를 남겼다. 선지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백성을 대표했으며 기도했다. 에스겔의 벙어리는 자기 민족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예루살렘의 멸망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임박한 멸망에 대한 선언만 있었다.
에스겔서에는 많은 알레고리적 본문들이 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문자적 해석이 난무하였었다. 군사적 긴장과 에스겔서의 구절을 직접 연결시키려고도 하고 있다. 메섹과 두발왕 곡이 모스크바와 토볼스크로 연결시키거나 해서 러시아가 중동의 나라를 침입한다고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것을 얘기할 때에 북방에서 오는 적들은 전통적인 적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는 초역사적이고 묵시적 색채를 가진다. 하나님 나라 백성에 대항하는 모든 나라들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를 하는 것이다. 자신과 자신 동료 포로들이 잡힌 바벨론의 심판은 담지 않는다. 이런 오해는 재건 공동체와도 연관되는데 예루살렘 귀환이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니게 이루어졌으며 에스겔이 묘사하는 성전은 실제 지어지지 않았기에 미래의 성전에 대한 청사진과 세부사항을 준다고 주장한다. 이는 문자적 해석을 초월하는 것이며 본질상 상징적 성격을 가짐을 중시하고 전체 이상이 하나님께서 백성을 미래에 어떻게 축복하실지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초월적 경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다니면서 새로운 성전으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때에 성취되었다. 새로운 성전에서의 제반 사항들에 대해서 에스겔은 오경의 것과 다른 부분이 있으며 사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 책을 읽을 때에 에스겔의 감정에 몰입하게 된다. 일인칭으로 쓰인 유일한 선지서이라는 것도 연관된다. 에스겔은 책 전체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인자라고 불리우는데 인간이라는 연약함을 부각시켜주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에 비교된다. 다양한 문학 양식이 사용되기도 했는데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많은 장르들을 사용한 것이다. 에스겔의 상징행위들은 다른 설교들과 마찬가지 효과를 가지면서 제시되어지고 있다.
신학적인 메시지
하나님의 거룩성과 초월성 – 에스겔에서 하나님은 피조물과 선지자 자신을 초월하시는데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상을 보았을 때에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을 보았다고 말한다. 이는 실제 보는 것에 대한 암시를 피해가는 수단이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이스라엘의 죄를 목도할 수 없으셨고 죄를 간과하지 않으심이 보여진다. 이스라엘은 반항적이었으며 우상을 숭배했다. 정화된 하나님께 준종하는 남은 자들을 배출하실 것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을 어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약속들을 새롭게 물려받고 회복을 통해 그들 가운데 다시 계실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성 –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나라들의 정사와 운명을 지배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전 안쪽의 것에 갇히신 분도 아니다. 모든 나라들은 그의 명령을 수행하며 선지자들의 말을 통한 말씀들은 실현될 것이다. 그 말들의 진정성을 증명하는데 하나님의 인정의 문구가 등장한다. 에스겔의 말씀을 성취하심으로서 자신과 자신의 선지자를 변호하시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의 능력부족이 아니라 뜻하신 바이기 때문이고 회복도 약속으로 동일하게 보여질 것임을 알 수 있다.
개인적인 책임 – 포로생활은 하나님과 그의 율법에 반역한 지난 세대들의 축적된 죄악으로 일어난 것이다. 순종과 불순종이 가져오는 개별적 결과들을 강조했으며 하나님이 조상들의 죄 때문에 자신들의 세대를 벌한다는 것에서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지 않는 간과하고 있다. 포로 시대의 죄들 역시 예루살렘 멸망에 기여했으며 이런 접근태도 정상성을 위해 역사를 새로 기술한 것이다.
신약으로의 접근
이 책을 단순화 시킬수는 없으며 요약하기 어렵다. 초대 교회는 에스겔의 예언 속에서 자신들 시대의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된 동일 원인들을 찾아내었으며 교회는 자신들의 회복의 약속들의 후사라고 보았다. 회복에 대한 에스겔의 이상은 하나님의 새로운 도성이 처소와 그의 백성 영원히 함께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요한의 묘사에 바탕을 제공해 주었다. 에스겔 시대의 이스라엘과 초대 교회 및 이스라엘의 상황과 역사적으로 비슷한 모양을 가지는데 에스겔서의 많은 다른 주제들과 모티브들은 신약에서 발전된다. 에스겔의 강물의 제단 남쪽 흐르는 것이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인 말씀에서 생명의 물의 근원으로 연결된다. 과실나무들이 열두번씩 과실 맺는 것을 에스겔이 본 것은 예수께서 끝없는 추수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게하는 것과 연관된다.
에스겔은 거짓 선지자들이 이익을 노리는 것에 비난했으며 그들을 모세와 대비시키고 있다. 예수께서는 모세보다 큰 선지자이시며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서서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시고 있다. 회복에 대한 이상에는 영광스런 성전이 포함되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함께하시는 것으로 상징되어진다. 이 성전은 너무나 크고 장엄해서 이상을 통해서만 표현할 수 없다. 이는 에수께서 성전으로 존재하셨을 때 우리가 영광스러운 분으로 묘사한다. 이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을 때 두 번째 성전에 임하는 것이다.
다니엘서
다니엘서는 양면적 성격을 가지는 책인데 단순한 책이기도하고 복잡한 책이기도 한다. 전반부는 인기있는 간단한 주제들이고 후반부는 복잡한 이상의 논쟁이 있다. 수많은 논쟁의 원천이 되어왔는데 그 역사성과 예언에 대한 해석의 경우가 그러하다. 여러 부분들이 신비로 남아있다.
문학적인 분석
다니엘서에는 궁정 내러티브와 묵시적 예언의 두 장르가 두드러지고 있다. 이런 구분의 특징은 히브리어와 아람어 부분 구분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궁정 내러티브 – 다니엘서 전반부는 다니엘과 세친구의 이야기에 초점을 둔다. 이 궁정이야기의 다니엘서 1-6장의 배경을 제시해주고 있으며 이방 궁정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것에 초점을 둔다. 5장의 경우 궁정 내 경쟁 이야기의 구조를 보인다. 다니엘은 여러 갈등을 격고 영광의 자리로 승진한다. 이런 식으로 파악할 때에 성경 본문과 성경외적 문헌들과 연결성을 보게 된다. 이 이야기들의 공통적 기능으로는 교훈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압제자에서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것이다. 이것들을 궁정 내러티브로 보는 것은 역사적 측면에서 저자의 의도를 의문으로 남겨둔다. 허구적으로 부르면서 결론을 대변해 준다. 역사성의 문제는 장르 파악에 의해 해결될 수 없으며 비역사적인 것으로 해석을 선호하게 된다. 초자연적인 것과 미래적 예언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성경적 세계관을 받아 본문을 역사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에 방해되진 않는다.
묵시적 예언 – 다니엘서의 전체적 성격은 보통 묵시적 예언으로 간주되어지고 구약에서 아무런 논란없이 묵시문헌으로 간주되어지는 것은 이것뿐이다. 구약의 다른 본문들등과 같이 묵시적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의 난점은 장르의 정의의 의견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르에 대한 전통적 접근방법은 본문 내에서 본문을 묵시로 규정 짓도록 하는 특징들을 추출해내는 것이다. 종말론의 특정한 종류 역사적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억압받는 자이에 마지막 때의 승리를 바라보게 하는 종말론과 연관된다. 이런 맥락에서 묵시문학이 특정한 종말론이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계시임을 나타낸다. 묵시문학의 다른 접근 방법은 묵시문학의 본질적 특징은 내러티브의 외곽틀, 중개된 계시, 종말론적 내용들로 나누어 되어 진다. 이렇게 묵시문학은 독립 범주로 다루어지고 있지만 장르의 구성에 대한 확실한 일치는 존재하지 않으며 선지문헌과 구분 짓는다는 점이 있다. 이러한 묵시문학과 선지문헌을 너무 단순하거나 예리하게 정의하려는 것에서부터 난점이 발생하는데 장르는 결국 사물들 속 내재되는 엄격한 범주가 아닌 경계선이 겹치는 유동적인 문학 사항이며 유동적 관계를 인식하면서 후자의 정의의 장애를 극복하는 것으로 선지문학과 묵시문학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묵시문학과 선지문헌들의 공통특징들은 자주 발견되지만 후자에는 덜 나타나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1.협의의 종말론 – 묵시문학은 말세를 바라보는데 모든 억압을 그치는 시대를 바라보며 항상 계신 자에게 구름 타고 오시는 인자는 자기 백성을 억압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시는 것이다. 2. 중개된 계시 –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이 백성에 가져다주는 존재이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면서 유다 백성에게 그 전달한 사명을 받는다. 이 백성이 그 말씀에 어떤 반응을 보이면 선지자는 다시 새 말씀으로 돌아간다. 새로운 요소로서 중개자를 통해서 다니엘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두 번째 종류의 계시 중개는 여행을 통해서 천상적이고 종말론적인 것을 계시한다. 3. 보기 드문 상징들 – 기타 묵시문학적 책들에는 상징들이 상당히 사용되는데 묵시문학의 상징은 경이적이다. 악은 가장 기괴하게 묘사되면서 혼종 동물로 표현된다. 이런 상징 표현들은 이방 종교에서 자주 발견된다. 4. 억압이라는 배경 – 묵시문학은 억압받는 사회나 그런 게층의 산물이다. 신약에서의 묵시문학의 대표인 계시록도 그렇게 표현된다. 억압은 묵시문학 속 만나는 악에 대한 묘사와 구원을 향한 부르짖음을 잘 설명해준다. 소망을 통해서 다니엘은 억압당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선지자들의 묵시문학 저자 간의 차이는 선지자는 위안을 누리고 있는 자를 공격하는 것이고 묵시문학 저자는 고통당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는 것이다. 묵시문학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용사로서의 하나님이고 강하게 개입하신 것을 고대한다. 5. 역사에 대한 결정론적 시각과 주도적인 낙관주의 – 고전적 선지서 기능으로 하나님 백성에게 다가오는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며 회개를 촉구한다. 반면 다니엘은 심판을 확정적으로 말하며 예언은 남은 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절망이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이 확실하며 이것에 소망을 두는 것이다. 6. 가명성과 사후 예언 – 묵시문학들은 사칭된 이름으로 쓰인 경우가 자주 있는데 여기에 대한 여러 의견들이 있어왔다. 7. 함축된 의미들과 기원들 – 다니엘서 후반부에서는 묵시문학과 연결 짓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상징적 표현들에 민감해야 하며 이 표현의 기능인 바벨론이 망할 것이라는 글보다는 그런 비유로 그런 믿음을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많은 상징적 표현들은 묵시적 시간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금한다. 마지막 시간을 산출하고자 하는 것은 본문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며 묵시문헌이 사용하는 비유법 성격은 고대 근동 신화로 차용될 것들에 대해 점검하게 된다. 장르 파악 작업은 다니엘서를 하는 것이다. 이런 장르 파악은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계시록 관계를 부각시킨다. 성경의 묵시문학적 기원을 따라가는데 이 기원은 예언된 전통이고 지혜 문학의 영향에서 나온 경우도 있다.최근 연구는 다니엘서가 후대의 책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묵시문학적 글들이 존재했으며 고대 근동 문헌과 연관됨을 보인다.
언어 – 두 가지 장르를 사용하는 것 외에도 두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아람어 부분은 왜 2장에서 했는데 그 의미와 기원이 주신 선물인데 내가 갑자기 가야하는 것이다. 다니엘서를 읽을 때에 유념해야 할 것은 이 책의 압제 시대의 모습에 대해 의논하게 된다.
합축된 의미들과 기원들 – 다니엘서 후반부는 묵시 문학적 요소을 드러낸다. 메신저로부터 상실들에 대했는지 아시고 말씀하시는데 이 목적은회개가 아니라 신실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이런 다니엘서를 이해하려면 먼저 상징성을 점술적인 지혜 순종들로 왔다는 것을 주장한다. 성경의 묵시문학 기원은 예언적 전통이락 할 수 있다.
언어 – 다니엘서는 두가지 아이디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광명위하게 순종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고 하다고 파악된다. 성경이 원래 보는 그대로라는 사실은 의심하는 역사는 없겠으냐 다니엘의 아람 부분이 히브리어 원문을 변형한 아람어라는 주장을 찾을 수는 없겠느냐는 이 책이 가지는 목표와 연관된다. 이런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지만 원래적 통일성은 아니더라도 최종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게끔 하는 것이다.
문체 – 다니엘의 문체에 대해서 높은 점수를 주지는 않는다. 언어 및 장르가 혼재되어 잇다는 점 외에도 인물들의 성격 묘사가 현대 기준에서 심오하지 못하는 등 구약의 어느 부분으로 볼때에 심오하지 모하며 이차원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 내러티브 속에서 어떤 신앙적 의심과 죄를 저지르지 않고 이상적 의인으로 제시된다. 인물 묘사는 이방 통치자들의 종교적 입장에 의문을 가지게 하고 본문이 우리에게 이상적 모습을 제공해준다고 해서 비역사적 기록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화는 왜곡과 위조의 선별 가능이다. 다니엘서의 다니엘에 대한 묘사는 역대기 서술몬에 대한 묘사와 연관되면서 우상 선베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체를 의미한다고 한다. 다니엘서의 전반부의 이상화된 등장인물에 대한 에피소드적 플론이 분명히 없으며 히브리적 산문으로 어렵다는 점도 있다. 그럼에도 단순한 플롯들, 이상화된 인물 등을 통해 미래의 소망의 원천을 발견하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다니엘서의 통일성 – 다니엘서는 다양한 장르와 언어를 보여주기에 책이 원래 통일성 문제가 있는지 논쟁되어왔다. 현재적 주석들은 첫째와 둘째 부분에서 이 책의 통일성을 옹호한다. 통일성이라는 용어는 최종적인 본문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같이 복합적인 본문이지만 현재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며 정경적 모습에 해석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보눈의 원래적 통ㅇ리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여전한 관심사이며 본문의 주장에 따라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본문의 통일성은 연대 및 저작권의 문제와 얽혀 있으며 다니엘서가 내적으로 주장하는 다니엘의 저작권은 전반부는 그가 하나의 대상이고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할 근거를 제시했었다. 단일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러다도 이것이 꼭 지켜져야만 저자가 할 시기에 따라 나오게 되는 것이다. 본래 통일성에 대한 질문을 가지는 것은 여전한 관심이고 통일성의 문제는 복잡히 얽혀있는 것이다. 단일 저작권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한번에 다 썼음을 의미하는지 논란이 되는데 통일성의 의미는 한 시기에 다 쓰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이 만족할 통일성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불가능하며 책의 주제는 전체를 통해 일관성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한 책에서 한가지 이상 장르를 쓰는 것은 통일성에 진정한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며 뚜렷한 교차대구법적 구조가 이상들이 시작되는 장들과 이야기를 연결시킨다. 정경상 통일성의 또 다른 문제는 70인경에 세 개의 다른 이야기들이 더 존재한다는 것으로 외경에는 발견된다. 이 세 이야기는 다 재미있고 교육적 목적을 가지는데 역사적 전통을 보존하지는 않으며 주제적 통일성을 가지지 못한다.
신학적인 메시지
다니엘서 신학적 메시지는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시며 결국 모든 인간적인 악들을 이기실 것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 이방 통치자들에 대한 본문은 대부분 호의적인데 다니엘과 세친구의 하나님 백성은 실제적 위협에 처해있으나 이 등장인물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며 구출하시고 증가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다니엘을 사형에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지만 하나님은 악을 정복하시고 정의를 가져다주실 권세가 있으신 것이다. 그래서 압제의 시대에 어떻게 처신할지 하나님 백성에게 말해주는 지침서의 역할을 한다. 전범적 지혜서인 것이다. 다니엘서 후반부에서는 박해속 사는 하나님 백성에 대해서 말하는데 하나님의 구원은 미래의 소망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돌볼 것을 믿고 순종적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악의 잠재성을 강하게 묘사하는데 노하는 바다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고 네 짐승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짐승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인간의 악이 강력하고 기괴한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결국 그리스가 로마에 무너짐을 알게 된다. 다니엘서는 이 끔찍한 인간적 악의 기원이 무엇인지 말한다. 인간의 교만이 이런 원인임을 말해준다. 다니엘은 단순히 악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혼돈에서부터 점령해 나가는 것이다. 예부터 항상 계신 이에 대한 그림에서 첫 번째 사항은 이 모사들이 모사의 형상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인간적 모습으로 묘사는 인간의 악의 영역에 대해 묘사할대 짐승적 이미지와 대조되며 그 점을 크게 각인시켜준다. 스스로의 교만에서 하나님을 배척하고 자신에게 힘을 끌어 오려는 인간들이 존재하는데 다른 한편에선느 악한 이 나라 사이의 전쟁이 하늘과 따의땅의 영역인데 하하님의 나라 사이 이런 전쟁이 하늘과 땅에 동시에 있음을 말한다. 다니엘은 하나님 나라 승리가 될 것임을 전했고 이 승리는 확실하고 완전한 것이다. 다니엘의 메시지는 구약 전체의 메시지 성경 전체의 메시지와 잘 맞고 하나님은 악과 전쟁을 치르더라도 승리하실 것이며 남은 자들을 위로하셨고 오늘날도 그렇다는 것이다. 시간에 관한 숫자들은 상징의 문맥에서 나오는데 묵시적인 시간 단위들은 단지 다니엘과 그의 백성에게 중요한 진리들을 전달하는 틀을 제공하고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으로의 접근
그리스도의 승리는 예견된 것이며 재림에 완성되신다. 이 미래 승리를 다니엘서를 자주 인용하면서 밝혀진다. 계시록은 다니엘서에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오셔서 이 세상 악을 제거하고 구원하심을 고대함을 말해주면서 위로를 준다.
호세아서
호세아서는 처음의 세장 내용이 잘 알려져 있는데 결혼과 이스라엘과 하나님 관계의 유비를 만날 수 있다. 이 해석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사랑에 대한 호세아의 메시지는 명쾌하다. 나머지 장들은 많은 난점들을 가지지만 이런 난점들을 파악하면서 시도해야 한다.
문학적인 분석
장르 및 연설의 양식 – 호세아서는 예언적 신탁들의 모음집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책 표제는 장르상의 표시를 한다. 산문으로 된 두 개의 신탁을 제하고는 대부분 운문으로 되어있다. 1-3은 신탁들을 개관하고 4-14는 구원에 관한 내용을 심판에 관한 내용으로부터 어조에 따라 구언해낸다. 특정한 심판 신탁들이 구체적으로 세분화해서 구분하기는 어렵다. 하나님의 일인칭 연설과 삼인칭 연설이 혼재되어 있는데 하나님과 동일시되어 구분해줄 필요가 있다.
구조 – 처음 세장은 문단 구분이 가능하지만 나머지 11장은 대략적으로 개관된다. 1-3과 4-14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되는데 처음에는 결혼에 대한 유비가 지배적이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여러 비유가 사용되고 있다. 11-12 사이에 구분선이 있다고 보기에 가능한데 심판에서 희망으로 전환을 담는다.
문체 – 중요한 산문부분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주로 시적인 문체를 가진 책이다. 주로 직유와 은유들이 나타난다. 그 비유적 표현들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관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하는 것으로도 구분할 수 있다. 북왕국을 불신실한 아내로 묘사하고 있으며 남왕국도 가끔 그렇게 묘사한다. 언어 유희를 활용하면서 호세아의 자녀들인 이스르엘은 죄로인한 벌, 로루하마는 긍휼이 없다,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난다.
신학적 메시지
언약 – 모세 언약이 호세아의 배후에 깔려 있는데 축복과 저주들이 모세 율법의 축복과 저주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심판의 연설들과 언약 저주 사이 존재하는 연결점들도 있는데 기근과 불임에 대한 언약의 저주로부터 나온 것이라 한다. 자신의 메시지에 언약이 차지한 위치를 명시하기도 한다.
호세아의 결혼 – 호세아의 결혼이 상징-신학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결혼이란 주제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을 처음으로 연결시킨 것이다. 배타성을 가지는 유일한 관계는 결혼과 언약이다. 여기서 경쟁자는 용납될 수 없다. 고멜의 성적 방탕은 이스라엘의 방탕과 상응하는 것이다. 최근 여권신장적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본문 자체 시각에서 벗어난다.
심판과 구원 – 불순종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및 구원의 소망은 언약의 토래로부터 흘러나온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여러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그 배후에는 배교행위가 갈려있는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도 그러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지식이 없기 때문이었으며 하나님보다 외국과의 연합을 선호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시기로 경고하시는데 역사적 전통에 따라 광야로의 회귀와 동일시된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소망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심판과 포로생활에서 영원히 남도록 버려두지 않으시고 두 번의 출애굽과 회복을 경험케 하실 것이다.
신약으로의 접근
신약에서는 호세아로부터 나온 중요 구절들이 인용되어 있다. 호세아 자녀들의 이름을 부정적이거나 긍정적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버지께 불순종한 이스라엘과 달리 의로운 하나님 아들이었다고 믿는 신앙에서 이해되어진다. 그래서 출애굽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호세아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으로 흘러가는 주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이 인간 결혼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주제를 기독교적 시각에서 발전시킨다.
요엘서
구약에 요엘이라는 인물은 12명이 더 있지만 이 선지자와 연결시킬 수는 없다. 표제에 다른 정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당대 잘 알려진 사람일 수도 있다. 예루살렘 주변에 살아서 성전을 잘 알고 예배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문학적인 분석
요엘서는 전체적으로 국가적 애사에 사용할 목적을 가진 에전적 문학이거나 역사적 본보기임을 보인다. 이런 관행에 대한 예들을 제공해주는데 재난이나 군사적 위협이 있을 때에 성소에모여 금식하는 것이나 탄원의 기도로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다. 이 책이 성전 예배 한 부분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면 다른 상황에서도 사용되어야할텐데 역사적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예배에 사용될 경우가 줄어든다. 죄의 고백과 관련되어서도 본문의 비역사화를 보면서 회개를 촉구하지만 특정 죄가 무엇인지 언급하지는 않는다. 예배에 사용되는 문헌은 덜 구체적일수록 용도의 범위가 넓어지는데 이런 면에서 연대를 파악하기 힘들고 비시간성이 우리 시대에 영향력을 가짐을 설명해준다. 요엘서의 통일성은 두움을 통해 두 명이상의 사람에게 저술이라고 파악되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약간의 중보부분은 있으나 한 저자로 보고 있고 애가적인 문학 구조를 가진다는 것에서 도출된다.
1장 메뚜기 재앙과 2:1-11의 관계는 논쟁거리였는데 그 접근방법은 1. 2장이 단지 1장과 동일한 메뚜기 재앙이지만 1장이후 뒤이은 역사상 실제 메뚜기 재앙에 대한 또 하나라는 입장인데 이는 은유적 성격을 무시하고 메뚜기들을 하나님 군대로 서술한다. 2. 2장이 이스라엘의 전통 적중 하나인 외국 군대의 예견된 침략을 표현하는 것이거나 모든 적들을 알레고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접근법에 따르면 메뚜기 재앙은 실제 적에 의한 더 큰 침략의 전조이며 그 침략의 결과로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것이다. 심판 받는 것은 이방 군대이고 유다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게 된다. 요엘서와 관련해서도 다른 강력한 나라와 관련된 승리가 연관되어 있음과 생각해볼 수 있으며 북에서 오는 군대들인 앗시리아 및 바벨론 관련으로 재사용된다. 그러나 본문상 다른 요소들은 실제적 군대에 어울리지 않으며 실제 군대에 대해 말한다면 군대와 비교하기 어려울 것이다. 3. 현대 주석들이 지지하는 접근은 메뚜기 침공의 두 번째 묘사가 메뚜기 재앙에 바탕을 두고 확장한 것이므로 악에 대한 성전에서 심판에 대한 전조로 사용된다. 역사상 어느 특정한 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군대로부터 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현을 묘사하는 것에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이런 은유적 성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군대는 인간의 군대처럼 표현된다. 결론에서 유다에게 재앙에서 구원할 뿐 아니라 말세 심판에서 해방할 것을 약속하신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피난처가 되실 것이다. 선지자가 묵시론적 위험의 제거에 이런 많은 것들을 할애하는 것은 메뚜기 군대에 대한 그의 두 번째 서술이 묵시론적 위험이 시작된 것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접근방법들은 두 기록 사이의 이해에 중요하다. 그러나 마지막 접근 방법이 가장 잘 파악하는 것이며 요엘서가 예전적 문헌이라면 이 책의 모호성은 이 상황과 다른 상황에서 사용되고 적용되어지는 작용을 하며 고의적인 모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적인 메시지
요엘은 하나님의 주권, 거룩하심, 자비에 대해 설파하면서 하나님은 선민의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드러낸다. 메뚜기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을 꾸짖고 회개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더 큰 재앙이 올 것이며 하나님의 개입으로 구원되는 소망을 가지는 많은 경우와 달리 냉소적으로 요엘은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다른 선지서들의 이방 나라 신탁과는 다르게 여호와의 날에 악에 대한 보편적이고 종말론적이며 결정적인 우주적 전쟁에 대해 다룬다. 열방들에 대한 이런 심판의 날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회개하고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인자와 자비를 보이시는 날이다.
신약으로의 접근
교회 역시 요엘을 통해 이스라엘에 주어진 하나님의 메시지를 필요로 하고 이는 여전히 진실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힘을 주고 예언을 가능케 하신다. 요엘은 하나님께서 모세기도를 들으시고 예언을 내다보았는데 베드로는 오순절을 통해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게된다. 이 임재의 불은 언어를 권능있게 하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 서열에서는 높은 위치의 유대 남자들이 기도할때에 노예나 이방인이나 여자로 태어나지 않음에 감사를 드렸는데 요엘은 예언의 능력이 남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 젊은이들, 노예들에게도 주어짐을 보인다. 이 만민은 유다 시민들만 말하는 것이지만 이스라엘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만큼 이 장벽도 무너진다. 모든 사람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며 요엘은 이스라엘만 말하지만 바울은 육신의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이스라엘에 적용된다고 말한다. 옛 선지자들에게 권능을 주었던 바로 그 신이 교회에도 권능을 주시고 거 증거의 권능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믿는 자들의 모든 제사장직을 말한다. 하나님을 부르거나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하는데 오순절 베드로 설교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
코멘트
에스겔에서는 상징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예언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상징 행동은 굉장히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예언을 드러내고 그 뜻을 함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징행동을 실제로 에스겔이 했을 때에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고민하게 된다. 상징 행동의 내용들은 굉장히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며 정상적이지 않다. 에스겔은 아마도 그런 상징행동을 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행동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으로도 파악될 수도 있지 않을지 고민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에 빠져서 심판의 날에 임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드러낼 수 없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런 방법을 사용해서 정말 듣게끔하도록 유도한 것이 아닐지 고민하게 된다. 또한 에스겔이 벙어리와 같이 지냈고 하나님의 말씀을 할 때에만 말했다는 것은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는 듯 보인다.
요엘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지에 대한 것들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국한되는 한정적인 예언의 성취가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백성들에게 해당하는 예언의 성취에 대해서 들여다보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에 대해서 보게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구속하시는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신다. 그리고 그 부어주신 영으로 하나님을 따라 살며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를 생각할 때에 이러한 영을 주심은 구약에서의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따르는 모든 구습에서 벗어날 것을 위한 것이기도 함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은 살아 움직이시기에 영향력이 있고 사람에게 실제적 영향을 끼친다. 물론 구약의 하나님께서도 주권적으로 개입하시지만 신약에 이르러 성령을 받은 신도와 같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하는 부분은 신약에 들어서 더 늘었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을 이미 예언적으로 시사하고 계셨고 이 예언을 사모하며 우리에게 실현된 하나님의 영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그 뜻에 맞추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