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는 길
김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2》
가막 덤불
김소월
산에 가시나무
가막덤불은
덤뿔 덤불 산마루로
벋어 올랐소
산에는 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바로 말로
집도 있는 내 몸이라오
길에는 혼잣몸의
홑옷 자락은
하룻밤 눈물에는
젖기도 했소
산에는 가시나무
가막덤불은
덤불덤불 산마루로
벋어 올랐소.
《3》
가을 저녁에
김소월
물은 희고 길구나, 하늘보다도.
구름은 붉구나, 해보다도
서럽다, 높아 가는 긴 들 끝에
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늘 깊어 오르는 발 앞으로
끝없이 나아 가는 길은 앞으로.
키 높은 나무 아래로, 물마을은
성깃한 가지가지 새로 떠오른다.
그 누가 온다고 한 언약도 없건마는!
기다려 볼 사람도 없건마는!
나는 오히려 못물가를 싸고 떠돈다.
그 못물로 놀이 잦을 때.
《4》
개여울
김소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 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5》
고적한 날
김소월
당신님의 편지를
받은 그 날로
서러운 풍설이 돌았습니다
물에 던져달라고 하신 그 뜻은
언제나 꿈꾸며 생각하라는
그 말씀인 줄 압니다
흘려 쓰신 글씨나마
언문 글자로
눈물이라고 적어 보내셨지요.
물에 던져달라고 하신 그 뜻은
뜨거운 눈물 방울방울 흘리며,
마음 곱게 읽어달라는 말씀이지요.
《6》
금잔디
김소월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深深) 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 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 산천에도 금잔디에
《7》
길
김소월
어제도 하루 밤
나그네 집에
가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었소.
오늘은
또 몇 십 리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말 마소, 내 집도
정주 곽산
차 가고 배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 십자 복판에 내가 섰소.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8》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김소월
'가고 오지 못한다' 하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만수산(萬壽山)을 올라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님도
오늘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고 하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으랴.
제석산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님의
무덤엣 풀이라도 태웠으면!
《9》
님에게
김소월
한때는 많은 날을 당신 생각에
밤까지 새운 일도 없지 않지만
아직도 때마다는 당신 생각에
축업은 베갯가의 꿈은 있지만
낯모를 딴 세상의 네길거리에
애달피 날 저무는 갓 스물이요
캄캄한 어두운 밤들에 헤메도
당신은 잊어버린 설움이외다
당신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비 오는 모래밭에 오는 눈물의
축업은 베갯가의 꿈은 있지만
당신은 잊어버린 설움이외다
《10》
님의 노래
김소월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제 가슴에 젖어 있어요
긴 날을 문 밖에서 서서 들어도
그리운 우리 님의 고운 노래는
해 지고 저물도록 귀에 들려요
고이도 흔들리는 노래 가락에
내 잠은 그만이나 깊이 들어요
그러나 자다 깨면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 없이 잃어버려요.
들으면 듣는 대로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 없이 잊고 말아요
《11》
동경하는 여인
김소월
너의 붉고 부드러운
그 입술에 보다
너의 아름답고 깨끗한
그 혼에다
나는 뜨거운 키스를......
내 생명의 굳센 운율은
너의 조그마한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12》
등불과 마주 앉았으려면
김소월
적적히
다만 밝은 등불과 마주앉았으려면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울고만 싶습니다,
왜 그런지야 알 사람이 없겠습니다마는,
어두운 밤에 홀로이 누웠으려면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울고만 싶습니다.
왜 그런지야 알 사람도 없겠습니다마는,
탓을 하자면 무엇이라 말할 수는 있겠습니까마는.
《13》
먼 후일
김소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의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14》
못잊어
김소월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오.
그런 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료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오
그런 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15》
바람과 봄
김소월
봄에 부는 바람 바람 부는 봄
작은 가지 흔들리는 부는 봄바람
내 가슴 흔들리는 바람 부는 봄
봄이라 바람이라 이 내 몸에는
꽃이라 술盞이라 하며 우노라.
《16》
부모 어머니
김소월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보랴?
《17》
산
김소월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 산골
영 넘어 갈려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내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은
칠팔십 리
돌아서서 육십 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 오 년 정분을 못잊겠네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삼수 갑산 가는 길은 고개의 길
《18》
山有花 (산유화)
김소월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갈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누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이 지네
갈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19》
엄마야 누나야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20》
엄숙
김소월
나는 혼자 뫼 위에 올랐어라.
솟아 퍼지는 아침 햇빛에
풀잎도 번쩍이며
바람은 속삭여라.
그러나
아아 내 몸의 상처받은 맘이여.
맘은 오히려 저리고 아픔에 고요히 떨려라.
또 다시금 나는 이 한때에
사람에게 있는 엄숙을
모두 느끼면서
《21》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김소월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밟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22》
왕십리
김소월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랴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이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상 마루에 걸려서 운다.
《23》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김소월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그림자 같은 벗 하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쓸데없는 괴로움으로만 보내었겠습니까!
오늘은 또다시 당신의 가슴속, 속모를 곳을
울면서 나는 휘저어 버리고 떠납니다 그려.
허수한 맘, 둘 곳 없는 심사에 쓰라린 가슴은
그것이 사랑, 사랑이던 줄이 아니도 잊힙니다
《24》
접동새
김소월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나라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랍 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25》
진달래 꽃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이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26》
招魂
김소월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는 그 사람이여!
사랑하는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음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음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27》
팔베개 노래
김소월
첫날에 길동무
만나기 쉬운가
가다가 만나서
길동무되지요.
날 긇다 말아라
가장님만 님이랴
오다가다 만나도
정붙이면 님이지.
화문석(花紋席) 돗자리
놋촉대 그늘엔
칠십년 고락을
다짐 둔 팔베개.
드나는 곁방의
미닫이 소리라
우리는 하룻밤
빌어 얻은 팔베개.
조선의 강산아
네가 그리 좁더냐
삼천리서도(西道)를
끝까지 왔노라.
삼천리 서도를
내가 여기 왜 왔나
남포(南浦)의 사공님
날 실어다 주었소.
집 뒷산 솔밭에
버섯 따던 동무야
어느 뉘집 가문에
시집 가서 사느냐.
영남의 진주(晋州)는
자라난 내 고향
부모 없는
고향이라우.
오늘은 하룻밤
단잠의 팔베개
내일은 상사(相思)의
거문고 베개라.
첫닭아 꼬끼요
목놓지 말아라
품속에 있던 님
길채비 차릴라.
두루두루 살펴도
금강 단발령 (金剛 斷髮嶺)
고갯길도 없는 몸
나는 어찌 하라우.
영남의 진주는
자라난 내 고향
돌아갈 고향은
우리 님의 팔베개.
《28》
풀 따기
김소월
우리집 뒷산에는 풀이 푸르고
숲 사이의 시냇물, 모래바닥은
파아란 풀 그림자, 떠서 흘러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날마다 피어나는 우리 님 생각.
날마다 뒷산에 홀로 앉아서
날마다 풀울 따서 물에 던져요.
흘러가는 시내의 물에 흘러서
내어 던진 풀잎은 옅게 떠갈 제
물살이 해적해적 품을 헤쳐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가엾는 이내 속을 둘 곳 없어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지고
흘러가는 잎이나 맘해 보아요.
《29》
하다 못해 죽어 달려가 올라
김소월
아주 나는 바랄 것 더 없노라
빛이랴 허공이랴,
소리만 남은 내 노래를
바람에나 띄워서 보낼밖에.
하다 못해 죽어 달려가 올라
좀더 높은 데서나 보았으면!
한세상 다 살아도
살은 뒤 없을 것을,
내가 다 아노라 지금까지
살아서 이만큼 자랐으니.
예전에 지나 본 모든 일을
살았다고 이를 수 있을진댄!
물가의 닳아져 널린 굴꺼풀에
붉은 가시덤불 뻗어 늙고
어득어득 저문 날을
비바람에 울지는 돌무더기
하다 못해 죽어 달려가 올라
밤의 고요한 때라도 지켰으면
《30》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김소월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내게 두고는 당신 때문에 저뭅니다.
해가 산마루에 올라와도
내게 두고는 당신 때문에 밝은 아침이라고 할 것입니다.
땅이 꺼져도 하늘이 무너져도
내게 두고는 끝까지 모두다 당신 때문에 있습니다.
다시는, 나의 이러한 맘뿐은, 때가 되면,
그림자 같이 당신한테로 가오리다.
오오, 나의 애인이었던 당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