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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보이지 않는데 흰구름이 끼인 파란 하늘을 볼수있었다

나는 한참을 바닥에 앉아 메미 소리를 듣는 상상을 하곤 했다

여전히 날 위한 문은 열리지 않았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과 반갑게 인사를 했다
사실은 처음 본 사람인것같았다

나는 다시 빈방에 돌아와
안경을 벗어 던지고
오늘 하루동안 그 사람을 얼마나 생각했는지 반추해본다

두꺼운 바지를 벗으며 그 사람의 표정을 얼마나 보았는지 생각한다

양말을 댕겨부르며 그 사람이 내게 얼마나 불친절했는지 생각한다

이제 속옷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너만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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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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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계신 성부 하나님
내가 주께 찬양합니다

내 안에 계신 성자 하나님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
내가 주께 순종합니다

내 안에 계신 삼위 하나님
내가 주만 경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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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이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制壓하는 
노고지리가 自由로 왔다고 
부러워 하던 
어느 詩人의 말은 修正되어야 한다 

自由를 위해서 
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自由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革命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사랑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을 넘어가는 
이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 

사랑의 변주곡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節度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 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四.一九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 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瞑想이 아닐 거다 


김용택엮음 ; 사랑 / 이레.2001 

~~~~~~~~~~~~~~~~~~~~~~~~~~~~~~~~~ 

구름의 파수병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詩와는 反逆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먼 山頂에 서있는 마음으로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와 
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하여진 물체만을 보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만약에 또 어느 나의 친구와 와서 나의 꿈을 깨워주고 
나의 그릇됨을 꾸짖어주어도 좋다 

함부로 흘리는 피가 싫어서 
이다지 낡아빠진 생할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먼지 낀 잡초 우에 
잠자는 구름이여 
고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철늦은 거미같이 존재없이 살기도 어려운 일 

방 두간과 마루 한간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러운 妻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과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 

詩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여 
자기의 裸體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詩人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거리에 나와서 집을 보고 
집에 앉아서 거리를 그리던 어리석음도 이제는 모두 사라졌다보다 
날아간 제비와같이 

날아간 제비와 같이 자죽도 꿈도 없이 
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디로이든 가야 할 反逆의 정신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 
시를 반역한 죄로 
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 
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1956> 

~~~~~~~~~~~~~~~~~~~~~~~~~~~~~~~~~~~~~~~~~ 

먼 곳에서부터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김수영 '먼 곳에서부터' (1961) 

~~~~~~~~~~~~~~~~~~~~~~~~~~~~~~~~~~~~~~~~~~~~~ 

그의 일생 
- 배 만드는 사람 2 


그가 태어나서 제일 처음 본 것은 갈매기가 바람을 가르는 
바다였다. 그는 그 바다를 바라보며 조금씩 커갔고, 아버지가 
배를 만들고 있는 포구의 모래톱까지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어느덧 그는 뼈가 굵고 근육이 튼튼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어느날인가 조난당한 사람을 구하러 늙은 아버지가 바다로 
간 뒤, 그는 뜻하지 않게 아버지의 손때가 묻어 있는 연장을 
고스란히 물려받게 되었다. 그후 그도 그의 아버지처럼 
모래톱에서 그렇게 늙어갔다. 

세월이 흘러 그가 더 이상 일을 하기 힘들 정도로 쇠잔해 
졌을 때, 그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새로 조그마한 배를 하나 
만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배가 완성 된 날. 그는 배에 가 
벼워진 자신의 몸을 싣고, 이제 까지 바라보기만 하던 황혼 
이 붉게 물들어 있는 바다로 갔다. 

~~~~~~~~~~~~~~~~~~~~~~~~~~~~~~~~~~~~~~~~~ 

낙타 


내 몸의 형체를 이룬 모든 선들을 깎고 
깎아버린다면 
나는 견고해지는가 
내 몸이 소진되어버린다면 
꿰뚫을 수 있는가 
저 사막을 
지상에서 가장 큰 동물이 되고 싶은 
미련한 내 희망이라는 것까지도 
꿰뚫어 
나를 절망케 하는 것은 노역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지고 
이 세상 밖을 묵묵히 걸어가려 하는 
가혹한 믿음이란 것을 
깨닫게 할 수는 없는가 

허리의 뼈가 많아지고 
완만한 구릉을 이룬 
가늘고 긴 다리 사이로 사막이 보인다 
사막 한가운데서 
사막을 이어갈 때 
모래의 단담함과 부드러움을 가진 
누군가의 눈을 보았다 

~~~~~~~~~~~~~~~~~~~~~~~~~~ 

살아 있는 상처 


어두운 무덤에서 나와 
환한 전시실 한켠에 누워 있는, 
저것은 칼이다. 

이제 칼은 그 푸른 
검광을 잃었다. 

끊임없이 제 안의 붉은 녹을 
밀어내지만, 세월은 아직 
항아리 속의 곡식처럼, 

그것을 흙으로 돌려놓지 못했다. 

물과 불로 증오심만 벼렸던, 
달빛마저 저밀 것 같던 
푸른 날로, 

스스로를 베었던 기억. 
형체가 무너진 다음에도 
생채기를 내며 저렇듯 들끓는다. 

오랫동안 독을 품고 있으면 
제 몸이 먼저 상하는 법. 


오랜 밤 이야기 / 창작과비평사, 2000 

~~~~~~~~~~~~~~~~~~~~~~~~~~~~~~~~~~~~~~~~~~~ 

강가에서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 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 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번 새벽에 한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고 
그는 나보다도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그는 나보다도 월씩 늙었는데 
그는 나보다도 눈이 들어갔는데 
그는 나보다도 여유가 있고 
그는 나에게 공포를 준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같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간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小人이 돼간다 
俗돼간다 俗돼간다 
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 

~~~~~~~~~~~~~~~~~~~~~~~~~~~~~~~~ 

간이역 


기차는 아직 오지 않았다 
부드러운 능선 위로 
갑자기 쏟아지는 붉은빛 
어디까지나 파고드는 고요함 
녹슨 철길에 뻗는다 

한때나마 나도 누구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는가 
기차가 지나가듯이 벌판이 흔들리고 
잘 익은 들녘이 타오른다 
지는 해가 따가운 듯 부풀어오르는 뭉게구름 

기차를 기다린다 
지나간 일조차 쓰리고 아플 때에는 
길 위가 편안하리라 

~~~~~~~~~~~~~~~~~~~~~~~~~~~ 

구절리에서 


사는 건 얼마나 많은 구멍으로 이루어진 어둠일까 
그들 사이에 비치지도 않을 빛을 찾아 
먼곳에서 돌아오는 끝이 뾰죽한 나무들 
더 먼곳에서 돌아오는 외로운 새들의 가벼운 그림자 

어느 돌밭을 헤맨 사랑인지 
어둠이 감춘 수천 개의 눈이 
초점에 갇힌 뜨거운 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아직도 날아오르는 캄캄한 새들이 
강이 던진 수많은 밧줄을 잡고 
천천히 일어서는 검은 산을 끌고 간다 

함께 흐르므로 고요한 저 반짝거림 

어둠의 깊은 구멍 속을 본다 
어둠의 씨앗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눈동자가 박힌 
어둠 속에서만 사는 짐승이 있을 듯 
구멍 속의 폭풍만 본다 

~~~~~~~~~~~~~~~~~~~~~~~~~~~~~ 

우물 속의 구렁이 


나를 잡아끌던, 우물 속의 
그 구렁이는 어디로 갔을까 
우물 저 깊은 데서 친친 또아리를 틀고 
잠들어 있던 검은 구렁이 

우물 뚜껑을 열자 
하늘 저편으로 흘러가던 흰구름과 
어룽거리던 무화과잎 
아무도 퍼내지 않아 퍼렇게 녹이 슨 물 
우물 속에서 확 올라오던 검은 기운에 
잡고 있던 두레박줄에 얽혀들어가 
손을 뻗으면 바닥에 닿을 듯했지 

우물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나를 
겨우 잡아챈 건 뒷집 육손이 아저씨 
할머니 어머니, 밤새 나의 몸을 
바늘로 따 붉은 피를 내고 
염불을 외고, 향을 사르고...... 

독한 향내에 살 속에 돋은 비늘이 타는 것처럼 
온몸이 따가워 꿈틀거렸지 

밤마다, 그 깊은 곳에서 융융 우는 것은 무엇 
우물에 빠져 죽으면 나도 큰 뱀이 될 것 같던 
닫힌 채 묻혀가던 우물 

~~~~~~~~~~~~~~~~~~~~~~~~~~~~ 

마음의 연못 


철새들이 밤새 연못을 끌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수련과 농병아리 갈대 무성한 연못이 있던 자리 
새들이 한때 깃들던 볕 잘 드는 곳에 
주둥이 새까만 황구와 그 새끼들과 
나비를 문 듯한 집 잃은 고양이 한 마리 
늙은 아버지와 얼음 낚시도 하고 볕도 쬐면서 
봄을 기다리고 싶다 

새들이 돌아올 무렵이면 
연못 어귀에 달맞이 꽃도 무성하리. 

~~~~~~~~~~~~~~~~~~~~~~~~~~~ 

사령(死靈)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黃昏)도 저 돌벽 아래 잡초(雜草)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纖細)도 
행동(行動)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1959> 

~~~~~~~~~~~~~~~~~~~~~~~~ 

살아있는 상처 


어두운 무덤에서 나와 
환한 전시실 한 켠에 누워있는, 
저것은 칼이다 

이제 칼은 그 푸른 
검광을 잃었다 

끊임없이 제 안의 붉은 녹을 
밀어내지만, 세월은 아직 
항아리 속의 곡식처럼, 

그것을 흙으로 돌려놓지 못했다 

물과 불로 증오심만 버렸던, 
달빛마저 저밀 것 같던 
푸른 날로, 

스스로를 베었던 기억 
형체가 무너진 다음에도 
생채기를 내며 저렇듯 들끓는다 

오랫동안 독을 품고 있으면 
제 몸이 먼저 상하는 법 

~~~~~~~~~~~~~~~~~~~~~~~~~~~~ 

남행시초 1/김수영 
-귀향 


자, 빈 갯벌도 한잔 받지 
집 떠난 지 칠년만이다 
늙은 노동자의 잔등 같은 녹슨 배의 철골이나 
산비알 붉은 고구마밭에서 굴러내리는 
살집좋은 바람 모두 한잔 들지 
냉기처럼 다가서는 끝물의 바다 
늘 돌아올 만큼씩은 비어서 
망망대해에 있으면 그렁그렁하니 가슴팍을 비집는 마을의 불빛 
눈알 뒤집으며 주먹다짐하기도 하면서 
파도가 높음, 파도가 높음, 긴급구조 요망 긴급구조 
깜박깜박 이 많은 골짜기를 감춘 세파에 *자물쳐도 
기다려라, 또 계속 가라 
바람없는 낮엔 뜬 구름만 쇠주병에 담아 띄우기도 했어 
때로는 잊혀지기도 해야할 젊은 날들처럼요 
아버지에게도 바다는 길흉을 알 수 없는 심연이었을까 
이미 예정된 깊이가 보이는 여정이었을까 
하루 필요한 물과 기름을 받으면서 
할망구짝난 바테리로 둘둘거리는 배가 
언제 덜컹 무심한 돌섬에 묻힐지 모르는 일 
나는 같이 늙어가는 박씨의 사투리가 좋다 
살아갈 날이 아침 안개속 첩첩으로 걸리믄 
달포씩 밭그늘에 묵었던 지게가 낙락장송으로 뵈이고 
지겟다리에 걸쳐둔 호멩이도 학모가지로 보이능거 
아버지의 그리움도 갈수록 바람의 주먹이 매운 
물주름으로 되돌아 왔었을까 
한순간 바라다보고 있던 황량한 벌이 
손바닥을 펴서 보여준 
풀씨들의 집만 무수히 뚫린 외길로 통한 끝없는 황혼 
담배만 되새김질하던 염소새끼까지도 
흙먼지에 섞여 놓여나기만 하면 
같은 피붙이를 기막히게도 찾아가는 
떠도는 것만이 제 몫인 뿌리들은 
이제 모두 하나로 보입니다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淫蕩)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 파병(派兵)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悠久)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 수용소의 제십사 야전병원(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 소리를 듣고 그 비명(悲鳴)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장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장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洞會)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나의 가족 


고색이 창연한 우리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던가 
파도처럼 옆으로 
혹은 세대를 가리키는 지층의 단면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 

누구 한 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그것은 저 넓은 문창호의 수많은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겨울바람보다도 나의 눈을 밝게 한다 

조용하고 느름한 불빛 아래 
가족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全靈을 맡긴 탓인가 
내가 지금 순한 고개를 숙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기고 있는 서책은 
위대한 고대조각의 사진 

그렇지만 
구차한 나의 머리에 
성스러운 향수와 우주의 위대함을 
담아주는 삽시간의 자극을 
나의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에 
비하여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부자연한 곳이 없는 
이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유순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안에서 
나의 위대한 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 

불타버린 지도 


그는 질투심 많은 애인이었다, 나는 그가 
언젠가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보니 떠난 것은 
그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파랑 속에 묻혀 버린 
암초 같은 섬, 아무도 밟지 않는 
섬,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그동안 내가 잃은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내가 사랑한 것은 
모두 섬에 갇혀 버렸다, 그곳으로 가는 
지도는 모두 불타 버렸다. 

~~~~~~~~~~~~~~~~~~~~~~~~~~~~~~~ 

긍지의 날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나는 피로하였고 
또 나는 
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몇개의 번개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꿈은 교훈 
청춘 물 구름 
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하여 있을 때도 
나의 원천과 더불어 
나의 최종점은 긍지 
파도처럼 요동하여 
소리가 없고 
비처럼 퍼부어 
젖지 않는 것 

그리하여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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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도서관 


모두들 공부하는 속에 와보면 나도 옛날에 공부하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 당시의 시대가 지금보다 훨씬 좋았다고 
누구나 어른들은 말하고 있으나 
나는 그 우열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구태여 달관하고 있는 지금의 내 마음에 
샘솟아나오려는 이 설움은 무엇인가 
모독당한 과거일까 
약탈된 所有權일까 
그대들 어린 학도들과 나 사이에 놓여있는 
연령의 넘지못할 차이일까… 

전쟁의 모든 파괴 속에서 
不死鳥같이 살아난 너의 몸뚱아리 ― 
우주의 파편같이 
혹은 혜성같이 반짝이는 
무수한 잔재 속에 담겨있는 또 이 무수한 몸뚱아리―들은 
지금 무엇을 예의 연마하고 있는가 

흥분할 줄 모르는 나의 생리와 
방향을 가리지 않고 서있는 書架 사이에서 
도적질이나 하듯이 희끗희끗 내어다보는 저 흰 壁들은 
무슨 鳥類의 분뇨와도 같다 

오 죽어있는 방대한 書冊들 

너를 보는 설움은 피폐한 고향의 설움일지도 모른다 
예언자가 나지 않는 거리로 窓이 난 이 도서관은 
창설의 의도부터가 풍자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두들 공부하는 속에 와보면 나도 옛날에 공부하던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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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책을 한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지요. 첫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 

"오랜 밤 이야기" 창작과 비평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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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여행가방 


스무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 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 것인지, 곱게 말린 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 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 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 생각해본다. 나는 혼자이고 이제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시집 ; 오랜 밤 이야기, 창비,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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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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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나라의 장난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 번 팽이를 돌려 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都會)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小說)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生活)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 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餘裕)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機) 벽화(壁畵)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運命)과 사명(使命)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放心)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記憶)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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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란넬 저고리 


낮잠을 자고 나서 들어보면 
플란넬 저고리도 훨씬 무거워졌다 
거지의 누더기가 될락말락한 
저놈은 어제 비를 맞았다 
저놈은 나의 노동의 상징 
호주머니 속의 소눈깔만한 호주머니에 든 
물뿌리와 담배 부스러기의 오랜 친근 
윗호주머니나 혹은 속호주머니에 든 
치부책 노릇을 하는 종이쪽 
그러나 돈은 없다 
-돈이 없다는 것도 오랜 친근이다 
-그리고 그 무게는 돈이 없는 무게이기도 하다 
또 무엇이 있나 나의 호주머니에는? 
연필쪽! 
옛날 추억이 든 그러나 일년 내내 한번도 펴본 일이 없는 
죽은 기억의 휴지 
아무 것도 집어넣어 본 일이 없는 
죽은 기억의 휴지 
아무 것도 집어넣어 본 일이 없는 왼쪽 안호주머니 
-여기에는 혹시 휴식의 갈망이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휴식의 갈망도 나의 오랜 친근한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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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픈 육체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 
다시 일어났다 

암만해도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 있어 다시 불을 켜고 앉았을 때는 이미 내가 찾던 것은 없어졌을 때 

반드시 찾으려고 불을 켠 것도 아니지만 
없어지는 自體를 보기 위하여서만 불을 켠 것도 아닌데 
잊어버려서 아까운지 아까웁지 않은지 헤아릴 사이도 없이 불은 켜지고 

나는 잠시 아름다운 統覺과 조화와 영원과 귀결을 찾지 않으려 한다 

어둠 속에 본 것은 청춘이었는지 대지의 진동이었는지 
나는 자꾸 땅만 만지고 싶었는데 
땀과 몸이 일체가 되기를 원하며 그것만을 힘삼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불굴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인가 
어둠 속에서 일순간을 다투며 
없어져버린 애처롭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박한 꿈을 찾으려 하는 것은 


생활이여 생활이여 
잊어버린 생활이여 
너무나 멀리 잊어버려 천상의 무슨 등대같이 까마득히 사라져버린 귀중한 생활들이여 
말없는 생활들이여 
마지막에는 해저의 풀떨기같이 혹은 책상에 붙은 민민한 판대기처럼 무감각하게 될 생활이여 

조화가 없어 아름다웠던 생활을 조화를 원하는 가슴으로 찾을 것은 아니로나 
조화를 원하는 심장으로 찾을 것은 아니로나 

지나간 생활을 지나간 벗같이 여기고 
해 지자 헤어진 구슬픈 벗같이 여기고 
잊어버린 생활을 위하여 불을 켜서는 아니될 것이지만 
천사같이 천사같이 흘려버릴 것이지만 

아아 아아 아아 
불은 켜지고 
나는 쉴사이없이 가야 하는 몸이기에 
구슬픈 육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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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나는 일손을 멈추고 잠시 무엇을 생각하게 된다 
----살아있는 보람이란 이것뿐이라고---- 
하루살이의 狂舞여 

하루살이는 지금 나의 일을 방해한다 
----나는 확실히 하루살이에게 졌다고 생각한다---- 
하루살이의 유희여 

너의 모습과 너의 몸짓은 
어쩌면 이렇게 자연스러우냐 
소리없이 기고 소리없이 날으다가 
되돌아오고 되돌아가는 무수한 하루살이 
----그러나 나의 머리 위의 천장에서는 너의 소리가 들린다---- 
하루살이의 반복이여 

불옆으로 모여드는 하루살이여 
벽을 사랑하는 하루살이여 
감정을 잊어버린 시인에게로 
모여드는 모여드는 하루살이여 
----나의 視覺을 쉬이게 하라---- 
하루살이의 황활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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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더불어 


다병한 나에게는 
파리도 이미 어제의 파리는 아니다 

이미 오래전에 일과를 전페해야 할 
문명이 
오늘도 또 나를 이렇게 괴롭힌다 

싸늘한 가을 바람소리에 
전통은 
새처럼 겨우 나무 그늘같은 곳에 
정처를 찾았나보다 

병을 생각하는 것은 
병에 매어달리는 것은 
필경 내가 아직 건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거대한 비애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거대한 여유를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저 광막한 양지 쪽에 반짝거리는 
파리의 소리없는 소리처럼 
나는 죽어가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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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1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 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고 자기가 가 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 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같고 
혁명(革命)같고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같고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같고 


거대한 뿌리, 민음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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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췄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1954年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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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의자 


가난뱅이 고흐는 의자를 열두개나 가지고 있었다. 
그가 한번도 앉지 않은 팔걸이가 달린 의자들 
파이프를 얹어둔 낡은 밀짚의자는 
내 방 구석에 걸려 있다. 

빵을 굶어가며 마련한 새 의자 
그는 누구를 기다리며 의자를 비워두었을까 

한밤중 신발을 끌며 집으로 돌아가는 
늙은 광부를 위해 
어두컴컴한 식탁에 둘러앉아 감자를 먹는 
농부를 위해 
바람을 막기 위해 심어진 
사이프러스 나무를 위해 
창을 열 듯 제 가슴을 활짝 열어젖히는 
해바라기를 위해 
그리고, 쪽창으로 들어오는 별빛을 바라보는 
그 자신을 위해? 

어떤 모습이든 그들은 의자에 앉아 
예수님의 열두제자처럼 그를 에워싸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초대한 손님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 마음의 쓸쓸함이 부른 손님들인 것이다. 


현대시,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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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개의 빈 의자 


가난뱅이 고흐는 의자를 열두 개나 가지고 있었다 
그가 한 번도 앉지 않은 팔걸이가 달린 의자들 
파이프를 얹어둔 낡은 밀짚의자는 
내 방 구석에 걸려 있다 

빵을 굶어가며 마련한 새 의자 
그는 누구를 기다리며 의자를 비워두었을까 

한밤중 신발을 끌며 집으로 돌아가는 
늙은 광부를 위해 
어두컴컴한 식탁에 둘러앉아 감자를 먹는 
농부를 위해 
바람을 막기 위해 심어진 
사이프러스 나무를 위해 
창을 열 듯 제 가슴을 열어젖히는 
해바라기를 위해 
…………… 
그리고, 쪽창으로 들어오는 별빛을 바라보는 
그 자신을 위해? 

어떤 모습이든 그들은 의자에 앉아 
예수님의 열두 제자처럼 그를 에워싸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초대한 손님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 마음의 쓸쓸함이 부른 손님들인 것이다 

~~~~~~~~~~~~~~~~~~~~~~~~~~~ 

길 2 


그 말이 없던 사람 평생 외톨박이 떠돌이였다. 그가 
그리 길지 않은 일생을 마감한 곳은 해발 1,000미터의 
광산마을이었다. 오랜 장마 끝 맑게 갠 날, 쏟아지는 
빛 속에 눈부신 듯 서 있다가 나무토막 쓰러지듯 그는 
그렇게 갔다. 한동안 같이 살던 여자도 있었다. 지은 
죄가 있어 고향이 가지 못한 그는 길 위에서 살다 길 
위에서 죽었다. 
사람들은 그가 어디에서 흘러들어온 지 모른 것처럼 
그를 어디로 보내야 하는 지도 몰랐다. 결국 그가 쓰러 
진 곳이 그의 고향이 되었다. 


로빈슨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창작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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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들 


떠나는 것들은 커브를 그린다 
보내는 것들도 커브를 그린다 
사라질 때까지 돌아다보며 간다 
그 사이가 길이다 

얼어붙은 하얀 해의 한가운데로 날아갈 이유는 
없겠지만,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까지 
그 빛나는 사이로 가기 위해 
벼랑에서 몸을 던지는 새처럼 

내 희망의 한가운데는 텅 비어 
중력에 굴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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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처럼 


깊은 바다, 빛이라 해도 이르지 못하는 어둠 
그 깊은 곳의 고래 

어둠 속을 살기 위해 
실핏줄들이 얼마나 팽팽한 현이 되는지 
얼마나 많은 피가 소용돌이치며 
제 몸을 바닥에서 밀어올리는지 
고동소리만으로도 세상이 폭풍치는 듯하다 

태아 적 어머니의 몸속에서 듣던 
폭풍의 눈과도 같은 고요 
떠오르기 위한 삶의 한가운데에는 폭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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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위에서 


그곳으로 해가 지는 것을 보러 간다 
흐르는 강물 아래 
그리운 것들이 먼저 저문다 
멀리 있는 불빛 너머 
길이 없으므로 이어지는 다리들 

막차를 타고 와서 갈 데까지 가보고 싶은 나는 
건들거리며 난간에 기대 노래하고 
미련없이 떠나고 싶은 당신은 
물속에서 흔들린다 

이따금 추위를 느낄 때면 당신을 생각한다 
한밤중 낯선 도시의 다리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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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산 아래 


멀리 능선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한 몇년 정든 사 
람과 살고 싶지, 바람이 많은 그곳에서 염소 몇마리 
구름이나 뜯게 하고, 한번씩 산꼭대기로 올라가 고사 
목 그루터기를 파서 꿀단지개미들을 건드려도 보고, 
깊은 골짜기에 달 그림자 고이면 천둥벌거숭이로 누워 
꿈을 꾸고 싶지, 가을이 다 갈 무렵 허물어진 무덤 곁 
을 지나다 들꽃다발도 놓고, 울새나 휘파람새가 쪼다 
남긴 마가목 열매로 겨우내 차를 끓여야지, 벌 치는 
사람이 살다 간 토담집 언저리 토담 속엔 아직도 장수 
말벌들이 꿀을 따고 있을지도 몰라, 그곳에서 밭을 일 
구어 배추와 옥수수를 심고, 해마다 울밑에 해바라기 
접시꽃도 가꾸고 싶지 

~~~~~~~~~~~~~~~~~~~~~~~~ 

절망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무지개 그림자 속을 날다 


더 높이, 더 멀리 
날개에 얹혀 있는 푸른 하늘 
솟구쳐도 끝이 없는 
그 큰 구멍 

가파를수록 아름다운 절벽 
내려앉을 나무 하나 없는 
벼랑 끝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먼 거리를 비행한 새는 

외로이 날았던 허공을 보게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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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잃고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있는 
너는 억만개의 모욕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늬가 없이 사는 삶이 보람있기 위하여 나는 돈을 벌지 않고 
늬가 주는 모욕의 억만배의 모욕을 사기를 좋아하고 
억만인의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 

나의 생활의 원주(圓周) 우에 어느날이고 
늬가 서기를 바라고 
나의 애정의 원주가 진정으로 위대하여지기 바라고 

그리하여 이 공허한 원주가 가장 찬란하여지는 무렵 
나는 또하나 다른 유성(遊星)을 향하여 달아날 것을 알고 

이 영원한 숨바꼭질 속에서 
나는 또한 영원한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나는 억만무려(億萬無慮)의 모욕인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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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 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뜩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또 속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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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태와 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김수영 시선 ; 거대한 뿌리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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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4.19순국학도 위령제에 부치는 노래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꺽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어리석을 만치 소박하게 성취한 
우리들의 혁명을 
배암에게 쐐기에게 쥐에게 삵괭이에게 
진드기에게 악어에게 표범에게 승냥이에게 
늑대에게 고슴도치에게 여우에게 수리에게 빈대에게 
다치지 않고 깎이지 않고 물리지 않고 더럽히지 않게 

그러나 쟝글보다도 더 험하고 
소용돌이보다도 더 어지럽고 해저보다도 더 깊게 
아직까지도 부패와 부정과 살인자와 강도가 남아있는 사회 
이 심연이나 사막이나 산악보다도 
더 어려운 사회를 넘어서 

이번에는 우리가 배암이 되고 쐐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쥐가 되고 삵괭이가 되고 진드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악어가 되고 표범이 되고 승냥이가 되고 늑대가 되더라 
도 
이번에는 우리가 고슴도치가 되고 여우가 되고 수리가 되고 빈대가 되더 
라도 
아아 슬프게도 슬프게도 이번에는 
우리가 혁명이 성취하는 마지막날에는 
그런 사나운 추잡한 놈이 되고 말더라도 

나의 죄 있는 몸의 억천만개의 털구멍에 
죄라는 죄가 가시같이 박히어도 
그야 솜털만치도 아프지는 않으려니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꺽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1960. 5. 18> 

~~~~~~~~~~~~~~~~~~~~~~~~~~~~~~~~~~ 

廟庭의 노래 


南廟문고리 굳은 쇠문고리 
기어코 바람이 열고 
열사흘 달빛은 
이미 寡婦의 靑裳이어라 

날아가던 朱雀星 
깃들인 矢箭 
붉은 柱礎에 꽂혀있는 
半절이 過하도다 

아아 어인 일이냐 
너 朱雀의 星火 
서리앉은 胡弓에 
피어 사위도 스럽구나 

寒鴉가 와서 
그날을 울더라 
밤을 반이나 울더라 
사람은 영영 잠귀를 잃었더라 


百花의 意匠 
萬華의 거동이 
지금 고요히 잠드는 얼을 흔드며 
關公의 色帶로 감도는 
香爐의 餘烟이 神秘 한데 

어드메에 담기려고 
漆黑의 壁板 위로 
香烟을 찍어 
白蓮을 무늬놓는 
이밤 畵工의 소맷자락 무거이 적셔 
오늘도 우는 
아아 짐승이냐 사람이냐. 

<1945> 


묘정의 노래 


남묘문고리 굳은 쇠문고리 
기어코 바람이 열고 
열사흘 달빛은 
이미 과부의 청상이어라 

날아가던 주작성 
깃들인 시전 
붉은 주초에 꽂혀있는 
반절이 과하도다 

아아 어인 일이냐 
너 주작의 성화 
서리앉은 호궁에 
피어 사위도 스럽구나 

한아가 와서 
그날을 울더라 
밤을 반이나 울더라 
사람은 영영 잠귀를 잃었더라 


백화의 의장 
만화의 거동이 
지금 고요히 잠드는 얼을 흔드며 
관공의 색대로 감도는 
향로의 여연이 신비 한데 

어드메에 담기려고 
칠흑의 벽판 위로 
향연을 찍어 
백련을 무늬놓는 
이밤 화공의 소맷자락 무거이 적셔 
오늘도 우는 
아아 짐승이냐 사람이냐. 

<1945> 

~~~~~~~~~~~~~~~~~~~~~~~~~~~~~~~ 

삼동(三冬) 유감 


요즘 연말과 연시의 어수선한 틈에 일도 손에 안 잡히고 해서, 노벨상을 탄 과 
테말라 작가의 「대통령 각하」를 읽어보기고 하고, 여편네와 어린놈을 데리고 
영화「25시」를 구경하기도 했다. 치질이 도져서 술도 안 먹은 탓도 있지만 오 
랜만에 조용하게 가라앉아서 쉴 수 있었다. 먹고 자고 읽고 잡담을 하고 있는 
것이, 평범하게 시간을 즐기면서 사는 맛이 꿀처럼 달다. 

한적한 마루의 난로 옆의 의자에 앉아서 사과 궤짝에 비치는, 마루 유리를 통 
해 들어오는 따뜻한 햇볕을 바라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이런 안정된 고독을 편 
하게 즐기고 있는 것이 한없이 죄스럽기까지도 하다. 물을 뜨러 부엌에 내려가 
서 마당을 바라보면 라일락, 장미, 전나무들이 일렬로 서 있는 풍경이 천국처 
럼 조용하고, 5월의 꽃동산보다도 아름답다. 마음은 「대통령 각하」나 「25시 
」가 격려하는 사회 정의의 구현을 위해 불같이 타오르면서, 이상하게도 몸은 
낙천과 기독의 가르침의 대극을 향해 줄달음질치는 것이 이상하다. 
<하략> 
<1968> 

~~~~~~~~~~~~~~~~~~~~~~~~~~~~~~~~~~~~~~~ 

시여, 침을 뱉어라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 


나의 시에 대한 사유(思惟)는 아직도 그것을 공개할 만한 명확한 것이 못 된다. 그리고 그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이러한 나의 모호성은 시작(詩作)을 위한 나의 정신구조의 상부 중에서도 가장 첨단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없이는 무한 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유일한 도구를 상실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교회당의 뾰족탑을 생각해 볼 때, 시의 탐침(探針)은 그 끝에 달린 십자가의 십자의 상반부의 창끝이고, 십자가의 하반부에서부터 까마아득한 주춧돌 밑까지의 건축의 실체의 부분이 우리들의 의식에서 아무리 정연하게 정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시작상(詩作上)으로는 그러한 명석(明晳)의 개진은 아무런 보탬이 못 되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는 그는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시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에 이 물음이 포괄하고 있는 원주가 바로 우리들이 오늘의 세미나의 논제인, 시에 있어서의 형식의 내용의 문제와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 ----즉, 노래----이 시의 형식으로서의 예술성과 동의어가 되고,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의 현실성과 동의어가 된다는 것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나는 20여 년의 시작 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똑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 쓰게 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思辨)을 모조리 파산(破算)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 ----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 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 게 된다. 

그러면 이번에는 시를 논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나는 이미 <시를 쓴다>는 것이 시의 형식을 대표한다고 시사한 것만큼,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전제를 한 폭이 된다. 내가 시를 논하게 된 것은 ----속칭 <시평>이나 <시론>을 쓰게 된 것은 ----ㅡ극히 최근에 속하는 일이고, 이런 의미의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 <시를 논한다>는 본질적인 의미에 속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태여 그것을 제1의적인 본질적인 의미 속에 포함시켜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논지의 진행상의 편의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구태여 말하자면 그것은 산문의 의미이고 모험의 의미이다. 

시에 있어서의 모험이란 말은 세계의 개진(開陳), 하이데거가 말한 <대지(大地)의 은폐> 의 반대되는 말이다. 엘리엇의 문맥 속에서는 그것은 의미 대 음악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엘리엇도 그의 온건하고 주밀한 논문 「시이 음악」의 끝머리에서 <시는 언제나 끊임없는 모험 앞에 서 있다>라는 말로 <의미>의 토를 달고 있다. 나의 시론이나 시평이 전부가 모험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들을 통해서 상당한 부분에서 모험의 의미를 연습을 해보았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 나는 시단의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참여시의 옹호자라는 달갑지 않은, 분에 넘치는 호칭을 받고 있다. 

산문이란, 세계의 개진이다. 이 말은 사랑의 유보(留保)로서의 <노래>의 매력만큼 매력적인 말이다. 시에 있어서의 산문의 확대작업은 <노래>의 유보성에 대해서는 침공적(侵攻的)이고 의식적이다. 우리들은 시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생각할 때, 내용과 형식의 동일성을 공간적으로 상상해서, 내용이 반, 형식이 반이라는 식으로 도식화해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노래>의 유보성, 즉 예술성이 무의식적이고 은성적(隱性的)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반이 아니다. 예술성의 편에서는 하나의 시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고, 시의 본질은 이러한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의 예술성이 무의식적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기가 시의 기교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시의 기교라는 것이 그것을 의식할 때는 진정한 기교가 못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자기의 시인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거울이 아닌 자기의 육안으로 사람이 자기의 전신을 바라볼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가 보는 것은 남들이고, 소재이고, 현실이고, 신문이다. 그것이 그의 의식이다. 현대시에 있어서는 이 의식이 더욱더 정예화(精銳化) ----때에 따라서는 신경질적으로까지----되어 있다. 이러한 의식이 없거나 혹은 지극히 우발적이거나 수면(睡眠) 중에 있는 시인이 우리들의 주변에는 허다하게 있지만 이런 사람들을 나는 현대적인 시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현대에 있어서는 시뿐만이 아니라 소설까지도 모험의 발견으로서 자기 형성의 차원에서 그의 <새로움>을 제시하는 것이 문학자의 의무로 되어 있다. 지극히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말이지만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산문을 도입하고 있고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다.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도,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되지만,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은 <내용>이 하는 말이 아니라 <형식>이 하는 혼잣말이다. 이 말은 밖에 대고 해서는 아니 될 말이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는 <형식>을 정복할 수 있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간신히 성립된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여야 한다. 이 것을 계속해서 지껄이는 것이 이를테면 38선을 뚫는 길인 것이다. 낙숫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이런 시인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우다 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그러한 시의 축적이 진정한 민족의 역사의 기점(起點)이 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여시의 효용성을 신용하는 사람의 한 사람이다. 

나는 아까 서두에서 시에 대한 나의 사유가 아직도 명확한 것이 못되고, 그러한 모호성은 무한 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도구로서 유용한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호성의 탐색이 급기야는 참여시의 효용성의 주장에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여태껏 없었던 세계가 펼쳐지는 충격>을 못 주고 있다. 이 시론은 아직도 시로서의 충격을 못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태까지의 자유의 서술이 자유의 서술로 그치고 자유의 이행을 하지 못한 데에 있다. 모험은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다. 자유이 이행에는 전후좌우의 설명이 필요없다. 그것은 원군(援軍)이다. 원군은 비겁하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그처럼 시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다. 내가 지금 ----바로 지금 이 순간에----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자아 보아라, 당신도, 당신도, 당신도, 나도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가 없다. 이러고서도 정치적 금기에만 다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새로운>문학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다.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형식>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의 성립이 사회조건의 중요성을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다음과 같은 평범한 말로 강조하고 있다. <사회생활이 지나치게 주밀하게 조직되어서 시인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게 되면, 그때는이미 중대한 일이 모두 다 종식되는 때다. 개미나 벌이나, 혹은 흰개미들이라도 지구의 지배권을 물려받는 편이 낫다. 국민들이 그들의 <과격파>를 처형하거나 추방하는 것은 나쁜 일이고, 또한 국민들이 그들의<보수파>를 처형하거나 추방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나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 고립된 단독의 자신이 되는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간극(間隙)이나 구멍을 사회기구 속에 남겨놓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더 나쁜 일이다. 설사 그 사람이 다만 기인(奇人)이나 집시나 범죄자나, 바보 얼간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인용문에 나오는 기인이나 집시나 바보 멍텅구리는 <내용>과 <형식>을 논한 나의 문맥 속에서는 물론 후자 즉, <형식>에 속한다. 그리고 나의 판단으로는, 아무리 너그럽게 보아도 우리의 주변에서는 기인이나 바보 얼간이들이 자유당 때하고만 비교해 보더라도 완전히 소탕되어 있다. 부산은 어떤지 모르지만 서울이 내가 다니는 주점은 문인들이 많이 모이기로 이름난 집인데도 벌써 주정꾼다운 주정꾼 구경을 못한 지가 까마득하게 오래된다. 주정은 커녕 막걸리를 먹으로 나오는 글쓰는 친구들의 얼굴이 메콩 강변의 진주를 발견하기보다도 더 힘이 든다. 이러한 <근대화>의 해독은 문학주점에만 한한 일이 아니다. 

그레이브스는 오늘날의 <서방측의 자유세계>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없는 것을 개탄하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서방측 자유세계의) 시민들의 대부분은 군거(群居)하고, 인습에 사로잡혀 있고, 순종하고, 그 때문에 자기의 장래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을 싫어하고, 만약에 노예제도가 아직도 성행한다면 기꺼이 노예가 되는 것도 싫어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종교적, 정치적, 혹은 지적(知的) 일치를 시민들에게 강요하지 않는 의미에서, 이 세계가 자유를 보유하는한 거기에 따르는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 이 인용문에서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점은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자유당때의 무기력과 무능을 누구보다도 저주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지만, 요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도 자유는 없었지만 <혼란>은 지금처럼 이렇게 철저하게 압제를 받지 않은 것이 신통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혼란>이 없는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의 건설은,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가 없는 혼란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다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한 자유와 사랑의 동의어로서의 <혼란>의 향수가 문화의 세계에서 싹트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징조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본질적 근원을 발효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임무인 것이다. 

시는 온몸으로 ,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 시론도 이제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순간에 와 있다.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시인은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라는 아의 명제의 이행이 여기에 있다.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1968.4> 
* 1968년 4월 부산에서 펜클럽 주최로 행한 문학 세미나에서 발표한 원고이다. 

~~~~~~~~~~~~~~~~~~~~~~~~~~~~~~~~~~~~~~~~~~~~~~~~ 

김수영(金洙暎) 1921∼1968. 시인 소개 


본관은 김해.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지주였던 아버지 태욱(泰旭)과 
어머니 안형순(安亨順)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1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가서 동경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다. 
1943년 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1944년 가족과 함께 만주 길림성(吉林省)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교원생활도 하였으며 연극운동도 했다. 
광복 후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4년에 편입하였으나 중퇴하였다. 
북한의 남침으로 미처 피난하지 못한 그는 북한군에 징집되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그뒤 미군통역생활도 하고 평화신문사 문화부차장 등 여러 직장을 전전하였으나, 
1956년 이후부터는 시작과 번역에만 전념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활동은 1945년 문예지 《예술부락 藝術部落》에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뒤 김경린(金璟麟)·박인환(朴寅煥)·임호권(林虎權)·양병식(梁炳植)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로 각광을 받았다. 
이때의 시들은 〈공자의 생활난〉(1945)·〈가까이할 수 없는 서적〉(1947)· 
〈아메리카타임지〉(1947)·〈웃음〉(1948)·〈이 蝨〉(1947)·〈토끼〉(1949) 등이 있다. 
초기에는 모더니스트의 일반적 경향인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적으로 노래했으나, 
서구사조를 뒤쫓는 일시적이고 시사적인 유행성에 탐닉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전진로를 개척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서구취향의 모더니스트의 자기극복과정을 보여준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모더니스트들이 지닌 관념적 생경성을 벗어나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겪어야 했던 지적 방황과 번민을 
풍자적이며 지적인 언어로 시화하였다. 
1959년에 간행된 《달나라의 장난》은 이 시기의 시적 성과를 수록한 첫 개인시집이다. 
수록된 대표적 작품들은 〈달나라의 장난〉(1953)·〈헬리콥터〉(1955)· 
〈병풍〉(1956)·〈눈〉(1957)·〈폭포〉(1957) 등을 꼽을 수 있다. 
1950년대의 지적 번민 속에서 성숙해온 그가 
본격적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은 1960년의 4월의거이며, 
여기서 그는 평등한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자유를 위한 혁명에서 시적 열정을 얻는다. 
1958년 제1회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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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구붓하고: 몸이 구부정한

모래톱: 넓은 모래 벌판, 모래사장

지중지중: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에 잠기는 모습, 의태어

개지꽃: 나팔꽃

쇠리쇠리하야: 눈이 부셔, 눈이 시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 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다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샛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려 다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아서라 세상사'라도 들을

유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

는 것도 생각한다



따디기: 한낮의 뜨거운 햇빛 아래 흙이 풀려 푸석푸석한 저녁 무렵

누굿하니: 여유있는

살틀하든: 너무나 다정스러우며 허물없이 위해주고 보살펴 주던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

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은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엽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는 탓이다



잠풍: 잔잔하게 부는 바람

달재: 달째, 달강어, 쑥지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진장: 진간장, 오래 묵어서 진하게 된 간장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헛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없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

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

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

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단이며, 가라앉을 것

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

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

이었다.



삿: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

쥔을 붙이었다: 주인집에 세 들었다

딜옹배기: 아주 작은 자배기

붇덕불: 짚북더기를 태운 불

굴기도 하면서: 구르기도 하면서

나줏손: 저녁 무렵

바우섶: 바위 옆

갈매나부: 키가 2m쯤 자라는 낙엽 활엽 교목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

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

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긋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서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바람벽: 집안의 안벽

때글은: 오래도록 땀과 때에 전

쉬이고: 잠시 머무르게 하고, 쉬게 하고

앞대: 평안도를 벗어난 남쪽지방. 멀리 해변가

개포: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이즈막하야: 시간이 그리 많이 흐르지 않은, 이슥한 시간이 되어서



여승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 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가지취: 참취나물

금덤판: 금을 캐거나 파는 산골의 장소로 간이 식료품 등 잡품을 파는 곳

섶벌: 울타리 옆에 놓아 치는 꿀벌, 재래종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탸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마가리: 오막살이

고조곤히: 고요히, 소리없이



통영2


구마산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주 집의 어린 딸은 난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든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고당: 고장

갓갓기도: 가깝기도

아개미: 아가미

호루기: 쭈꾸미와 비슷하게 생긴 해산물

황화장사: 온갖 잡살뱅이 물건을 지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파는 사람

오구작작: 여러 사람이 뒤섞여 떠드는 수선스런 모양



여우난골족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 고무, 고무의 딸 이녀, 작은 이녀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 고무, 고무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육십리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
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
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
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 깨돌
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 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
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육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 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국수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구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홍성홍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룻밤 뽀오햔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어느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재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 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심심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굳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멕이고: 활발히 움직이고

김치가재미: 김치독 묻어두는 곳

은댕이: 언저리

예대가리밭: 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

산멍에: 산몽아, 전설상의 커다란 뱀, 이무기

분틀: 국수를 짜는 분틀

들쿠레한: 좀 달고 구수하고 시원한

사리워: 담겨져서

집등색이: 짚등석, 짚이나 칡덩굴로 짜서 만든 자리

댕추가루: 고춧가루

탄수: 식초

아르굳: 아랫목

고담하고: 속되지 않고 아취가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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