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서
문학적 구조
열방들에 대한 신탁
아모스는 일곱 나라에 대한 예언적 심판의 말씀을 전하고 마지막에 가서 이스라엘의 심판을 말한다. 이를 지리적 교차대조법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방 나라들은 주로 전쟁에서의 죄악들 때문에 질책을 받는다. 열방들에 대한 아모스의 신탁들이 신화적 모티브를 결여하고 있는데 아모스의 신탁들은 이스라엘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된 수사학적 기법이다. 청중들은 다른 나라들의 비판에 동조하다가 그 비판이 자신의 발등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긴박감을 이루다가 절정을 이루게 된다. 적국에 대한 비난의 신탁은 이스라엘의 덫이 되는 것이다. 아모스가 어떤 도덕적 권위에서 이런 심판을 말하는지 논쟁이 있었는데 아모스는 보편적으로 인식된 강령들에 호소하고 있다. 아모스의 배후에는 도덕적 전제들이 폭넓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말씀들
3-6장의 아모스는 다양한 문학 양식들을 사용한다. 특히 선지자적 소송의 양식을 사용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고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법정 대리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조약 관계하의 종주가 대리인을 보내 자신의 언약 관계의 속주에게 의무사항을 깨우고 지적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의 배경은 재판정이다. 이런 요소 중 많은 것들이 아모스에서 발견된다. 검사와 피고가 소개되거나 과거에 대한 간략 역사와 파리가 언급되거나 한다. 이런 선지자적 소송 외에도 심판의 연설들과 저주의 연설들을 사용한다.
이상들에 대한 기록들 7-9장
아모스는 다섯 개의 이상들에 대한 자전적 기록을 제공한다. 처음 네 개는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에게 대상이나 사건을 보이시고 대화가 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 자신을 보이시고 대화가 없다. 처음 네 개 이상들은 연결되고 집단 구조를 가진다. 처음 두 개는 아모스와 하나님의 대화, 다음 두 개는 재앙들을 돌이키실 것을 간청하는 것이다. 다음 두 개는 이상의 내용을 돌이킬 수 없으며 다음 두 개는 설명을 필요로 한다. 다림줄은 백성의 불순종과 대조되고 과일 광주리는 종말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구원의 신탁이 갑자기 주어지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이 나라는 다시 세워지고 회복을 즐길 것이고 이스라엘은 회복된 에덴 동산이 될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통일 왕국이 재수립 될 것에 대한 희망을 품는 것으로 보인다. 아모스는 자신의 신탁에서 다양한 문학 기교를 사용하는데 농사에 대한 비유적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것은 그의 배경을 반영하고 구조상 반복이나 수사 의문문, 어구 반복을 많이 사용한다.
신학적인 주제들
하나님 주권과 심판
역사의 흐름을 하나님이 지배하심을 다른 선지자들과 공유했으며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벌하시기로 결정하였음을 선언한다. 이런 주권적 통치와 심판을 다른 사원에서 보면 먼저 인격적ㆍ신적 차원에서 심판의 주도권을 취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둘째는 창조의 차원이다, 셋째는 도덕적 인과관계의 차원이다. 넷째는 정치적 역사 시각이다.
우상숭배와 사회적 불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아모스의 메시지는 우상숭배와 사회적 불의의 영역에 대한 것이다. 당시 우상 숭배는 흔한 일이었고 율법의 중요 요소들을 상실했다. 여로보암 2세하의 정치 군사적 성공은 번영을 이끌어 부유한 상류층을 창출했다. 이들은 가난한 자를 핍박했고 하나님은 이들을 보호하시고자 하셨다. 그들은 결국 노예로 삼은자는 노예가 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고통을 당하고 공의를 명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언약과 남은자
아모스는 초기 성경 비평학이 묘사한 것과 같은 급진적 개혁가는 아니었다. 언약의 존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새로운 종교적 사고를 받도록 한 것이 나이라 옛 길을 택하도록 촉구했다. 여호와의 언약에서 구속 받은 나라라는 이스라엘의 지위는 언약을 따르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이것에 실패했고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성 때문에 죄를 심판으로 대응하시고 이 심판을 통과하고 계속된 하나님의 백성의 핵이 되는 자들이 항상 존재한다. 이들에게 새롭게 약속을 상속받는다.
여호와의 날
보통 여호와의 날이 이스라엘의 적에게 심판을 행하는 날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모스는 이를 뒤집어 이스라엘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다. 여호와의 날이 종말론적 개념이 아니라고 보기도 했지만 종말론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우주적 종말에서는 여호와의 날은 아마 종말론적인 것이 아닐 것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개입하시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아모스의 것은 종말론적이다.
하나님의 말씀
아모스는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효력에 신념을 가진다. 하나님의 말씀에 땅이 반응하고 사자의 울음은 반응을 일으키시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하신 말씀을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약으로의 접근
신약은 사회 정의 및 가난한 자들의 학대에 대한 아모스의 관심을 공유한다. 교회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해서는 안되고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특별 관심 대상이다. 예수께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심을 보이셨다. 아모스서는 신약에 구체적으로 인용되는데 바울의 권면과 스데반의 인용, 사도행전의 인용 등이다. 사도행전의 실제 구절을 확정짓기는 어렵지만 이방인들을 교회 속에 포함시키고 이스라엘 재연합의 뜻을 성취시키는 것으로 주장하는 듯하다. 분열을 수리하는 것은 실제적 나라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열방을 모으는 것을 포함한다.
오바댜서
문학적 분석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나라에도 메시지를 선포했다. 다른 선지서들에게는 한 이방 나라에 대한 신탁 하나에 불과할 것이 오바댜에는 한 개의 독립된 책이었다. 에돔은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신탁 중에서 다른 것들과 구분되어지는데 선지서들에는 다른 나라에 대해서보다 간결하거나 일시적이며 적대적인 신탁들의 주제이다. 예레미야와의 유사성으로 볼 때 문헌상 의존 관계가 있었음이 확실하지만 어느 쪽이 의존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두 신탁은 모두 에돔의 지혜 없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책의 형성 단계를 파악하려는 시도들은 두가지 접근 방법이 있는데 먼저 1-14,15B를 오바댜의 것으로 보고 나머지를 후대나 개인의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구분의 근거는 첫 부분이 구체적 역사를 다루는 반면에 나머지는 묵시적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접근 방법은 19-21만 오바댜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고 나머지는 오바댜 자신의 것이지만 독립된 신탁으로 보는 것이다. 첫부분은 열방들이 에돔을 벌하는 것이지만 두 번째 부분은 열방들이 에돔처럼 심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형성 역사를 찾으려는 이런 접근 방법이 있었지만 대부분 이 책의 본질적 통일성을 옹호하였다.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신탁은 실로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었다. 에돔에 관한 말씀에서부터 유다에 대한 말씀으로 이동이 있었고 이런점에서 환기를 시켰다. 에돔이 유다의 영토를 병합했으나 이것이 반전되어 에돔이 점령되고 심판 받는 것이다. 이책의 후반부가 이스라엘과 열방들에 넓게 관계되지만 에돔이 전면에 부각된다. 구조에 대한 분석도 다양한 결과를 낳는데 여러 부분으로 쪼개면서 개관하고 있다.
신학적인 메시지
오바댜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신탁과 동일한 신학 토대를 가지고 다음의 세가지 공유점이 있다. 1. 신탁들은 여호와의 보편적 통치를 말한다. 2. 이 신탁들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스라엘 속에서 작용함을 밝힌다. 에돔이 행했으니 행한대로 돌아간다. 3. 이 신탁들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의 거룩한 전쟁에 용사이신 하나님의 메신저들로 참여함을 말해준다.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신탁들은 선지자들의 전쟁 참여 연장선에 있는 것들로 신탁들 속에서 선지자들은 용사로서의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다.
이 책의 정확한 배경은 파악하기 어려우나 넓은 맥락에 보게 되는데 오바댜서는 이 문맥을 넘어서 여러 맥락에서 이해하게 만든다. 국가간 정치 영역에서부터 가족 관계의 영역으로 옮겨가게 만들어준다. 두 나라는 태어날 때부터 연결되어있는데 에서가 자신의 장자권을 경홀히 여기는 것에서 기술하는데 사용된다. 하나님의 섭리에서 에서의 역할은 형제 야곱을 섬기는 것으로 고정된 것이었다. 에돔이 이스라엘 공격한 것은 정치 군사적 문제가 아니라 형제에 대한 배판이고 에돔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반역한 것이었다. 결국 에돔은 하나님의 목적대로 형제를 섬기게 될 것이었다.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데 하나님의 정의 및 궁극적 의도들이 승리를 거둘 것임을 말한다. 에돔은 유다 생존자들을 쓰러뜨리지만 에돔의 생존자들도 남지 않고 통치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신학적 주제들을 공유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적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여호와의 날, 심판 기준으로서의 동해형 복수법, 등이 있다.
신약으로의 접근
이스라엘과 에돔 간의 오랜 경쟁 관계와 갈등에 대해서는 신약에서는 에돔의 후손인 헤롯이 예수님을 탄생시에 죽이려 한 점에서 보게 되고 바울도 이 고대 이야기를 회고하면서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변호한다.
요나서
문학적인 분석
장르
이 책의 장르는 역사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이 문제를 확실히 결론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적 기록으로 해석해야할 것으로 장르 표시가 있으나 비유적 해석의 가능성이 있기에 의견상 불일치를 용납해야 한다.
문체
요나서가 하나의 역사 기록으로 읽혀지지만 문체가 상당히 고도화 되었다. 문체에 상당한 주의를 가지고 메시지를 강화시키고 있다. 핵심어휘들이 계속되어 반복되는데 특히 쿰 동사가 반복된다. 이 단어들의 아이러니칼 언어유희가 등장하고 요나에게 주어진 일어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함께 듣게 되는 것이다. 다시 일어나라는 동사를 통해서 순종을 하게 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한 특징은 크다, 예비하다, 내려가다 등의 동사를 통해 제시된다.
구조
이 책은 두 개의 장을 가진 두 개의 막으로 나울 수 잇다. 먼저 1:1-2와 3:1-2에 반복되는 선지자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나뉘는데 1막에서는 주로 바다에서의 행위이고 2막ㅇ느 설교와 니늬웨의 회개를 다룬다. 마지막장은 니느웨의 동편에서 옮기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나타낸다.
요나의 시
요나서의 문학적 통일성과 관련된 문제는 2장의 시이다. 이것은 문맥과 어울리지 않고 나머지 부분과 다른 성격의 요나를 보여준다. 문맥상 다른 형태의 시로서 고난 중 애가를 할 것이라고 예상하게 되지만 감사의 시를 보여준다. 이런 의문은 요나의 처한 상황이 물고기 속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라는 것이다. 더 문제는 이것에서 충성을 약속한 요나이지만 다음 장에서는 다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요나가 단일한 성격이 아니라 복합적 인물임을 시사한다.
신학적인 메시지
구약의 맥락에 이 책의 특징은 언약 공동체 밖에 대한 태도이다. 하나님께서 이방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처음 나오지는 않으나 요나서는 이방인들에 대한 사랑의 두 방식에 초점이 있다. 영적으로 민감한 이교도들과 잘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선지자를 대비시킨다. 둘째로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고 끝맺고 있다. 이 책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연민을 표현함과 이스라엘의 비난을 가하고 있다. 요나는 선지자로서 영성의 정소를 보여주어야 하지만 불순종하려고 하다가 시도를 당한다. 니느웨에 갔을 때에 회개가 일어나고 심판이 없자 하나님과 대적한다. 요나가 절망에 빠진 이유는 자신이 거짓 선지자로 인식될까 두려워 했다는 것이다. 예언이 결국 실현되지 않게 되리라고 요나가 생각될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견해에 대해서는 선지자의 임무는 민족이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고 이 메시지는 백성의 반응에 달린 것이다. 요나의 절망은 하나님의 연민이 단지 이방만이 아니라 잔인한 제국에까지 미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인데 자기 원수들에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을 배우게 된다. 이야기 전체에서 요나는 도망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을 사용하셔서 돌아오게 하시고 그것에서 도피할 수 없는 전 피조물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
신약으로의 접근
신약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으로 돌아올 수 있으며 그들도 백성의 일부임을 선포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요나의 사역과 비교하시는데 기적을 바라는 것에 대답으로 요나의 표적과 비교하신다. 이는 십자가에 달릴 것과 부활에 대한 것이었다. 요나는 자기 뜻에 반하여 말씀을 선포했으나 예수님은 구원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드리신 분이다.
미가서
문학적인 분석
미가서의 구조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다음의 확실성을 가진다. 1. 미가의 신탁들은 한 시기에 다 전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그 사역 기간 전체에 선지자적 메시지의 모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2. 책의 서두에 연대기적 순서는 구조를 파악하는 열쇠가 아니다. 3. 예언은 경고와 소망의 교차적 배열에 근거한 구조를 가진다.
문체
미가서의 힘찬 문체는 히브리어가 난해하고 구조가 현대 독자들에 명료하지 않다는 것과 동시대의 더 잘 알려진 인물인 이사야의 그림자에 가려져왔기에 간과되어 왔다. 그러나 미가는 언어와 수사에 탁월한 인무이다. 역사적으로 산헤립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진군할 때에 대한 예언적 서술인데 미가는 재미있는 언어유희를 사용하여 기술하고 이것들리 도성의 처할 운명과 연결된다. 모팻의 의역은 독자들에게 본문의 유희를 보여준다.
신학적인 메시지
미가서의 신학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심을 기울인다. 여호와는 미가가 자기 백성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임무 부여하신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모두 하나님의 길을 떠나 죄를 짓는데 이런 죄들은 제의적인 것들이었고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된 안위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확신은 미가가 지적하는 거짓 선지자 태도에서 보게 된느데 이스라엘이 안전하다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과 언약을 깨뜨린 백성에 대한 소송을 집행하시고 백성에 대항해 싸우는 전사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6:6-8에서 율법의 요약으로 받아들이는 부분은 제의적 종교에 대한 논박이라고 해석하지만 이스라엘 사람에 존재하는 외적 종교에 대한 건전치 못함을 강조를 교저하는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죄에 대한 심판이 중심적 어조이지만 소망의 내용도 함께 등장하는데 심판의 구원에 대한 위로의 어조로 말씀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을 보인다. 다윗에게 주신 약속들은 성취될 것이다.
신약으로의 접근
미가는 당대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심판과 소망의 신탁을 전했지만 직면한 역사 위기를 초월 표현을 사용했으며 자신의 독자로 미래로 인도했다. 미가를 인용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했다. 이 신탁의 미래는 다윗과 같은 통치자를 고대하는 것이고 베들레햄의 중요성이다. 하나님의 산이 솟은 것과 민족이 하나님을 경배하려 모이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평화가 있고 전쟁이 없다. 신탁은 만일에라는 문구로 시작하며 이 예언은 종말에 궁극적 성취가 이뤄지지만 구속사가 펼치는 가운데 선행적으로 성취된 것이다.
나훔서
문학적인 분석
문체
나훔의 시적 문체는 뛰어나다. 나훔은 소선지자들 중 가장 정제되고 아름다운 시로 되어있다. 니느웨의 멸망과 황폐화는 생생한 색채로 되어있다. 또한 비유적 표현이나 평행법으로 탁월한 시인임을 보인다.
장르
이 책의 표제는 선지서 속 만날 종류와 관련하여 책, 이상, 신탁 등이다. 책은 나훔의 예언이 다른 것과 상이함을 보이는데 대부분 선지자가 설교가들이며 선지서들은 그 말한바를 낮우에 모은 것이지만 나훔은 직접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기록 문헌의 성격을 가짐은 나훔의 설교들의 모음이 아니라 잘 구성된 구조를 가짐을 밝혀준다. 이상을 담는 것으로 밝히고 있는데 이상을 담는 두 개의 문단이 있다. 신탁에 있어서는 전쟁 신탁 이방에 대한 적대적 신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조
이 책에는 짜임새 있는 구조가 드러난다. 선지자 이름, 도시 이름, 주제에 대한 전형적 표제로 시작되고 찬양시로 시작된다. 이 찬양시는 역사적 면에서 구체적이지 않으나 다음 두분은 승리의 노래에서 흘러나와서 선지서들 중 독특하게 유다에 대한 구원의 신탁을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신탁과 함께 엮는다. 이런 극적 긴장은 구원과 심판의 대상이 누구인지 늧움으로 고양된다. 이 선지서는 이상으로 계속 이어지면서 사건에 대한 이상에서 마지막 멸망의 장면에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되어있다. 강력하고 억압적인 도시 멸망에 대한 생각을 염두에 둔 나훔은 니느웨에 대한 조롱을 하고 구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조롱은 앗시리아를 죽임당한느 사라라고 하고 두 번째 조롱은 앗시리아를 마술사 창녀라 한다. 나훔은 전쟁의 신탁과 더불어 사건에 대한 이상을 넣는다. 이런 양식은 장례식 애가로서 니느웨가 죽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까지 조롱들이 이어지는데 니느웨를 테베와 비교하면서 역사를 활용한 조롱을 하고 조약의 저주에 근거나 조롱을 하고 장송곡으로 끝맺는 것이다.
신학적인 메시지
나훔서 1:7-8은 중심적 메시지를 요약한다. 나훔서의 하나님은 백성을 위한 전쟁을 할 용사로 나타난다. 이는 유대인의 희망의 메시지였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앗시라아에 대한 멸망의 심판은 백성들에게 위로를 주었다. 하나님의 예언은 성취되었으나 유다 백성들은 죄로서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했다. 그 결과 바벨론에 의해 유다는 정복된다.
신약으로의 접근
나훔서의 영속적 의미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약의 용사로서 하나님 묘사는 예수 그리스도 임재를 고대하는데 그리스도 역시 신약에서 용사로 묘사된다. 하나님의 전쟁은 구약과 달리 전쟁의 절정으로서 전사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묘사와 사탄과 그리스도 사이의 전쟁은 계시록에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께서 사탄 및 마귀 및 인간 군대에 대해 자기 군대로서 마지막 전쟁을 수행하심으로 악은 끝나게 된다.
하박국서
하박국에 대해서 별로 알려진 것은 없다. 많은 학자들은 하박국을 제의 선지자로 결론을 내렸다. 이 책의 성전과 관련된 애가 장르를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고 예배에 사용된 것임을 시사해준다. 그러나 제의 선지자라는 표현은 명료하지 못하며 선지자와 성전의 정확한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제의 선지자가 성전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한 부분으로 선지자적 직무를 수행한 것이라면 하박국의 그런 인물로서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 제사장 직분 때문에 선지작 된 것이 아니며 선지자는 전수되는 것이 아니다. 이 제의 선지자가 성전을 배경으로 일고나 사역을 하는 선지자라면 하박국 및 다른 선지자들에게 적용될 것이다. 하박국이 알려진 것이 없다는 것은 그에 대한 여러 전설이 존재하는 것에 설명을 해준다. 하박국을 레위인이라고 말하는 전승이 있으며 술람이 여인의 아들이라고 하기도 하고 파수꾼과 동일하다고 하는 등이 있으나 사실적 정보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문학적인 분석
이 책의 첫 부분은 하나님과 선지자 사이 대화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애가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박국은 유다의 악과 불의에 대해서 불평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유다에 멸망과 사망을 주는 갈대아인으로 유다를 심판핫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기 위해 더 큰 악을 사용한다는 것의 의문을 가지게 한다. 이 문제는 두 번째 불평으로 도입하게 하는데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악한 자들이 의로운 자를 심판하도록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가 성취될 때에 증거가 되도록 선지자가 계시하는 바 기록할 것을 명령하시고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를 벌하시는 것이다. 바벨론의 오만은 그 심판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바름과 잘못됨에 대한 생각은 역사에서 하나님의 행위들을 평가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받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갈대인인들도 심판하신 것이라는 것은 다섯 개의 저주 신탁들로 확인되는데 악이 항상 번성하지 않을 것이며 땅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질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침묵할 것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본 이상에 대한 선지자의 반응은 찬양시고 승리의 노래이다. 그가 오실 때에 천지가 떨고 하나님은 창조 때처럼 혼돈의 물들을 다스림을 보여주실 것이다. 출애굽 때철머 열방들을 심판하기 위해 무기를 가지고 오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신 것에서 확신을 가졌다. 3장의 시는 고어체적 히브리어로 쓰이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과거 행한 것들을 나열하면서 의도적으로 고대의 서사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가능성이 있다. 이 구조는 대부분 받아들여졌으나 이 각장이 개요상 분리된 부분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신학적인 메시지
하박국은 역사 마지막에 처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말씀을 선포했으며 이 나라는 부패로 썩어 있었다. 새롭게 부각하는 바벨론이 멸망시킬 운명이었다. 그러나 선지자의 시선에는 하나님은 무관심하신 것으로 보였다. 하박국의 불평들을 욥과 비교하면서 욥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해야하며 공의를 행하심을 확신해야한다는 것을 배웠고 하박국은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신약으로의 접근
하박국 이후 다시 악과 불의가 흥왕했고 이 성전은 위협을 당했다. 이 성전은 그리스도 몸으로 상징되는 성전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기 위해 오지 않았고 악이 승리하는 듯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 일으키심으로 변호하셨으며 예수님의 부활은 악이 승리하지 못함을 보이는 선언이다. 바울은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믿음으로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는 것을 초대 교회에 주지시켰다. 바울은 의가 믿음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주장에서 하박국을 인용하고 있다. 역시 동일한 신앙으로 부름 받았으며 용사이신 하나님이 장차 오셔서 자기 이름을 수호하실 것이다.
스바냐서
스바냐는 상세한 족보와 소개된 유일한 선지자다. 히스기야의 후손으로 왕족이었으며 자신의 지위로 유다 지도자의 죄악을 관찰하고 외칠 수 있었다. 표제는 요시야 시대에 사역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하박국 및 예레미야와 동시대 인물이었을 것이다.
문학적 분석
전통적 비평학계는 이 선지자의 말은 삽입부분이나 첨가로 구분하는데 관심을 기울였으나 방법의 결과들은 일관성이 없었다. 이런 접근방법들은 일부 본문을 후대의 것으로 분리하는 중요 이유는 포로기 이후 시대 시각이 있다는 점이나 묵시문헌과 비슷한 종말론적 기대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런 이차적 삽입부분이 정경화 과정의 본보기이고 이스라엘 이후 세대의 당대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해석한 것으로 생각한다. 다른 접근방법들은 논리적이고 질서정연안 사상 흐름에 주목하고 스바냐가 면밀히 구성된 통일체를 이룬다 강조한다. 이 선지자는 보편 심판을 선언하고 그 결과를 상술한다. 이는 보편 축복이 유다 및 열방에 미치는 결과들로 이어지고 수사적으로 확장시킨 결과로 만들어진 통일된 책이라 보면서 짜임새가 있음이 강조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스바냐의 구조가 다른 선지서와 비슷함을 알게 되었는데 모두 유다의 직접적 역사적 상황과 관련된 신탁에서 시작하여 다음 열방에 대한 신탁으로 이어지며 미래의 종말론적 축복에 대한 신탁으로 끝을 맺는다.
신학적인 메시지
심판이라는 주제에 은혜와 자비의 주제가 지배적인 주제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남은자와 회복의 모티브로 기술된다. 1. 여호와의 날은 선지서들에 자주 나오는 주제이고 이와 비슷하게 이 날은 하나님께서 자신 명예를 지키고 열방이나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 오시는 날이다. 그의 임재는 신현 현상에 의한 신호로 알려지며 이 위대한 날은 역사 속에서 기대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개입하시는 역사적 행위는 죄가 이 땅으로부터 제하여지는 종말론적 심판의 그림지이다. 2. 이런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기대와 병행하여 남은자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의 주제는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남은자 모티브는 성경의 많은 책에서 발견되는데 재앙을 겪을 때 재앙에서 남아 존손하는 하나님의 백성 핵이 되는 자들을 남은자라고 한다. 하나님의 미래 존속은 이 남은자들에 맞추어져 있다.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에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고 그의 기대는 나라를 정화시켜 죄 없는 남은 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본토와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우주적인 하나님이시고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신의 거룩성과 자기 백성을 어찌 대했는지 따라 심판을 내리신다. 전체를 창조하셨기에 모든 열방에 심판이 있고 자비를 가지신다. 자신의 은혜를 받도록 모으시고 그들이 모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다.
신약으로의 접근
기독교 독자들은 스바냐의 비유적 표현과 모티브들이 신약에도 사용됨을 보게 된다. 임박한 역사적 재난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바울은 여호와의 날, 그리스도의 날에 대해 자주 언급했으며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나타나셔서 최종적으로 옹호하실 날을 기대한다. 요한은 용사이신 하나님이 군대를 이끌고 오심을 기술한다.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스바냐는 열방이 하나님을 경배할 날을 고대 했으며 교회가 볼때에 이것은 이미 현재에 실현된 사실이다. 교회 역시 이 세상이 진정한 왕의 다스리심을 인정할 때가 됨을 알고 소망하는 것이다.
학개서
이 선지서에서 얻는 것 말고는 학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스가랴와 같은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말씀을 선포하였다는 것은 알고 있다. 스가랴에 대한 연대를 보면 단순히 선지자라고 언급되고 아버지 이름이 제시되지 않음은 동대사람에게 잘 알려진 사람임을 시사한다. 학개라는 이름은 축제, 절기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으며 이것은 그가 절기중 하나에 태어났음을 시사한다. 제롬의 주석에 따르면 학개는 제사장이었는데 이는 증명될 수는 없다.
문학적 구조 및 신학
학개서는 네 개의 신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직접적으로 설파된 신탁들이 산문으로 내러티브 틀 속에 들어가 있다. 그래서 청중들에게 끼친 효과에 대한 보고서로 보인다. 내러티브 틀 속에서 학개는 삼인칭으로 언급되는데 이는 그 책의 저자가 아니라고 결론 내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학개서와 역대기 유사성은 먼저 존재해서 역대기 편찬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학개가 이 채의 저자이며 객관적 역사성을 위해 삼인칭으로 내러티브를 사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성전의 봉헌 전에 쓰여졌을 것이라고 보는데 이것은 성전의 봉헌이 학개의 명성을 높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첫 번째 신탁은 간략한 논쟁과 더불어 심판의 말을 담고 있다. 이것은 달의 첫째 날에 전달되는데 신년 축제에 선포되었을 것이다. 성전 폐허 장소이고 사람들이 모인 것은 좋은 배경이었다. 학개는 귀환자들의 수고가 성전을 무시함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이 백성이라 하면서 다 언약에 순종하지 않음에서 옴을 보인다. 두 번째 신탁은 성전에 대한 작업이 시작된지 한달이 못되어 주어진다. 이 절기의 마지막 날을 가리킨다. 여기서도 사람들이 성전에 모였을 때라는 것이며 두 번째 성전이 처음보다 못하는 상태였다. 선지자는 이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주고 두 번째 성전의 영광이 처음보다 뛰어날 것임을 확신시킨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신탁은 같은 날 주어지는데 성전 작업 세달 째였다. 세 번째 신탁은 토라에 대한 질문, 격려의 메시지로 이루어진다. 성전도 부정함에 의해 더럽혀질 수 있으니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아마 일이 시작된 이래 세 달간 백성은 낙심한 듯 하다. 선지자는 그들의 수고를 축복하심을 통해 그들을 격려하신다. 네 번째 신학에서는 스룹바벨에게 주어지는데 여호야긴의 한 후손이 하나님 손에 들려진 인장 반지가 될 것이라 말한다. 학개와 스가랴등은 이방의 통치가 무너지고 다윗의 통치를 기대했겠으나 스룹바벨은 다윗 계보의 왕이 아니라 종말의 날을 가리키는 자였다.
신약으로의 접근
구약에서 하나님이 성소나 제단을 승인하실 때에 불이 나타났고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과 구름 기둥이었다. 영광이라는 단어는 부와 풍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성전 건설과 제의를 승인해주기는 했으나 이방의 부가 도시로 들어놀 것이라는 말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불과 구름 기둥이 두 번째 성전에 나타났다는 것에 대한 암시나 주장은 없으며 페르시아의 통치 하에서 자유는 있었으나 이방의 통치가 분쇄된 것은 아니었다. 다윗 계보의 스룹바벨이 치리를 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왔으나 이것은 장차 올 것에 대한 임시적 단계였다. 새로운 왕국이 예수님을 통해서 임하게 되며 지금도 다스리시며 모든 만물을 발에 두시고 있다. 이런 것들 역시 만물의 종국으로 새로워지고 표현할 수 없이 휘황찬란한 도성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고 눈물이 닦여질 때를 향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스룹바벨이 선택받은 것은 다윗의 계보 통치가 시작된 것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지변을 형상하여 종말적 시대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스가랴서
스가랴서는 소선지서 중 가장 긴 책이며 어려운 책이다. 이 책의 난점들로 여러 견해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가장 중요한 책이다. 수난 기사의 구약 구절들을 가장 많이 담고 잇으며 계시록 저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스가랴는 흔한 이름이었는데 스가랴는 포로 귀환한 제사장 가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는 그가 성전과 관계된 일들을 잘 알고 거기에 흥미를 가졌음을 설명한다.
문학적인 분석
스가랴서 1-8이 다른 시대 저자에게 나왔다는 비평학계 견해는 다음 증거들로 도출되었다. 두 부부은 다른 시기에 비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는 회복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반면 9-14장은 묵시적이고 종말론적 상징을 담는다. 그리고 두 부분은 문학 양식에서도 차이가 있다. 앞부분은 스가랴의 밤 이상과 금식의 준수 등이 나오는 반면 후반부는 경고라고 치칭되는 것으로 구성된다. 양 부분의 일부 어휘와 구문의 차이도 있다. 이러한 차이점은 저자가 다르다는 것에 대한 근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컴퓨터를 활용한 자료 축적에서 두 부분의 차이에 대한 주장의 근거가 부족함이 드러났다. 통계학적 자료는 동일한 저자라는 가능성이 적다는 것도 시사해주었다. 또한 9-14의 연대에 대한 내정 증거는 1-8의 회복 시대 초기와 일치하지 않으며 헬라인들에 대한 언급은 이전 세기보다 두시기 이른 것이다. 11:4-17의 난해한 부분이 등장하여 마카베오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전반부에서는 구체적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반면에 후반에는 인명이 언급되지 않는다. 앞부분은 연대가 언급되지만 후반부는 연대가 없다. 앞부분은 대제사장과 다윗의 후손 스룹바벨이 지도자이지만 뒷부분은 목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러한 부분들이 분리시키는 것을 위해 사용된 논거들이다. 비록 일너 논거들의 구체적 대답의 필요가 있ㅇ으나 이것들을 간다히 다루자면 양 부분의 차이점으로 파악된 점에 근거해서 제기된 것이고 양 부분의 차이는 저자와 배경이 다르다는 주자을 지지해 줄 만큼 충분히 많고 두드러진다고 생각되어졌다. 그러나 다른 주장 역시 이런 차이점들을 설명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만약 현대 저자가 자신의 자료를 주제나 양식에 따라 배열한다면 정리 능력의 증거라고 하지 문헌들이 각기 저자에게 나온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고대 저자가 자신의 문헌을 기준에 따라 분리한다면 합리적이고 정리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논거는 저작권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위의 3번 논거와 관하여 조심할 것들은 인간 언어의 담화 문법을 관찰한 것을 일반화하여 보면 글의 주제가 다르면 구조 등이 달라지는 것을 예상하게 되는데 장르상 주제나 차이를 나타낼 뿐이다. 산문체 문헌과 시 문헌을 대조할 때 이런 차이가 발견됨은 자연스럽고 이것이 스가랴 내의 상이성이 저작권의 문제를 설명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게 된다. 아직은 저작권의 문제를 위한 통계학적 모델 사용의 유아기에 있으며 이론들의 난점이 있다. 우리는 스가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며 책의 두 부분 사이에 상당한 시간의 흐름이 있으며 1-8장이 묵시적 특징을 조금인 것에 반하여 후반부는 이런 요소들을 많이 보여준다. 후반부는 발전된 묵시 사상이고 훨씬 후대의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묵시 사상 발전에 대해 이런 직선적 견해가 타당한지 의문을 가지게 되고 만약 9-14가 생애 후기의 파생이라면 그 배경인 전반부는 낙관주의로부터 하나님의 개입에 소망으로 바뀌는 시간이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두 태도가 한 개인이나 사회에서 공존하기에 시간의 경과를 가정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스럽게 된다. 4번 논거와 관련해서도 헬라인들에 대한 언급이 알렉산더 이후를 가정한다고 하기에는 이상하다. 즉 비록 스가랴 9-14가 1-8장과 같은 시기 같은 저자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증명을 위해 많은 증거가 제시되지만 그런 결론 도출의 근거가 되지 못하며 오히려 한 저자로 적용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주제를 공유하고 있으며 공동점을 보인다. 그러므로 비평학자들의 견해는 저자가 다르다는 것 뿐이며 이를 넘는 것이 없다. 후반부의 연대에 대해서 주전 8세기부터 마카베오 시대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으며 후밤부가 통일성을 가지는 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런 학자들은 이 후반부를 고대 이스라엘 제의 속에 정초시키거나 사회 배경에 정초시켰다. 전반적으로 스가랴를 이분하는 결정을 하고 나자 이 후반부 장들의 역사, 사회적 배경 파악 문제는 당혹스러운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신학적 메시지
스가랴서 1-8장
스가랴서는 다른 선지서와 달리 소명 기사로 시작하지는 않지만 스가랴가 모세와 같은 선상에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자기 말이 선재한 선지자의 효력을 가지며 이것에 귀을 기울여 화를 당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스가랴 여덟 개 밤의 이상들은 교차대조법 구조를 이루며 이방 나라들의 운명에 대해 그리고 있다. 두 쌍의 이상들은 덜 문명하다. 양자는 회복 공동체가 직면하는 이방 나라의 반대와 언약 공동체 내의 죄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하난미의 심판과 포로됨에 대해 다룬다. 한쌍 이상은 성전 주변을 배경으로 지도자들에게 관심을 두고 총체적으로 이방세계로부터 예루살렘 마지막으로는 성 주변으로 가는 구심적 구조를 가진다. 첫 번째 밤 이상은 실현되지 못한 종말론 문제를 다루고 유대인들은 여호와 날을 경험했으며 거룩한 하나님의 분노를 배웠다. 이방 나라들은 평안하여 조용한 것으로 보였다. 여기에 여호와 군대의 대장인 여호와 사자는 하나님께서 진노를 그치시고 백성을 수호하실 것을 간구한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잊지 않는다는 위로의 말을 듣는다. 열방들은 여호와의 날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시온은 하나님 은혜의 대상이 될 것이다. 두 번째 밤의 환상 해석은 네 뿔과 네 대장장이 해석인데 세부적 내용이 난해하더라도 요점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을 분쉐할 것이라는 점이다. 포로 귀환의 백성은 성벽이 없기에 적의 공격에 열려 있었다. 세 번째 밤 이상에서는 여호와께서 성, 번영으로 흐르는 도성의 불의 벽이심을 보았다. 이 상징은 전 도시가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불기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임재는 지성소에 국한되지 않고 전 도성이 하나님의 처소가 된 것이다. 네 번째 밤 이상에서는 재판 장면을 목격하는데 하나님의 천사가 재판장으로 참소하는 자가 있고 대제사장의 잘못을 지적한다. 이것은 그 배경이 속죄일의 배경일 가능성이 많음을 보인다. 이는 대제사장이 여호와 앞에 서는 때와 관계되어 이 것이 속죄일에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과 연관시킬 수 있다. 대제사장의 보장에 대해서 다른 제의로 표현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대제사장을 스스로 힘이 아닌 의를 제공해주고 참소자의 기소 토대를 제거하신다. 제사장이 하는 일들이 죄를 제거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었다. 당시 맥락 속에 대제사장은 나라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가 하나님에 의해 정결케 됨을 입는 것은 동시대 귀환자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성전ㄴ을 지을 수 있음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다섯 번째 이상에서 선지자는 하나의 받침 위 일곱 대 촛대를 본다. 본래 제사장들은 성전 등대를 하루 두 번식 보며 기름을 채우는데 여기서의 촛대는 관리가 필요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는 것이고 이일을 끝까지 돌아보실 것이다. 어떤 이들이 자신의 성전이 실망스럽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기뻐하셨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이를 위한 도구들이었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이상은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는 십계명을 요약하는 것으로 보이고 처음 네 개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죄로서 하나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것에 의해 대표되며 마지막 여섯 계명은 다른 사람의 죄로 나타난다. 포로생활은 이스라엘의 정화가 목표인데 율법은 이 회복 공동체의 심판받을 죄가 있음을 나타내고 죄를 상징하는 에바를 보면서 죄 심판의 장소로 옮겨질 것을 보인다. 여덟 번 째 이상은 첫 번째 환상에서 사용된 말들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몸소 열방을 벌하실 것임을 나타낸다. 이 책 전반부 나머지 부분들은 이상이기보다는 기록들이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사로잡힌 자들이 아직 포로생활을 하는 유대인들로 헌물을 가지고 그 금을 면류관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면류관은 왕가의 인물이 가져야하는데 이것은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이 메시야 속에 결합된 것으로 해석한다. 포로 시대 동안 예루살렘 멸망을 전후한 사건들을 기념하기 위해 네 번의 금식이 준수되었는데 포로 시대가 끝나고 성전이 완성되니 유대인들은 이 성의 멸망을 기념하는 금식을 행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그것으로 이 문제에 대한 자문으로 대표단이 예루살렘으로 오지만 스가랴는 위선적 금식과 율법적 사항에 집착하는 경건 태도에 대해 설교하면서 포로기 이후 시대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이방으로 구분하는 집착이 있으나 스가랴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같은 토대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날을 예언한다.
스가랴서 9-14장
최근 이 부분의 통일성, 앞장들 사이의 통일성이나 밀집성에 대해서 강조를 했다. 전체는 단일한 저자가 반복적 주제들을 중심으로 교차대조법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 구조 구성에 반복 주제는 전쟁을 통한 이스라엘과 열방들의 심판 및 구원, 여호와의 날 우상 숭배 억제 등이다. 이 책의 두 부분의 저자가 다르다는 생각은 분명히 하나의 문학적 통일성을 보이고 각자의 해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주의를 기울이면 이스라엘의 예언적 소망에서의 포로 귀환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 중 많은 것들을 성취시킨 것이다. 귀환은 새로운 출애굽이고 구원이며 최종적 구원은 아니었고 구원의 시작이자 예비이다.
말라기
문학적 분석
장르 및 구조
표제를 통해서 예언을 시사해주는 장르 표지를 사용하고 있다. 말라기 예언은 논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묘사하고 백성의 행위를 꾸짖으며 어떤 심판할 것인지 묘사한다.
여섯 번의 논쟁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 논쟁은 통상적 패턴으로 하나님 자신의 속성에 대한 진리를 주장함으로 시작한다. 다른 논쟁들도 비슷한 양식을 따른다. 이러한 분석 뒤에 부록이 남는다. 여기서는 말씀을 따르는 것에 대한 촉구이다. 대체적으로 이 책의 통일성은 부록을 제외하고는 도전을 받지 않았다.
문체
말라기의 문체의 창의적은 논쟁의 양식에 있다. 운문인지 산문이지에 대한 논쟁이 있으며 히브리어 성경에서 무엇이 운문인지 정의하기 어려움과 연관된다. 말라기의 문체는 양식에서 창의적이고 메시지가 분명하고 논리의 설득력이 있다.
신학적인 메시지
말라기에는 이스라엘에 준 언약이 들어가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심판은 언약을 위반하는 것에 기초한다. 조상들이 맺은 언약이 족장들의 언약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백성과 하나님의 언약 파기가 있음은 분명하다. 우상 숭배의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태도를 시사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보이면서도 자기를 사랑하는지에 대해 의심하는 것을 보이는 말을 한다. 논쟁들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말라기는 단지 과거의 죄 때문에 현재 회개하는 것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 이상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미래의 소망에 불을 붙이려 했으며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승리와 그렇지 않은자에게는 심판을 가져옴을 보인다.
신약으로의 접근
마가복음은 말라기와의 인용문으로 시작된다. 부록부분은 여기서 나오는 사자가 엘리야라고 밝히고 승리의 심판의 날에 앞서 등장한다. 신약에서 이것을 예비하는 것은 세례요한이고 임박한 멸망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지상 사역으로의 길을 연다. 이런 메신저 역할은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님은 말라기 본론을 통해 강림하실 여호와와 동일시된다. 말라기의 종말론적 희망들은 복음서에서 성취된다.
코멘트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을 향한 심판으로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역설적인 태도를 보이셨다. 이 여호와의 날이 바로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기 위한 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굉장히 놀랍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거부하는 양태로까지 나아간다. 이것을 지금의 현실과 연관지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자신의 의로움과 순수성은 주장하지만 자신에 대해 점검하고 회개하는 결단은 부족함을 느낀다. 마치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생각하던 유대인들과 같이 말이다. 이런 면에서 여호와의 날이 한국교회에 임한다면 당시 유대인과 같이 의아해하면서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을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정죄와 판단의 출발점이 나 자신이라는 것에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까지 나갈 것도 없이 나 자신의 죄악됨과 오류 투성이임을 인정하고 이 여호와의 날이 바로 나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임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여호와의 날을 통해 심판하시지만 결국 남은자를 통해서 자신의 언약의 대를 이어가신다. 이러한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고 예배에 삶으로 참예해야 할 것이다.
더욱 하나님의 심판이 은혜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이러한 예언적 선포가 목적이 심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에 있다는 것이다.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곳곳을 통하여 심판하기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고 자비 베푸시고 어쩔 수 없이 심판하시는 분임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고의 메시지에 지금 당장 취해야할 태도는 돌이킴이고 회개이다. 이러한 회개는 바로 나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