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적 관점에서 생태신학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있다고들 들었다.
주로 해방신학 민중신학적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생태신학을 개진하고
그러한 맥락아래 현대 환경문제와 함께 생태신학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나타나는 진보, PC, 여성주의, 등의 관점에서
매우 극단적인 운동 및 이벤트의 성행
그러므로 생태신학에 대해서 뭐랄까 경시하는? 중시하지 않는 시각이 존재하는 듯 하다.
다른 편에 있어서 교회성장주의에 있어서 생태신학은 매우 호소력을 가지지 못한다.
교회성장을 하려면 건물을 만들어야 하고 교회 안으로 사람들을 밀어 넣어야 한다.
교회 성장 전도 초청이 가장 높은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삶의 문제에 대한 접근은 매우 피상적인 것에 머무르게 된다.
생태신학적 접근은 삶의 방식에 대한 문제로서 깊은 사고력을 요하는 문제다.
나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의 생태신학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경적 근거가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성장주의의 관점에서의 생태신학 거부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경적 근거가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다.
생태신학은 매우 지당히 현대 지금 여기에 필요한 신학적 성경적인 고찰을 요하는 블루오션?이다.
여러가지 할 이야기들이 많은데 여기서는 끄적여놓는 것을 먼저 하려고 한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불을 뿜어내며 회중 가운데 있는 죄성을 끄집어내고 지적해내었을 때에
그 누구보다 죄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던 그 시대에
흑인 인권문제 노예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음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현대인들은 의아해한다. 어떻게 죄에대해 그렇게 진실하게 성찰하던 사람들이 흑인노예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
헌데 이는 매우 어리석은 의문이다. 사람은 시대와 환경을 벗어나 사고하지 못한다. 오직 예수께서만 이것이 가능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에게 시대와 환경은 무한하시기 때문이고 시작과 끝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시대적 모든 환경에서 요청하는 메시지를 뿜어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보면서 의아함을 가지는 것처럼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날의 개혁주의자들? 혹은 유명한 신학자들? 목회자들이
생태신학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 매우 의아해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때에 이르러서도 동일한 말을 할 것이다. 아니 이렇게 훌륭한 개혁신학자가 복음의 진수를 잘 발견하는 자가 생태신학에 대한 언급이 없다니! 이해하기 힘들다!.
생태신학은 결국에 죄의 문제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냐의 문제이며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소유로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대한 문제다.
지금은 이러한 논의와 실제적 삶의 모습에 대해서 매우 낯설고 의아하게 여겨지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시대적으로 생태신학적 메시지가 강대상에서 혹은 삶의 지경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감사하게도 그러한 논의와 고민을 미리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 다음 세대에 이어지는 부분에 있어서는 대부분 실패한 듯 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그들로 연대하게 하는 것이며 함께 논의하게 하는 것이며
당신이 혼자가 아니다. 당신이 싸워온 것이 헛된 것이 아니다 하고 말해주고 그들을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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