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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지라 하시니라

 

제자가 물었다. - 본다 1) 건물 2) 예수

제자는 건물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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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간음한 여인과 바리새인

 

서론

우리 나라는 전통적으로 유교적인 나라입니다. 우리 집안은 유교집안이야. 하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기독교인들도 할 때가 있습니다. 유교집안이라는 말의 의미에는 우리 집안은 양반의 집이야. 뼈대 있는 집이야. 하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비의 모습과 기독교인의 모습을 혼동하기도 합니다. 유교가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이 뭡니까? 제사입니다. 저희 할머니 이야기를 하자면, 노인분들은 항상 만날때 자신이 고생했던 이야기를 많이 되풀이해서 하십니다. 제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십니다. 제사가 한달에 한번씩 있어서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이유가 뭔가요? 조상 신이 있는데 그 조상신을 달래기 위해서입니다. 조상을 경배하고 존경해서 하기보다는 조상 신이 지금 후손들을 잘 봐달라는 식으로 하는게 제사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유교의 제사는 신을 숭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카톨릭은 제사를 허용했습니다. 하지만 귀신에 절하는 명백한 우상숭배니까 우리 개신교는 이를 우상숭배로 금한 것입니다.

유교의 제사만 그런게 아닙니다. 이슬람교도는 할렘이라는 천국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 개념은 72명의 지하드 성공자. 자살 폭탄 테러.

불교 힌두교 환생을 믿는다. 그래서 더 나은 생애로 태어나고자 한다.

 

결국 이들은 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신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컨트롤하는 것이다. 자신의 어떠한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컨트롤 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세상의 종교다.

 

종교만 그러냐? 요즘 유행하는 것들이 있다. 복수극이다. 범죄도시. 문동은의 더글로리. 복수에 대한 것. 정의에 대한 실현이 그들이 과거에 지었던 악행에 대해서 되갚는 것.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선한 행실을 쌓으면 좋고. 구원을 얻고. 악한 행실을 쌓으면 결국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어떠한 세상의 원리. 세상의 철학이 말하는 바이다.

 

본론

기독교는 이것과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를 믿고 더 행복해지고, 예수를 믿고 더 잘살고 돈 많이 벌고 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초대 교회에 예수를 믿으면 핍박을 받았다. 모든 사회적 특권에서 박탈당했다. 억압과 오해와 분란이 일어났다. 그런데도 굉장한 성장을 했다. ?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적과 기적이 일어나서가 아니다. 그것은 한때 그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목표는 천국가기 위함이 아니다.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이 아니다. 성취하는 것은 세상의 철학과 종교다.

 

기독교의 목표는 뭐냐?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뭐냐? 오늘 말씀이 이를 보여준다.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간음한 여인을 데려왔다. 간음한 여인은 모세 율법의 정죄에 따라 돌로 쳐서 죽어야 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시나?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다.

 

율법학자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무언가를 해야 얻는 것이었다. 세상의 종교로서. 율법으로서는 이 여인은 반드시 죽어야 했다. 돌에 맞이 죽어야한다. 악한 일을 했기에 악한 결과를 맞이해야만 한다. 그것이 우주의 원리다.

하지만 온 인류 중에 오직 한분. 예수님만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과는 다른 복음의 원리를 말하신다.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치라!

 

죄 없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법 율법을 모두 지키는 사람은 없다. 동은이도 연진이에게 당했지만, 동은이 역시 죄인이다. 죄인은 죄인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 죄 없는자가 그 권한을 가진다. 똑 같은 사람들끼리 어떻게 서로를 비난하고 정죄하느냐. 그럴 수 없다. 저 사람 머리에 똥이 묻어있으면. 내 몸통에 똥이 묻어있을 뿐이다.

 

예수님이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신다. 성경에서 기록되는 유일한 예수님의 글쓰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 내용에 대해 요한복음은 집중하지 않는다. 허리를 숙여 글을 쓰는 모습 자체에 집중한다. ?

 

(31:18)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하나님이 친히 쓰셨다의 원래 의미는 그의 손가락으로 돌판에 쓰셨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자신이 출애굽기의 그 십계명의 율법을 수여했을 때에 했던 방식과 동일하게. 온 세상에 적용되어야 하는 온 세상에 드러나야 하는 원리를 부여하고 계신 것이다.

내가 바로 모세 율법의 수여자다. 내가 선과 악을 지정하는 자다. 내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다라는 것을 보이시는 것이다.

 

그 권위자가 제공하시는 그 원리는 새로운 말씀은 뭐냐?

요한복음 15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누구든지 그가 행한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나와의 관계로 구원받는다. 나에 속한자 나의 백성에 속한 자. 그가 구원받는다. 그가 잘하고 못해서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나무에 속해 있어야 한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소속의 문제다. 내가 어디 속했느냐는 것이다. 내가 예수께 속했다면 그렇지 않고 예수 밖에 세상에 속했다면 그 소속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하나님께 예수께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외식한다. 외식이라는 말은 척한다는 말이다. 뭐 하는 척하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척한다.

신명기 6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내가 하나님께 속했다. 예수께 속했다는 정체성을 가지는 가장 큰 증거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에 누가 뭐라해도 내가 잘하든 못하든 어떻든지간에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당신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다.

이 명령이 말하는 바가 뭐냐? 이스라엘 백성이 한 민족으로서 정체성을 가지는 시기인 신명기의 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첫 명령이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를 사랑하라. 사랑은 자발성이다. 자유다. 줘도 더 주고 싶은 것이 사랑이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너희도 나를 사랑해주겠니?

얼마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내가 너희를 사랑하여 영새 전부터 영원의 시간이라는 그 개념 이전부터 세상의 시작 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마지막 시간의 밖 영원에 이르기까지 무한히 너를 사랑한다.

내 사랑에는 너희가 미칠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의 마음을 다해 날 사랑하겠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마음이 없었다. 이들에게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식.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하는 것들이 있을 뿐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내가 지키고 산다는 외식. 그러는 척 근엄한 척이 있을 뿐. 그들의 마음은 공허했다. 비어있었다.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 여러 율법들로 자신을 치장하고. 남과 나를 비교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정죄할 뿐이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가는 방향으로 행동하면 된다.

8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우리에게 자유가 있다. 이 자유는 아들의 자유다.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유다.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만나주신다. 내 마음에 찾아오신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그분과의 관계가 종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하는 율법에 메인 종이 아니라 자유로운 아들이 된다. 자유로운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것 정도가 아니다. 아버지를 존중하지만 아버지를 존중하고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기에 그 마음에 열정과 열심히 생성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신다.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에게 있어 여자가 간음이라는 엄중한 죄를 지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새로운 질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에 속한 자가 된다면. 그가 얼마나 막중한 죄를 가진 사람이든지간에 그가 얼마나 악독한 자이든지 간에 그는 예수님의 사람이 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내가 너를 용납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여인은 이 장면에서 그 누구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한 무조건적인 용납을 경험한다. 여인도 그 마음에 바리새인들과 같은 공허가 있었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욕정이라는 수단. 간음이라는 죄악으로 빠져들었다. 바리새인과 증상만 다를 뿐이지 원인이 같다. 그 마음 속의 공허를 다른 무언가로 채우고자 발버둥 친 것이다. 예수님이 그 마음을 아셨고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무조건적으로 그 자체로 용납해주신 것이다.

 

16:6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내가 공허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낸 죄들로 인하여 핏물과 오염된 온갖 오물을 뒤집어 쓴 상태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너는 살아 있으라. 제발 살아달라. 너는 꼭 살아야 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용납한다. 말씀해주시는 것이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다. 그 마음이 채워졌다. 그 마음에 해결되지 않은 구멍이 예수님이라는 분으로 메워졌다.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의 인생이 변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예수님과 관계가 형성되었다.  

 

5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래서 믿음은 사랑이다. 예수님과 관계가 있기에 그를 믿는다. 예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나를 있는 그대로 살아 있으라 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를 믿고 사랑한다.

우리는 모두가 바리새인이거나 반대로 간음한 여인이다. 어느정도는 바리새인이고 어느정도는 간음한 여인이다. 우리의 그 공허한 자리를 채우려고 한 자리를 예수님께 내어드리라. 그분은 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우리게 주실 것이다.

 

결론

 

사랑의 자유로 행하자. 아들로 딸로서 행하자. 율법을 채우려고하는 어리석음을 따르지도 말고 / 쾌락을 채우려는 미련함을 따르지도 말자.

뭐든 좋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이끄는 대로 행하라.
그리고 준비하자. 이제 실력을 갖추자. 능력을 갖추자. 애송이가 되지 말자.

이런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그는 예배를 사모한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다. 더 깊이. 그리고 그에게는 거룩한 열정이 있다. 거룩한 헌신이 있다.

 

그런 사람은 멋있다. 아름답다. 명예롭다. 영광스럽다. 그 옆에 가면 그것에 전염된다.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우리 가운데 그 사람으로 나타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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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Ἐγένετο τότε τὰ ἐγκαίνια 

           ἐν τοῖς Ἱεροσολύμοις,

        χειμὼν ἦν,

 23     καὶ περιεπάτει ὁ Ἰησοῦς 

              ἐν τῷ ἱερῷ ἐν τῇ στοᾷ τοῦ Σολομῶνος.

 

 24  ἐκύκλωσαν οὖν αὐτὸν οἱ Ἰουδαῖοι 

     καὶ ἔλεγον αὐτῷ·

            ἕως πότε τὴν ψυχὴν ἡμῶν αἴρεις; εἰ σὺ εἶ ὁ χριστός, εἰπὲ ἡμῖν παρρησίᾳ.

 25  ἀπεκρίθη αὐτοῖς ὁ Ἰησοῦς·

       εἶπον ὑμῖν καὶ οὐ πιστεύετε·

       τὰ ἔργα ἃ ἐγὼ ποιῶ ἐν τῷ ὀνόματι τοῦ πατρός μου ταῦτα μαρτυρεῖ περὶ ἐμοῦ·

 26  ἀλλ᾽ ὑμεῖς οὐ πιστεύετε, ὅτι οὐκ ἐστὲ ἐκ τῶν προβάτων τῶν ἐμῶν.

 

 27  τὰ πρόβατα τὰ ἐμὰ τῆς φωνῆς μου ἀκούουσιν, 

     κἀγὼ γινώσκω αὐτὰ

     καὶ ἀκολουθοῦσίν μοι,

 28  κἀγὼ δίδωμι αὐτοῖς ζωὴν αἰώνιον

     καὶ οὐ μὴ ἀπόλωνται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καὶ οὐχ ἁρπάσει τις αὐτὰ ἐκ τῆς χειρός μου.

 (Jn. 10:22-28 BGT)

 22 그곳에 예루살렘의 축제일이 왔다.

그때는 겨울이었고

 

 23 그리고 예수께서 성전 안의 솔로몬의 성곽으로 걷고 계셨다.

 

  24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를 둘러쌌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언제까지 우리의 영을 의혹하는가?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이라면, 우리에게 거리낌 없이 말하라.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했다.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고 있다: 내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내가 행한 그 바로 그 일이 나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나의 것인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나의 양들은 나의 음성을 그들이 듣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따르고 있다,

 28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놓지 않을 것이다 나의 손에서.

제목 : 주의 양이라면

 

청중의 상황 :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에 대해서 목회자나 직분자 부모 선생 등의 말을 듣지 않는 것. 말씀에 대한 권위가 세워지지 않는 것. 그리고 말씀에 대해서 관심 없는 것.

한편으로는 그런 이유로 갈등을 피하기 위해 말씀을 가진 자들이 권위자들이 말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 힘드니까.

 

본문의 중심 사상

자신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이에 대해 신성모독으로 여기는 유대인들.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시는 일을 보라 그리고 믿으라 하심.

 

설교의 구조 (틀 의미론)

듣지 않는다   듣는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 표적을
보러 따르러 오다!
 
돌로 치려 한다   듣고 알고 따른다

 

하강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는 모두 양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리 연약한 자라고 하더라도 임재해 있다.

하지만 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듣고자 하는 의지가 없기에 말씀이 들리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반전

예수님은 선한 일을 하셨다. 그가 일으키신 모든 표적은 그가 선한 일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낸다. 구원이 예수께 있다.

말씀에는 항상 두 가지 반응이 있는데 유대인처럼 돌로 치려하고 거부하거나 요단강 저편의  사람들처럼 예수를 믿는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예수를 증거하는 말씀을 통해 경험한다. 나는 양이 되는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양으로 부름 받는다. 그의 말이 들리게 되고 그가 나를 아시게 되고 나는 그를 따르게 된다.

 

상승

성도는 신앙을 고백하는 자로서 예수를 믿는 자이다. 이미 확실한 예수님의 양이다. 본문의 거부자들이 아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선한 일을 경험한 사람은 그의 말씀을 듣는다.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세상을 이기며 승리한다.

서론 (본문 설명)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을 읽겠습니다.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수전절이라는 명절에 예수님께서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셨습니다. 명절이니까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 중에도 솔로몬 행각은 성전 바깥에 있던 곳으로 지붕이 있어서 시원한 그늘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랍비들, 경건한 사람들, 학식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토론의 장이 되던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는데 유대인 무리들이 예수님을 둘러 싸고 묻습니다. 솔로몬 행각에서 일어나던 율법 토론을 하려는 듯, 질문을 쏟아 냅니다.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왜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느냐 그리스도이시면 말하십시오 하고 묻습니다. 이 사람들의 질문에는 가시가 박혀 있습니다. 질문이 아니라 공격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민족의 구원자가 맞느냐라는 물음이 아니라 - 그것도 아닌데 왜 설치고 다니느냐. 하는 공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을 간파하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했다. 너희 질문에 이미 답했다.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미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냐. 말한 것만이 아니라 내가 행한 일들이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한다.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다고 말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 질문하는 유대인들이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들과는 대비되는 내 양이 어떤 자들인지 설명해주십니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양에 대해서 내 음성을 듣고 나도 그 양들을 알고 그 양들은 나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다 라고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양의 특성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영상 시청>

 

이 아저씨의 음성을 듣고 안개 속에서 보이지 않던 양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그 주인 곁으로 옵니다. 이게 양의 특성입니다. 양은 주인의 음성을 기억하고 분별합니다. 자기 주인이 아닌 음성은 듣고 쫓아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음성은 기억하고 그 음성에만 따라 오는 것이 양입니다.

 

하강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는 이 시간 이 장소에 나와서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부모님이 오라고 했던, 친구가 오라고 했던, 목사님이 오라고 했던, 자기가 오고 싶어서 왔던 어찌하든지간에 모두 다르지만 우리 모두는 예배에 나아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따라서 이 예배의 자리에 나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양식을 받아 먹기 위해서 그 언덕을 내려 온 것입니다.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늘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인정하든 안하든,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끄심대로 나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방금 봤던 그런 양들처럼 멀리 산 속에서 안개가 짙어서 멀리 떨어져 있다가도 주인의 음성이 들리면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면 뛰어서 신나게 마치 강아치처럼 보였는데 그런 식으로 그 언덕을 내려 오고 있습니까? 예배를 예로 들면 와 신난다. 내일은 주일이다. 기대하는 신나는 기쁜 마음으로 달려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양들처럼 정말로 강아지처럼 뛰어서 예수님 앞에 그분의 말씀을 듣고 즉각적으로 뛰어오고 있습니까?

질문. 우리가 양인 것은 맞는데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데 왜 항상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냐는 겁니다.

 

예화)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학생 때에 인도를 여행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와 함께 갔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역사를 공부하신 분이었습니다. 함께 인도에 있는 문화 유적지를 갔습니다. 그곳에는 아주 화려한 힌두교 사원이었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아 멋지다. 와 화려하다. 이거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지나갑니다. 어떤 친구들은 왜 이런데 데려와서 재미없게 지루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를 공부하고 종교를 공부한 선생님은 그런 사원에 갈 때마다 얼마나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카메라를 들고 뛰어다닙니다. 그러면서 그 건축물의 양식이 그 건축물과 그림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조각상은 왜 그런 위치에서 그런 손 모양을 하고 있는지 왜 여기에선 코끼리가 등장하는지. 자기가 책에서 봤던 내용들이 이렇게나 자세하고 극적으로 묘사되어있는 장소에 가니까 그것을 살펴보면서 아주 신이 나신 겁니다. 저도 그분의 설명을 들으면서 덩달아 인도의 그런 종교나 신화 역사에 대해 건축물에 녹아져 있는 것들을 보면서 재미와 흥분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박물관이나 유적지에 가면 항상 그 건축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먼저 공부해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똑 같은 건물에 들어가서 사진도 찍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선생님만 그 건물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건물의 가치를 올바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사실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계속해서 우리에게 보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열망이 없습니다. 밤길을 산책하다 보면 수많은 소리들이 들립니다. 벌레소리 바람소리 지나가는 차 소리. 그런데 평상시에는 그 소리들이 들리지 않습니다. 내게 들려진 소리이지만 그 소리보다 다른 소리를 듣고 신경쓰지 않고 관심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찌우고 우리를 더 성장케 하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시는데 그 음성을 듣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은 듣는 것과 따르는 것을 긴밀하게 연결시키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생각이 없다면 그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혹은 들린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이 진짜 예수님의 말씀인지 의심하게 됩니다. 평가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소음처럼 여겨지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주의 음성을 소음처럼 여기는 사람. 주의 음성이 들렸을 때에 그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요?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순종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따르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은 예수님이 직접 분명하게 말씀하시더라도 예수님께 미쳤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음성이 소음입니까? 예수님의 음성이 잡음입니까?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혹시나 귀를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 나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하는 것이 싫어서 그 말을 전하는 자를 미워하거나 깍아 내리거나 미쳤다고 하거나 오늘 말씀의 유대인들과 같이 돌로 치려하는 공격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에게 주의 말씀. 옳으신 뜻. 의로운 것들을 말하는 자에게 분노와 미움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를 듣지 않는 시대. 의로운 것과 올바른 것에 대해 듣지 않는 시대로 몰아갑니다. 나 자신이 옳고 나 스스로가 기준이 되는 시대로 몰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당하고 정당하고 바람직하고 의롭고 자유로운 것이라고 매력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의 음성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음성도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우리 공동체에는 주의 음성이 들려지고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서 그 음성이 매 주마다 매일 마다 들려지고는 있는데 혹시나 그것이 마치 잡음이나 심지어 소음과 같이 경솔히 여겨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의 말씀을 따르고 싶어합니까?

그냥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니까. 묵상해야 하니까. 시키니까 안할 수는 없고.

예배에는 어떻습니까? 예배 시간이 즐겁고 값지고 귀하고 감격스럽습니까? 예배 버티기?

반전

 

예수님의 말씀이 전달되었을 때에 반드시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하나는 방금 살펴보았던 유대인들과 같은 반응입니다. 이들의 반응은 거부이자 무시이자 공격입니다.

그런데 10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유대인들과 전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40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침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이 유대인들을 피해 요단강 저편으로 멀리 가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많이 믿게 됩니다.

 

이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 사람들은 멀리 계신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이 요단 저편 베다니라는 뜻은 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지명이 가난자의 집이라니요. 가장 가난한 사람들.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든 곳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예수님을 갈구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께 먹기를 구하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리고 그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따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3절 산상수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내가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내게 자랑할만한 것이 없다. 내가 살면서 이룬 것도 없다. 내 몸이 병들어서 더 이상 힘있게 살지도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수전절에 예루살렘에 모여서 토론을 벌이던 율법학자들 랍비들과는 다르게 배우지도 못했고 가난하고 신분도 천하고 차별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음성이 선명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그분을 그리스도로서 나의 주인으로서 믿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양이라면 나의 주인께 모두 다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나의 생명까지도 목숨까지도 다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러나요? 내가 가진 게 없어서 내 생명도 예수님만이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실 수 있다는 그 마음. 완전히 완벽하게 예수님만 의지하는 그 마음. 가난하고 갈급한 마음. 나는 예수님이 아니면 비참한 사람이라는 마음. 이게 예수님을 향해 있어야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고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는 정말 참된 양인 것입니다. 이 마음에 두 그룹이 분명히 갈리는 포인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솔로몬 행각의 부유한 사람입니까? 베다니의 비참의 집 사람입니까?

상승

 

예수님은 이 양들에게만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이 가난한 자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이 생명은 영원히 멸망할 수 없는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손이 이 사람들을 강하게 붙잡으셔서 그 어떤 것도 이 예수님의 손에서 떨어져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이 양들에게만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양들을 먹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양들에게 평안함을 주십니다. 보호하십니다.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적용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정말로 내가 주의 양이며, 주께서 내게 영생을 주시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심을 믿으십니까?

우리 회복합시다. 우리 모두는 주의 음성을 듣고 이곳에 모여온 예수님의 양들입니다.

그런데.

 

1) 회개, 간구

내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더라도 듣고 있더라도 들을 마음 자체가 없습니다.

내 마음이 가난하지 않습니다. 비참의 집 사람이 아니라 솔로몬 행각 사람입니다. 내가 양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는 없는데 이 양이 좀 잘못된 양입니다. 주인의 음성에 뛰어오지 않습니다. 주인을 거부하는 양입니다. 병들어버린, 감각이 마비되어버린 양입니다. 예수님 내 마음을 내 심령을 고쳐주십시오. 예수님 나를 고쳐주세요. 우리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수많은 예수님의 음성들 - 그것들을 내가 무시하고 오늘도 살아갑니다. 이번주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예수님의 양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나를 지금도 강하게 붙잡으시고 어떤 것에서도 놓지 않으시는 예수님. 내가 아무리 음성을 듣지 않는 제 멋대로인 양이더라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가장 선하시고 인내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2) 결단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에 그쳐서는 슬퍼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결단해야 합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지금부터 오늘부터 이 순간부터는 주님 말씀하시면 듣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내가 정말 양으로서 주인을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결단하시기 축복합니다.

 

우리가 다 맡길 수 있는 이유. 순종할 수 있는 이유. 그 순종의 내용이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닐수도 있고,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내가 정말 하기 싫고 거리끼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음성을 듣기도 전에 먼저 말씀하신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주께 드릴 수 있는. 목숨까지도 주께 드릴 수 있는 이유는 뭔가요?

 예수님이 이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목자이신 분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이용해먹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자신이 이용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창조자이신 그분께서 피조물을 위해 사기 당하시고 이용 당하시고 죽임 당하십니다.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 죽겠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나의 의지는 죽었습니다. 주 뜻대로 하소서. 주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리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을 하시든지간에 듣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3) 기도

이 믿음을 주시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 믿음은 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고후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의 영광, 주의 생명의 영광을 알게하여 주소서,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 믿음을 주소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게 하소서.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함께 기도하는 시간. 가정이 함께 기도하는 시간.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밀한 비밀을 얻게 됩니다. 특별히 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도에 대해서 결단하십시오. 시간과 장소를 결단하십시오. 방법을 결단하십시오. 그것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십시오.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주실 것입니다.

내 마음을 비추실 수 있도록 예수님의 얼굴 그 영광을 볼 수 있도록 그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기도의 시간을 예수님께 드리겠습니다.

 

마무리

예수님의 음성을 따르고자 한다면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베다니의 사람처럼 되고 싶습니다. 솔로몬 행각의 유대인랍비들처럼 되고 싶지 않습니다. 언덕을 강아지처럼 뛰어 내려오는 주인을 온전히 신뢰하는 기뻐하는 그 양떼들처럼 나도 예수님의 착한 양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이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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