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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영광의 상실

 

서론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 급하게 빠르게 가든 천천히 가서 빙빙 돌아가서 가든 목적지인 서울에만 가면 상관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서울에 가야 한다는 목적지가 있으면 모로가든 천천히 가든 놀다가 가든 자가 가든 큰 문제가 안된다고 하는데

서울로 가야 하는지 광주에 가야 하는지 인천에 가야 하는지 대구에 가야 하는지 장성에 가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을 보면 이 시대의 모습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나마 모로 가도 어디에 가야 하는지 아는 사람의 삶은 그래도 괜찮다. 그래도 안심이 된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르니까 참 힘들다 절망스럽다.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몰라서 방황한다. 잘난사람 똑똑한 사람 현명한 사람 돈 많은 사람 건강한 사람 잘생긴 사람 많은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르는 채로 살게끔 한다. YOLO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여기에는 방향과 목적이 없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오늘 그냥 놀자.

어찌 보면 목적이 없는 삶에 대한 정직한 대답이 그런 쾌락주의일 것이다.

 

정말 큰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내가 모로가도 어디에 가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의 삶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그 목적지는 어떤 곳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고 이끌고자 하시는 것은 어디인가를 알지도 못하고 들어보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늘은 이 목적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눠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S.1 인간은 본래 영광스러운 존재였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은 23절에서 특이한 표현을 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니

사람이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되는가? 다른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하나?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죄를 범한 결과는 생명과 반대되는 개념인 죽음. 사망을 말한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서 특이하게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 하나님의 영광에 핵심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인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인가?

 

창세기의 태초에 죄를 범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어떤 존재인가? 그들은 죄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범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그들에게 부여된 기쁜 삶을 살았더라면 하나님께서 그 크신 영광을 허락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가리고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탓하며 거짓을 말한다.

 

아담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 타락 이후에도 한동안 처음 창조하신 아담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유지된다.

(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6: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노아 이전의 아담의 후손들에게 벌을 내리신다. 사람의 딸들을 보고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보면서 그들의 날이 백이십년, 수명의 단축을 말하신다.

하지만 지금의 기준에서 생각해보라. 120년의 수명이 짧은 수명이냐?

하나님은 인간의 수명이 굉장한 존재로 만드셨다. 창세기 5장의 족보를 보면 알 듯이 이들의 기대수명 평균 수명은 천년을 산다. 노아도 500살에 홍수를 맞는다.

 

대한민국의 기대수명 2020년 태어난 아기의 기대하는 수명은 평균 83.

 

대단하다고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인간에 비하면 그리고 그 인간의 상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천년을 사는 사람의 신체는 80년을 사는 사람의 신체와 매우 다를 것이다. 골격, 근육, 내장기관, 질병에 대한 면역력, 노화를 막는 호르몬, 유전자의 건강도.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인간은 엄청난 존재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창세기의 아담의 후손들은 단순히 몸만 건강하고 강력했겠는가? 몸은 인간이 지혜와 능력을 담는 기반이다.

성경은 가인에 대해서 말한다. 가인은 혼자 성을 쌓아 만든다. 가인의 자손들은 가축을 치는자, 음악과 예술을 창조한자 구리, 쇠 기구를 만드는자로 등장한다.

이들이 가진 지혜는 우리가 가진 지혜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5년만 뭔가를 집중해서 한다고 생각해보면 그것의 달인이 된다. 포크레인 기사들을 보면 감탄을 하게 되는데 아무리 길어봤자 20년 하고 그런다. 그 이후에는 눈이 잘 안보이고 해서 더 기술을 발전시키지도 못한다.

이 사람들은 천년을 건강히 강력하게 살면서 인간이 가진 지혜와 능력을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이 굉장한 수준으로 가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노아 이후에 인간은 완전히 탁월함을 잃어버린 존재인가? 아니다.

수명과 신체 능력이 줄어든 인간. 무력하지 않았다. 이들은 바벨탑을 만든다. 한데 모아서 세계제국을 만든다. 하나님을 대적한다.

인간이 신을 대적하는 국가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명과 신체 능력이 급감해도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드러낸다.

 

타락 후, 홍수 후의 인간이 대단하다면

홍수 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역사적으로 떠나기 전에는 어떠했겠는가?

타락 이전 아담의 능력은? 인간은 천년이 아니라 그 이상을 살았다.

하늘과 땅 바다를 경영하고 동물 식물 천체를 다스리는 보존에 참여하는 존재였다.

아담이 누리는 지혜, 아담의 능력, 신체적 강력함은 지금의 인간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보존은 더 강력함을 말한다. 아담은 아마도 신체적으로도 코끼리, 사자를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교정할 정도의 능력과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S2. 인간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

 

하지만 아담의 능력과 영광을 말하고 그것을 기리기 위해서 이 말씀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탁월함 능력은 우리가 이르러야 할 것이 아니다. 출발점에 불과하다.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를 아들에게 주신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영생이라는 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영생 :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더 구체적으로 이 영생은 뭐냐?

 

S2. 영생은 영원한 생명 정도가 아니다.

영생은 문자적으로만 말한다면 죽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개념으로 영생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탄의 속임수다.

죽음의 반대 정도의 생존 정도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생이다.

 

하지만 우리는 영생을 이렇게 생각한다. 단순히 죽지 않는 삶.

우리 나이가 50살 정도가 지나면 그때부터 노안이 온다. 무릎 관절. 어깨. 소화기관.

건강상의 활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건강을 걱정하게 되는 이유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건강이 나빠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건강을 완전히 잃어버린 삶에 소망이 있는가?

침대에서 누워 생활하는 것으로만 1020년을 사는게 행복한 삶인가?

영생이 아무런 활력과 기쁨과 의미도 없이 따분하고 지루하게 단순히 죽지 않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런 것이라면 그런 영생은 축복인가?

우리가 얻을 천국의 소망을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사탄은 우리의 생각을 곡해해서 천국에 대한 기대와 갈망을 앗아간다. 영생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주는 것이다.

 

어떤 철학자는 찰나의 순간의 아름다움을 쾌락을 기쁨과 정열을 위해서 온 생애를 바칠 수 있다고 말한다. 짧게 살아도 그 순간이 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천국에 가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천국이 그런 곳인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이 그런 것인가?

영생은 단순한 시간의 연장이 아니다. 그곳은 역동적이며 정열적이며 / 이 철학자가 말하는 바와 같은 그러한 최고의 순간들로 가득 찬 곳이 바로 천국이다. 그 철학자가 말하는 경험하는 것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열과 기쁨과 환희가 가득한 곳이 바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영생의 삶이다.

 

과학자들은 미래에 대해 예측하기를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일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영생은 어떤가? 천국은 어떤가?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수도 없는 우리의 사고를 뛰어넘는 전혀 알수도 없는 정도의 것들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여하시는 것이다.

 

S3. 영생은 예수님과의 연합이다.

영생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결국에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이끄신다. 우리를 이 영생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영생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이 영생을 볼 수 있다.

영생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 영육이 하나된 피조물을 통해서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그 영광 때문에 다메섹 도상에서 그것을 쳐다보다가 그 영광과 완전함에 눈이 부셔서 눈이 멀어버렸다. 우리에게 이 영광스러운 영생에 이르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 하나님만이 누리시는 그 특별한 영광. 하나님과의 결코 나누어질 수 없는 참된 연합으로 우리를 이끄시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하심은 이 영광으로 이끌기 위한 구원하심이다.

참 하나님을 아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를 위해서는 그분과의 연합이 필요하다.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 이해하는 것 정도는 아는 것이 아니다.

진짜 아는 것은 존재 자체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알기 위해서 그 사람과 대화하고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와 함께 살며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생활하는 것을 통해서 그를 알게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의 앎도 그분과 연합함을 통해서 안다.

그런데 그분이 영생의 영광을 가지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영광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는 것이다.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하나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S5. 그렇다면 예수님과 하나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분리되어 원수된 자들이 찬송하게 된다.

진실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분을 찬송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리게 된다. 하나님 영광이 이런 요소로 가득차다.

 

타락 전 타락 후의 모습이 아니다. -> 아담의 능력 정도가 아니다.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가진 정도의 것으로 하나님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영적 몸이 되고 인간 본성이 완전하게 되는 구속의 은총과 위엄 감사와 찬송이 가득한 교제와 앎이 일어날 계획을 창조부터 하신 것이고 / 우리 인식의 한계에서는 아직 표현할 수 없는 언어적 한계를 벗어난 그 엄청난 것들로서 우리를 연합시키시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죽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만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 말로 소망이다. 우리가 바라본 유일한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대이다. 우리는 이 영생을 믿는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다.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천국이 필요 없고 이 땅에서의 순간의 그 정열 기쁨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에는 어이없음을 느낀다. 불쌍함을 느낀다. 이런 소망이 있는데 이 소망을 얻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에 연민을 느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런 마음으로 이 땅에서 사역하신 것이다. 이 영생을 경험하시고 이 영생을 주시고자 설명시키고자 전파하시고자 하셨는데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만 아시는 것.

그래서 얼마나 열심을 가지고 그 천국 복음을 전하셨는가? 그럴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없다면 우리 안에 믿음이 소망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생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올 그 소망의 날을 영생의 날들을 연습하며 살아가는 것. 영광을 잃어버린, 영광을 상실해버린 상황에서 앞으로 얻게 될 그 영생을 바라보면서 그 영생의 삶을 그리며 기대하며 그것대로 살아갈 것을 연습해보는 것이 이 땅에서의 삶이다. 그래서 완전하지 않다. 실수 투성이고 실패한다. 하지만 그것에 좌절 할 필요가 절대 없다. 이건 연습이니까 우리가 영생을 바라보면서 시도해도 된다 도전해도 된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래서 실패해도 된다.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영원한 은총들을 다 누리게 하겠다. 다 주겠다는 전제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자이다.

 

심지어는 저 갓난 아이의 작은 믿음이라도/ 예수님 우편에 십자가에 달린 죄수와 같은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어떠한 상태와 관계 없이 이 영생의 소망을 믿는자에게, 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겠다고 그를 주로 고백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다 주시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아무런 댓가 없이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형언할 수 없는 특권이 있다. 하늘의 시민권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적용.1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께서 주시는 이 영생이 무엇인지, 마치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것처럼 살아간다.

그분과의 교제와 감각이 없는 세대로 들어간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싶다. 갈망이 있어야 한다.

아무 변화 없는 예배를 드린다면 주의 말씀을 접할 때에도 큐티를 할때에도 그러한 갈망이 없다면 영생의 삶에 대한 갈증이 없다면 그 사람은 소망이 없는 것.

하나님과 교제의 열망이 있는가? 그분을 더 알고자 하는 그분을 더 깨닫고자 하는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그것이 없다면 / 그것은 죽은 신앙이다.

 

그것은 오해하는 영생의 모습과 같이 단지 죽지 않는 생존 정도의 신앙일 뿐이다. 죽지 못해서 벅벅대며 살아가는 정도의 신앙. 져버릴 수는 없어서 지루함과 따분함과 체념 가운데 아무런 생동력과 생동감과 열정도 없이 / 차라리 죽는게 나은 상태의 신앙.

이것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말하나?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왜 입에서 토한다고 말하나? 신성모독이다. 영생을 모독하는 것이다.

영생을 아는 사람. 영생을 경험한 사람. 영생을 믿는 사람은 안 뜨거울 수가 없다. 실패하고 절망 가운데 잠시 어느 기간동안 어두움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삶은 정열로 가득 찰 수 밖에 없다. 그분을 향한 열정. 그분을 향한 사랑. 그분을 향한 기쁨. 그분을 향한 헌신으로 가득 차서 그분을 찬양하고 노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교제하는 것. 알기를 포기하는 세대.

이 참담한 시대. 진주를 값진 보화를 진흙탕에 쳐 박아두고서 / 썩은 고기를 먹으려 서로 다투는 시대. 이 불쌍한 시대 가운데 우리는 소망을 가진 자이다.

우리를 통해서 이 불쌍한 시대에 소망이 전해져야 한다. 이 불행한 시대 가운데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적용 2. 

이를 아는 자들은 기대하며 인내할 수 있다. 인내는 소망을 이룬다고 말한다. 

죽음이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우리 집에 가는 일이 죽음이다. 세상이 이런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다. 

 

적용 3.

이 갈망을 막는 이 소망을 막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죄이다.

죄는 조금만 있어도 하나님과 교제를 방해한다. 하나님께 돌리는 시선을 멈추게 한다. 우리가 배워 알게 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해 영생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멈추게 한다.

그러나 죄를 피하려는 이기려는 노력만 마음만 먹어도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내 안에 스며들어오는 은밀한 죄, 작은 죄들, 별거 아닌 죄악들을 심각하게 죄를 생각하라. 내 마음의 저의를 바라보라.

내 욕심 몇 개 더 챙기려고 내 순간적 쾌락을 더 늘리기 위해서 천지를 지으시고 영생을 주시는 분과의 교제를 멀리하겠느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함을 믿으며 그 소망 안에서 영원히 즐거워하는 우리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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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싸움을 싸우라 딤전1:15-20

 

Q. 선배에게 손절당한 이야기. 이런 일을 경험한다.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차이가 없는 시대인 것 같다. 왜 그런가? 교회를 다녀도 술 담배. 성적 문란. 탈취, 사기. 어디가서 교회 다니는 사람입니다 당당히 말하기가 참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예수를 믿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나?

 

S1. 복음을 만나지 못하면 자신을 헛되이 자랑한다.

E, 복음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을 남과 비교하면서 우위를 점하려고 한다.

코로나 기간 생긴 것 : 명품(21년도 7323년도 88천억)/ 외제차(20년 대비 17% 21103598/ 사교육비 15172123.4/ 힙합의 플랙스 - 나 고생한거 재능, , , , 인맥, 건물/ 한국 자살률 2113,352/ 10만명당 26

V. 그런데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헛된 자랑에 빠져있다. 자신을 뽐내고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추앙하고 우상화하고 따라간다. 별판 다른 것이 없다.

 

S2. 복음을 만나면 하나님을 자랑한다.

E. 하지만 복음을 정말로 만난 사람은 사람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 자랑의 자리에 하나님을 둔다.

A. 15절의 바울이 그러하다. 

죄인 중의 괴수다. 자신을 낮춘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17- 영원하신 왕 . 홀로 하나이신 분

V.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중심성이다. 하지만 복음이 비추어지면 자기중심의 시선에서 나를 정확히 바라보게 된다. 나를 죄인으로 소망 없음으로 낮추고 자랑의 자리에 하나님을 두게 된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한다.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자랑하는가? 1) 영원하신 분 2) 유일하신 분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다르게 썩지 않으신 영원하신 분이다. 그분은 다른 종교와 다르게 오직 유일하심을 선포하길 주저하지 말라. 선포하고 있는가? 고백하는가?

A. 이 하나님을 고백한다면 6:4을 고백하라 -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죄인이라 회개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라. 자신을 혹은 사람을 찬양의 자리로 두지 말라.

 

S3. 복음을 만나면 선한 싸움을 싸운다.

E. 기독교신앙은 복음에 감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복음을 가지고 세상과 싸울 것을 요청한다.

A. 18절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 영적 전쟁을 지금 지속적으로 계속 해야 한다.

V.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어야 한다. 지금 싸우고 있는가? 무엇과 싸워야 하는가? 나의 옛 자아와 싸워야 한다. 세상의 조류와 싸워야 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의 자랑과 싸우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백하지 않는 세상의 사상과 싸워야 한다. 끊임없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나의 옛 자아.

A. 이전의 자기중심성의 싸움에서 선한 싸움으로 나아가라 - 싸움을 하고 있는가? 포기하지 말라.

 

S4. 복음으로 싸우면 믿음과 착한 양심이 세워진다.

선한 싸움을 싸울 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E.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일하신다. 그를 변화시키신다. 그에게 믿음과 양심을 세워주신다.

A.  19절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이것이 결과로 주어진다. 이 믿음이 있는가?

V. 그러나 반대로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으면 믿음과 양심이 파산하게 된다. 믿음에 틈이 생기면 중요한 때에 전혀 발휘하지 못한다.

요일5:4 -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 믿음 자체가 흔들리는데

평안할 때는 드러나지 않는다. 믿음이 사용되지 않는다.

김익두의 예화 예전의 죽은 자아와 싸우라. - 인민군에 순교 이유는 평소 싸워 믿음을 세웠다. 양심을 세웠다. 그래서 결정적 순간에 발휘 가능했다.

우리의 양심이 아직 살아 있는가? 끊임없이 말하는데 그 말을 듣지 않으면 양심은 저멀리간다.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는 이 싸움에서 파선했다. 알렉산더:해를 끼치는 자/ 후메네오:악성 종양. 싸우지 않았기에-믿음이 변질되고 양심이 없어져서.

교회가 긁어내야만 하는 악성 종양이 되지 말아달라 제발.

A. 지금 선한 싸움을 싸우라 - 거창하고 시대적인 것을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예배를 회복하라. 회개, 진정찬양, 대표기도, 설교, 헌금. 주일성수

은혜를 받으면 싸울 수 있다.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디모데전서 1:15-20

 

S1. 복음을 만나지 못하면 자신을 헛되이 자랑한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다 자신의 잘남을 말하기에 급급하다. 자기가 얼마나 멋지게 살아왔고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고 얼마나 노력을 많이 했고 얼마나 똑똑한지 성실한지 자랑한다. 건물을 몇채 가지고 있는지 재산이 얼마인지 얼마나 멋진 경험을 했는지 자랑한다.

 명품 시장은 코로나 기간에 엄청난 성장을 했다. 21년도에 73천억 2년뒤 23년에는 88천억 정도로 전망되고 있다. 전체적인 경제는 코로나로 망해가는 명품 시장은 성장한다. 벤츠, BMW 등의 수입차는 20년 대비 17프로가 성장했다. 21년도에 총 103598대를 팔았다. 사교육 비용은 201517조원 202123.4조원 학생들 수는 계속 감소하는데 사교육 비용은 계속 증가한다.

 요즘 힙합이 유행하다. 힙합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힙합을 듣다 보면 이런 현상의 정답을 알려주는 듯 하다. 유명한 노래들의 상당수의 가사들이 자기가 얼마나 잘났는지 자기가 이 위치까지 오는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자신이 얼마나 돈이 많은지 좋은 차가 있는지를 자랑하는 것들이다. 이것을 플랙스라고 말하고 열광한다.

옷을 왜 입나? 좋은 차를 왜 타나? 좋은 직장을 왜 들어가려고 하나? 좋은 대학을 왜 들어가려고 하나? 결국엔 더 잘났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남들보다 더 좋고 더 낫고 더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영광을 받고 싶은 것이다. 지금 시대만 그러한가? 아니다. 세상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잘남을 강조하며 나아간다. 자신이 영광받고 추앙받아야 하며 남보다 더 높아야 하며 우러러봄을 받고자 한다.

 

 

S2. 복음을 만나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15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은 뭐라고 말하나?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세상은 자신의 잘남과 영광을 말하지만 바울은 겸손히 말한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겸손하는 척이 아니라 정말 겸손이 생겨난 것이다.

 

사람의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자기 중심성이다. 사람들은 누구든지간에 가르치지 않아도 모든 일을 자기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바라본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지나치게 자기만 보아서 자기에 함몰된다.

그런데 복음이 그 마음을 비추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자기를 돌아보게 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많은 일을 내게 행했는지를 보게 되고, 자기 자신을 보는 것에만 함몰된 눈이 자기 자신을 정말로 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추악한 자이구나. 나에게서는 자랑한만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 내가 아무리 나를 치장하고 높이기 위해서 명품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집을 가져도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를 바라보는 다른 시선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되는가 나 자신에게 함몰된 시선이 이제는 밖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 눈이 자기에게서 떨어져서 그 눈을 통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이웃들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전에는 이웃은 나를 위한 도구일 뿐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복음의 빛이 들어오게 되면 그제서야 이웃들이 내 삶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나의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고민하게 되는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또한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가?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는 삶이 우리 삶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만 합당한 것이 영광과 존귀와 찬양이다. 사람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기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면서 내가 그 영광을 받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죄의 특징과 결과이다. 사람은 영광과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긍휼이 여기고 사랑하고 아끼고 불쌍히 여기는 대상이다. 찬사와 높임을 받을 만한 것은 합당하지 않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합당한 것이다.

 세상은 끝없이 사람에 대한 찬사와 그 찬사를 받은 사람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때에 그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하다. 사람을 높이고 찬사를 보내고 그 기대를 져버리면 미워하고 분노하고 정죄하고 공격한다. 하지만 신자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세상을 어떻게 사는가? 사람들이 훌륭하더라도 그들이 우리와 같은 한계가 없는 훌륭하기만 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모태로부터 죄 중에 태어났고 깨어진 부분을 갖고 있기에 비판하고 정죄함으로 끝나지 않고 긍휼히 여기고 지지해주고 함께 슬퍼하고 그 사람의 유익과 덕을 구하는 다른 눈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께만 영광이 합당하고 그분만 바르게 높일 때 우리는 사람을 바르게 사랑하고 사람을 바르게 아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배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 가족. 그 가족들에게 어떻게 대하는가? 그들을 하나님께만 두어야 할 영광의 자리로 놓아서는 안될 것이다. 아내와 남편이 하나님이 계실 자리 영광을 받을 자리에 놓일 때 나도 다치고 상대방도 다치게 된다. 자녀들이 주님이 계실 자리에 있으면 둘 다 다치게 된다.

 영광을 하나님께가 아니라 다른 인간에게 돌리고, 스스로가 하나님인척 하고 하나님 한분에게만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인간의 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흉악한 죄를 지어야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교활하고도 근본적인 죄의 모습이 이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것을 간과하며 살아간다. 영광은 하나님 한 분에게만 합당하고 사람은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고 아끼고 지지하고 붙들어 주어야 하는 불쌍한 존재들이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때 사람은 가장 아름답고 합당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 한 분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소개하는가? 사람이 아니라 그분께만 영광을 돌려야 하는게 합당한데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가? 우리의 감사, 헌신, 찬양을 다 드려도 부족함 뿐인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자리야말로 땅에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최고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고백하는 현장이 예배이다. 그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17절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 지어다. 아멘

 

바울은 하나님을 두가지로 설명한다. (1) 영원하시고, (2) 유일하신 하나님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온 세상에 모든 것들은 썩어 없어진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 한분만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영원 전부터 영원하도록 존재하시고 이렇게 모든 것이 생성과 사라짐과 죽음의 썩음으로 반복되는 세상에서 그 질서를 깨트리시고 그 위에 계신 유일하신 영원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영원하시기에 그분의 영생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

 세상은 어떤가? 모든 사람들이 다 썩어 없어진다. 모두가 나이를 먹는다. 어지간히 건강해도 어지간이 아름답고 잘생겨도 그 아름다움을 붙들 수 없다. 이를 붙들어두려고 의학이 발전하고 화장품이 발달하지만 조금 늦출 뿐이지 절대로 붙들 수 없다. 밖은 화려하게 해도 속은 완전히 문드러지고 썩어간다. 사람은 아무리 출중해도 때가 되면 다 시들고 없어진다. 우리 교회의 어린 아이들. 3-4살 되는 아이들 애기 피부를 보라 너무나 보드랍고 깨끗하다. 그런데 10년만 지나보라. 그들의 이마에 여드름이 생길 것이다. 조금 더 지나보라.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흉터와 주름들이 가득해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썩어 없어질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영원 전부터 변함 없이 진실하고 우리를 향한 사랑과 긍휼이 바뀌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께 영광과 찬양을 오직 올려드리는 것이다.

 

 또한 영원하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신 분이시다. 많은 신적 존재가 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가시적인 손에 잡히는 모양으로 드러내려고 한다. 불교는 불상으로, 이슬람은 마호메트로, 유교는 조상들의 위패나 묘자리들로 자기 나름대로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섬기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서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어 나타내지 말라고 말하셨다. 그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알 수 없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알고 느끼는 분이라고 우리는 고백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성령과 생명의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 한분께만 영광이 합당함을 알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세상에 온갖 종류의 신들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오직 우리가 섬기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분이시다.

 세상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시고 예수님만이 유일하신 구원이시다고 말하면 싫어한다. 미워한다. 우리를 편협하다고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에게 무엇이라고 고백하는가? 우리는 그러한 미움을 받는 것을 오히려 환영한다. 우리는 구원을 위한 다른 길이 있다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외에 다른 분이 있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세상이 원하는 그런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절대로 이 말을 타협할 수 없다. 하나님 한분만이 이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그분께만 영광을 올려드린다. 그분만이 영원하시고 하나이신 분이시다.

 

신명기 64절은 분명히 말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백한다면 그분을 모든 마음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있는가? 집중력 있게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내고 그 중심에 하나님과 통하는 그 태도로 기도하고 예배하고 있는가?

 예배와 찬양과 경배가 예배의 현장에서와 기도의 시간에서만이 아니라 그 한 분만이 모든 현장에서도 다 받으실만한 하나님이심을 영광과 존귀와 찬양이 그분께만 합당함을 알고 우리의 마음을 쏟지 못하게 하는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분께 중심을 드리는 일에 실패하지 않아야 할것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영광과 찬양과 감격의 대상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S3. 복음을 만나면 선한 싸움을 싸운다.

 여러분 이 복음을 고백하는가? 하나님께만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가?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이 고백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렇게 영광의 하나님을 복음을 설명하고 나서 제자 디모데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무엇을 당부하고 있는가?

 

18절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하나님의 영광만을 말하고 끝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은혜와 감격만을 말하고 끝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그 이후에도 싸움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그 시간이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고백하는 그 감격이 있다면 우리 자신에게 쏟아놓았던 자기 중심성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새로운 시각을 주셨음을 고백한다면 우리에게는 치열하고도 혹독한 영적 싸움. 원문으로 말하면 전쟁이 남아 있다고 바울은 말하는 것이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 복음의 빛이 비춰지기 전에 했던 싸움은 무엇이냐? 항상 상대를 탓한다. 항상 상대를 사랑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정당화시킨다. 저 사람은 사랑할만한 사람이 아니고  너무 어렵고 예민하고 날카롭고 저렇고 이렇고 하면서 늘 우리의 안락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주님의 복음으로 나와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것을 알고 나서 이제는 나를 깨뜨리는 싸움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전에는 나를 위해서 상대를 깨뜨렸다면 항상 타인을 정죄하는 것에 부지런한 삶이었는데 이제는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를 깨뜨리는 선한 싸움을 싸우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나쁜 싸움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 물어뜯고 자기 중심성을 위해서 싸우는 나쁜 싸움이 아니라 선한 싸움을 해야 한다. 하나님 한 분을 영광스럽게 하고 바른 경배와 예배를 드리고 싶어하는 선한 싸움을 해야 한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기 위한 선한 싸움. 목적이 방법이 바른 선한 싸움을 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가? 그렇다면 여러분 싸우고 있는가? 끝없이 어리석은 자아를 깨뜨리고 이렇게 말 듣지 않는 자신의 몸을 멍이 들면서 때려가면서 진리 앞에 순종하고 싶은 삶을 살고 싶어하는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삶. 결정적인 싸움은 예수께서 싸우셨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남은 싸움을 싸워나가는 그 일이 우리 삶의 본질이다. 하지만 교회가 싸움을 멈추고 있지 않는가. 힙합이 말하는 플랙스가 말하는 것처럼 세상 가운데 잘 되기만을 남보다 비교우위를 점하고 뽐내기만 바라고 있지 않은가. 선한 싸움을 싸워야만 하는데 싸우기를 멈추고 그저 윤택하게 좋은 직장 좋은 밥 좋은 차 좋은 학교 좋은 미래 위해서 남들에게 안 꿀리고 인정받기 위해서 급급하게 불안해하면서 살아가는 것 아닌가.

 

 

S4. 복음을 만나 선한 싸움을 싸우면 믿음과 착한 양심이 세워진다.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19절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이 구절은 exon이라는 분사 구문으로 18절과 연결되어 있다. 선한 싸움을 싸울 때에 우리에게 두 가지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우면 (1) 믿음을 지키게 되며 (2) 착한 양심을 잘 보존하게 된다.

 하지만 선한 싸움을 싸울 때에 싸우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이 파선하게 된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교회 안에서 믿음의 삶을 살고 있다고 보이지만 그 뒤로는 믿음이 깨어진 것이다.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한데 믿음의 배에 물이 조금씩 세고 있다. 평상시에는 평온할때는 티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는 파선하는 것이다. 믿음이 사용되어야 할 때에 그 위기에 아무런 힘도 작동도 하지 못하는 믿음을 가진다. 그게 파선한 믿음의 특징이다. 평탄할 때는 괜찮을 수 있지만, 위기가 닥쳐올 때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에 믿음이 깨어져 있으니까 결정적 순간에 믿음을 쓰려고 하니까 평상시에 세워놓지 못한 믿음이 쓰여지지 않은 것이다. 여러분은 싸워야 할 선한 싸움을 싸울 때가 왔을 때에 그 싸움에 대비되어 준비되어 있는가? 사용되어야 할 중요한 순간에 다 파선한 것처럼 형태는 있지만 제대로 된 역할을 못하는 이유는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기 때문이지 않는가.

 아무도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예수의 공로를 의지하고 붙들고 신뢰함으로 구원에 들어가는 믿음으로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복된 자들이다. 그런데 이 믿음이 파선된다면 위기의 순간에 믿음이 파선된다면 나만이 아니라 이웃들의 생명도 가족들의 생명도 떠내려가는 것이다.

 

요한일서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믿음이 없이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믿음을 써서 세상의 방식을 극복해내고 분별해내고 이겨내야 하는 상황인데 이 믿음 자체가 깨져 있으니까 물이 세고 있으니까 배가 파선되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싸울 힘이 없이 그저 또 넘어지고 넘어진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엇이냐? “내가 아직 너무 약해서 이래. 요즘 세상이 원래 그래.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 요즘 시대가 이런 게 안 맞아.”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스스로를 계속해서 합리화하고 마는 것이다. 복음은 시대를 역행한다. 항상 시대와 상황과 맞지 않는 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복음을 미워한다. 복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미움과 상황의 어려움을 각오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을 지키는 자의 태도다.

 

 착한 양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양심은 정한 기준을 따라 행동하고 싶어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양심이 우리 안에서 하는 일이 무엇이냐? 양심이 우리 속에서 소리를 치고 있다. 그런데 양심에게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생명이 있는 자로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러면 안된다는 마음이 양심의 소리를 치고 있는데 그게 불편하다. 그래서 저쪽 한 구텅이에 한 구석의 방으로 숨겨 놓고 무시한다. 어떤 때에는 그 소리를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나는 더 이상 양심이 말하는대로 살고 싶지 않아 나는 세상이 하는대로 살거야 하면서 양심을 거스르는 삶을 아주 과감히 선택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점차 선한 양심이 무뎌지기 시작한다.

 우리의 양심은 어떠한가? 양심을 유지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날카롭게 예민하게 간직하고 보호하고 있는가? 이 시대는 이 지역은 어떠한가? 영광의 전직 군수들은 다 경제적인 문제로 감옥에 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고장에서 양심이 군민들에게는 있는가? 여러분은 어떠한가? 양심이 살아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과 양심을 지키고 있는가? 배려와 따뜻함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자기 논리에 사로잡혀서 자기를 관철 시키려는 어리석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께만 영광 올려 드린다고 하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있는가? 이곳에서라도 하나님의 복음을 말하는 이곳에 모인 사람이라도 어떻게든 착한 양심으로 시대를 다른 눈으로 보고 다른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면 이 지역에 이 세상에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어쩔 수 없다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렵다고 시대에 맞지 않다고 합리화하면서 살아간다면 점점 더 악한 양심의 시대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믿음에 파선하는 전쟁이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적극적으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때이다. 진리의 깃발을 가지고 진리의 검을 가지고 주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주님이 오셔서 이제 그만 쉬고 멈춰도 된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멈추지 않고 싸워야 한다. 우리가 이 싸움을 멈추면 이 악한 흐름을 멈춰야 할 방법이 없다.

 예화 - 김익두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그분은 깡패 출신의 목사였다. 그분은 깡패에서 회심하고 온 마음을 다해서 일제 강점기에 부흥사로서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였던 분이시다. 그의 말년에는 북한 황해도의 신천교회에서 사역하시면서 다들 남쪽으로 피신가는데 목사가 어떻게 성도들을 버리고 자기 살려고 떠나느냐 하시며 5명의 성도들과 교회를 지키셨다. 이들이 교회에 모여 함께 있을 때에 인민군이 갑자기 들어와 총을 쏴서 그 자리에서 순교하셨다.

 이분이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기 안에 예전 깡패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런 분노와 혈기와 미움이 들어올때에 이렇게 외치셨다고 한다. 야 이 죽은 김익두야 왜 나타나느냐! 지금은 너가 나타날 때가 아니다. 너는 죽었다! 깡패의 혈기가 나타날 때마다 김익두의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피를 흘리며 싸웠던 것이다. 평소에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온 분이시기에 그래서 이분은 결정적인 순간에 죽음이 믿음을 위협하는 순간에 죽음의 공포가 에워싸는 순간에 교회를 떠나지 않고 당당히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김익두처럼 믿음의 싸움 양심의 싸움을 하고 있는가?

 

 

 주목하여 보아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의 시대에도 그 교회 안에 착한 양심과 믿음을 거스르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선한 싸움이 아니라 악한 싸움을 싸운 사람들이었다.

 

1920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사탄에게 내주었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출교되었다는 말이다. 초대 교회에서부터 초창기부터 교회는 치리를 통해서 진리와 삶의 거룩을 보존해왔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진리와 삶에서 어긋남으로 공동체 밖으로 내어 보낸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진리와 삶의 모습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가? 이후 디모데후서에서도 발견되는 이들의 모습은 계속해서 진리를 불분명하게 말하며 삶의 모습 가운데 악한 양심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가 되었다. 바울은 이들을 악성 종양과 같다고 말한다.

 이들은 예수를 알고 그 영광을 알았지만 믿음의 물이 새서 결국 그 믿음이 파선하고 교회 가운데도 큰 해를 입히게 된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냐?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냐의 길을 가고 있는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가? 믿음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바울의 권면을 받고 있는 디모데의 길을 가고 있는가?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주님이 허락하실 때까지 믿음의 싸움을 신실히 싸우면서 착한 양심을 지키며 이 시대에 살리고 치료하는 삶이 되길 축복한다.

 

 한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이 영적 전쟁 싸움을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그 시작은 예배이다. 우리 이 예배를 회복하자.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이다. 예배가 무너지면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없다. 믿음을 양심을 지킬 수 없다. 이 예배에서부터 우리의 모습이 발견되어야 하고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이 나타나야 한다. 예배야 말로 영원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영광스러운 현장이다.

 예배에 늦지 말라. 예배를 준비하며 기도하라. 찬양 한 소절을 부를 때에 그 고백이 나의 고백으로 온 마음을 다해 드리라. 대표 기도하는 자는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준비하며, 그 기도를 드릴 때에 모든 사람들은 그 마음에 공감하고 함께 고백함으로 들리라. 말씀을 준비하는 자는 말할 것도 없고, 말씀을 듣는 그 순간에 설교자의 선포 가운데 참여하라. 말씀을 통한 은혜를 사모하라. 그 안에 하나 되어라. 선포의 말씀마다 아멘으로 화답하라. 무릎을 바르게 하고 손을 바르게 하고 허리를 세워라. 눈을 설교자의 눈과 마음에 두라. 하나님의 재정을 도둑질하지 말라. 헌금과 십일조에 있어서 정직하게 행하라 그것이 선한 싸움을 싸우게 하는 힘의 근원이 된다. 다른 날 싸우지 못하면 주일 하루만큼이라도 하나님께 드리라. 그러기 위해서 싸우라. 말씀이 올라온다. 그 말씀을 주중에 들어라. 그날 바로 올라온다.

 

 그리고 예배를 위해 싸움으로 우리의 양심과 믿음에 변화가 생겨나면 주께서 각자에게 맞는 싸움을 알려주시고 그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나아가면 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믿음에 파선하지 않고 축복된 싸움을 싸우는 우리가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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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 중심 사상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죄인 중에 괴수인 자신을 긍휼히 여겨 복음 사역자로 세우시는 복음의 은혜와 영광을 밝히면서 그로 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권면한다. 

 

신학 중심 사상

하나님은 신자의 전적 부패를 고백하게 하시고 여기부터 시작하여 긍휼과 회복을 허락심으로서 선한 싸움을 싸워가게 하신다.

 

청중 상황

1) 죄임됨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긍휼을 구하지 않는 상황 

2) 문제가 있어도 싸우려하지 않고 어떻게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 혹은 싸움 자체를 포기한 상황

3) 자기 삶이 이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공감하는 상황

 

설교 중심 상황

 

Q. 변화하고 성장하는 삶인가? 정체되고 오히려 퇴보하는 삶인가?  

S1. 복음을 만나지 못하면 나를 볼 수 없다.

A 바울도 그랬다. 그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 그러나 알지 못했다. 

E,V 복음을 만나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죄책감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고 살아가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막 산다. 바울처럼 알지 못하는 삶을 산다. 

죄책감없는 삶의 예시 - 김익두 안악골 호랑이 - 부잣집 출신 잘 자랐으나 아버지 돌아가시고 자수성사 하였으나 사기를 당해서 거지 꼴이 되어버림 - 매일 술을 마시고 깡패가 되어 온 마을을 괴롭히는. 술에 취해 할머니들이 물건을 파는 것들을 발길로 차고. 주막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술값을 내라고 하자 화를 내서 술상을 엎어버리고 소란을 피움. 사람들이 다들 그를 보면서 누가 저놈 죽여버리면 좋겠다. 저런 놈은 세상에 아무 필요 없는 놈이야! 

청년 김익두는 이런 상황에서도 죄책감에 빠지지 않고 사기 당한 분노로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어떤가? 김익두처럼 깽판을 치는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뭘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은 아닌가? 사람은 어떻게 자신을 발견하는가? 

 

 

S2. 복음을 만나면 나를 보게 된다. 

A 바울도 그랬다. 15절 - 예수를 만나게된 바울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E,V 예수님의 복음은 무엇이냐?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하시려고 아무것도 모르고 막 살아가는 김익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 예수님의 빛이 바울에게 비추어지니까 그안의 어두움이 드러난 것이다. 

예시 - 김익두는 깡패생활을 하다가 서양 선교사를 만나 전도지를 보게 된다. / 인생이란 무엇이냐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이 꽃과 같으나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 / 며칠후 친구가 선교사가 와서 부흥회를 하니 같이 가보자고 했다. 소안론 선교사가 예수를 전하였다.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되었다. 

김익두는 복음을 만나자 자신의 죄가 깨달아지는 것이다. 전에는 주막에서 횡패를 부리던 할머니를 걷어차던 상관 없던 사람이었지만 이제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의 죄임을 처절히 자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 안에 빛이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그 빛 때문에 내가 죄인임을 말할 수밖에없게 된 것이다. 소안론 선교사는 기도해주었다. /하나님이여 죄인이었던 김익두를 용서해주시고 앞으로 하나님의 귀한 종이 되게 해주십시요 불의 사자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 

A  여러분에게 이러한 회개의 기도가 있느냐? 김익두와 같이 처절히 나의 삶을 비추어 용서하옵소서. 하고 있는가? 어리던 나이가 많던 죄가 많던 적던 그게 상관이 아니다. 죄가 있는데 빛이 없어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냄새나는 오물들이 가득 한데 김익두의 모습과 같이 보지 못하는 것이다. 회개하라. 예수를 믿으라. 성령님의 조명 빛을 받으라. 

 

 

S3. 복음을 만나면 나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된다. 그리고 찬양하게 된다. 

A. 바울도 그랬다. 바울은 나를 보게 된 이후에 깨닫는다. 16절 내가 나된 이유는 예수님이 오래 참아주신 것이구나 긍휼을 주신 것으로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구나. 바울을 이 감격에 휩싸여 17절의 감탄을 하게 된다. 영원하신왕 썩지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E,V,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복음으로 내가 왜 존재하는지를 알게 된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하고 죄악 가운데 행할 때에 예수님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고 계심에도 오래 참고 계셨구나. 지금도 나를 참고 계시는구나 하는 그 마음에 우리의 속이 가득 찬 감격과 송구함으로 터져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백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 찬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A. 이 감격이 예배의 본질이다.  주의 보좌로 나아갈때에 찬양의 예시. 자격없는 내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예배합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시 - 김익두는 이후  자신을 위한 장례식을 열었다. 사람들에게 김익두가 죽었다고 장례식에 참여해달라는 부고장을 돌렸다. 사람들이 와서 김익두가 죽었다니 너무 기쁘다고 행복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익두가 나타난 것이다. /여러분 제 장례식에 오셔서 감사합니다. 과거의 깡패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저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 태어난 김익두입니다. 그동안 저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 우리가 예배할 때에 찬양할 때에 바울이 하고 있는 그 감격이 터져 나오는가? 김익두와 같은 나는 죽었습니다! 하지만 수님이 나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날 살리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는 고백으로 예배드릴 때에 기도할 때에 그 감격이 터져나오는가? 봉사하고 섬길 때에 그것으로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을 더욱 깊이 묵상하라. 그분이 나를 얼마나 오래 참아주시는지를 다시 고백하라. 회개하라 성령의 조명을 받으라. 

 

S3. 복음을 만나면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다. 

A. 바울과 디모데가 그랬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이 교훈으로 이 마음으로 지도한다. 계속해서 명령한다. 선한 싸움을 싸우라. 이 싸움의 원어적 의미는 전쟁에 나서는 전투를 의미한다. 군대를 의미한다. 전쟁을 계속해서 지속하라는 것이다. 

무엇으로 싸우는가?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다. 

E,V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내가 전쟁 중의 병사임을 놓친다. 내가 전쟁하는 병사. 나를 이 복음에서 떨어뜨려 놓으려는 이 감격에서 이 고백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려는 악한 영적 세력과 대립하는 중임을 잊게 만든다. 

후메네오와 알렉산더가 나타난다. 이들은 원래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믿음을 잃어버렸다. 양심을 잃어버렸다. 한번 복음의 은혜를 맛보고서도 믿음을 져버린 것이다.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가? 사탄에게 내어준것. - 교회에서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교제를 금하는 것이다. 

우리가 선한 양심과 믿음을 잃어버린다면 이것을 지키지 못하고 빼앗겨버린다면 그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우리를 사탄에게 내어주는 꼴이 되어버린다. 

예시 - 김익두는 가끔씩 옛 깡패 기질이 불쑥 되살아나려고 할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을 향해서 소리쳤다.

야 이 죽은 김익두야!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아직 울려 퍼지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살아나려고 하느냐? 아직은 때가 아니다 죽어 있어라!

A.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싸움을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 믿음과 양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끝까지 지속해야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2가지 

예배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시간이다. 예배시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시간이다. / 예배 가운데 선한 싸움을 사우라. 예배 양심을 지키라. 한번 무너지면 다시 세워지기 어렵다. 예배를 일찍 와서 준비하는 것 - 예배 가운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 맡은 순서 가운데 준비함으로 세우는것 

기도 -  왜 기도하지 않는가? 부르짖으며 기도하라. 교회당에 나와서 기도하라. 회개하며 기도하라. 

 

이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싸움을 시작할 준비 운동이다. 

2022년이 끝나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는가 자문해본다. 아니다. 싸움을 포기한다. 싸우려 하지 않았다. 회개한다. 

다시 2022년 마지막 12월이라도 선한 싸움을 싸워보자. 기본 ㄱ예배에서 기도에서 싸워보고 승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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