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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Ἐγένετο τότε τὰ ἐγκαίνια 

           ἐν τοῖς Ἱεροσολύμοις,

        χειμὼν ἦν,

 23     καὶ περιεπάτει ὁ Ἰησοῦς 

              ἐν τῷ ἱερῷ ἐν τῇ στοᾷ τοῦ Σολομῶνος.

 

 24  ἐκύκλωσαν οὖν αὐτὸν οἱ Ἰουδαῖοι 

     καὶ ἔλεγον αὐτῷ·

            ἕως πότε τὴν ψυχὴν ἡμῶν αἴρεις; εἰ σὺ εἶ ὁ χριστός, εἰπὲ ἡμῖν παρρησίᾳ.

 25  ἀπεκρίθη αὐτοῖς ὁ Ἰησοῦς·

       εἶπον ὑμῖν καὶ οὐ πιστεύετε·

       τὰ ἔργα ἃ ἐγὼ ποιῶ ἐν τῷ ὀνόματι τοῦ πατρός μου ταῦτα μαρτυρεῖ περὶ ἐμοῦ·

 26  ἀλλ᾽ ὑμεῖς οὐ πιστεύετε, ὅτι οὐκ ἐστὲ ἐκ τῶν προβάτων τῶν ἐμῶν.

 

 27  τὰ πρόβατα τὰ ἐμὰ τῆς φωνῆς μου ἀκούουσιν, 

     κἀγὼ γινώσκω αὐτὰ

     καὶ ἀκολουθοῦσίν μοι,

 28  κἀγὼ δίδωμι αὐτοῖς ζωὴν αἰώνιον

     καὶ οὐ μὴ ἀπόλωνται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καὶ οὐχ ἁρπάσει τις αὐτὰ ἐκ τῆς χειρός μου.

 (Jn. 10:22-28 BGT)

 22 그곳에 예루살렘의 축제일이 왔다.

그때는 겨울이었고

 

 23 그리고 예수께서 성전 안의 솔로몬의 성곽으로 걷고 계셨다.

 

  24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를 둘러쌌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언제까지 우리의 영을 의혹하는가?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이라면, 우리에게 거리낌 없이 말하라.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했다.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고 있다: 내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내가 행한 그 바로 그 일이 나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나의 것인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나의 양들은 나의 음성을 그들이 듣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따르고 있다,

 28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놓지 않을 것이다 나의 손에서.

제목 : 주의 양이라면

 

청중의 상황 :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에 대해서 목회자나 직분자 부모 선생 등의 말을 듣지 않는 것. 말씀에 대한 권위가 세워지지 않는 것. 그리고 말씀에 대해서 관심 없는 것.

한편으로는 그런 이유로 갈등을 피하기 위해 말씀을 가진 자들이 권위자들이 말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 힘드니까.

 

본문의 중심 사상

자신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이에 대해 신성모독으로 여기는 유대인들.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시는 일을 보라 그리고 믿으라 하심.

 

설교의 구조 (틀 의미론)

듣지 않는다   듣는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 표적을
보러 따르러 오다!
 
돌로 치려 한다   듣고 알고 따른다

 

하강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는 모두 양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리 연약한 자라고 하더라도 임재해 있다.

하지만 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듣고자 하는 의지가 없기에 말씀이 들리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반전

예수님은 선한 일을 하셨다. 그가 일으키신 모든 표적은 그가 선한 일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낸다. 구원이 예수께 있다.

말씀에는 항상 두 가지 반응이 있는데 유대인처럼 돌로 치려하고 거부하거나 요단강 저편의  사람들처럼 예수를 믿는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예수를 증거하는 말씀을 통해 경험한다. 나는 양이 되는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양으로 부름 받는다. 그의 말이 들리게 되고 그가 나를 아시게 되고 나는 그를 따르게 된다.

 

상승

성도는 신앙을 고백하는 자로서 예수를 믿는 자이다. 이미 확실한 예수님의 양이다. 본문의 거부자들이 아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선한 일을 경험한 사람은 그의 말씀을 듣는다.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세상을 이기며 승리한다.

서론 (본문 설명)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을 읽겠습니다.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수전절이라는 명절에 예수님께서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셨습니다. 명절이니까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 중에도 솔로몬 행각은 성전 바깥에 있던 곳으로 지붕이 있어서 시원한 그늘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랍비들, 경건한 사람들, 학식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토론의 장이 되던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는데 유대인 무리들이 예수님을 둘러 싸고 묻습니다. 솔로몬 행각에서 일어나던 율법 토론을 하려는 듯, 질문을 쏟아 냅니다.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왜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느냐 그리스도이시면 말하십시오 하고 묻습니다. 이 사람들의 질문에는 가시가 박혀 있습니다. 질문이 아니라 공격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민족의 구원자가 맞느냐라는 물음이 아니라 - 그것도 아닌데 왜 설치고 다니느냐. 하는 공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을 간파하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했다. 너희 질문에 이미 답했다.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미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냐. 말한 것만이 아니라 내가 행한 일들이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한다.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다고 말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 질문하는 유대인들이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들과는 대비되는 내 양이 어떤 자들인지 설명해주십니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양에 대해서 내 음성을 듣고 나도 그 양들을 알고 그 양들은 나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다 라고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양의 특성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영상 시청>

 

이 아저씨의 음성을 듣고 안개 속에서 보이지 않던 양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그 주인 곁으로 옵니다. 이게 양의 특성입니다. 양은 주인의 음성을 기억하고 분별합니다. 자기 주인이 아닌 음성은 듣고 쫓아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음성은 기억하고 그 음성에만 따라 오는 것이 양입니다.

 

하강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는 이 시간 이 장소에 나와서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부모님이 오라고 했던, 친구가 오라고 했던, 목사님이 오라고 했던, 자기가 오고 싶어서 왔던 어찌하든지간에 모두 다르지만 우리 모두는 예배에 나아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따라서 이 예배의 자리에 나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양식을 받아 먹기 위해서 그 언덕을 내려 온 것입니다.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늘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인정하든 안하든,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끄심대로 나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방금 봤던 그런 양들처럼 멀리 산 속에서 안개가 짙어서 멀리 떨어져 있다가도 주인의 음성이 들리면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면 뛰어서 신나게 마치 강아치처럼 보였는데 그런 식으로 그 언덕을 내려 오고 있습니까? 예배를 예로 들면 와 신난다. 내일은 주일이다. 기대하는 신나는 기쁜 마음으로 달려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양들처럼 정말로 강아지처럼 뛰어서 예수님 앞에 그분의 말씀을 듣고 즉각적으로 뛰어오고 있습니까?

질문. 우리가 양인 것은 맞는데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데 왜 항상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냐는 겁니다.

 

예화)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학생 때에 인도를 여행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와 함께 갔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역사를 공부하신 분이었습니다. 함께 인도에 있는 문화 유적지를 갔습니다. 그곳에는 아주 화려한 힌두교 사원이었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아 멋지다. 와 화려하다. 이거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지나갑니다. 어떤 친구들은 왜 이런데 데려와서 재미없게 지루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를 공부하고 종교를 공부한 선생님은 그런 사원에 갈 때마다 얼마나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카메라를 들고 뛰어다닙니다. 그러면서 그 건축물의 양식이 그 건축물과 그림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조각상은 왜 그런 위치에서 그런 손 모양을 하고 있는지 왜 여기에선 코끼리가 등장하는지. 자기가 책에서 봤던 내용들이 이렇게나 자세하고 극적으로 묘사되어있는 장소에 가니까 그것을 살펴보면서 아주 신이 나신 겁니다. 저도 그분의 설명을 들으면서 덩달아 인도의 그런 종교나 신화 역사에 대해 건축물에 녹아져 있는 것들을 보면서 재미와 흥분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박물관이나 유적지에 가면 항상 그 건축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먼저 공부해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똑 같은 건물에 들어가서 사진도 찍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선생님만 그 건물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건물의 가치를 올바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사실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계속해서 우리에게 보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열망이 없습니다. 밤길을 산책하다 보면 수많은 소리들이 들립니다. 벌레소리 바람소리 지나가는 차 소리. 그런데 평상시에는 그 소리들이 들리지 않습니다. 내게 들려진 소리이지만 그 소리보다 다른 소리를 듣고 신경쓰지 않고 관심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찌우고 우리를 더 성장케 하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시는데 그 음성을 듣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은 듣는 것과 따르는 것을 긴밀하게 연결시키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생각이 없다면 그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혹은 들린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이 진짜 예수님의 말씀인지 의심하게 됩니다. 평가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소음처럼 여겨지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주의 음성을 소음처럼 여기는 사람. 주의 음성이 들렸을 때에 그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요?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순종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따르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은 예수님이 직접 분명하게 말씀하시더라도 예수님께 미쳤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음성이 소음입니까? 예수님의 음성이 잡음입니까?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혹시나 귀를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 나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하는 것이 싫어서 그 말을 전하는 자를 미워하거나 깍아 내리거나 미쳤다고 하거나 오늘 말씀의 유대인들과 같이 돌로 치려하는 공격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에게 주의 말씀. 옳으신 뜻. 의로운 것들을 말하는 자에게 분노와 미움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를 듣지 않는 시대. 의로운 것과 올바른 것에 대해 듣지 않는 시대로 몰아갑니다. 나 자신이 옳고 나 스스로가 기준이 되는 시대로 몰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당하고 정당하고 바람직하고 의롭고 자유로운 것이라고 매력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의 음성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음성도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우리 공동체에는 주의 음성이 들려지고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서 그 음성이 매 주마다 매일 마다 들려지고는 있는데 혹시나 그것이 마치 잡음이나 심지어 소음과 같이 경솔히 여겨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의 말씀을 따르고 싶어합니까?

그냥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니까. 묵상해야 하니까. 시키니까 안할 수는 없고.

예배에는 어떻습니까? 예배 시간이 즐겁고 값지고 귀하고 감격스럽습니까? 예배 버티기?

반전

 

예수님의 말씀이 전달되었을 때에 반드시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하나는 방금 살펴보았던 유대인들과 같은 반응입니다. 이들의 반응은 거부이자 무시이자 공격입니다.

그런데 10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유대인들과 전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40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침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이 유대인들을 피해 요단강 저편으로 멀리 가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많이 믿게 됩니다.

 

이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 사람들은 멀리 계신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이 요단 저편 베다니라는 뜻은 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지명이 가난자의 집이라니요. 가장 가난한 사람들.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든 곳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예수님을 갈구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께 먹기를 구하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리고 그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따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3절 산상수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내가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내게 자랑할만한 것이 없다. 내가 살면서 이룬 것도 없다. 내 몸이 병들어서 더 이상 힘있게 살지도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수전절에 예루살렘에 모여서 토론을 벌이던 율법학자들 랍비들과는 다르게 배우지도 못했고 가난하고 신분도 천하고 차별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음성이 선명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그분을 그리스도로서 나의 주인으로서 믿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양이라면 나의 주인께 모두 다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나의 생명까지도 목숨까지도 다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러나요? 내가 가진 게 없어서 내 생명도 예수님만이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실 수 있다는 그 마음. 완전히 완벽하게 예수님만 의지하는 그 마음. 가난하고 갈급한 마음. 나는 예수님이 아니면 비참한 사람이라는 마음. 이게 예수님을 향해 있어야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고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는 정말 참된 양인 것입니다. 이 마음에 두 그룹이 분명히 갈리는 포인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솔로몬 행각의 부유한 사람입니까? 베다니의 비참의 집 사람입니까?

상승

 

예수님은 이 양들에게만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이 가난한 자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이 생명은 영원히 멸망할 수 없는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손이 이 사람들을 강하게 붙잡으셔서 그 어떤 것도 이 예수님의 손에서 떨어져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이 양들에게만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양들을 먹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양들에게 평안함을 주십니다. 보호하십니다.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적용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정말로 내가 주의 양이며, 주께서 내게 영생을 주시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심을 믿으십니까?

우리 회복합시다. 우리 모두는 주의 음성을 듣고 이곳에 모여온 예수님의 양들입니다.

그런데.

 

1) 회개, 간구

내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더라도 듣고 있더라도 들을 마음 자체가 없습니다.

내 마음이 가난하지 않습니다. 비참의 집 사람이 아니라 솔로몬 행각 사람입니다. 내가 양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는 없는데 이 양이 좀 잘못된 양입니다. 주인의 음성에 뛰어오지 않습니다. 주인을 거부하는 양입니다. 병들어버린, 감각이 마비되어버린 양입니다. 예수님 내 마음을 내 심령을 고쳐주십시오. 예수님 나를 고쳐주세요. 우리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수많은 예수님의 음성들 - 그것들을 내가 무시하고 오늘도 살아갑니다. 이번주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예수님의 양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나를 지금도 강하게 붙잡으시고 어떤 것에서도 놓지 않으시는 예수님. 내가 아무리 음성을 듣지 않는 제 멋대로인 양이더라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가장 선하시고 인내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2) 결단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에 그쳐서는 슬퍼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결단해야 합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지금부터 오늘부터 이 순간부터는 주님 말씀하시면 듣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내가 정말 양으로서 주인을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결단하시기 축복합니다.

 

우리가 다 맡길 수 있는 이유. 순종할 수 있는 이유. 그 순종의 내용이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닐수도 있고,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내가 정말 하기 싫고 거리끼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음성을 듣기도 전에 먼저 말씀하신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주께 드릴 수 있는. 목숨까지도 주께 드릴 수 있는 이유는 뭔가요?

 예수님이 이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목자이신 분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이용해먹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자신이 이용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창조자이신 그분께서 피조물을 위해 사기 당하시고 이용 당하시고 죽임 당하십니다.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 죽겠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나의 의지는 죽었습니다. 주 뜻대로 하소서. 주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리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을 하시든지간에 듣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3) 기도

이 믿음을 주시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 믿음은 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고후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의 영광, 주의 생명의 영광을 알게하여 주소서,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 믿음을 주소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게 하소서.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함께 기도하는 시간. 가정이 함께 기도하는 시간.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밀한 비밀을 얻게 됩니다. 특별히 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도에 대해서 결단하십시오. 시간과 장소를 결단하십시오. 방법을 결단하십시오. 그것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십시오.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주실 것입니다.

내 마음을 비추실 수 있도록 예수님의 얼굴 그 영광을 볼 수 있도록 그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기도의 시간을 예수님께 드리겠습니다.

 

마무리

예수님의 음성을 따르고자 한다면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베다니의 사람처럼 되고 싶습니다. 솔로몬 행각의 유대인랍비들처럼 되고 싶지 않습니다. 언덕을 강아지처럼 뛰어 내려오는 주인을 온전히 신뢰하는 기뻐하는 그 양떼들처럼 나도 예수님의 착한 양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이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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