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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싸움을 싸우라 딤전1:15-20

 

Q. 선배에게 손절당한 이야기. 이런 일을 경험한다.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차이가 없는 시대인 것 같다. 왜 그런가? 교회를 다녀도 술 담배. 성적 문란. 탈취, 사기. 어디가서 교회 다니는 사람입니다 당당히 말하기가 참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예수를 믿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나?

 

S1. 복음을 만나지 못하면 자신을 헛되이 자랑한다.

E, 복음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을 남과 비교하면서 우위를 점하려고 한다.

코로나 기간 생긴 것 : 명품(21년도 7323년도 88천억)/ 외제차(20년 대비 17% 21103598/ 사교육비 15172123.4/ 힙합의 플랙스 - 나 고생한거 재능, , , , 인맥, 건물/ 한국 자살률 2113,352/ 10만명당 26

V. 그런데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헛된 자랑에 빠져있다. 자신을 뽐내고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추앙하고 우상화하고 따라간다. 별판 다른 것이 없다.

 

S2. 복음을 만나면 하나님을 자랑한다.

E. 하지만 복음을 정말로 만난 사람은 사람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 자랑의 자리에 하나님을 둔다.

A. 15절의 바울이 그러하다. 

죄인 중의 괴수다. 자신을 낮춘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17- 영원하신 왕 . 홀로 하나이신 분

V.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중심성이다. 하지만 복음이 비추어지면 자기중심의 시선에서 나를 정확히 바라보게 된다. 나를 죄인으로 소망 없음으로 낮추고 자랑의 자리에 하나님을 두게 된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한다.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자랑하는가? 1) 영원하신 분 2) 유일하신 분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다르게 썩지 않으신 영원하신 분이다. 그분은 다른 종교와 다르게 오직 유일하심을 선포하길 주저하지 말라. 선포하고 있는가? 고백하는가?

A. 이 하나님을 고백한다면 6:4을 고백하라 -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죄인이라 회개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라. 자신을 혹은 사람을 찬양의 자리로 두지 말라.

 

S3. 복음을 만나면 선한 싸움을 싸운다.

E. 기독교신앙은 복음에 감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복음을 가지고 세상과 싸울 것을 요청한다.

A. 18절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 영적 전쟁을 지금 지속적으로 계속 해야 한다.

V.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어야 한다. 지금 싸우고 있는가? 무엇과 싸워야 하는가? 나의 옛 자아와 싸워야 한다. 세상의 조류와 싸워야 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의 자랑과 싸우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백하지 않는 세상의 사상과 싸워야 한다. 끊임없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나의 옛 자아.

A. 이전의 자기중심성의 싸움에서 선한 싸움으로 나아가라 - 싸움을 하고 있는가? 포기하지 말라.

 

S4. 복음으로 싸우면 믿음과 착한 양심이 세워진다.

선한 싸움을 싸울 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E.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일하신다. 그를 변화시키신다. 그에게 믿음과 양심을 세워주신다.

A.  19절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이것이 결과로 주어진다. 이 믿음이 있는가?

V. 그러나 반대로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으면 믿음과 양심이 파산하게 된다. 믿음에 틈이 생기면 중요한 때에 전혀 발휘하지 못한다.

요일5:4 -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 믿음 자체가 흔들리는데

평안할 때는 드러나지 않는다. 믿음이 사용되지 않는다.

김익두의 예화 예전의 죽은 자아와 싸우라. - 인민군에 순교 이유는 평소 싸워 믿음을 세웠다. 양심을 세웠다. 그래서 결정적 순간에 발휘 가능했다.

우리의 양심이 아직 살아 있는가? 끊임없이 말하는데 그 말을 듣지 않으면 양심은 저멀리간다.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는 이 싸움에서 파선했다. 알렉산더:해를 끼치는 자/ 후메네오:악성 종양. 싸우지 않았기에-믿음이 변질되고 양심이 없어져서.

교회가 긁어내야만 하는 악성 종양이 되지 말아달라 제발.

A. 지금 선한 싸움을 싸우라 - 거창하고 시대적인 것을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예배를 회복하라. 회개, 진정찬양, 대표기도, 설교, 헌금. 주일성수

은혜를 받으면 싸울 수 있다.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디모데전서 1:15-20

 

S1. 복음을 만나지 못하면 자신을 헛되이 자랑한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다 자신의 잘남을 말하기에 급급하다. 자기가 얼마나 멋지게 살아왔고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고 얼마나 노력을 많이 했고 얼마나 똑똑한지 성실한지 자랑한다. 건물을 몇채 가지고 있는지 재산이 얼마인지 얼마나 멋진 경험을 했는지 자랑한다.

 명품 시장은 코로나 기간에 엄청난 성장을 했다. 21년도에 73천억 2년뒤 23년에는 88천억 정도로 전망되고 있다. 전체적인 경제는 코로나로 망해가는 명품 시장은 성장한다. 벤츠, BMW 등의 수입차는 20년 대비 17프로가 성장했다. 21년도에 총 103598대를 팔았다. 사교육 비용은 201517조원 202123.4조원 학생들 수는 계속 감소하는데 사교육 비용은 계속 증가한다.

 요즘 힙합이 유행하다. 힙합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힙합을 듣다 보면 이런 현상의 정답을 알려주는 듯 하다. 유명한 노래들의 상당수의 가사들이 자기가 얼마나 잘났는지 자기가 이 위치까지 오는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자신이 얼마나 돈이 많은지 좋은 차가 있는지를 자랑하는 것들이다. 이것을 플랙스라고 말하고 열광한다.

옷을 왜 입나? 좋은 차를 왜 타나? 좋은 직장을 왜 들어가려고 하나? 좋은 대학을 왜 들어가려고 하나? 결국엔 더 잘났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남들보다 더 좋고 더 낫고 더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영광을 받고 싶은 것이다. 지금 시대만 그러한가? 아니다. 세상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잘남을 강조하며 나아간다. 자신이 영광받고 추앙받아야 하며 남보다 더 높아야 하며 우러러봄을 받고자 한다.

 

 

S2. 복음을 만나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15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은 뭐라고 말하나?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세상은 자신의 잘남과 영광을 말하지만 바울은 겸손히 말한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겸손하는 척이 아니라 정말 겸손이 생겨난 것이다.

 

사람의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자기 중심성이다. 사람들은 누구든지간에 가르치지 않아도 모든 일을 자기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바라본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지나치게 자기만 보아서 자기에 함몰된다.

그런데 복음이 그 마음을 비추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자기를 돌아보게 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많은 일을 내게 행했는지를 보게 되고, 자기 자신을 보는 것에만 함몰된 눈이 자기 자신을 정말로 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추악한 자이구나. 나에게서는 자랑한만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 내가 아무리 나를 치장하고 높이기 위해서 명품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집을 가져도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를 바라보는 다른 시선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되는가 나 자신에게 함몰된 시선이 이제는 밖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 눈이 자기에게서 떨어져서 그 눈을 통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이웃들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전에는 이웃은 나를 위한 도구일 뿐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복음의 빛이 들어오게 되면 그제서야 이웃들이 내 삶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나의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고민하게 되는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또한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가?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는 삶이 우리 삶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만 합당한 것이 영광과 존귀와 찬양이다. 사람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기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면서 내가 그 영광을 받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죄의 특징과 결과이다. 사람은 영광과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긍휼이 여기고 사랑하고 아끼고 불쌍히 여기는 대상이다. 찬사와 높임을 받을 만한 것은 합당하지 않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합당한 것이다.

 세상은 끝없이 사람에 대한 찬사와 그 찬사를 받은 사람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때에 그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하다. 사람을 높이고 찬사를 보내고 그 기대를 져버리면 미워하고 분노하고 정죄하고 공격한다. 하지만 신자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세상을 어떻게 사는가? 사람들이 훌륭하더라도 그들이 우리와 같은 한계가 없는 훌륭하기만 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모태로부터 죄 중에 태어났고 깨어진 부분을 갖고 있기에 비판하고 정죄함으로 끝나지 않고 긍휼히 여기고 지지해주고 함께 슬퍼하고 그 사람의 유익과 덕을 구하는 다른 눈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께만 영광이 합당하고 그분만 바르게 높일 때 우리는 사람을 바르게 사랑하고 사람을 바르게 아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배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 가족. 그 가족들에게 어떻게 대하는가? 그들을 하나님께만 두어야 할 영광의 자리로 놓아서는 안될 것이다. 아내와 남편이 하나님이 계실 자리 영광을 받을 자리에 놓일 때 나도 다치고 상대방도 다치게 된다. 자녀들이 주님이 계실 자리에 있으면 둘 다 다치게 된다.

 영광을 하나님께가 아니라 다른 인간에게 돌리고, 스스로가 하나님인척 하고 하나님 한분에게만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인간의 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흉악한 죄를 지어야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교활하고도 근본적인 죄의 모습이 이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것을 간과하며 살아간다. 영광은 하나님 한 분에게만 합당하고 사람은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고 아끼고 지지하고 붙들어 주어야 하는 불쌍한 존재들이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때 사람은 가장 아름답고 합당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 한 분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소개하는가? 사람이 아니라 그분께만 영광을 돌려야 하는게 합당한데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가? 우리의 감사, 헌신, 찬양을 다 드려도 부족함 뿐인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자리야말로 땅에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최고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고백하는 현장이 예배이다. 그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17절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 지어다. 아멘

 

바울은 하나님을 두가지로 설명한다. (1) 영원하시고, (2) 유일하신 하나님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온 세상에 모든 것들은 썩어 없어진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 한분만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영원 전부터 영원하도록 존재하시고 이렇게 모든 것이 생성과 사라짐과 죽음의 썩음으로 반복되는 세상에서 그 질서를 깨트리시고 그 위에 계신 유일하신 영원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영원하시기에 그분의 영생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

 세상은 어떤가? 모든 사람들이 다 썩어 없어진다. 모두가 나이를 먹는다. 어지간히 건강해도 어지간이 아름답고 잘생겨도 그 아름다움을 붙들 수 없다. 이를 붙들어두려고 의학이 발전하고 화장품이 발달하지만 조금 늦출 뿐이지 절대로 붙들 수 없다. 밖은 화려하게 해도 속은 완전히 문드러지고 썩어간다. 사람은 아무리 출중해도 때가 되면 다 시들고 없어진다. 우리 교회의 어린 아이들. 3-4살 되는 아이들 애기 피부를 보라 너무나 보드랍고 깨끗하다. 그런데 10년만 지나보라. 그들의 이마에 여드름이 생길 것이다. 조금 더 지나보라.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흉터와 주름들이 가득해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썩어 없어질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영원 전부터 변함 없이 진실하고 우리를 향한 사랑과 긍휼이 바뀌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께 영광과 찬양을 오직 올려드리는 것이다.

 

 또한 영원하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신 분이시다. 많은 신적 존재가 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가시적인 손에 잡히는 모양으로 드러내려고 한다. 불교는 불상으로, 이슬람은 마호메트로, 유교는 조상들의 위패나 묘자리들로 자기 나름대로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섬기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서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어 나타내지 말라고 말하셨다. 그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알 수 없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알고 느끼는 분이라고 우리는 고백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성령과 생명의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 한분께만 영광이 합당함을 알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세상에 온갖 종류의 신들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오직 우리가 섬기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분이시다.

 세상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시고 예수님만이 유일하신 구원이시다고 말하면 싫어한다. 미워한다. 우리를 편협하다고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에게 무엇이라고 고백하는가? 우리는 그러한 미움을 받는 것을 오히려 환영한다. 우리는 구원을 위한 다른 길이 있다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외에 다른 분이 있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세상이 원하는 그런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절대로 이 말을 타협할 수 없다. 하나님 한분만이 이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그분께만 영광을 올려드린다. 그분만이 영원하시고 하나이신 분이시다.

 

신명기 64절은 분명히 말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백한다면 그분을 모든 마음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있는가? 집중력 있게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내고 그 중심에 하나님과 통하는 그 태도로 기도하고 예배하고 있는가?

 예배와 찬양과 경배가 예배의 현장에서와 기도의 시간에서만이 아니라 그 한 분만이 모든 현장에서도 다 받으실만한 하나님이심을 영광과 존귀와 찬양이 그분께만 합당함을 알고 우리의 마음을 쏟지 못하게 하는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분께 중심을 드리는 일에 실패하지 않아야 할것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영광과 찬양과 감격의 대상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S3. 복음을 만나면 선한 싸움을 싸운다.

 여러분 이 복음을 고백하는가? 하나님께만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가?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이 고백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렇게 영광의 하나님을 복음을 설명하고 나서 제자 디모데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무엇을 당부하고 있는가?

 

18절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하나님의 영광만을 말하고 끝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은혜와 감격만을 말하고 끝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그 이후에도 싸움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그 시간이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고백하는 그 감격이 있다면 우리 자신에게 쏟아놓았던 자기 중심성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새로운 시각을 주셨음을 고백한다면 우리에게는 치열하고도 혹독한 영적 싸움. 원문으로 말하면 전쟁이 남아 있다고 바울은 말하는 것이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 복음의 빛이 비춰지기 전에 했던 싸움은 무엇이냐? 항상 상대를 탓한다. 항상 상대를 사랑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정당화시킨다. 저 사람은 사랑할만한 사람이 아니고  너무 어렵고 예민하고 날카롭고 저렇고 이렇고 하면서 늘 우리의 안락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주님의 복음으로 나와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것을 알고 나서 이제는 나를 깨뜨리는 싸움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전에는 나를 위해서 상대를 깨뜨렸다면 항상 타인을 정죄하는 것에 부지런한 삶이었는데 이제는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를 깨뜨리는 선한 싸움을 싸우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나쁜 싸움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 물어뜯고 자기 중심성을 위해서 싸우는 나쁜 싸움이 아니라 선한 싸움을 해야 한다. 하나님 한 분을 영광스럽게 하고 바른 경배와 예배를 드리고 싶어하는 선한 싸움을 해야 한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기 위한 선한 싸움. 목적이 방법이 바른 선한 싸움을 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가? 그렇다면 여러분 싸우고 있는가? 끝없이 어리석은 자아를 깨뜨리고 이렇게 말 듣지 않는 자신의 몸을 멍이 들면서 때려가면서 진리 앞에 순종하고 싶은 삶을 살고 싶어하는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삶. 결정적인 싸움은 예수께서 싸우셨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남은 싸움을 싸워나가는 그 일이 우리 삶의 본질이다. 하지만 교회가 싸움을 멈추고 있지 않는가. 힙합이 말하는 플랙스가 말하는 것처럼 세상 가운데 잘 되기만을 남보다 비교우위를 점하고 뽐내기만 바라고 있지 않은가. 선한 싸움을 싸워야만 하는데 싸우기를 멈추고 그저 윤택하게 좋은 직장 좋은 밥 좋은 차 좋은 학교 좋은 미래 위해서 남들에게 안 꿀리고 인정받기 위해서 급급하게 불안해하면서 살아가는 것 아닌가.

 

 

S4. 복음을 만나 선한 싸움을 싸우면 믿음과 착한 양심이 세워진다.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19절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이 구절은 exon이라는 분사 구문으로 18절과 연결되어 있다. 선한 싸움을 싸울 때에 우리에게 두 가지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우면 (1) 믿음을 지키게 되며 (2) 착한 양심을 잘 보존하게 된다.

 하지만 선한 싸움을 싸울 때에 싸우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이 파선하게 된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교회 안에서 믿음의 삶을 살고 있다고 보이지만 그 뒤로는 믿음이 깨어진 것이다.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한데 믿음의 배에 물이 조금씩 세고 있다. 평상시에는 평온할때는 티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는 파선하는 것이다. 믿음이 사용되어야 할 때에 그 위기에 아무런 힘도 작동도 하지 못하는 믿음을 가진다. 그게 파선한 믿음의 특징이다. 평탄할 때는 괜찮을 수 있지만, 위기가 닥쳐올 때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에 믿음이 깨어져 있으니까 결정적 순간에 믿음을 쓰려고 하니까 평상시에 세워놓지 못한 믿음이 쓰여지지 않은 것이다. 여러분은 싸워야 할 선한 싸움을 싸울 때가 왔을 때에 그 싸움에 대비되어 준비되어 있는가? 사용되어야 할 중요한 순간에 다 파선한 것처럼 형태는 있지만 제대로 된 역할을 못하는 이유는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기 때문이지 않는가.

 아무도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예수의 공로를 의지하고 붙들고 신뢰함으로 구원에 들어가는 믿음으로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복된 자들이다. 그런데 이 믿음이 파선된다면 위기의 순간에 믿음이 파선된다면 나만이 아니라 이웃들의 생명도 가족들의 생명도 떠내려가는 것이다.

 

요한일서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믿음이 없이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믿음을 써서 세상의 방식을 극복해내고 분별해내고 이겨내야 하는 상황인데 이 믿음 자체가 깨져 있으니까 물이 세고 있으니까 배가 파선되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싸울 힘이 없이 그저 또 넘어지고 넘어진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엇이냐? “내가 아직 너무 약해서 이래. 요즘 세상이 원래 그래.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 요즘 시대가 이런 게 안 맞아.”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스스로를 계속해서 합리화하고 마는 것이다. 복음은 시대를 역행한다. 항상 시대와 상황과 맞지 않는 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복음을 미워한다. 복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미움과 상황의 어려움을 각오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을 지키는 자의 태도다.

 

 착한 양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양심은 정한 기준을 따라 행동하고 싶어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양심이 우리 안에서 하는 일이 무엇이냐? 양심이 우리 속에서 소리를 치고 있다. 그런데 양심에게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생명이 있는 자로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러면 안된다는 마음이 양심의 소리를 치고 있는데 그게 불편하다. 그래서 저쪽 한 구텅이에 한 구석의 방으로 숨겨 놓고 무시한다. 어떤 때에는 그 소리를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나는 더 이상 양심이 말하는대로 살고 싶지 않아 나는 세상이 하는대로 살거야 하면서 양심을 거스르는 삶을 아주 과감히 선택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점차 선한 양심이 무뎌지기 시작한다.

 우리의 양심은 어떠한가? 양심을 유지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날카롭게 예민하게 간직하고 보호하고 있는가? 이 시대는 이 지역은 어떠한가? 영광의 전직 군수들은 다 경제적인 문제로 감옥에 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고장에서 양심이 군민들에게는 있는가? 여러분은 어떠한가? 양심이 살아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과 양심을 지키고 있는가? 배려와 따뜻함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자기 논리에 사로잡혀서 자기를 관철 시키려는 어리석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께만 영광 올려 드린다고 하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있는가? 이곳에서라도 하나님의 복음을 말하는 이곳에 모인 사람이라도 어떻게든 착한 양심으로 시대를 다른 눈으로 보고 다른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면 이 지역에 이 세상에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어쩔 수 없다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렵다고 시대에 맞지 않다고 합리화하면서 살아간다면 점점 더 악한 양심의 시대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믿음에 파선하는 전쟁이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적극적으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때이다. 진리의 깃발을 가지고 진리의 검을 가지고 주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주님이 오셔서 이제 그만 쉬고 멈춰도 된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멈추지 않고 싸워야 한다. 우리가 이 싸움을 멈추면 이 악한 흐름을 멈춰야 할 방법이 없다.

 예화 - 김익두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그분은 깡패 출신의 목사였다. 그분은 깡패에서 회심하고 온 마음을 다해서 일제 강점기에 부흥사로서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였던 분이시다. 그의 말년에는 북한 황해도의 신천교회에서 사역하시면서 다들 남쪽으로 피신가는데 목사가 어떻게 성도들을 버리고 자기 살려고 떠나느냐 하시며 5명의 성도들과 교회를 지키셨다. 이들이 교회에 모여 함께 있을 때에 인민군이 갑자기 들어와 총을 쏴서 그 자리에서 순교하셨다.

 이분이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기 안에 예전 깡패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런 분노와 혈기와 미움이 들어올때에 이렇게 외치셨다고 한다. 야 이 죽은 김익두야 왜 나타나느냐! 지금은 너가 나타날 때가 아니다. 너는 죽었다! 깡패의 혈기가 나타날 때마다 김익두의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피를 흘리며 싸웠던 것이다. 평소에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온 분이시기에 그래서 이분은 결정적인 순간에 죽음이 믿음을 위협하는 순간에 죽음의 공포가 에워싸는 순간에 교회를 떠나지 않고 당당히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김익두처럼 믿음의 싸움 양심의 싸움을 하고 있는가?

 

 

 주목하여 보아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의 시대에도 그 교회 안에 착한 양심과 믿음을 거스르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선한 싸움이 아니라 악한 싸움을 싸운 사람들이었다.

 

1920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사탄에게 내주었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출교되었다는 말이다. 초대 교회에서부터 초창기부터 교회는 치리를 통해서 진리와 삶의 거룩을 보존해왔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진리와 삶에서 어긋남으로 공동체 밖으로 내어 보낸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진리와 삶의 모습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가? 이후 디모데후서에서도 발견되는 이들의 모습은 계속해서 진리를 불분명하게 말하며 삶의 모습 가운데 악한 양심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가 되었다. 바울은 이들을 악성 종양과 같다고 말한다.

 이들은 예수를 알고 그 영광을 알았지만 믿음의 물이 새서 결국 그 믿음이 파선하고 교회 가운데도 큰 해를 입히게 된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냐?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냐의 길을 가고 있는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가? 믿음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바울의 권면을 받고 있는 디모데의 길을 가고 있는가?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주님이 허락하실 때까지 믿음의 싸움을 신실히 싸우면서 착한 양심을 지키며 이 시대에 살리고 치료하는 삶이 되길 축복한다.

 

 한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이 영적 전쟁 싸움을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그 시작은 예배이다. 우리 이 예배를 회복하자.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이다. 예배가 무너지면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없다. 믿음을 양심을 지킬 수 없다. 이 예배에서부터 우리의 모습이 발견되어야 하고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이 나타나야 한다. 예배야 말로 영원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영광스러운 현장이다.

 예배에 늦지 말라. 예배를 준비하며 기도하라. 찬양 한 소절을 부를 때에 그 고백이 나의 고백으로 온 마음을 다해 드리라. 대표 기도하는 자는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준비하며, 그 기도를 드릴 때에 모든 사람들은 그 마음에 공감하고 함께 고백함으로 들리라. 말씀을 준비하는 자는 말할 것도 없고, 말씀을 듣는 그 순간에 설교자의 선포 가운데 참여하라. 말씀을 통한 은혜를 사모하라. 그 안에 하나 되어라. 선포의 말씀마다 아멘으로 화답하라. 무릎을 바르게 하고 손을 바르게 하고 허리를 세워라. 눈을 설교자의 눈과 마음에 두라. 하나님의 재정을 도둑질하지 말라. 헌금과 십일조에 있어서 정직하게 행하라 그것이 선한 싸움을 싸우게 하는 힘의 근원이 된다. 다른 날 싸우지 못하면 주일 하루만큼이라도 하나님께 드리라. 그러기 위해서 싸우라. 말씀이 올라온다. 그 말씀을 주중에 들어라. 그날 바로 올라온다.

 

 그리고 예배를 위해 싸움으로 우리의 양심과 믿음에 변화가 생겨나면 주께서 각자에게 맞는 싸움을 알려주시고 그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나아가면 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믿음에 파선하지 않고 축복된 싸움을 싸우는 우리가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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