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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영광의 상실

 

서론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 급하게 빠르게 가든 천천히 가서 빙빙 돌아가서 가든 목적지인 서울에만 가면 상관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서울에 가야 한다는 목적지가 있으면 모로가든 천천히 가든 놀다가 가든 자가 가든 큰 문제가 안된다고 하는데

서울로 가야 하는지 광주에 가야 하는지 인천에 가야 하는지 대구에 가야 하는지 장성에 가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을 보면 이 시대의 모습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나마 모로 가도 어디에 가야 하는지 아는 사람의 삶은 그래도 괜찮다. 그래도 안심이 된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르니까 참 힘들다 절망스럽다.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몰라서 방황한다. 잘난사람 똑똑한 사람 현명한 사람 돈 많은 사람 건강한 사람 잘생긴 사람 많은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르는 채로 살게끔 한다. YOLO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여기에는 방향과 목적이 없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오늘 그냥 놀자.

어찌 보면 목적이 없는 삶에 대한 정직한 대답이 그런 쾌락주의일 것이다.

 

정말 큰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내가 모로가도 어디에 가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의 삶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그 목적지는 어떤 곳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고 이끌고자 하시는 것은 어디인가를 알지도 못하고 들어보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늘은 이 목적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눠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S.1 인간은 본래 영광스러운 존재였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은 23절에서 특이한 표현을 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니

사람이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되는가? 다른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하나?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죄를 범한 결과는 생명과 반대되는 개념인 죽음. 사망을 말한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서 특이하게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 하나님의 영광에 핵심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인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인가?

 

창세기의 태초에 죄를 범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어떤 존재인가? 그들은 죄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범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그들에게 부여된 기쁜 삶을 살았더라면 하나님께서 그 크신 영광을 허락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가리고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탓하며 거짓을 말한다.

 

아담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 타락 이후에도 한동안 처음 창조하신 아담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유지된다.

(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6: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노아 이전의 아담의 후손들에게 벌을 내리신다. 사람의 딸들을 보고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보면서 그들의 날이 백이십년, 수명의 단축을 말하신다.

하지만 지금의 기준에서 생각해보라. 120년의 수명이 짧은 수명이냐?

하나님은 인간의 수명이 굉장한 존재로 만드셨다. 창세기 5장의 족보를 보면 알 듯이 이들의 기대수명 평균 수명은 천년을 산다. 노아도 500살에 홍수를 맞는다.

 

대한민국의 기대수명 2020년 태어난 아기의 기대하는 수명은 평균 83.

 

대단하다고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인간에 비하면 그리고 그 인간의 상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천년을 사는 사람의 신체는 80년을 사는 사람의 신체와 매우 다를 것이다. 골격, 근육, 내장기관, 질병에 대한 면역력, 노화를 막는 호르몬, 유전자의 건강도.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인간은 엄청난 존재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창세기의 아담의 후손들은 단순히 몸만 건강하고 강력했겠는가? 몸은 인간이 지혜와 능력을 담는 기반이다.

성경은 가인에 대해서 말한다. 가인은 혼자 성을 쌓아 만든다. 가인의 자손들은 가축을 치는자, 음악과 예술을 창조한자 구리, 쇠 기구를 만드는자로 등장한다.

이들이 가진 지혜는 우리가 가진 지혜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5년만 뭔가를 집중해서 한다고 생각해보면 그것의 달인이 된다. 포크레인 기사들을 보면 감탄을 하게 되는데 아무리 길어봤자 20년 하고 그런다. 그 이후에는 눈이 잘 안보이고 해서 더 기술을 발전시키지도 못한다.

이 사람들은 천년을 건강히 강력하게 살면서 인간이 가진 지혜와 능력을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이 굉장한 수준으로 가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노아 이후에 인간은 완전히 탁월함을 잃어버린 존재인가? 아니다.

수명과 신체 능력이 줄어든 인간. 무력하지 않았다. 이들은 바벨탑을 만든다. 한데 모아서 세계제국을 만든다. 하나님을 대적한다.

인간이 신을 대적하는 국가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명과 신체 능력이 급감해도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드러낸다.

 

타락 후, 홍수 후의 인간이 대단하다면

홍수 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역사적으로 떠나기 전에는 어떠했겠는가?

타락 이전 아담의 능력은? 인간은 천년이 아니라 그 이상을 살았다.

하늘과 땅 바다를 경영하고 동물 식물 천체를 다스리는 보존에 참여하는 존재였다.

아담이 누리는 지혜, 아담의 능력, 신체적 강력함은 지금의 인간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보존은 더 강력함을 말한다. 아담은 아마도 신체적으로도 코끼리, 사자를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교정할 정도의 능력과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S2. 인간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

 

하지만 아담의 능력과 영광을 말하고 그것을 기리기 위해서 이 말씀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탁월함 능력은 우리가 이르러야 할 것이 아니다. 출발점에 불과하다.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를 아들에게 주신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영생이라는 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영생 :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더 구체적으로 이 영생은 뭐냐?

 

S2. 영생은 영원한 생명 정도가 아니다.

영생은 문자적으로만 말한다면 죽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개념으로 영생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탄의 속임수다.

죽음의 반대 정도의 생존 정도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생이다.

 

하지만 우리는 영생을 이렇게 생각한다. 단순히 죽지 않는 삶.

우리 나이가 50살 정도가 지나면 그때부터 노안이 온다. 무릎 관절. 어깨. 소화기관.

건강상의 활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건강을 걱정하게 되는 이유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건강이 나빠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건강을 완전히 잃어버린 삶에 소망이 있는가?

침대에서 누워 생활하는 것으로만 1020년을 사는게 행복한 삶인가?

영생이 아무런 활력과 기쁨과 의미도 없이 따분하고 지루하게 단순히 죽지 않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런 것이라면 그런 영생은 축복인가?

우리가 얻을 천국의 소망을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사탄은 우리의 생각을 곡해해서 천국에 대한 기대와 갈망을 앗아간다. 영생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주는 것이다.

 

어떤 철학자는 찰나의 순간의 아름다움을 쾌락을 기쁨과 정열을 위해서 온 생애를 바칠 수 있다고 말한다. 짧게 살아도 그 순간이 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천국에 가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천국이 그런 곳인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이 그런 것인가?

영생은 단순한 시간의 연장이 아니다. 그곳은 역동적이며 정열적이며 / 이 철학자가 말하는 바와 같은 그러한 최고의 순간들로 가득 찬 곳이 바로 천국이다. 그 철학자가 말하는 경험하는 것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열과 기쁨과 환희가 가득한 곳이 바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영생의 삶이다.

 

과학자들은 미래에 대해 예측하기를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일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영생은 어떤가? 천국은 어떤가?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수도 없는 우리의 사고를 뛰어넘는 전혀 알수도 없는 정도의 것들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여하시는 것이다.

 

S3. 영생은 예수님과의 연합이다.

영생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결국에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이끄신다. 우리를 이 영생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영생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이 영생을 볼 수 있다.

영생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 영육이 하나된 피조물을 통해서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그 영광 때문에 다메섹 도상에서 그것을 쳐다보다가 그 영광과 완전함에 눈이 부셔서 눈이 멀어버렸다. 우리에게 이 영광스러운 영생에 이르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 하나님만이 누리시는 그 특별한 영광. 하나님과의 결코 나누어질 수 없는 참된 연합으로 우리를 이끄시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하심은 이 영광으로 이끌기 위한 구원하심이다.

참 하나님을 아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를 위해서는 그분과의 연합이 필요하다.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 이해하는 것 정도는 아는 것이 아니다.

진짜 아는 것은 존재 자체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알기 위해서 그 사람과 대화하고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와 함께 살며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생활하는 것을 통해서 그를 알게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의 앎도 그분과 연합함을 통해서 안다.

그런데 그분이 영생의 영광을 가지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영광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는 것이다.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하나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S5. 그렇다면 예수님과 하나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분리되어 원수된 자들이 찬송하게 된다.

진실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분을 찬송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리게 된다. 하나님 영광이 이런 요소로 가득차다.

 

타락 전 타락 후의 모습이 아니다. -> 아담의 능력 정도가 아니다.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가진 정도의 것으로 하나님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영적 몸이 되고 인간 본성이 완전하게 되는 구속의 은총과 위엄 감사와 찬송이 가득한 교제와 앎이 일어날 계획을 창조부터 하신 것이고 / 우리 인식의 한계에서는 아직 표현할 수 없는 언어적 한계를 벗어난 그 엄청난 것들로서 우리를 연합시키시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죽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만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 말로 소망이다. 우리가 바라본 유일한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대이다. 우리는 이 영생을 믿는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다.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천국이 필요 없고 이 땅에서의 순간의 그 정열 기쁨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에는 어이없음을 느낀다. 불쌍함을 느낀다. 이런 소망이 있는데 이 소망을 얻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에 연민을 느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런 마음으로 이 땅에서 사역하신 것이다. 이 영생을 경험하시고 이 영생을 주시고자 설명시키고자 전파하시고자 하셨는데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만 아시는 것.

그래서 얼마나 열심을 가지고 그 천국 복음을 전하셨는가? 그럴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없다면 우리 안에 믿음이 소망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생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올 그 소망의 날을 영생의 날들을 연습하며 살아가는 것. 영광을 잃어버린, 영광을 상실해버린 상황에서 앞으로 얻게 될 그 영생을 바라보면서 그 영생의 삶을 그리며 기대하며 그것대로 살아갈 것을 연습해보는 것이 이 땅에서의 삶이다. 그래서 완전하지 않다. 실수 투성이고 실패한다. 하지만 그것에 좌절 할 필요가 절대 없다. 이건 연습이니까 우리가 영생을 바라보면서 시도해도 된다 도전해도 된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래서 실패해도 된다.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영원한 은총들을 다 누리게 하겠다. 다 주겠다는 전제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자이다.

 

심지어는 저 갓난 아이의 작은 믿음이라도/ 예수님 우편에 십자가에 달린 죄수와 같은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어떠한 상태와 관계 없이 이 영생의 소망을 믿는자에게, 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겠다고 그를 주로 고백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다 주시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아무런 댓가 없이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형언할 수 없는 특권이 있다. 하늘의 시민권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적용.1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께서 주시는 이 영생이 무엇인지, 마치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것처럼 살아간다.

그분과의 교제와 감각이 없는 세대로 들어간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싶다. 갈망이 있어야 한다.

아무 변화 없는 예배를 드린다면 주의 말씀을 접할 때에도 큐티를 할때에도 그러한 갈망이 없다면 영생의 삶에 대한 갈증이 없다면 그 사람은 소망이 없는 것.

하나님과 교제의 열망이 있는가? 그분을 더 알고자 하는 그분을 더 깨닫고자 하는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그것이 없다면 / 그것은 죽은 신앙이다.

 

그것은 오해하는 영생의 모습과 같이 단지 죽지 않는 생존 정도의 신앙일 뿐이다. 죽지 못해서 벅벅대며 살아가는 정도의 신앙. 져버릴 수는 없어서 지루함과 따분함과 체념 가운데 아무런 생동력과 생동감과 열정도 없이 / 차라리 죽는게 나은 상태의 신앙.

이것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말하나?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왜 입에서 토한다고 말하나? 신성모독이다. 영생을 모독하는 것이다.

영생을 아는 사람. 영생을 경험한 사람. 영생을 믿는 사람은 안 뜨거울 수가 없다. 실패하고 절망 가운데 잠시 어느 기간동안 어두움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삶은 정열로 가득 찰 수 밖에 없다. 그분을 향한 열정. 그분을 향한 사랑. 그분을 향한 기쁨. 그분을 향한 헌신으로 가득 차서 그분을 찬양하고 노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교제하는 것. 알기를 포기하는 세대.

이 참담한 시대. 진주를 값진 보화를 진흙탕에 쳐 박아두고서 / 썩은 고기를 먹으려 서로 다투는 시대. 이 불쌍한 시대 가운데 우리는 소망을 가진 자이다.

우리를 통해서 이 불쌍한 시대에 소망이 전해져야 한다. 이 불행한 시대 가운데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적용 2. 

이를 아는 자들은 기대하며 인내할 수 있다. 인내는 소망을 이룬다고 말한다. 

죽음이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우리 집에 가는 일이 죽음이다. 세상이 이런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다. 

 

적용 3.

이 갈망을 막는 이 소망을 막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죄이다.

죄는 조금만 있어도 하나님과 교제를 방해한다. 하나님께 돌리는 시선을 멈추게 한다. 우리가 배워 알게 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해 영생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멈추게 한다.

그러나 죄를 피하려는 이기려는 노력만 마음만 먹어도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내 안에 스며들어오는 은밀한 죄, 작은 죄들, 별거 아닌 죄악들을 심각하게 죄를 생각하라. 내 마음의 저의를 바라보라.

내 욕심 몇 개 더 챙기려고 내 순간적 쾌락을 더 늘리기 위해서 천지를 지으시고 영생을 주시는 분과의 교제를 멀리하겠느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함을 믿으며 그 소망 안에서 영원히 즐거워하는 우리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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