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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의 음악을 듣는다

그들의 음색을 듣는다

나의 슬픔을 이들이 노래해주고잇다

슬프다

정말슬프다

아정말슬퍼서정말그렇다

 

시대적 아픔과 개인의 존재적 아픔

그속의 젊은이의 고민 고뇌 그것이 뼈로 사무친다

살같을 후벼판다

갈비사이를 후벼판다

그것은 정말 아프다

날카러워서 숨이막혀온다

 

그것ㄱ이 그들의 노래에대한 기억이다

나는 그들의 노래에 동감한다

그들의 회ㅢ와 고뇌

사랑 불같은사랑 그것을 꺼내들고싶은 갈망

그것이 그들의 음악에 잇다

 

현실에 안주하고싶은

지쳐서 그만하고싶은 마음과

쓰러진자신에대한 미움과 분노 자책

이것도 저것도 안되는

그야말로 갈등의 상황

 

그것이 그들이 표현하고자하는 마음이다

나는 만약에

가수가된다면

싱어송라이터가된다면

그들과같은 글을쓰고 노래를 할 것이다.

 

나는 그런노래밖에 하지 못한다

정말로 나는 이제 그런노래밖에 하지 못하게되었다.

 

그속에서히미하게보이는희망이라는빛

그것을붙잡으러가는것이다

 

당연히 사람들이생각하는그길과는다를수박에없다

좁은문으로가는길은 정말 좁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살았던 삶이며

내가 살아가고싶은 삶이다.

그런 삶에 나의 청춘과 나의 노년을 바쳐야할것같다

30세의 그리스도와같이

자신의 불꽃을 남김없이 태워버리고 살아가야한다

 

정말그렇다

나는 나의 모든 것들을 불태우며살아가야한다

정말로 나는 그렇게 살아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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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두 아들

 

목사인 아버지

형은 아버지의 말에 순종한다.

동생은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다.

형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그 길로 가면서 정도를 걷는다.

하지만 동생은 집을 나가 방황하며 지낸다

 

동생은 성직자들이 믿는 하나님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을 찾길 원한다.

그런 동생을 부모와 형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형은 그런 동생이 한심스러우면서도 반면 부럽다

 

형은 잘나가게 된다.

하지만 형은 동생에게 부러움을 느낀다고 고백하게 된다.

 

주인공은 이웃 아이

부모에게서 그 형제의 이야기를듣고 자신이 그 형제들에게 듣는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진정한 하나님이 무엇이가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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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우선되어 살지 못하는 이유


1 율법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령이 이미 임재하셔서 모든 것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없고 그냥 성령이 행하시는 것을 받아들이고 가면된다.


2 도덕적 판단이 우선한다

하나님보다 자신의 도덕 판단이 우세한다 성경에 말하는 것 그리고 영적 리더가 하는 것을 자신의 도덕적 기준이 잣대가 되어 판단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바위를 쳐서 물을 얻은 것을 가지고 도덕적 판단을 한다 그러나 고린도후서를 보면 그 반석이 예수님을 가르킨다



3 자기 생각 가치관 철학 등이 우선한다.

자기 생각이 더 우선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계획 생각들이 우선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요약하면 자신이 하나님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가 그것이 자신을 드러내서이거나 자신을 부정적으로 내세워서든지간에 말이다

무튼 이런 모습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편하게 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완전히 내려놓고 성령의 일하심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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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은 제사장의 아들이었으며 여호야긴 포로된지 5년에 삼십살이었으며 마지막 신탁은 여호야긴 포로 27년으로 보아 22년동안 최소 사역했음을 알 수 있다그의 제사장 가문 출신은 성전 및 성전에서의 제의에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드러난다제사장들은 삼십세쯤부터 사역을 시작했으나 포로생활을 했기에 제사장의 직무를 할 수 없었고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이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멸망을 선포하시고 계획하시고 감독하실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상류 계층 출신들로서 과거 선지자들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집단이었으며 포로생활 후 부귀한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그들은 에스겔에 적대적이었으며 무시하였다.

 

문학적인 분석

 

이사야서스바냐서칠십인경 예레미야는 모두 선지자 자신이 살던 시기 심판과 관련된 신탁으로 시작되고 이방 나라들의 방대한 신탁을 나열하고 먼 미래에 대한 축복의 예언으로 끝나게 된다이 선지자의 부름에 대한 기록 및 예루살렘의 임박한 멸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예루살렘의 화에 대한 말씀들은 에스겔의 아내가 죽기까지 되었고 이 소식이 포로로 잡힌 자들에게 전해질 것을 예고한다그리고 주변 나라들의 신탁들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멸망을 예언한다이러한 이방 나라들에 대한 예언 후에는 이스라엘의 축복된 미래에 대한 묘사를 한다에스겔 선지자가 파수꾼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개인의 도덕에 대한 설교아내 죽음과 벙어리 시절의 마감으로 시작된다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에스겔 초점은 미래 도성과 하나님 백성에 맞추어진다에스겔 벙어리 생활 기간은 많은 논쟁을 가져왔는데 그는 완전한 벙어리는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할때만 말을 했다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그의 입을 여셨고 축복과 소망의 이야기를 남겼다선지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백성을 대표했으며 기도했다에스겔의 벙어리는 자기 민족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예루살렘의 멸망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그러므로 임박한 멸망에 대한 선언만 있었다.

에스겔서에는 많은 알레고리적 본문들이 있다이러한 것들에 대한 문자적 해석이 난무하였었다군사적 긴장과 에스겔서의 구절을 직접 연결시키려고도 하고 있다메섹과 두발왕 곡이 모스크바와 토볼스크로 연결시키거나 해서 러시아가 중동의 나라를 침입한다고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것을 얘기할 때에 북방에서 오는 적들은 전통적인 적들을 의미한다그러나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는 초역사적이고 묵시적 색채를 가진다하나님 나라 백성에 대항하는 모든 나라들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를 하는 것이다자신과 자신 동료 포로들이 잡힌 바벨론의 심판은 담지 않는다이런 오해는 재건 공동체와도 연관되는데 예루살렘 귀환이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니게 이루어졌으며 에스겔이 묘사하는 성전은 실제 지어지지 않았기에 미래의 성전에 대한 청사진과 세부사항을 준다고 주장한다이는 문자적 해석을 초월하는 것이며 본질상 상징적 성격을 가짐을 중시하고 전체 이상이 하나님께서 백성을 미래에 어떻게 축복하실지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이러한 초월적 경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다니면서 새로운 성전으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때에 성취되었다새로운 성전에서의 제반 사항들에 대해서 에스겔은 오경의 것과 다른 부분이 있으며 사적인 성격이 강하다이 책을 읽을 때에 에스겔의 감정에 몰입하게 된다일인칭으로 쓰인 유일한 선지서이라는 것도 연관된다에스겔은 책 전체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인자라고 불리우는데 인간이라는 연약함을 부각시켜주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에 비교된다다양한 문학 양식이 사용되기도 했는데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많은 장르들을 사용한 것이다에스겔의 상징행위들은 다른 설교들과 마찬가지 효과를 가지면서 제시되어지고 있다.

 

신학적인 메시지

 

하나님의 거룩성과 초월성 – 에스겔에서 하나님은 피조물과 선지자 자신을 초월하시는데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상을 보았을 때에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을 보았다고 말한다이는 실제 보는 것에 대한 암시를 피해가는 수단이었다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이스라엘의 죄를 목도할 수 없으셨고 죄를 간과하지 않으심이 보여진다이스라엘은 반항적이었으며 우상을 숭배했다정화된 하나님께 준종하는 남은 자들을 배출하실 것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을 어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약속들을 새롭게 물려받고 회복을 통해 그들 가운데 다시 계실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성 –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나라들의 정사와 운명을 지배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전 안쪽의 것에 갇히신 분도 아니다모든 나라들은 그의 명령을 수행하며 선지자들의 말을 통한 말씀들은 실현될 것이다그 말들의 진정성을 증명하는데 하나님의 인정의 문구가 등장한다에스겔의 말씀을 성취하심으로서 자신과 자신의 선지자를 변호하시는 것이다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의 능력부족이 아니라 뜻하신 바이기 때문이고 회복도 약속으로 동일하게 보여질 것임을 알 수 있다.

개인적인 책임 – 포로생활은 하나님과 그의 율법에 반역한 지난 세대들의 축적된 죄악으로 일어난 것이다순종과 불순종이 가져오는 개별적 결과들을 강조했으며 하나님이 조상들의 죄 때문에 자신들의 세대를 벌한다는 것에서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지 않는 간과하고 있다포로 시대의 죄들 역시 예루살렘 멸망에 기여했으며 이런 접근태도 정상성을 위해 역사를 새로 기술한 것이다.

 

신약으로의 접근

 

이 책을 단순화 시킬수는 없으며 요약하기 어렵다초대 교회는 에스겔의 예언 속에서 자신들 시대의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된 동일 원인들을 찾아내었으며 교회는 자신들의 회복의 약속들의 후사라고 보았다회복에 대한 에스겔의 이상은 하나님의 새로운 도성이 처소와 그의 백성 영원히 함께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요한의 묘사에 바탕을 제공해 주었다에스겔 시대의 이스라엘과 초대 교회 및 이스라엘의 상황과 역사적으로 비슷한 모양을 가지는데 에스겔서의 많은 다른 주제들과 모티브들은 신약에서 발전된다에스겔의 강물의 제단 남쪽 흐르는 것이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인 말씀에서 생명의 물의 근원으로 연결된다과실나무들이 열두번씩 과실 맺는 것을 에스겔이 본 것은 예수께서 끝없는 추수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게하는 것과 연관된다.

에스겔은 거짓 선지자들이 이익을 노리는 것에 비난했으며 그들을 모세와 대비시키고 있다예수께서는 모세보다 큰 선지자이시며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서서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시고 있다회복에 대한 이상에는 영광스런 성전이 포함되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함께하시는 것으로 상징되어진다이 성전은 너무나 크고 장엄해서 이상을 통해서만 표현할 수 없다이는 에수께서 성전으로 존재하셨을 때 우리가 영광스러운 분으로 묘사한다이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을 때 두 번째 성전에 임하는 것이다.

 

 

 

 

 

다니엘서

 

다니엘서는 양면적 성격을 가지는 책인데 단순한 책이기도하고 복잡한 책이기도 한다전반부는 인기있는 간단한 주제들이고 후반부는 복잡한 이상의 논쟁이 있다수많은 논쟁의 원천이 되어왔는데 그 역사성과 예언에 대한 해석의 경우가 그러하다여러 부분들이 신비로 남아있다.

 

문학적인 분석

 

다니엘서에는 궁정 내러티브와 묵시적 예언의 두 장르가 두드러지고 있다이런 구분의 특징은 히브리어와 아람어 부분 구분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궁정 내러티브 – 다니엘서 전반부는 다니엘과 세친구의 이야기에 초점을 둔다이 궁정이야기의 다니엘서 1-6장의 배경을 제시해주고 있으며 이방 궁정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것에 초점을 둔다. 5장의 경우 궁정 내 경쟁 이야기의 구조를 보인다다니엘은 여러 갈등을 격고 영광의 자리로 승진한다이런 식으로 파악할 때에 성경 본문과 성경외적 문헌들과 연결성을 보게 된다이 이야기들의 공통적 기능으로는 교훈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하나님의 백성이 압제자에서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것이다이것들을 궁정 내러티브로 보는 것은 역사적 측면에서 저자의 의도를 의문으로 남겨둔다허구적으로 부르면서 결론을 대변해 준다역사성의 문제는 장르 파악에 의해 해결될 수 없으며 비역사적인 것으로 해석을 선호하게 된다초자연적인 것과 미래적 예언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성경적 세계관을 받아 본문을 역사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에 방해되진 않는다.

묵시적 예언 – 다니엘서의 전체적 성격은 보통 묵시적 예언으로 간주되어지고 구약에서 아무런 논란없이 묵시문헌으로 간주되어지는 것은 이것뿐이다구약의 다른 본문들등과 같이 묵시적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그러나 이런 것의 난점은 장르의 정의의 의견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장르에 대한 전통적 접근방법은 본문 내에서 본문을 묵시로 규정 짓도록 하는 특징들을 추출해내는 것이다종말론의 특정한 종류 역사적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억압받는 자이에 마지막 때의 승리를 바라보게 하는 종말론과 연관된다이런 맥락에서 묵시문학이 특정한 종말론이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계시임을 나타낸다묵시문학의 다른 접근 방법은 묵시문학의 본질적 특징은 내러티브의 외곽틀중개된 계시종말론적 내용들로 나누어 되어 진다이렇게 묵시문학은 독립 범주로 다루어지고 있지만 장르의 구성에 대한 확실한 일치는 존재하지 않으며 선지문헌과 구분 짓는다는 점이 있다이러한 묵시문학과 선지문헌을 너무 단순하거나 예리하게 정의하려는 것에서부터 난점이 발생하는데 장르는 결국 사물들 속 내재되는 엄격한 범주가 아닌 경계선이 겹치는 유동적인 문학 사항이며 유동적 관계를 인식하면서 후자의 정의의 장애를 극복하는 것으로 선지문학과 묵시문학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즉 묵시문학과 선지문헌들의 공통특징들은 자주 발견되지만 후자에는 덜 나타나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1.협의의 종말론 – 묵시문학은 말세를 바라보는데 모든 억압을 그치는 시대를 바라보며 항상 계신 자에게 구름 타고 오시는 인자는 자기 백성을 억압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시는 것이다. 2. 중개된 계시 –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이 백성에 가져다주는 존재이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면서 유다 백성에게 그 전달한 사명을 받는다이 백성이 그 말씀에 어떤 반응을 보이면 선지자는 다시 새 말씀으로 돌아간다새로운 요소로서 중개자를 통해서 다니엘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두 번째 종류의 계시 중개는 여행을 통해서 천상적이고 종말론적인 것을 계시한다. 3. 보기 드문 상징들 – 기타 묵시문학적 책들에는 상징들이 상당히 사용되는데 묵시문학의 상징은 경이적이다악은 가장 기괴하게 묘사되면서 혼종 동물로 표현된다이런 상징 표현들은 이방 종교에서 자주 발견된다. 4. 억압이라는 배경 – 묵시문학은 억압받는 사회나 그런 게층의 산물이다신약에서의 묵시문학의 대표인 계시록도 그렇게 표현된다억압은 묵시문학 속 만나는 악에 대한 묘사와 구원을 향한 부르짖음을 잘 설명해준다소망을 통해서 다니엘은 억압당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것이다선지자들의 묵시문학 저자 간의 차이는 선지자는 위안을 누리고 있는 자를 공격하는 것이고 묵시문학 저자는 고통당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는 것이다묵시문학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용사로서의 하나님이고 강하게 개입하신 것을 고대한다. 5. 역사에 대한 결정론적 시각과 주도적인 낙관주의 – 고전적 선지서 기능으로 하나님 백성에게 다가오는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며 회개를 촉구한다반면 다니엘은 심판을 확정적으로 말하며 예언은 남은 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그러나 절망이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이 확실하며 이것에 소망을 두는 것이다. 6. 가명성과 사후 예언 – 묵시문학들은 사칭된 이름으로 쓰인 경우가 자주 있는데 여기에 대한 여러 의견들이 있어왔다. 7. 함축된 의미들과 기원들 – 다니엘서 후반부에서는 묵시문학과 연결 짓는 특징이 있다그러므로 상징적 표현들에 민감해야 하며 이 표현의 기능인 바벨론이 망할 것이라는 글보다는 그런 비유로 그런 믿음을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많은 상징적 표현들은 묵시적 시간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금한다마지막 시간을 산출하고자 하는 것은 본문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며 묵시문헌이 사용하는 비유법 성격은 고대 근동 신화로 차용될 것들에 대해 점검하게 된다장르 파악 작업은 다니엘서를 하는 것이다이런 장르 파악은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계시록 관계를 부각시킨다성경의 묵시문학적 기원을 따라가는데 이 기원은 예언된 전통이고 지혜 문학의 영향에서 나온 경우도 있다.최근 연구는 다니엘서가 후대의 책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묵시문학적 글들이 존재했으며 고대 근동 문헌과 연관됨을 보인다.

 

언어 – 두 가지 장르를 사용하는 것 외에도 두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아람어 부분은 왜 2장에서 했는데 그 의미와 기원이 주신 선물인데 내가 갑자기 가야하는 것이다다니엘서를 읽을 때에 유념해야 할 것은 이 책의 압제 시대의 모습에 대해 의논하게 된다.

합축된 의미들과 기원들 – 다니엘서 후반부는 묵시 문학적 요소을 드러낸다메신저로부터 상실들에 대했는지 아시고 말씀하시는데 이 목적은회개가 아니라 신실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이런 다니엘서를 이해하려면 먼저 상징성을 점술적인 지혜 순종들로 왔다는 것을 주장한다성경의 묵시문학 기원은 예언적 전통이락 할 수 있다.

 

언어 – 다니엘서는 두가지 아이디어를 사용하고 있다그렇게 광명위하게 순종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고 하다고 파악된다성경이 원래 보는 그대로라는 사실은 의심하는 역사는 없겠으냐 다니엘의 아람 부분이 히브리어 원문을 변형한 아람어라는 주장을 찾을 수는 없겠느냐는 이 책이 가지는 목표와 연관된다이런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지만 원래적 통일성은 아니더라도 최종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게끔 하는 것이다.

문체 – 다니엘의 문체에 대해서 높은 점수를 주지는 않는다언어 및 장르가 혼재되어 잇다는 점 외에도 인물들의 성격 묘사가 현대 기준에서 심오하지 못하는 등 구약의 어느 부분으로 볼때에 심오하지 모하며 이차원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내러티브 속에서 어떤 신앙적 의심과 죄를 저지르지 않고 이상적 의인으로 제시된다인물 묘사는 이방 통치자들의 종교적 입장에 의문을 가지게 하고 본문이 우리에게 이상적 모습을 제공해준다고 해서 비역사적 기록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화는 왜곡과 위조의 선별 가능이다다니엘서의 다니엘에 대한 묘사는 역대기 서술몬에 대한 묘사와 연관되면서 우상 선베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체를 의미한다고 한다다니엘서의 전반부의 이상화된 등장인물에 대한 에피소드적 플론이 분명히 없으며 히브리적 산문으로 어렵다는 점도 있다그럼에도 단순한 플롯들이상화된 인물 등을 통해 미래의 소망의 원천을 발견하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다니엘서의 통일성 – 다니엘서는 다양한 장르와 언어를 보여주기에 책이 원래 통일성 문제가 있는지 논쟁되어왔다현재적 주석들은 첫째와 둘째 부분에서 이 책의 통일성을 옹호한다통일성이라는 용어는 최종적인 본문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같이 복합적인 본문이지만 현재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며 정경적 모습에 해석되어지는 것이다그러나 보눈의 원래적 통리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여전한 관심사이며 본문의 주장에 따라서는 더욱 그러하다그러므로 본문의 통일성은 연대 및 저작권의 문제와 얽혀 있으며 다니엘서가 내적으로 주장하는 다니엘의 저작권은 전반부는 그가 하나의 대상이고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할 근거를 제시했었다단일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러다도 이것이 꼭 지켜져야만 저자가 할 시기에 따라 나오게 되는 것이다본래 통일성에 대한 질문을 가지는 것은 여전한 관심이고 통일성의 문제는 복잡히 얽혀있는 것이다단일 저작권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한번에 다 썼음을 의미하는지 논란이 되는데 통일성의 의미는 한 시기에 다 쓰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모든 사람이 만족할 통일성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불가능하며 책의 주제는 전체를 통해 일관성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이 한 책에서 한가지 이상 장르를 쓰는 것은 통일성에 진정한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며 뚜렷한 교차대구법적 구조가 이상들이 시작되는 장들과 이야기를 연결시킨다정경상 통일성의 또 다른 문제는 70인경에 세 개의 다른 이야기들이 더 존재한다는 것으로 외경에는 발견된다이 세 이야기는 다 재미있고 교육적 목적을 가지는데 역사적 전통을 보존하지는 않으며 주제적 통일성을 가지지 못한다.

 

신학적인 메시지

 

다니엘서 신학적 메시지는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시며 결국 모든 인간적인 악들을 이기실 것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이방 통치자들에 대한 본문은 대부분 호의적인데 다니엘과 세친구의 하나님 백성은 실제적 위협에 처해있으나 이 등장인물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며 구출하시고 증가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다니엘을 사형에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지만 하나님은 악을 정복하시고 정의를 가져다주실 권세가 있으신 것이다그래서 압제의 시대에 어떻게 처신할지 하나님 백성에게 말해주는 지침서의 역할을 한다전범적 지혜서인 것이다다니엘서 후반부에서는 박해속 사는 하나님 백성에 대해서 말하는데 하나님의 구원은 미래의 소망이다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돌볼 것을 믿고 순종적이었다그리고 여기서 악의 잠재성을 강하게 묘사하는데 노하는 바다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고 네 짐승으로 표현된다이러한 짐승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인간의 악이 강력하고 기괴한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결국 그리스가 로마에 무너짐을 알게 된다다니엘서는 이 끔찍한 인간적 악의 기원이 무엇인지 말한다인간의 교만이 이런 원인임을 말해준다다니엘은 단순히 악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혼돈에서부터 점령해 나가는 것이다예부터 항상 계신 이에 대한 그림에서 첫 번째 사항은 이 모사들이 모사의 형상으로 되어있다이러한 인간적 모습으로 묘사는 인간의 악의 영역에 대해 묘사할대 짐승적 이미지와 대조되며 그 점을 크게 각인시켜준다스스로의 교만에서 하나님을 배척하고 자신에게 힘을 끌어 오려는 인간들이 존재하는데 다른 한편에선느 악한 이 나라 사이의 전쟁이 하늘과 따의땅의 영역인데 하하님의 나라 사이 이런 전쟁이 하늘과 땅에 동시에 있음을 말한다다니엘은 하나님 나라 승리가 될 것임을 전했고 이 승리는 확실하고 완전한 것이다다니엘의 메시지는 구약 전체의 메시지 성경 전체의 메시지와 잘 맞고 하나님은 악과 전쟁을 치르더라도 승리하실 것이며 남은 자들을 위로하셨고 오늘날도 그렇다는 것이다시간에 관한 숫자들은 상징의 문맥에서 나오는데 묵시적인 시간 단위들은 단지 다니엘과 그의 백성에게 중요한 진리들을 전달하는 틀을 제공하고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으로의 접근

 

그리스도의 승리는 예견된 것이며 재림에 완성되신다이 미래 승리를 다니엘서를 자주 인용하면서 밝혀진다계시록은 다니엘서에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오셔서 이 세상 악을 제거하고 구원하심을 고대함을 말해주면서 위로를 준다.

 

 

 

 

 

 

호세아서

 

호세아서는 처음의 세장 내용이 잘 알려져 있는데 결혼과 이스라엘과 하나님 관계의 유비를 만날 수 있다이 해석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사랑에 대한 호세아의 메시지는 명쾌하다나머지 장들은 많은 난점들을 가지지만 이런 난점들을 파악하면서 시도해야 한다.

 

문학적인 분석

 

장르 및 연설의 양식 – 호세아서는 예언적 신탁들의 모음집이다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책 표제는 장르상의 표시를 한다산문으로 된 두 개의 신탁을 제하고는 대부분 운문으로 되어있다. 1-3은 신탁들을 개관하고 4-14는 구원에 관한 내용을 심판에 관한 내용으로부터 어조에 따라 구언해낸다특정한 심판 신탁들이 구체적으로 세분화해서 구분하기는 어렵다하나님의 일인칭 연설과 삼인칭 연설이 혼재되어 있는데 하나님과 동일시되어 구분해줄 필요가 있다.

 

구조 – 처음 세장은 문단 구분이 가능하지만 나머지 11장은 대략적으로 개관된다. 1-3과 4-14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되는데 처음에는 결혼에 대한 유비가 지배적이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여러 비유가 사용되고 있다. 11-12 사이에 구분선이 있다고 보기에 가능한데 심판에서 희망으로 전환을 담는다.

 

문체 – 중요한 산문부분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주로 시적인 문체를 가진 책이다주로 직유와 은유들이 나타난다그 비유적 표현들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관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하는 것으로도 구분할 수 있다북왕국을 불신실한 아내로 묘사하고 있으며 남왕국도 가끔 그렇게 묘사한다언어 유희를 활용하면서 호세아의 자녀들인 이스르엘은 죄로인한 벌로루하마는 긍휼이 없다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난다.

 

신학적 메시지

 

언약 – 모세 언약이 호세아의 배후에 깔려 있는데 축복과 저주들이 모세 율법의 축복과 저주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심판의 연설들과 언약 저주 사이 존재하는 연결점들도 있는데 기근과 불임에 대한 언약의 저주로부터 나온 것이라 한다자신의 메시지에 언약이 차지한 위치를 명시하기도 한다.

호세아의 결혼 – 호세아의 결혼이 상징-신학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결혼이란 주제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을 처음으로 연결시킨 것이다배타성을 가지는 유일한 관계는 결혼과 언약이다여기서 경쟁자는 용납될 수 없다고멜의 성적 방탕은 이스라엘의 방탕과 상응하는 것이다최근 여권신장적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본문 자체 시각에서 벗어난다.

심판과 구원 – 불순종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및 구원의 소망은 언약의 토래로부터 흘러나온다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여러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그 배후에는 배교행위가 갈려있는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도 그러했다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지식이 없기 때문이었으며 하나님보다 외국과의 연합을 선호하는 것으로 드러난다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시기로 경고하시는데 역사적 전통에 따라 광야로의 회귀와 동일시된다하지만 미래에 대한 소망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심판과 포로생활에서 영원히 남도록 버려두지 않으시고 두 번의 출애굽과 회복을 경험케 하실 것이다.

 

신약으로의 접근

 

신약에서는 호세아로부터 나온 중요 구절들이 인용되어 있다호세아 자녀들의 이름을 부정적이거나 긍정적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그러나 예수께서 아버지께 불순종한 이스라엘과 달리 의로운 하나님 아들이었다고 믿는 신앙에서 이해되어진다그래서 출애굽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호세아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으로 흘러가는 주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이 인간 결혼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주제를 기독교적 시각에서 발전시킨다.

 

 

 

 

요엘서

 

구약에 요엘이라는 인물은 12명이 더 있지만 이 선지자와 연결시킬 수는 없다표제에 다른 정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당대 잘 알려진 사람일 수도 있다예루살렘 주변에 살아서 성전을 잘 알고 예배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문학적인 분석

 

요엘서는 전체적으로 국가적 애사에 사용할 목적을 가진 에전적 문학이거나 역사적 본보기임을 보인다이런 관행에 대한 예들을 제공해주는데 재난이나 군사적 위협이 있을 때에 성소에모여 금식하는 것이나 탄원의 기도로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다이 책이 성전 예배 한 부분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면 다른 상황에서도 사용되어야할텐데 역사적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예배에 사용될 경우가 줄어든다죄의 고백과 관련되어서도 본문의 비역사화를 보면서 회개를 촉구하지만 특정 죄가 무엇인지 언급하지는 않는다예배에 사용되는 문헌은 덜 구체적일수록 용도의 범위가 넓어지는데 이런 면에서 연대를 파악하기 힘들고 비시간성이 우리 시대에 영향력을 가짐을 설명해준다요엘서의 통일성은 두움을 통해 두 명이상의 사람에게 저술이라고 파악되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약간의 중보부분은 있으나 한 저자로 보고 있고 애가적인 문학 구조를 가진다는 것에서 도출된다.

1장 메뚜기 재앙과 2:1-11의 관계는 논쟁거리였는데 그 접근방법은 1. 2장이 단지 1장과 동일한 메뚜기 재앙이지만 1장이후 뒤이은 역사상 실제 메뚜기 재앙에 대한 또 하나라는 입장인데 이는 은유적 성격을 무시하고 메뚜기들을 하나님 군대로 서술한다. 2. 2장이 이스라엘의 전통 적중 하나인 외국 군대의 예견된 침략을 표현하는 것이거나 모든 적들을 알레고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이 접근법에 따르면 메뚜기 재앙은 실제 적에 의한 더 큰 침략의 전조이며 그 침략의 결과로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것이다심판 받는 것은 이방 군대이고 유다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게 된다요엘서와 관련해서도 다른 강력한 나라와 관련된 승리가 연관되어 있음과 생각해볼 수 있으며 북에서 오는 군대들인 앗시리아 및 바벨론 관련으로 재사용된다그러나 본문상 다른 요소들은 실제적 군대에 어울리지 않으며 실제 군대에 대해 말한다면 군대와 비교하기 어려울 것이다. 3. 현대 주석들이 지지하는 접근은 메뚜기 침공의 두 번째 묘사가 메뚜기 재앙에 바탕을 두고 확장한 것이므로 악에 대한 성전에서 심판에 대한 전조로 사용된다역사상 어느 특정한 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군대로부터 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현을 묘사하는 것에 광범위하게 사용된다이런 은유적 성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군대는 인간의 군대처럼 표현된다결론에서 유다에게 재앙에서 구원할 뿐 아니라 말세 심판에서 해방할 것을 약속하신다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피난처가 되실 것이다선지자가 묵시론적 위험의 제거에 이런 많은 것들을 할애하는 것은 메뚜기 군대에 대한 그의 두 번째 서술이 묵시론적 위험이 시작된 것임을 시사한다이러한 접근방법들은 두 기록 사이의 이해에 중요하다그러나 마지막 접근 방법이 가장 잘 파악하는 것이며 요엘서가 예전적 문헌이라면 이 책의 모호성은 이 상황과 다른 상황에서 사용되고 적용되어지는 작용을 하며 고의적인 모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적인 메시지

 

요엘은 하나님의 주권거룩하심자비에 대해 설파하면서 하나님은 선민의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드러낸다메뚜기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을 꾸짖고 회개하게 하려는 것이다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더 큰 재앙이 올 것이며 하나님의 개입으로 구원되는 소망을 가지는 많은 경우와 달리 냉소적으로 요엘은 말한다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다른 선지서들의 이방 나라 신탁과는 다르게 여호와의 날에 악에 대한 보편적이고 종말론적이며 결정적인 우주적 전쟁에 대해 다룬다열방들에 대한 이런 심판의 날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회개하고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인자와 자비를 보이시는 날이다.

 

신약으로의 접근

 

교회 역시 요엘을 통해 이스라엘에 주어진 하나님의 메시지를 필요로 하고 이는 여전히 진실이다구약에서 하나님은 힘을 주고 예언을 가능케 하신다요엘은 하나님께서 모세기도를 들으시고 예언을 내다보았는데 베드로는 오순절을 통해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게된다이 임재의 불은 언어를 권능있게 하는 것이다고대 이스라엘의 사회 서열에서는 높은 위치의 유대 남자들이 기도할때에 노예나 이방인이나 여자로 태어나지 않음에 감사를 드렸는데 요엘은 예언의 능력이 남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젊은이들노예들에게도 주어짐을 보인다이 만민은 유다 시민들만 말하는 것이지만 이스라엘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만큼 이 장벽도 무너진다모든 사람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며 요엘은 이스라엘만 말하지만 바울은 육신의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이스라엘에 적용된다고 말한다옛 선지자들에게 권능을 주었던 바로 그 신이 교회에도 권능을 주시고 거 증거의 권능을 부여받았다그래서 믿는 자들의 모든 제사장직을 말한다하나님을 부르거나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하는데 오순절 베드로 설교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

 

 

 

 

 

 

 

 

 

 

 

 

 

 

 

 

 

 

 

 

 

 

코멘트

 

에스겔에서는 상징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예언을 드러내고 있다이러한 상징 행동은 굉장히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예언을 드러내고 그 뜻을 함의하고 있다하지만 이런 상징행동을 실제로 에스겔이 했을 때에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고민하게 된다상징 행동의 내용들은 굉장히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며 정상적이지 않다에스겔은 아마도 그런 상징행동을 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하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행동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으로도 파악될 수도 있지 않을지 고민하게 된다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에 빠져서 심판의 날에 임하고 있었다그런 그들에게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드러낼 수 없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그러므로 이런 방법을 사용해서 정말 듣게끔하도록 유도한 것이 아닐지 고민하게 된다또한 에스겔이 벙어리와 같이 지냈고 하나님의 말씀을 할 때에만 말했다는 것은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는 듯 보인다.

 

요엘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지에 대한 것들을 찾아볼 수 있다특히 유대인들에게 국한되는 한정적인 예언의 성취가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백성들에게 해당하는 예언의 성취에 대해서 들여다보게 된다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에 대해서 보게한다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구속하시는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신다그리고 그 부어주신 영으로 하나님을 따라 살며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이를 생각할 때에 이러한 영을 주심은 구약에서의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따르는 모든 구습에서 벗어날 것을 위한 것이기도 함을 발견하게 된다하나님의 영은 살아 움직이시기에 영향력이 있고 사람에게 실제적 영향을 끼친다물론 구약의 하나님께서도 주권적으로 개입하시지만 신약에 이르러 성령을 받은 신도와 같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하는 부분은 신약에 들어서 더 늘었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그러므로 이러한 영을 이미 예언적으로 시사하고 계셨고 이 예언을 사모하며 우리에게 실현된 하나님의 영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그 뜻에 맞추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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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서

 

문학적 구조

열방들에 대한 신탁

아모스는 일곱 나라에 대한 예언적 심판의 말씀을 전하고 마지막에 가서 이스라엘의 심판을 말한다이를 지리적 교차대조법으로 나타내고 있다이방 나라들은 주로 전쟁에서의 죄악들 때문에 질책을 받는다열방들에 대한 아모스의 신탁들이 신화적 모티브를 결여하고 있는데 아모스의 신탁들은 이스라엘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된 수사학적 기법이다청중들은 다른 나라들의 비판에 동조하다가 그 비판이 자신의 발등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긴박감을 이루다가 절정을 이루게 된다적국에 대한 비난의 신탁은 이스라엘의 덫이 되는 것이다아모스가 어떤 도덕적 권위에서 이런 심판을 말하는지 논쟁이 있었는데 아모스는 보편적으로 인식된 강령들에 호소하고 있다아모스의 배후에는 도덕적 전제들이 폭넓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말씀들

3-6장의 아모스는 다양한 문학 양식들을 사용한다특히 선지자적 소송의 양식을 사용한다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고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법정 대리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조약 관계하의 종주가 대리인을 보내 자신의 언약 관계의 속주에게 의무사항을 깨우고 지적하는 것을 의미했다이것의 배경은 재판정이다이런 요소 중 많은 것들이 아모스에서 발견된다검사와 피고가 소개되거나 과거에 대한 간략 역사와 파리가 언급되거나 한다이런 선지자적 소송 외에도 심판의 연설들과 저주의 연설들을 사용한다.

 

이상들에 대한 기록들 7-9

아모스는 다섯 개의 이상들에 대한 자전적 기록을 제공한다처음 네 개는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에게 대상이나 사건을 보이시고 대화가 있다마지막에는 하나님 자신을 보이시고 대화가 없다처음 네 개 이상들은 연결되고 집단 구조를 가진다처음 두 개는 아모스와 하나님의 대화다음 두 개는 재앙들을 돌이키실 것을 간청하는 것이다다음 두 개는 이상의 내용을 돌이킬 수 없으며 다음 두 개는 설명을 필요로 한다다림줄은 백성의 불순종과 대조되고 과일 광주리는 종말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구원의 신탁이 갑자기 주어지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이 나라는 다시 세워지고 회복을 즐길 것이고 이스라엘은 회복된 에덴 동산이 될 것이라고 한다여기서 통일 왕국이 재수립 될 것에 대한 희망을 품는 것으로 보인다아모스는 자신의 신탁에서 다양한 문학 기교를 사용하는데 농사에 대한 비유적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것은 그의 배경을 반영하고 구조상 반복이나 수사 의문문어구 반복을 많이 사용한다.

 

신학적인 주제들

 

하나님 주권과 심판

역사의 흐름을 하나님이 지배하심을 다른 선지자들과 공유했으며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벌하시기로 결정하였음을 선언한다이런 주권적 통치와 심판을 다른 사원에서 보면 먼저 인격적신적 차원에서 심판의 주도권을 취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다둘째는 창조의 차원이다셋째는 도덕적 인과관계의 차원이다넷째는 정치적 역사 시각이다.

우상숭배와 사회적 불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아모스의 메시지는 우상숭배와 사회적 불의의 영역에 대한 것이다당시 우상 숭배는 흔한 일이었고 율법의 중요 요소들을 상실했다여로보암 2세하의 정치 군사적 성공은 번영을 이끌어 부유한 상류층을 창출했다이들은 가난한 자를 핍박했고 하나님은 이들을 보호하시고자 하셨다그들은 결국 노예로 삼은자는 노예가 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고통을 당하고 공의를 명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언약과 남은자

아모스는 초기 성경 비평학이 묘사한 것과 같은 급진적 개혁가는 아니었다언약의 존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그는 새로운 종교적 사고를 받도록 한 것이 나이라 옛 길을 택하도록 촉구했다여호와의 언약에서 구속 받은 나라라는 이스라엘의 지위는 언약을 따르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이것에 실패했고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왔다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성 때문에 죄를 심판으로 대응하시고 이 심판을 통과하고 계속된 하나님의 백성의 핵이 되는 자들이 항상 존재한다이들에게 새롭게 약속을 상속받는다.

 

여호와의 날

보통 여호와의 날이 이스라엘의 적에게 심판을 행하는 날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모스는 이를 뒤집어 이스라엘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다여호와의 날이 종말론적 개념이 아니라고 보기도 했지만 종말론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우주적 종말에서는 여호와의 날은 아마 종말론적인 것이 아닐 것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개입하시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아모스의 것은 종말론적이다.

 

하나님의 말씀

아모스는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효력에 신념을 가진다하나님의 말씀에 땅이 반응하고 사자의 울음은 반응을 일으키시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하신 말씀을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약으로의 접근

신약은 사회 정의 및 가난한 자들의 학대에 대한 아모스의 관심을 공유한다교회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해서는 안되고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특별 관심 대상이다예수께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심을 보이셨다아모스서는 신약에 구체적으로 인용되는데 바울의 권면과 스데반의 인용사도행전의 인용 등이다사도행전의 실제 구절을 확정짓기는 어렵지만 이방인들을 교회 속에 포함시키고 이스라엘 재연합의 뜻을 성취시키는 것으로 주장하는 듯하다분열을 수리하는 것은 실제적 나라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열방을 모으는 것을 포함한다.

 

 

 

 

 

오바댜서

 

문학적 분석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나라에도 메시지를 선포했다다른 선지서들에게는 한 이방 나라에 대한 신탁 하나에 불과할 것이 오바댜에는 한 개의 독립된 책이었다에돔은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신탁 중에서 다른 것들과 구분되어지는데 선지서들에는 다른 나라에 대해서보다 간결하거나 일시적이며 적대적인 신탁들의 주제이다예레미야와의 유사성으로 볼 때 문헌상 의존 관계가 있었음이 확실하지만 어느 쪽이 의존하는지 확실하지 않다두 신탁은 모두 에돔의 지혜 없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책의 형성 단계를 파악하려는 시도들은 두가지 접근 방법이 있는데 먼저 1-14,15B를 오바댜의 것으로 보고 나머지를 후대나 개인의 것으로 보는 것이다이 구분의 근거는 첫 부분이 구체적 역사를 다루는 반면에 나머지는 묵시적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두 번째 접근 방법은 19-21만 오바댜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고 나머지는 오바댜 자신의 것이지만 독립된 신탁으로 보는 것이다첫부분은 열방들이 에돔을 벌하는 것이지만 두 번째 부분은 열방들이 에돔처럼 심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형성 역사를 찾으려는 이런 접근 방법이 있었지만 대부분 이 책의 본질적 통일성을 옹호하였다이방 나라들에 대한 신탁은 실로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었다에돔에 관한 말씀에서부터 유다에 대한 말씀으로 이동이 있었고 이런점에서 환기를 시켰다에돔이 유다의 영토를 병합했으나 이것이 반전되어 에돔이 점령되고 심판 받는 것이다이책의 후반부가 이스라엘과 열방들에 넓게 관계되지만 에돔이 전면에 부각된다구조에 대한 분석도 다양한 결과를 낳는데 여러 부분으로 쪼개면서 개관하고 있다.

 

신학적인 메시지

 

오바댜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신탁과 동일한 신학 토대를 가지고 다음의 세가지 공유점이 있다. 1. 신탁들은 여호와의 보편적 통치를 말한다. 2. 이 신탁들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스라엘 속에서 작용함을 밝힌다에돔이 행했으니 행한대로 돌아간다. 3. 이 신탁들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의 거룩한 전쟁에 용사이신 하나님의 메신저들로 참여함을 말해준다이방 나라들에 대한 신탁들은 선지자들의 전쟁 참여 연장선에 있는 것들로 신탁들 속에서 선지자들은 용사로서의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다.

이 책의 정확한 배경은 파악하기 어려우나 넓은 맥락에 보게 되는데 오바댜서는 이 문맥을 넘어서 여러 맥락에서 이해하게 만든다국가간 정치 영역에서부터 가족 관계의 영역으로 옮겨가게 만들어준다두 나라는 태어날 때부터 연결되어있는데 에서가 자신의 장자권을 경홀히 여기는 것에서 기술하는데 사용된다하나님의 섭리에서 에서의 역할은 형제 야곱을 섬기는 것으로 고정된 것이었다에돔이 이스라엘 공격한 것은 정치 군사적 문제가 아니라 형제에 대한 배판이고 에돔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반역한 것이었다결국 에돔은 하나님의 목적대로 형제를 섬기게 될 것이었다.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데 하나님의 정의 및 궁극적 의도들이 승리를 거둘 것임을 말한다에돔은 유다 생존자들을 쓰러뜨리지만 에돔의 생존자들도 남지 않고 통치를 받게 되는 것이다이렇게 많은 신학적 주제들을 공유하고 있다이스라엘의 적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여호와의 날심판 기준으로서의 동해형 복수법등이 있다.

신약으로의 접근

 

이스라엘과 에돔 간의 오랜 경쟁 관계와 갈등에 대해서는 신약에서는 에돔의 후손인 헤롯이 예수님을 탄생시에 죽이려 한 점에서 보게 되고 바울도 이 고대 이야기를 회고하면서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변호한다.

 

 

요나서

 

문학적인 분석

장르

이 책의 장르는 역사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이 문제를 확실히 결론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역사적 기록으로 해석해야할 것으로 장르 표시가 있으나 비유적 해석의 가능성이 있기에 의견상 불일치를 용납해야 한다.

문체

요나서가 하나의 역사 기록으로 읽혀지지만 문체가 상당히 고도화 되었다문체에 상당한 주의를 가지고 메시지를 강화시키고 있다핵심어휘들이 계속되어 반복되는데 특히 쿰 동사가 반복된다이 단어들의 아이러니칼 언어유희가 등장하고 요나에게 주어진 일어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함께 듣게 되는 것이다다시 일어나라는 동사를 통해서 순종을 하게 된다이러한 분석을 통한 특징은 크다예비하다내려가다 등의 동사를 통해 제시된다.

구조

이 책은 두 개의 장을 가진 두 개의 막으로 나울 수 잇다먼저 1:1-2와 3:1-2에 반복되는 선지자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나뉘는데 1막에서는 주로 바다에서의 행위이고 2느 설교와 니늬웨의 회개를 다룬다마지막장은 니느웨의 동편에서 옮기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나타낸다.

요나의 시

요나서의 문학적 통일성과 관련된 문제는 2장의 시이다이것은 문맥과 어울리지 않고 나머지 부분과 다른 성격의 요나를 보여준다문맥상 다른 형태의 시로서 고난 중 애가를 할 것이라고 예상하게 되지만 감사의 시를 보여준다이런 의문은 요나의 처한 상황이 물고기 속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라는 것이다더 문제는 이것에서 충성을 약속한 요나이지만 다음 장에서는 다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이것은 요나가 단일한 성격이 아니라 복합적 인물임을 시사한다.

 

신학적인 메시지

 

구약의 맥락에 이 책의 특징은 언약 공동체 밖에 대한 태도이다하나님께서 이방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처음 나오지는 않으나 요나서는 이방인들에 대한 사랑의 두 방식에 초점이 있다영적으로 민감한 이교도들과 잘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선지자를 대비시킨다둘째로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고 끝맺고 있다이 책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연민을 표현함과 이스라엘의 비난을 가하고 있다요나는 선지자로서 영성의 정소를 보여주어야 하지만 불순종하려고 하다가 시도를 당한다니느웨에 갔을 때에 회개가 일어나고 심판이 없자 하나님과 대적한다요나가 절망에 빠진 이유는 자신이 거짓 선지자로 인식될까 두려워 했다는 것이다예언이 결국 실현되지 않게 되리라고 요나가 생각될까 했다는 것이다이런 잘못된 견해에 대해서는 선지자의 임무는 민족이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고 이 메시지는 백성의 반응에 달린 것이다요나의 절망은 하나님의 연민이 단지 이방만이 아니라 잔인한 제국에까지 미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인데 자기 원수들에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을 배우게 된다이야기 전체에서 요나는 도망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을 사용하셔서 돌아오게 하시고 그것에서 도피할 수 없는 전 피조물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

신약으로의 접근

신약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으로 돌아올 수 있으며 그들도 백성의 일부임을 선포한다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요나의 사역과 비교하시는데 기적을 바라는 것에 대답으로 요나의 표적과 비교하신다이는 십자가에 달릴 것과 부활에 대한 것이었다요나는 자기 뜻에 반하여 말씀을 선포했으나 예수님은 구원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드리신 분이다.

 

 

 

미가서

 

문학적인 분석

 

미가서의 구조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다음의 확실성을 가진다. 1. 미가의 신탁들은 한 시기에 다 전한 것이 아니다이 책은 그 사역 기간 전체에 선지자적 메시지의 모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2. 책의 서두에 연대기적 순서는 구조를 파악하는 열쇠가 아니다. 3. 예언은 경고와 소망의 교차적 배열에 근거한 구조를 가진다.

문체

미가서의 힘찬 문체는 히브리어가 난해하고 구조가 현대 독자들에 명료하지 않다는 것과 동시대의 더 잘 알려진 인물인 이사야의 그림자에 가려져왔기에 간과되어 왔다그러나 미가는 언어와 수사에 탁월한 인무이다역사적으로 산헤립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진군할 때에 대한 예언적 서술인데 미가는 재미있는 언어유희를 사용하여 기술하고 이것들리 도성의 처할 운명과 연결된다모팻의 의역은 독자들에게 본문의 유희를 보여준다.

 

신학적인 메시지

미가서의 신학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심을 기울인다여호와는 미가가 자기 백성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임무 부여하신다이스라엘과 유다는 모두 하나님의 길을 떠나 죄를 짓는데 이런 죄들은 제의적인 것들이었고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된 안위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이런 확신은 미가가 지적하는 거짓 선지자 태도에서 보게 된느데 이스라엘이 안전하다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지 않았다따라서 하나님은 자신과 언약을 깨뜨린 백성에 대한 소송을 집행하시고 백성에 대항해 싸우는 전사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6:6-8에서 율법의 요약으로 받아들이는 부분은 제의적 종교에 대한 논박이라고 해석하지만 이스라엘 사람에 존재하는 외적 종교에 대한 건전치 못함을 강조를 교저하는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죄에 대한 심판이 중심적 어조이지만 소망의 내용도 함께 등장하는데 심판의 구원에 대한 위로의 어조로 말씀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을 보인다다윗에게 주신 약속들은 성취될 것이다.

 

신약으로의 접근

 

미가는 당대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심판과 소망의 신탁을 전했지만 직면한 역사 위기를 초월 표현을 사용했으며 자신의 독자로 미래로 인도했다미가를 인용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했다이 신탁의 미래는 다윗과 같은 통치자를 고대하는 것이고 베들레햄의 중요성이다하나님의 산이 솟은 것과 민족이 하나님을 경배하려 모이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평화가 있고 전쟁이 없다신탁은 만일에라는 문구로 시작하며 이 예언은 종말에 궁극적 성취가 이뤄지지만 구속사가 펼치는 가운데 선행적으로 성취된 것이다.

 

나훔서

 

문학적인 분석

문체

나훔의 시적 문체는 뛰어나다나훔은 소선지자들 중 가장 정제되고 아름다운 시로 되어있다니느웨의 멸망과 황폐화는 생생한 색채로 되어있다또한 비유적 표현이나 평행법으로 탁월한 시인임을 보인다.

장르

이 책의 표제는 선지서 속 만날 종류와 관련하여 책이상신탁 등이다책은 나훔의 예언이 다른 것과 상이함을 보이는데 대부분 선지자가 설교가들이며 선지서들은 그 말한바를 낮우에 모은 것이지만 나훔은 직접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이 책이 기록 문헌의 성격을 가짐은 나훔의 설교들의 모음이 아니라 잘 구성된 구조를 가짐을 밝혀준다이상을 담는 것으로 밝히고 있는데 이상을 담는 두 개의 문단이 있다신탁에 있어서는 전쟁 신탁 이방에 대한 적대적 신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조

이 책에는 짜임새 있는 구조가 드러난다선지자 이름도시 이름주제에 대한 전형적 표제로 시작되고 찬양시로 시작된다이 찬양시는 역사적 면에서 구체적이지 않으나 다음 두분은 승리의 노래에서 흘러나와서 선지서들 중 독특하게 유다에 대한 구원의 신탁을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신탁과 함께 엮는다이런 극적 긴장은 구원과 심판의 대상이 누구인지 늧움으로 고양된다이 선지서는 이상으로 계속 이어지면서 사건에 대한 이상에서 마지막 멸망의 장면에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되어있다강력하고 억압적인 도시 멸망에 대한 생각을 염두에 둔 나훔은 니느웨에 대한 조롱을 하고 구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첫 번째 조롱은 앗시리아를 죽임당한느 사라라고 하고 두 번째 조롱은 앗시리아를 마술사 창녀라 한다나훔은 전쟁의 신탁과 더불어 사건에 대한 이상을 넣는다이런 양식은 장례식 애가로서 니느웨가 죽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마지막 부분까지 조롱들이 이어지는데 니느웨를 테베와 비교하면서 역사를 활용한 조롱을 하고 조약의 저주에 근거나 조롱을 하고 장송곡으로 끝맺는 것이다.

 

신학적인 메시지

 

나훔서 1:7-8은 중심적 메시지를 요약한다나훔서의 하나님은 백성을 위한 전쟁을 할 용사로 나타난다이는 유대인의 희망의 메시지였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앗시라아에 대한 멸망의 심판은 백성들에게 위로를 주었다하나님의 예언은 성취되었으나 유다 백성들은 죄로서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했다그 결과 바벨론에 의해 유다는 정복된다.

 

신약으로의 접근

 

나훔서의 영속적 의미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구약의 용사로서 하나님 묘사는 예수 그리스도 임재를 고대하는데 그리스도 역시 신약에서 용사로 묘사된다하나님의 전쟁은 구약과 달리 전쟁의 절정으로서 전사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묘사와 사탄과 그리스도 사이의 전쟁은 계시록에서 절정에 이른다예수께서 사탄 및 마귀 및 인간 군대에 대해 자기 군대로서 마지막 전쟁을 수행하심으로 악은 끝나게 된다.

 

 

 

 

하박국서

하박국에 대해서 별로 알려진 것은 없다많은 학자들은 하박국을 제의 선지자로 결론을 내렸다이 책의 성전과 관련된 애가 장르를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고 예배에 사용된 것임을 시사해준다그러나 제의 선지자라는 표현은 명료하지 못하며 선지자와 성전의 정확한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제의 선지자가 성전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한 부분으로 선지자적 직무를 수행한 것이라면 하박국의 그런 인물로서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제사장 직분 때문에 선지작 된 것이 아니며 선지자는 전수되는 것이 아니다이 제의 선지자가 성전을 배경으로 일고나 사역을 하는 선지자라면 하박국 및 다른 선지자들에게 적용될 것이다하박국이 알려진 것이 없다는 것은 그에 대한 여러 전설이 존재하는 것에 설명을 해준다하박국을 레위인이라고 말하는 전승이 있으며 술람이 여인의 아들이라고 하기도 하고 파수꾼과 동일하다고 하는 등이 있으나 사실적 정보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문학적인 분석

 

이 책의 첫 부분은 하나님과 선지자 사이 대화로 이루어진다이것은 애가 형식으로 이루어진다하박국은 유다의 악과 불의에 대해서 불평했다그러나 그 대답은 유다에 멸망과 사망을 주는 갈대아인으로 유다를 심판핫니다는 것이다그것은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기 위해 더 큰 악을 사용한다는 것의 의문을 가지게 한다이 문제는 두 번째 불평으로 도입하게 하는데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악한 자들이 의로운 자를 심판하도록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하나님은 자신의 계시가 성취될 때에 증거가 되도록 선지자가 계시하는 바 기록할 것을 명령하시고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를 벌하시는 것이다바벨론의 오만은 그 심판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바름과 잘못됨에 대한 생각은 역사에서 하나님의 행위들을 평가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받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하나님께서 갈대인인들도 심판하신 것이라는 것은 다섯 개의 저주 신탁들로 확인되는데 악이 항상 번성하지 않을 것이며 땅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질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침묵할 것이라는 것이다자신이 본 이상에 대한 선지자의 반응은 찬양시고 승리의 노래이다그가 오실 때에 천지가 떨고 하나님은 창조 때처럼 혼돈의 물들을 다스림을 보여주실 것이다출애굽 때철머 열방들을 심판하기 위해 무기를 가지고 오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신 것에서 확신을 가졌다. 3장의 시는 고어체적 히브리어로 쓰이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과거 행한 것들을 나열하면서 의도적으로 고대의 서사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가능성이 있다이 구조는 대부분 받아들여졌으나 이 각장이 개요상 분리된 부분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신학적인 메시지

 

하박국은 역사 마지막에 처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말씀을 선포했으며 이 나라는 부패로 썩어 있었다새롭게 부각하는 바벨론이 멸망시킬 운명이었다그러나 선지자의 시선에는 하나님은 무관심하신 것으로 보였다하박국의 불평들을 욥과 비교하면서 욥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해야하며 공의를 행하심을 확신해야한다는 것을 배웠고 하박국은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신약으로의 접근

 

하박국 이후 다시 악과 불의가 흥왕했고 이 성전은 위협을 당했다이 성전은 그리스도 몸으로 상징되는 성전이다하나님께서는 구원하기 위해 오지 않았고 악이 승리하는 듯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 일으키심으로 변호하셨으며 예수님의 부활은 악이 승리하지 못함을 보이는 선언이다바울은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믿음으로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는 것을 초대 교회에 주지시켰다바울은 의가 믿음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주장에서 하박국을 인용하고 있다역시 동일한 신앙으로 부름 받았으며 용사이신 하나님이 장차 오셔서 자기 이름을 수호하실 것이다.

 

 

스바냐서

 

스바냐는 상세한 족보와 소개된 유일한 선지자다히스기야의 후손으로 왕족이었으며 자신의 지위로 유다 지도자의 죄악을 관찰하고 외칠 수 있었다표제는 요시야 시대에 사역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하박국 및 예레미야와 동시대 인물이었을 것이다.

 

문학적 분석

 

전통적 비평학계는 이 선지자의 말은 삽입부분이나 첨가로 구분하는데 관심을 기울였으나 방법의 결과들은 일관성이 없었다이런 접근방법들은 일부 본문을 후대의 것으로 분리하는 중요 이유는 포로기 이후 시대 시각이 있다는 점이나 묵시문헌과 비슷한 종말론적 기대가 등장한다는 점이다이런 이차적 삽입부분이 정경화 과정의 본보기이고 이스라엘 이후 세대의 당대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해석한 것으로 생각한다다른 접근방법들은 논리적이고 질서정연안 사상 흐름에 주목하고 스바냐가 면밀히 구성된 통일체를 이룬다 강조한다이 선지자는 보편 심판을 선언하고 그 결과를 상술한다이는 보편 축복이 유다 및 열방에 미치는 결과들로 이어지고 수사적으로 확장시킨 결과로 만들어진 통일된 책이라 보면서 짜임새가 있음이 강조되었다많은 학자들은 스바냐의 구조가 다른 선지서와 비슷함을 알게 되었는데 모두 유다의 직접적 역사적 상황과 관련된 신탁에서 시작하여 다음 열방에 대한 신탁으로 이어지며 미래의 종말론적 축복에 대한 신탁으로 끝을 맺는다.

 

신학적인 메시지

 

심판이라는 주제에 은혜와 자비의 주제가 지배적인 주제이다하나님의 은혜는 남은자와 회복의 모티브로 기술된다. 1. 여호와의 날은 선지서들에 자주 나오는 주제이고 이와 비슷하게 이 날은 하나님께서 자신 명예를 지키고 열방이나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 오시는 날이다그의 임재는 신현 현상에 의한 신호로 알려지며 이 위대한 날은 역사 속에서 기대되어진 것이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개입하시는 역사적 행위는 죄가 이 땅으로부터 제하여지는 종말론적 심판의 그림지이다. 2. 이런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기대와 병행하여 남은자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의 주제는 지배적으로 나타난다남은자 모티브는 성경의 많은 책에서 발견되는데 재앙을 겪을 때 재앙에서 남아 존손하는 하나님의 백성 핵이 되는 자들을 남은자라고 한다하나님의 미래 존속은 이 남은자들에 맞추어져 있다스바냐는 여호와의 날에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고 그의 기대는 나라를 정화시켜 죄 없는 남은 자들에 대한 것이었다그래서 다시 본토와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우주적인 하나님이시고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신의 거룩성과 자기 백성을 어찌 대했는지 따라 심판을 내리신다전체를 창조하셨기에 모든 열방에 심판이 있고 자비를 가지신다자신의 은혜를 받도록 모으시고 그들이 모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다.

 

신약으로의 접근

 

기독교 독자들은 스바냐의 비유적 표현과 모티브들이 신약에도 사용됨을 보게 된다임박한 역사적 재난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바울은 여호와의 날그리스도의 날에 대해 자주 언급했으며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나타나셔서 최종적으로 옹호하실 날을 기대한다요한은 용사이신 하나님이 군대를 이끌고 오심을 기술한다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스바냐는 열방이 하나님을 경배할 날을 고대 했으며 교회가 볼때에 이것은 이미 현재에 실현된 사실이다교회 역시 이 세상이 진정한 왕의 다스리심을 인정할 때가 됨을 알고 소망하는 것이다.

 

 

 

 

 

학개서

 

이 선지서에서 얻는 것 말고는 학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스가랴와 같은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말씀을 선포하였다는 것은 알고 있다스가랴에 대한 연대를 보면 단순히 선지자라고 언급되고 아버지 이름이 제시되지 않음은 동대사람에게 잘 알려진 사람임을 시사한다학개라는 이름은 축제절기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으며 이것은 그가 절기중 하나에 태어났음을 시사한다제롬의 주석에 따르면 학개는 제사장이었는데 이는 증명될 수는 없다.

 

문학적 구조 및 신학

 

학개서는 네 개의 신탁으로 구성되어 있다직접적으로 설파된 신탁들이 산문으로 내러티브 틀 속에 들어가 있다그래서 청중들에게 끼친 효과에 대한 보고서로 보인다내러티브 틀 속에서 학개는 삼인칭으로 언급되는데 이는 그 책의 저자가 아니라고 결론 내려지기도 했다그러나 학개서와 역대기 유사성은 먼저 존재해서 역대기 편찬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학개가 이 채의 저자이며 객관적 역사성을 위해 삼인칭으로 내러티브를 사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성전의 봉헌 전에 쓰여졌을 것이라고 보는데 이것은 성전의 봉헌이 학개의 명성을 높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첫 번째 신탁은 간략한 논쟁과 더불어 심판의 말을 담고 있다이것은 달의 첫째 날에 전달되는데 신년 축제에 선포되었을 것이다성전 폐허 장소이고 사람들이 모인 것은 좋은 배경이었다학개는 귀환자들의 수고가 성전을 무시함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이 백성이라 하면서 다 언약에 순종하지 않음에서 옴을 보인다두 번째 신탁은 성전에 대한 작업이 시작된지 한달이 못되어 주어진다이 절기의 마지막 날을 가리킨다여기서도 사람들이 성전에 모였을 때라는 것이며 두 번째 성전이 처음보다 못하는 상태였다선지자는 이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주고 두 번째 성전의 영광이 처음보다 뛰어날 것임을 확신시킨다세 번째와 네 번째 신탁은 같은 날 주어지는데 성전 작업 세달 째였다세 번째 신탁은 토라에 대한 질문격려의 메시지로 이루어진다성전도 부정함에 의해 더럽혀질 수 있으니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뿐이다아마 일이 시작된 이래 세 달간 백성은 낙심한 듯 하다선지자는 그들의 수고를 축복하심을 통해 그들을 격려하신다네 번째 신학에서는 스룹바벨에게 주어지는데 여호야긴의 한 후손이 하나님 손에 들려진 인장 반지가 될 것이라 말한다학개와 스가랴등은 이방의 통치가 무너지고 다윗의 통치를 기대했겠으나 스룹바벨은 다윗 계보의 왕이 아니라 종말의 날을 가리키는 자였다.

 

신약으로의 접근

 

구약에서 하나님이 성소나 제단을 승인하실 때에 불이 나타났고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과 구름 기둥이었다영광이라는 단어는 부와 풍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두 번째 성전 건설과 제의를 승인해주기는 했으나 이방의 부가 도시로 들어놀 것이라는 말과는 다른 것이었다하나님의 영광이 성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불과 구름 기둥이 두 번째 성전에 나타났다는 것에 대한 암시나 주장은 없으며 페르시아의 통치 하에서 자유는 있었으나 이방의 통치가 분쇄된 것은 아니었다다윗 계보의 스룹바벨이 치리를 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왔으나 이것은 장차 올 것에 대한 임시적 단계였다새로운 왕국이 예수님을 통해서 임하게 되며 지금도 다스리시며 모든 만물을 발에 두시고 있다이런 것들 역시 만물의 종국으로 새로워지고 표현할 수 없이 휘황찬란한 도성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고 눈물이 닦여질 때를 향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스룹바벨이 선택받은 것은 다윗의 계보 통치가 시작된 것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지변을 형상하여 종말적 시대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스가랴서

 

스가랴서는 소선지서 중 가장 긴 책이며 어려운 책이다이 책의 난점들로 여러 견해들이 나오게 되었다그리고 이 책은 가장 중요한 책이다수난 기사의 구약 구절들을 가장 많이 담고 잇으며 계시록 저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스가랴는 흔한 이름이었는데 스가랴는 포로 귀환한 제사장 가문 중 하나였을 것이다이는 그가 성전과 관계된 일들을 잘 알고 거기에 흥미를 가졌음을 설명한다.

 

문학적인 분석

 

스가랴서 1-8이 다른 시대 저자에게 나왔다는 비평학계 견해는 다음 증거들로 도출되었다두 부부은 다른 시기에 비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여기서는 회복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반면 9-14장은 묵시적이고 종말론적 상징을 담는다그리고 두 부분은 문학 양식에서도 차이가 있다앞부분은 스가랴의 밤 이상과 금식의 준수 등이 나오는 반면 후반부는 경고라고 치칭되는 것으로 구성된다양 부분의 일부 어휘와 구문의 차이도 있다이러한 차이점은 저자가 다르다는 것에 대한 근거로 사용되었다그러나 컴퓨터를 활용한 자료 축적에서 두 부분의 차이에 대한 주장의 근거가 부족함이 드러났다통계학적 자료는 동일한 저자라는 가능성이 적다는 것도 시사해주었다또한 9-14의 연대에 대한 내정 증거는 1-8의 회복 시대 초기와 일치하지 않으며 헬라인들에 대한 언급은 이전 세기보다 두시기 이른 것이다. 11:4-17의 난해한 부분이 등장하여 마카베오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전반부에서는 구체적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반면에 후반에는 인명이 언급되지 않는다앞부분은 연대가 언급되지만 후반부는 연대가 없다앞부분은 대제사장과 다윗의 후손 스룹바벨이 지도자이지만 뒷부분은 목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이러한 부분들이 분리시키는 것을 위해 사용된 논거들이다비록 일너 논거들의 구체적 대답의 필요가 있으나 이것들을 간다히 다루자면 양 부분의 차이점으로 파악된 점에 근거해서 제기된 것이고 양 부분의 차이는 저자와 배경이 다르다는 주자을 지지해 줄 만큼 충분히 많고 두드러진다고 생각되어졌다그러나 다른 주장 역시 이런 차이점들을 설명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만약 현대 저자가 자신의 자료를 주제나 양식에 따라 배열한다면 정리 능력의 증거라고 하지 문헌들이 각기 저자에게 나온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마찬가지로 고대 저자가 자신의 문헌을 기준에 따라 분리한다면 합리적이고 정리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이런 논거는 저작권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위의 3번 논거와 관하여 조심할 것들은 인간 언어의 담화 문법을 관찰한 것을 일반화하여 보면 글의 주제가 다르면 구조 등이 달라지는 것을 예상하게 되는데 장르상 주제나 차이를 나타낼 뿐이다산문체 문헌과 시 문헌을 대조할 때 이런 차이가 발견됨은 자연스럽고 이것이 스가랴 내의 상이성이 저작권의 문제를 설명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게 된다아직은 저작권의 문제를 위한 통계학적 모델 사용의 유아기에 있으며 이론들의 난점이 있다우리는 스가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며 책의 두 부분 사이에 상당한 시간의 흐름이 있으며 1-8장이 묵시적 특징을 조금인 것에 반하여 후반부는 이런 요소들을 많이 보여준다후반부는 발전된 묵시 사상이고 훨씬 후대의 것으로 보는 것이다그러나 우리는 묵시 사상 발전에 대해 이런 직선적 견해가 타당한지 의문을 가지게 되고 만약 9-14가 생애 후기의 파생이라면 그 배경인 전반부는 낙관주의로부터 하나님의 개입에 소망으로 바뀌는 시간이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이런 두 태도가 한 개인이나 사회에서 공존하기에 시간의 경과를 가정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스럽게 된다. 4번 논거와 관련해서도 헬라인들에 대한 언급이 알렉산더 이후를 가정한다고 하기에는 이상하다즉 비록 스가랴 9-14가 1-8장과 같은 시기 같은 저자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증명을 위해 많은 증거가 제시되지만 그런 결론 도출의 근거가 되지 못하며 오히려 한 저자로 적용됨을 볼 수 있다그리고 많은 주제를 공유하고 있으며 공동점을 보인다그러므로 비평학자들의 견해는 저자가 다르다는 것 뿐이며 이를 넘는 것이 없다후반부의 연대에 대해서 주전 8세기부터 마카베오 시대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으며 후밤부가 통일성을 가지는 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런 학자들은 이 후반부를 고대 이스라엘 제의 속에 정초시키거나 사회 배경에 정초시켰다전반적으로 스가랴를 이분하는 결정을 하고 나자 이 후반부 장들의 역사사회적 배경 파악 문제는 당혹스러운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신학적 메시지

 

스가랴서 1-8

스가랴서는 다른 선지서와 달리 소명 기사로 시작하지는 않지만 스가랴가 모세와 같은 선상에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자기 말이 선재한 선지자의 효력을 가지며 이것에 귀을 기울여 화를 당하지 않으려는 것이다스가랴 여덟 개 밤의 이상들은 교차대조법 구조를 이루며 이방 나라들의 운명에 대해 그리고 있다두 쌍의 이상들은 덜 문명하다양자는 회복 공동체가 직면하는 이방 나라의 반대와 언약 공동체 내의 죄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하난미의 심판과 포로됨에 대해 다룬다한쌍 이상은 성전 주변을 배경으로 지도자들에게 관심을 두고 총체적으로 이방세계로부터 예루살렘 마지막으로는 성 주변으로 가는 구심적 구조를 가진다첫 번째 밤 이상은 실현되지 못한 종말론 문제를 다루고 유대인들은 여호와 날을 경험했으며 거룩한 하나님의 분노를 배웠다이방 나라들은 평안하여 조용한 것으로 보였다여기에 여호와 군대의 대장인 여호와 사자는 하나님께서 진노를 그치시고 백성을 수호하실 것을 간구한다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잊지 않는다는 위로의 말을 듣는다열방들은 여호와의 날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시온은 하나님 은혜의 대상이 될 것이다두 번째 밤의 환상 해석은 네 뿔과 네 대장장이 해석인데 세부적 내용이 난해하더라도 요점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을 분쉐할 것이라는 점이다포로 귀환의 백성은 성벽이 없기에 적의 공격에 열려 있었다세 번째 밤 이상에서는 여호와께서 성번영으로 흐르는 도성의 불의 벽이심을 보았다이 상징은 전 도시가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불기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을 보여준다하나님의 임재는 지성소에 국한되지 않고 전 도성이 하나님의 처소가 된 것이다네 번째 밤 이상에서는 재판 장면을 목격하는데 하나님의 천사가 재판장으로 참소하는 자가 있고 대제사장의 잘못을 지적한다이것은 그 배경이 속죄일의 배경일 가능성이 많음을 보인다이는 대제사장이 여호와 앞에 서는 때와 관계되어 이 것이 속죄일에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과 연관시킬 수 있다대제사장의 보장에 대해서 다른 제의로 표현하기도 한다하나님은 대제사장을 스스로 힘이 아닌 의를 제공해주고 참소자의 기소 토대를 제거하신다제사장이 하는 일들이 죄를 제거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었다당시 맥락 속에 대제사장은 나라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가 하나님에 의해 정결케 됨을 입는 것은 동시대 귀환자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성전을 지을 수 있음을 확인시키는 것이다다섯 번째 이상에서 선지자는 하나의 받침 위 일곱 대 촛대를 본다본래 제사장들은 성전 등대를 하루 두 번식 보며 기름을 채우는데 여기서의 촛대는 관리가 필요없는 것이다그러므로 성전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는 것이고 이일을 끝까지 돌아보실 것이다어떤 이들이 자신의 성전이 실망스럽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기뻐하셨다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이를 위한 도구들이었다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이상은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는 십계명을 요약하는 것으로 보이고 처음 네 개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죄로서 하나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것에 의해 대표되며 마지막 여섯 계명은 다른 사람의 죄로 나타난다포로생활은 이스라엘의 정화가 목표인데 율법은 이 회복 공동체의 심판받을 죄가 있음을 나타내고 죄를 상징하는 에바를 보면서 죄 심판의 장소로 옮겨질 것을 보인다여덟 번 째 이상은 첫 번째 환상에서 사용된 말들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몸소 열방을 벌하실 것임을 나타낸다이 책 전반부 나머지 부분들은 이상이기보다는 기록들이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일부 사로잡힌 자들이 아직 포로생활을 하는 유대인들로 헌물을 가지고 그 금을 면류관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면류관은 왕가의 인물이 가져야하는데 이것은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이 메시야 속에 결합된 것으로 해석한다포로 시대 동안 예루살렘 멸망을 전후한 사건들을 기념하기 위해 네 번의 금식이 준수되었는데 포로 시대가 끝나고 성전이 완성되니 유대인들은 이 성의 멸망을 기념하는 금식을 행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그것으로 이 문제에 대한 자문으로 대표단이 예루살렘으로 오지만 스가랴는 위선적 금식과 율법적 사항에 집착하는 경건 태도에 대해 설교하면서 포로기 이후 시대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이방으로 구분하는 집착이 있으나 스가랴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같은 토대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날을 예언한다.

 

스가랴서 9-14

최근 이 부분의 통일성앞장들 사이의 통일성이나 밀집성에 대해서 강조를 했다전체는 단일한 저자가 반복적 주제들을 중심으로 교차대조법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이 구조 구성에 반복 주제는 전쟁을 통한 이스라엘과 열방들의 심판 및 구원여호와의 날 우상 숭배 억제 등이다이 책의 두 부분의 저자가 다르다는 생각은 분명히 하나의 문학적 통일성을 보이고 각자의 해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주의를 기울이면 이스라엘의 예언적 소망에서의 포로 귀환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 중 많은 것들을 성취시킨 것이다귀환은 새로운 출애굽이고 구원이며 최종적 구원은 아니었고 구원의 시작이자 예비이다.

 

 

말라기

 

문학적 분석

 

장르 및 구조

표제를 통해서 예언을 시사해주는 장르 표지를 사용하고 있다말라기 예언은 논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묘사하고 백성의 행위를 꾸짖으며 어떤 심판할 것인지 묘사한다.

여섯 번의 논쟁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 논쟁은 통상적 패턴으로 하나님 자신의 속성에 대한 진리를 주장함으로 시작한다다른 논쟁들도 비슷한 양식을 따른다이러한 분석 뒤에 부록이 남는다여기서는 말씀을 따르는 것에 대한 촉구이다대체적으로 이 책의 통일성은 부록을 제외하고는 도전을 받지 않았다.

문체

말라기의 문체의 창의적은 논쟁의 양식에 있다운문인지 산문이지에 대한 논쟁이 있으며 히브리어 성경에서 무엇이 운문인지 정의하기 어려움과 연관된다말라기의 문체는 양식에서 창의적이고 메시지가 분명하고 논리의 설득력이 있다.

 

신학적인 메시지

말라기에는 이스라엘에 준 언약이 들어가있다이 언약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심판은 언약을 위반하는 것에 기초한다조상들이 맺은 언약이 족장들의 언약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백성과 하나님의 언약 파기가 있음은 분명하다우상 숭배의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태도를 시사한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보이면서도 자기를 사랑하는지에 대해 의심하는 것을 보이는 말을 한다논쟁들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말라기는 단지 과거의 죄 때문에 현재 회개하는 것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 이상을 제시한다그러므로 미래의 소망에 불을 붙이려 했으며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승리와 그렇지 않은자에게는 심판을 가져옴을 보인다.

 

신약으로의 접근

마가복음은 말라기와의 인용문으로 시작된다부록부분은 여기서 나오는 사자가 엘리야라고 밝히고 승리의 심판의 날에 앞서 등장한다신약에서 이것을 예비하는 것은 세례요한이고 임박한 멸망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그리고 지상 사역으로의 길을 연다이런 메신저 역할은 예수님 자신이다예수님은 말라기 본론을 통해 강림하실 여호와와 동일시된다말라기의 종말론적 희망들은 복음서에서 성취된다.

 

 

 

 

 

 

 

 

 

코멘트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을 향한 심판으로 보았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역설적인 태도를 보이셨다이 여호와의 날이 바로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기 위한 날이라는 것이다이러한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굉장히 놀랍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다그리고 이 말씀을 거부하는 양태로까지 나아간다이것을 지금의 현실과 연관지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오늘날 한국 교회는 자신의 의로움과 순수성은 주장하지만 자신에 대해 점검하고 회개하는 결단은 부족함을 느낀다마치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생각하던 유대인들과 같이 말이다이런 면에서 여호와의 날이 한국교회에 임한다면 당시 유대인과 같이 의아해하면서 맞이하게 될 것이다이런 점을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정죄와 판단의 출발점이 나 자신이라는 것에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한국교회까지 나갈 것도 없이 나 자신의 죄악됨과 오류 투성이임을 인정하고 이 여호와의 날이 바로 나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임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여호와의 날을 통해 심판하시지만 결국 남은자를 통해서 자신의 언약의 대를 이어가신다이러한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고 예배에 삶으로 참예해야 할 것이다.

더욱 하나님의 심판이 은혜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이러한 예언적 선포가 목적이 심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에 있다는 것이다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곳곳을 통하여 심판하기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고 자비 베푸시고 어쩔 수 없이 심판하시는 분임을 발견한다그러므로 이러한 경고의 메시지에 지금 당장 취해야할 태도는 돌이킴이고 회개이다이러한 회개는 바로 나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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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니엘의 경험으로 야곱은 새로운 존재가 된다.


야곱은 고난을 당햇으나 그 성장이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의 고난은 이제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


야곱은 찾아짐을 당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신 것.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것은 마지막 기회이ㅣㅈ 않았을지


그리고 그 브니엘의 사건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다.



이 조선 반도가 바로 야곱이다. 끊임없이 수난을 겪었으나 깨닫고 돌이키지 못하는 야곱이다.


이 브니엘의 사건이 앞에오고 잇다. 그것이 바로 야곱이 만났던 브니엘의 사건 변화의 사건


바지가랑이를 물고 늘어질수 밖에 없는 그 사건


그것은 바로 핵.

전쟁의 위협


모두가 멸절될 수 있는 위기의 상황


그런데 우리 는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는가?


회개하는 척이라고 하고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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