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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오스트리아 학파의 하이에크의 대표할만한 저작인 노예의 길을 읽었다.

사실 자기개발 연구가인 공병호 박사의 강의를 듣다가 하이에크에 대한 추천을 들었었고 이 노예의 길을 추천했었다.

이후 이승훈 선생을 페북으로 알게 되면서 개인적으로 페메를 보내 신자유주의에 대한 책을 추천해달라 했는데

하이에크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두가지가 겹치니까 그리고 사실 이승훈 선생이 추천해준 다른 신자유주의자 학자들의 책이 없었다 알라딘에.... 

중고로 1만원 해서 샀다. 알라딘 서울대점인가 가서 샀다 아니 잠실새내점이었구나

 

무튼 거기서 샀다. 새책이었다.

 

자유주의와 계획주의의 충돌에 대해서 매우 적랄하게 써내려갔다.

자유주의가 무엇이고 역사적으로 어떻게 주창되어 왔으며

계획주의가 무엇이고 어떻게 역사적으로 침투해 왔으며 

그 교묘한 작용으로 인하여 현재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매우 면밀하게 

그 자유주의자의 시선을 가지고 그리고 계획주의를 경계함을 통하여 나타내고 있다.

 

그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가진 것 같아 보인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사회주의자들과는 다르다.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두지 않는다.

그보다 큰 자유를 위해서, 인민의 해방이라는 현재의 자유를 상쇄할만한 커다란 대의를 위해서

모든 이들의 자유가 무시당하고 멸시당하고 파쇄되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대의라는 것을 위해 폭력이 정당화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이 정당화된다. 

 

하지만 지금 이미 밝혀지고 증명되었듯이 그 대의가 허구였으며

오히려 더 큰 억압과 폭정의 시작이었다. 이들의 대의는 처음부터가 사기였고 지금도 사기다.

 

사회주의자들이 가진 인간에 대한 이해는 자유주의자들의 것과 다르다.

이들은 치명적인 자만을 가지고 있다. 

계획가들이 뭔가를 만들 수 있다는 정치적 체계를 통해서 뭔가를 세울 수 있다는 환상이다.

이는 마치 성경에서 말하는 바벨탑 사건과 같아 보인다.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서 인간들이 힘을 합쳐 큰 탑을 세우고 도시를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흩으시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다.

 

왜 하나님은 혼잡하게 하셨을까? 이들이 모이기를 싫어하시나? 

아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모여 함께 예배하고 문명을 만들고 문화를 창조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이들이 획일화되고 하나의 지배적 체계 안에 갖혀 자유와 창의성이 말살되어 살기를 바라지 않으시는 것이다.

분열과 함께 창의가 일어나고 분열과 함께 다양성이 나타난다. 

 

나는 여기서 다루고 있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 이해 이전에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본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창조자이며 무소부재하시며 전지전능하시며 처음과 끝이시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완전한 체계가 되신다. 

그리고 그분의 인격은 너무나 온유하시고 인애가 많으셔서 

우리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폭정을 가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인간의 자발성을 사용하신다. 

설득의 기술을 사용하시고 가장 좋은 길에 대해서 예비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면 사회주의와 계획주의를 주창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도 계획주의로 획일화하셔서 아담과 하와를 조종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러실 수 있고 그래도 되시는 당위가 있는데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들의 치명적인 자만은 인간을 조종하고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것이다. 

바벨탑 사건과 맥락을 같이 하는 일이 자명하다. 

 

자유주의는 무엇인가? 자유에 대한 방종인가? 아니다. 

자유주의는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점은 인간은 스스로 결정해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으며

그 말씀대로 하는 교회를 주셨다. 

교회가 해야 하는 역할을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발성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비전을 향해 나아가도록 돕는 역할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 들어온 사회주의 계획주의는 이미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벗어나있어 보인다. 

목회자를 중심으로 목회자 독재주의가 일어나며 

자발적 순종을 기다리거나 자발성을 불러일으키는 설교와 말씀의 반응이 없이 위력과 

종교적 두려움을 근거로한 폭압이 있기도 하다. 

이런 점들은 분명히 죄악이며 거룩성을 잃어버린 결과이다. 

 

인간의 자발성은 어디서 오는가? 인간의 선을 향한 하나님을 향한 자발성은 결국 무엇에서 오는가?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온다. 

성령의 감동으로부터만 온다. 인간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은 자발성에 근거해서 성경으로 돌아가고 그 성경을 묵상하면서 새로운 자발성을 얻고 

실천하는 자들이 되도록 돌아가는 것이다. 새 힘을 얻는 것이다. 

 

그럴 때에 참다운 의미에서 다양성이 실현되는 것이고 그 안에서 통합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의 말씀으로 감동받을 때에만 

참다운 의미에서 통합성과 다양성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체는 성령이기에 통합되어지며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세주 앞에서 하나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크기는 인간이 아니시기에 그분의 뜻은 인간과 같지 않으시기에 그분 안에서 다양한 자발성들이 비전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의 사이즈에서 시각에서 바라볼 때에 그것들이 옳고 그름이거나 다른 것들로 말해질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 그분의 크기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말씀을 보수적으로 제대로 뿌리를 박아서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통합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건강한 다양성

 

이를 어떻게 이루어가야 할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어떤 정신으로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자유주의 학교인 간디를 나오고 계획주의 교회에 속한자가 반드시 도출해내야 할 결론이다. 지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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