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24 하나님의 불가해성

 

신비는 교의학의 핵심 요소다. 성경은 신비를 추상적이고 초자연적 진리로 이해하거나 과학적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빛 안에서 고려되어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숙고할수록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며 수사의 신학이 아닌 사실의 신학에 머무른다면 삶에 가장 유용한 것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격차는 무한자와 유한자의 차이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무한히 초월하신 분이시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가장 강력히 확증하지만 하나님의 가지성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정하며 그 맥락안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식을 가진다고 전제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갖는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이로 인해 영생을 얻게 하는 것에 있다. 이 계시로 인해 하나님은 인격이며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며 자연위의 존재인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 하나님은 자연 안에 내려오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일컬어진다. 성경비평가들이 말하듯 하나님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형성된 일신론이 아니며 선택과 언약의 하나님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 갖는 밀접한 관계의 결과로 다른 민족들이나 그들의 신들이 어떤 실재를 갖는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다른 신들에게서는 단일신교를 포함하지 않으며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와 백성에게 특별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표현하게 된다. 여호와는 신들의 신이시며 모든 신보다 크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의 저급한 신과 고등한 신의 구별은 사실을 곡해하는 것이며, 이스라엘 종교가 다신론에서 단일신교를 거쳐 절대적 일신론으로 발전했다는 진화론적 관점은 정당화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로 자연에 제한되지 않으며 초월해 있으신 창조주이며, 특정 장소 시간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며, 이런 계시는 선지시대에도 예비적 성격을 지니며, 구약의 하나님 계시는 자신의 존재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고 이를 초월하시며, 자기 계시 간운데 모든 자연 전체와 피조물을 초월해 무한히 높이 들린 분이시다. 이와 동일한 것을 신약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로 거하게 하셨고 교회를 자신의 성전으로 삼아 거하시며 신자를 거처로 삼신다. 그의 인격성과 절대성은 성경에서 나란히 동행한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특별계시 영역을 벗어나자마자 모든 종교체계와 철학체계에서 하나님의 인격성과 절대성의 일치가 깨지는 것을 발견한다. 이교도들은 하나님을 알지만 그를 영화롭게 하지 않고 그의 영광을 피조물의 형상과 닮는 것으로 바꾸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철학적 사고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인하고 절대성을 강조한다. 브라만교, 이슬람, 헬라철학, 플라톤철학은 공통적으로 오직 신의 절대적 작인을 지시한다. 영지주의는 최상 신과 세상 사이를 절대적으로 분리시키며 신은 피조물이 알 수 없는 심연이자 형언할 수 없는 영원한 침묵임을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불가해성과 불가지성의 가르침은 기독교 신학의 근본사상이기도 하다. 어떤 개념도 하나님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으며 충분히 정의할 수 없다. 만일 모든 피조된 것을 제거한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 아닌가를 얻게 된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자 단일자임을 초월하기도 한다. 모든 존재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 분이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정의함에 있어서 자존에 대한 개념에서 출발한다고 하며 하나님을 말한다면 단지 유한한 실체들과 구별된 어떤 분이 아닌가를 말할 뿐이며 무지를 통해 더 잘 알려진다고 말했다. 다마스케누스는 하나님은 형언할 수 없고 불가해한 신적 존재로서 긍정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의 본성이 아닌 그의 본성에 관한 것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특이한 은유적 이름들로 지칭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긍정적인 이름들도 하나님의 본질을 알려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정적 신학이 긍정적 신학보다 더 선호된다. 부정적 신학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초월한 분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정적 신학도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지 못하는데 하나님은 결국 모든 부정과 긍정을 초월하시기 때문이다. 스콜라주의는 다양한 점에서 더 조심스럽게 표현하면서 긍정적 신학을 더 높게 평가했음에도 하나님의 본질 자체는 인간에게 알려질 수 없다는 교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스콜라주의가 더 발전하면서 하나님의 불가해성에 대한 진리는 배후로 사라지고 신론은 갈수록 더 확대되어 전개되었다. 하나님의 실존, 이름들, 위격들, 속성들이 세밀하고 자세히 전개되어 하나님의 불가해성에 대한 여지가 남지 않았고 일반적 속성들이 광범위에 다루어졌다. 유명론은 신적 본질에 대한 추상적 지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신비주의는 변증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지식을 얻고자 했다. 종교개혁 이후 로마교는 스콜라주의로 돌아갔고 불가지론을 수용했다. 종교개혁신학은 이 점에 있어서 어떤 변화도 초래하지 않았다. 루터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 하나님만을 확고히 붙들었다. 루터에게 하나님의 충만한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 다 계시된 것은 아니었고 하나님 안에는 여전히 어두운, 숨겨진 배경이 있으며 명백하게 알 수 없는 분이었다. 개혁파 또한 이 점에서 동일했다. 모든 피조물의 신격화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가졌고 하나님에 속한 것과 피조물에 속한 것을 구분했다. 유한은 무한을 포괄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츠빙글리는 우리 자신들 입장에서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으며 칼빈은 그의 본성이 무엇이며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유한은 무한을 포괄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모든 이름은 하나님의 본질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이해에 적절하게 맞추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알 필요가 있는 것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폴라누스는 성경에서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 인정된 속성들이 하나님의 본성과 존재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하나님에 대해 언급되는 어떤 것도 하나님이 아니며 그분은 형언될 수 없으시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불가해성의 중요성은 잊혀졌으며 신론이 취급되던 구조는 변경 없이 확정되었다. 소시누스주의는 하나님의 불가지성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항변파도 형이상학적 논쟁들에 간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고 헛된 사변을 경고하며 단순성을 주장했다. 합리주의는 하나님의 실존을 확신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식에는 가치를 두지 않았고 하나님의 위엄과 광대하심이 더 잇아 인식되지 못한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영생이 하나님을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뜻을 행하는데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신학이 이러한 신적 존재에 대한 불가지성의 진리를 전적으로 잊게 되었을 때 철학은 다시 이를 상기시켰다. 칸트는 이성이 선험적으로 종합적 원리들과 규칙들을 포함하는데 제한에서 무제한에 오른다는 원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말하면서 이로 인해 이성은 영혼,세계,하나님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세 관념들은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없고 주관적으로 이성의 본성에서 도출되는 것이며 이 관념의 대상을 관찰할 수 없는 것이 되어서 지식은 경험의 영역 안에만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관념들은 지식을 증대시키지 않고 규제할 뿐이며 개념들을 통일시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영혼, 세계가 존재한 것처럼 보게 하며 학문은 이 실재를 증명하거나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순수이성비판은 이러한 부정적 결과로 결론된다. 그러나 실천이성은 우리로 그 관념들의 실재를 수용하게 하며 실천이성은 세 관념들이 객관적 실재를 가지거나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학문적 지식의 내용을 증대시키지 못하며 사변적 이성은 다만 지식을 규제하고 정화하며 신인동형론을 대항하기 위해 신 관념을 사용한다. 지성과 의지가 하나님에게 비롯된 것이라면 단지 하나님에 대한 실천적 지식이지 사변적 지식이 아니며 신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 형이상학이 아니라 윤리학에 속하게 된다. 피히테는 칸트와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공리들 위에 수립하고 특정한 속성들이 하나님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이로서 알지 못한다. 종교는 하나님을 항상 제시하는데 단지 윤리와 모순되지 않는 한 감각적 표상이 객관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한 이러한 제시가 잘못된 것은 아니며 모든 것은 우리의 주관적 필요에 맞추어 낮아진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오직 그런 계심만 인격화된 하나님을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유효하다고 제시하는 신적 기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슐라이허마허는 하나님의 불가지성 교리에서 같은 일치를 보이는데 존재와 사유 현실과 이상의 일치에 대한 신 관념은 우리의 모든 지식의 전제이며 사유의 근원이나 생각 가운데 납득되지 않고 항상 인식론의 휘장 뒤에 머무르며 절대자를 우리 수준에 맞추려 하는 순간 절대자는 한정된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은 우리 실존의 원천이며 그러한 절대적 작인으로서 우리 지식의 대상이 아닌 절대 의존감정의 내용일 뿐이라 말한다.

하나님의 불가지성 교리는 갈수록 현대의 의식 가운데 침투했다. 헤겔은 종교적 표상은 부적절하고 대중에나 어울리는 것임을 인정했으나 철학이 이를 감각적 형태로 제거할 수 있으며 표상을 적절한 개념으로 상승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성은 다양한 단계를 거쳐 절대적 수준에 이르고 진리를 대면하여 본질로 인식하게 된다고 말했다. 많은 학자들은 개념들을 정화하고 심화시켜 더 초월적 실재에 접근하려고 시도했다. 다른 학자들에게 헤겔의 철학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는데 감각 표상은 신 관념에서 결코 극복될 수 없으며 무신론에 이르게 되었으며 포이에르바흐는 인격적 하나님은 인간 자체의 본질이며 신학은 인간학이라 말했다. 하나님에 대해 진술되는 모든 것은 인격뿐 아니라 모든 속성들과 이름들은 인간에게 유래한 것이며 종교는 인간 자체의 신격화라 주장했다. 이에 따라 많은 학자들은 신 관념 전체를 포기했다. 하지만 이러한 무신론은 과격한 것으로 여겨져서 유한 범주 내에서 활동하는 인간의 지각 능력의 한계를 주목하고 인간 본성에 관한 모든 선언들을 자제하며 이러한 사실과 관련해 오로지 자신의 전적 무능을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다시 불가지론이 득세하게 되었으며 실증적이고 정밀과학의 영역만이 확립되었다. 신학은 이러한 불가지론의 두려움에 깊이 빠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언급하지 못했다. 가능한 형이상학을 제외시키고 종교적 영역에 제한시키려고 했다. 스펜서는 알 수 없는 분에 대한 종교적 경배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며 독일의 신칸트주의자들은 이원론에 이르렀다. 논리적 사고가 우리를 최대한 절대자에 대한 개념으로 인도할 수 있더라도 우리는 종교에 있어 그것만으로 부족하며 우리와 같고 인격체이며 자기 자녀들을 돌보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런 종교적 묘사는 과학진영의 비판을 받지만 그 이상의 것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불가지론이 호소할 수 있는 근거는 매우 큰 비중을 가지는데 먼저 그것이 사용하는 논증은 고대로부터 궤변론자들과 회의주의자들이 모든 지식의 가능성에 대해 제기했던 것으로 모든 인간적 지식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라는 것이며 주체와 객체는 상호 의존적으로 사물과 속성들이 실존하는 겅슨 누군가의 인식과 관련될 때라는 것이다. 우리는 인식과 독립된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으며 어떤 것이 주어지는 순간에 그와 같은 것으로 비추어진다. 하지만 불가지론은 하나님의 가지성에 대해 제기된 다양한 근거들을 가지고 있으며 철학과 신학은 항상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적절하다고 확신했고 부정적 진술들은 하나님이 무엇이 아닌지를 말하고 긍정적인 진술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에게 적용되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제한되는 것은 모두가 인정한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획득가능하다는 것이 다른 방식으로 과격히 옹호되고 있다. 주관적으로는 인간의 지각 능력의 제한성이 지적되고 객관적으로는 모든 신 개념이 종속되는 내적 자기모순이 지적되는 것이다. 하나님, 세계, 영혼에 대한 초월적 관념들은 우리 행위를 위한 규칙들이 되고 도덕적 인간은 오로지 객관적 실재가 그 세 관념들에 상응하는 것처럼 보이나 증명될 수는 없는 것이다. 피히테는 절대성과 인격성의 개념들이 상호 조화될 수 없다는 것에 반대한다. 스피노자도 모든 제한은 부정이며 제한될수록 구체화되고 한정된다고 말한다. 신이란 피조물과 구별되어 제한된 어떤 것일 수가 없지만 신은 모든 피조물의 실체이자 유일하고 무한한 존재로 만물이 그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러한 철학적 전제는 피히테에 의해 인격성의 개념에 적용되는데 인격성과 자의식은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된 것이며 제한성과 유한성 없이는 생각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를 적용할 때에 신을 제한된 인간으로 만들며 종교에서 필요한 것이 도덕적 질서로 귀결된다. 절대적인 것과 인격적인 것 사이의 대립은 기독교 신학에서 항상 인식되어 부정적 신학과 긍정적 신학으로 표현된다. 신의 가지성을 부정하는 증명들이 다른 형태로 반복되어 제시되든 항상 동일하게 인간은 감각적 인식에 매여 자기 생각의 재료를 항상 가시 세계로부터 도출하며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고 비가시적 사물들의 세계로 오를 수 없게 된다. 그는 항상 시공간에 묶여 있으며 그의 사유는 질료적이며 유한하고 제한적이게 된다. 우리의 사유는 항상 유한한 것들의 범주 내에서 활동한다. 사유는 본성상 서로 대립하고 제한사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자연스럽게 전제하면서 그 사이 어느것도 절대적일 수 없다. 절대적인 것에 대한 지식은 모순이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생각하고 알고자 한다면 둘 중 하나를 알게 되는 것으로 절대적인 것을 유한한 것의 범주인 아래로 끌어내려 그 안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이며 제한적인 인간 존재로 만드는 것이고 혹은 우리 사유로 모든 시공간의 제한을 초월하고자 시도하여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유한한 피조물과 모든 유사성을 제거할 경우 우리 사고 가운데 다만 종교에 가치 없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개념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불가지성 교리를 동의하고 승인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학은 피상적인 합리주의가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지식이 가능하다고 함을 반대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을 잘 안다고 가르쳤다. 유노미우스는 하나님의 본질은 오직 피조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고 이런 생각 가운데 신적 본질에 대한 선명하고 명확한 충분한 개념을 발견하여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아는 것도 아니고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더 모르는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스피노자는 삼각형과 같이 하나님에 대해 선명한 개념을 가진다고 말했다. 헤겔은 개념 철학에서 절대자는 완전한 자의식에 이르도 철학자는 절대자를 충분히 안다고 말했다. 기독교회는 이런 합리주의에 전력을 다해 논박하고 거부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신이 전부 다 이해한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약간 아는 것은 큰 복이지만 하나님을 전부 다 이해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경이 불가지론의 전제들을 수용하고 인간의 제한성과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성을 확신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모든 유한한 피조물들과 구별된 무한한 존재를 인식하는 한 이 지식은 긍정적인 것으로 유비적 지식으로서 원래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지식이지만 피조물 가운데 자신에 대한 어떤 것을 알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율배반적인 것이 개입되어 있다. 불가지론이 개념드르이 혼란을 겪고 조화될 수 없는 모순을 보는 반면에 기독교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만한 신비를 바라본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피조물 가운데 자신을 계시할 수 있고 어느정도 자신을 알릴 수 있음을 전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 신비는 이해될 수 없고 단지 감사함으로 인정될 뿐이다. 신비는 모순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범신론적 주장과 다르게 하나님은 무한한 분이지만 유한한 피조물들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며 실제로 계시한다는 사실이 분명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창조 기적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절대적인 것이 모든 제한을 배제하고 모든 규정이 부정이라면 하나님을 인격성으로 언급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를 표현하는 것 자체가 부정이된다. 범신론은 신 개념으로부터 인격성과 자의식의 모순되는 요소로 제거할 때에 신 개념을 달성한다고 착각하는데 범신론에 대항하여 인격성은 신의 절대적 존재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지적들이 많이 있다. 만일 절대성이 사방으로 확되된 무한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인격성이 절대성과 모순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니므이 자의식이 자기 존재와 마찬가지로 풍성하고 깊고 무한하다는 사실을 내포하며 인간들에게 인격성은 비자아에 대항하여 깨어날 수 있으나 그것은 거기서 발생하지 않고 다만 인간 본성 가운데 자기 자신의 원칙과 내용을 두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인격성은 존재하고 자연히 자기 자신과 영원한 종합, 무한한 자기 지식과 자기 결정이 될 수 있어서 비자아에 의존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피히테의 인격성은 인간 영역에서 차용된 개념이라 말하며 신에 적용될 때에 불완전한 것을 포함한다고 말한 것은 올바른 지적이다. 인격성 개념이 하나님께 사용되는 것은 신인동형론적 표현보다 나은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존재를 묘사하기 위해 인격성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위격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절대성과 인격성 사이의 대조가 부정적 신학과 긍정적 시낙 사이의 대조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면서 인격성이란 용어가 틀리더라도 사실상 이로 분명해진 것은 없고 동일한 질문이 반복 제기되는 것이다. 모든 규정이 부정이라면 하나님은 유일신, 신론자, 절대자로 불려서는 안되며 하나님에 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금지된다. 사람인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유비적 인간적 방식으로 말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오로지 침묵하는 것 뿐이며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신적 방식으로 생각하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들 가운데 자신을 객관적으로 계시하거나 기관을 통해 주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가지성에 대한 질문은 하나님이 피조 세계에 자신을 계시하기를 원하고 계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다른 문제로 바뀌어 만일 하나님이 자시능ㄹ 계시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존재하지 않으며 만일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셨다면 작더라도 관찰하고 알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지성을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계시를 부정하는 것과 동일하다. 사실상 불가지론은 영지주의의 오류에 다시 빠지게 되어서 하나님은 형언할 수 없는 심연이며 영원한 침묵으로서 피조물 사이에 어떤 관계와 교제가 없게 된다. 온 세상은 하나님 없는 세상이다. 더 심각한 사실로서 불가지론은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할 수 있는 능력이 없게 된다. 하나님을 그 자신 가운데 가두고 보이지 않는 능력으로 만든다. 세상은 하나님과 나란히 대립되는 권능의 위치로 승격되어 그 권능은 하나님을 수용할 수 없고 하나님의 어떤 영광을 비추기에 전적으로 부적합하게 되며 사실상 무신론이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미 하나님에 대한 많은 지식을 전제하고 있는 모순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기에 하나님은 다시 형언할 수 없는 분이 된다. 절대적 존재에 관해 절대적 지식을 소유하는 것과 상대적 지식을 소유하는 것 차이는 큰 차이가 있으며 유한한 인간에게 절대적 지식을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서는 어떤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고 유한한 인간에 의해 수용되는 정도만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참되고 순수하지만 언제나 상대적이며 완전한 이해를 포함하지 않고 배제한다. 그 어떤 불가지론도 결국 불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스스로 지지될 수 없고 무신론을 두려워하는 불가지론은 범신론적 신 개념을 정당화하는데 공헌하게 되는 것이다.

 

25 하나님의 가지성(선천적 신 지식)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오직 계시에 그 기원을 둔다. 하나님이 자신을 피조물 가운데 계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미덕을 펼쳐 보인다면 하나님의 가시성은 거부될 수 없다. 하나님의 지식과 능력은 세상과 일치하지 않으며 세상 가운데 충만하게 전시되지 않는다. 또한 피조물 안에 하나님은 자신을 완전히 계시할 수 없는데 유한은 무한을 포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불가해성은 가지성을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전제하고 확정한다. 하나님이 피조물 가운데 자신을 계시한 것처럼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정도로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고 있다는 것은 확고한 것이다. 세상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 무대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성경은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선포하고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자신 안에서 살고 기동하는 소생을 창조하신다. 절대적 의미에서 무신론적인 세계는 없다. 세상은 하나님의 부재로 여겨질 수 없는데 그런 경우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이 될 수 없고 반드시 반신의 피조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불가지론은 회의론이 반대하는 것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스스로를 주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신론적이고 무종교적 민족들도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무신론적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실재에 관해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것처럼 그렇게 차이가 많지 않으며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실재적 무신론이 있지만 의식적인 무신론이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적 의미에서는 드물다. 무신론이라는 용어는 주로 상대적 의미에서 신성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신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에 있어서는 계시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그 이름을 사용했다. 하지만 절대적 의미에서 절대적 능력에 대한 부인으로서 무신론은 생각할 수 없으며 모든 사람은 신앙으로 추앙되는 능력을 다시금 인정하게 되며 무신론과 유물론은 범신론으로 변하며 인간이 참된 신을 부정하는 순간에 스스로 거짓된 신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 본성에 깊이 뿌리 박고 있으며 하나님의 계시는 이를 분명히 말해준다. 인간은 장기적으로 차갑고 적나라한 불신을 견지하기보다 오히려 가장 투박한 미신에 집착하며 우리의 경배를 요구하는 인격적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의미에서 무신론은 드물다. 자연주의자들과 범신론자들은 그들로만 구성된 민족, 사회, 교회,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으며 자연스럽게 인격적 신에 대한 신앙은 정상적으로 발생하는 것임을 드러낸다. 비인격적 신은 결코 신이 아니며 인격적 신을 믿지 않는 것은 어떤 의지가 필요한 것이며 하나님의 실재를 부적절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실재를 믿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증명을 하려면 사람이 전지하며 편재하는 하나님 자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종교와 신 지식의 이러한 자연적, 일반적, 필연적 성격은 인간 본성에 창조되어 천성적이라는 견해에 이르게 된다. 모든 인간이 가장 어릴 적부터 단지 물리적 세계만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 비가시적 세계를 의식함을 알게 된다. 유물론이 부정하는 것과 다르게 인간 본성에 내포된 본유관념은 필연적 성격을 지닌다.

본유관념론은 헬라 철학에서 인간이 배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사유에서 출발한다. 플라톤은 이를 기억이라는 이론으로 풀어간다. 영혼은 육체와 결합하기 이전에 가장 순수한 관념들을 주시하고 그 상들을 자신의 기억 속에 깊이 보존하며 모든 학습이 영혼의 선재를 전제한다고 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인식을 지식에 이르는 길로 여겼지만 이성이 공리이며 모든 증명의 토대가 최상의 보편적 원칙들을 잠재적으로 수반한다고 생각했다. 스토아철학은 인간의 사유 본성으로 모든 사람들이 관찰하여 도출하는 개념을 언급한다. 키케로는 실재적 의미에서 본유관념론을 처음으로 말하는데 정신에 새겨진 개념, 선천적, 본유적 지식을 언급하고 모든 경험과 탐구 이전 다양한 진리들에 대한 지식을 수용한다. 현대 철학에서 데카르트는 맨 처음으로 이 용어와 관념을 사용하며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에서 연관되어 지성적 지식이 감각적 인식에서 도출될 수 없음을 말했다. 그에게 감각적 인식은 표상들과 개념들을 위한 계기 제공 수단일 뿐이었으며 지식은 본유관념에서 나옴을 말했다. 그에게 관념들은 우리 정신에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라이프니츠는 진리들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리들이 합쳐져 이성의 본성적 빛을 형성하며 이 관념들이 실질적으로 천성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관념들은 인간 영혼에 미리 형성되며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의식과 상관없이 정신저긍로 지각하고 묘사하며 사유할 수 있기 때문이며 관념들은 인식이 정신적 활동을 자극할 때 의식되며 감각적 인식은 우리 안에 내재하는 잠재적 관념들을 우리 정신 가운데 실재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말르브랑슈는 인간의 학습과 지식은 하나님 안의 관념을 본다는 전제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임을 말했으며 지오베르트, 그라트리, 우바 등은 우리가 정신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 존재로 직접적으로 관찰하고 인간 내부에 직관적 신 지식이 있음을 말했다. 칸트는 선험적 지식과 후험적 지식을 언급하면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관찰의 형태들 범주라는 지성의 형태들 하나님, 미덕, 불멸의 이성의 형태들을 말했으며 피히테와 헤겔은 사고 작용을 통해 필연적이고 보편적 진리들만이 아닌 모든 지식 존재 물질 세계를 구성한다.

본유관념론의 기초 근거는 학습과 학습 능력은 선행 지식이 이미 우리 정신에 있음을 전제하며 논증과 증명이 근거하는 원리들은 반드시 자명하고 선험적으로 확립되어야 하며 경험은 단지 우연한 진리인 견해만 제공하는 반면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리는 오로지 인간 정신 자체에 의해서만 발생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영혼과 육체가 갖는 대조와 그 표상과 개념들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해설되어야만 한다.

분유관념론은 자연종교를 거부한 학자들에게 거부되었다. 이들에게 본유관념론은 전적으로 불필요하며 역사, 도덕적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들에게 인간의 모든 지식은 감각적 인식에서 발생하며 유물론에 의해 수용되었다.

하지만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 본유관념의 부인에 중요한 변화가 생겼으며 진화법칙은 반드시 인간 정신에 적용되어야만 했는데 인간 정신은 단번에 즉각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현재 상태에 이른 것이며 이러한 최초 시작의 관점에서 경험론은 옳았고 인간 정신은 백지상태로 수많은 세대 경험이 이런 정신을 구체화시키며 자신의 환경 전체에 적응된 관념들을 소유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생득설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본유관념론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기독교신학은 역사적으로 본유관념론을 강하게 거부했다. 후기의 본유관념 옹호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오해에 근거해 옹호했다. 터툴리안은 자연적 신지식을 매우 강조했다. 모든 인간이 위급한 상황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 자기 영혼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사실은 모든 민족에게 동일하여 영혼은 본성상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불멸을 알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 학자들은 더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아우구스티누스에 호소하는데 그는 감각적 인식보다는 사유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 이성을 하나님 자신 안에서 본다는 사실에서 설명한다. 지성적 진리들을 하나님의 빛 가운데 주목한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만물의 하나님과 주님은 자연의 간섭 없이 인간 정신을 다스리며 외부 자연 세계를 살피는 것보다 영원한 진리들을 생각함으로 하나님에 이르는 것이 더 나은 것이었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원을 받아 인간은 육신의 눈 외에도 관조의 눈을 부여받아 이 땅에서 하나님을 보고 완전하게 보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들에게 영혼은 감각의 도움 없이도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보나벤투라는 모든 지식이 감각을 통해 나온다는 진술을 거부하지만 감각적 인식이 아닌 내적 관찰과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획득하는 진리들이 있다는 것을 수용하더라도 그 역시 실재적 의미의 본유관념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스콜라주의는 본유관념론을 만장일치로 거부한다. 이들에게 사물의 본질은 지성적 지식의 실재적 대상이다. 모든 지식은 감각적 인식으로 시작하며 감각적 인식이 사물을 볼 때, 지성은 그 사물에서 보편적 개념을 추상화하고 일차적으로 본유관념을 도출할 가능성을 가지게 되며 본유관념은 지성에 의해 완성된 형태로 수반되지 않고 지성의 특성과 일치하여 가시적 사물에 대한 관찰로 도출되게 된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사물의 실체가 아닌 원인이기에 그의 존재와 미덕들도 관찰과 사유로 어느정도 알려질 수 있으며 본유지식이 언급되는 것은 유한한 것에서 무한한 것으로 오르는 자연적 성향이 지성 안에 창조되었다는 점에서는 가능하게 된다.

루터파에게 본유관념론은 정당한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자연신학과 획득된 자연신학을 환영하지 않았으며 루터는 자연적인 것은 여전히 온전하다는 주장에 반대하며 정반대의 극단에 빠지게 되었다. 그에게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은 완전히 상실 된 것이며 성령이 없는 이상 신 지식이 없으며 인간에게 남은 것은 오직 수동적으로 구원될 수 있는 가능성 뿐이었다. 그에게 인간의 본질은 죄로 일컬어졌으며 이는 선천적 신 지식과 획득된 신 지식에 대해 견해를 보여준다.

플라키우스와 켐닛츠와 같은 자연적 신 지식 전체를 거부하는 학자들은 루터의 견해를 이어받아 수용했다. 하지만 루터와는 달리 일방적 입장은 거부한다. 멜랑히톤은 선천적 신 지식과 획득된 신 지식을 가르쳤으며 이 선천적 신 지식이나 하나님에 대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의 자취들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자연신학은 별도로 조직화되어 선천적 신 지식을 능력, 기질, 성향, 완전, 선천적 빛과 성향에 유비적인 빛으로 다양히 정의했다. 선천적 신 지식은 인간 안에 내재한 심겨진 개념이 아니며 데카르트의 본유관념론을 거부하며 내적 빛과 관조의 신비적 이론도 거부되었다. 선천학 신학은 논증과 이지적 추론 없이 신 지식에 도달하고 이 지식을 의심 없이 확고하고 확실하게 증거하기 위한 인간 지성에 심겨진 자연적 소질과 성향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향적 지식에 관한 한 지성에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개혁파는 처음부터 자연신학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다. 칼빈은 일반은혜와 특별은혜를 구분하고 전자는 죄인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남은 좋은 것들로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신성에 대한 감각을 말하는데 하나님은 신성을 아는 지식을 모든 사람에게 심겨주셨고 이를 종교의 씨앗이라고 부르면서 종교의 보편성을 설명한다. 하나님의 존재 확신은 천성적 확신이다. 이는 제거될 수 없는 것이지만 이 씨앗을 소중히 키우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이 종교의 씨앗에 하나님의 창조 작품 가운데 나타난 자신의 계시가 덧붙여져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지 않고서는 눈을 뜰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연 전체는 경건하게 심지어 하나님으로 불릴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모든 개혁파 신조들은 동일하게 선언한다. 우르시누스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며, 인간 정신에 새겨진 하나님 자신에 관한 개념만이 아니라 자신의 신성을 반영하는 거울과 증거로 제시된 모든 피조물을 통해서 계시함을 말한다. 그는 종교의 보편성이 증명하듯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의식도 타고난 개념들에 포함시킨다. 잔키우스는 스토아 철학자들을 따라 보편적 개념들은 우리에게 천성적이지 경험을 통해 마련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폴라누스는 올바른 이성을 하나님의 의지와 사역들에 대한 참된 지식, 인간 정신에 기록한 신적 질서와 판단으로 이해한다. 로고스는 그 저자로서 형식과 규범에서 자연적 원리들이며 이 지식은 하나님의 사역들을 주목함으로 증진되는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식 본유관념론은 푸치우스에 의해 단호히 거부된다. 푸치우스는 데카르트가 (1) 관념의 용어를 색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서 (2) 본유적 신 관념이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히 말하지 않음으로서 (3) 감각을 통해 얻은 지식의 가치와 확실성을 무시함으로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말한다. 푸치우스에게 선천적 신학은 지성이 어떤 노력 연구 추론 없이 진리를 파악하는 능력이나 힘은 자연적 빛임을 말했다. 그리고 지성은 필연적 가정에 의해 이 진리를 깨닫고 승인하려는 쪽으로 확대되고 기우는 경향으로 이해되는 것으로 말한다.

 

앞선 논의를 통해 기독교 신학이 본유관념론을 왜 거부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는 기독교 신학이 빠지게 될 합리주의와 신비주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본유관념은 플라톤의 이원론과 신플라톤주의에 의해 로마교에서 신비주의에 이르렀다. 명상의 낮은 단계에서 높은 관조의 단계로 올라가면 하나님과 대면에서 완전히 만족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 철학에서 등장하는 이원론과 본유적 신 관념 이론들이 인간 정신의 내재적 사고로 구성된다는 합리주의에 이르게 되었다. 성경은 인간이 영육간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며 자신의 육체로 인해 가시적 세계 전체와 연관되어 매여 있음을 가르친다. 하지만 이 유대는 노예를 묶는 사슬이 아니다. 이와 정반대로 인간이 처한 세계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이며 세계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하나님의 미덕들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칼빈은 세상의 지극히 작은 곳에서조차 최소한 하나님 자신의 어떤 영광의 광채가 나타나지 않는 곳이란 없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만장일치로 본유관념론을 거부한다.

하나님은 인간 영혼의 태양이며, 하나님의 빛 가운데 빛을 보며 오로지 자연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봄으로써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이른다. 신비주의자, 합리주의자, 존재론자의 견해는 유신론적이 아니라 범신론적이며 이성의 빛을 하나님의 빛과 혼동시키고 보편적 진리들을 하나님 의식 가운데 있는 관념과 혼동시킨다. 하지만 하나님은 존재의 질서에서 일차적 존재이다. 그는 만물을 창조하고 보존하시며 하나님의 생각과 지식은 사물의 실재에 선행하며 세상이 존재하고 나서야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이 먼저 세상을 생각하고 자신의 의지를 통해 세상에 존재를 부여하는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그 관념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다음에 세상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피조물의 수준이며 사물들이 존재한 후에 그 때문에 사물들을 알고 세상에서 하나님에게 이른다. 존재론 자체가 자기 입장에서 우리의 신 관념을 신 존재와 우리의 로고스를 하나님의 로고스와 동일시하여 범신론의 오류에 빠지지 않고서는 객관적 실재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대하여 기독교 신학은 성경의 가르침을 제시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기에 우리의 모든 신 지식은 간접적 계시를 통해 획득되고 유비적 성격을 가진다. 그래서 세상을 떠나서는 기초 원리를 알 수 없고 신 관념에 이르지 못한다. 가시적 사물들에 대한 상징이 아니고서는 비가시적 사물들을 알 수 없다. 감각이 없는 자는 그 감각에 상응하는 현상들에 대한 개념 또한 얻지 못하며 부정과 대조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빛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정의와 도덕 종교와 예술에 있어 사람들마다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만일 관념들이 실재적 의미에서 본유적이며 하나님 자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우리 정신에 심겨진 것이라면 이 차이는 설명될 수 없으며 우리는 모든 사람이 언어 능력을 가질지라도 여러 언어를 사용하며 하나님에 대한 하나의 관념을 가져도 여러 가지 생각들로 덧입히고 자기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정의 불의 등의 견해는 매우 다른 것이다. 어떤 종교적 윤리적 진리도 항상 사람에 의해 인정되지 않으며 현실적으로 자연신학은 존재하지 않고 자연권과 자연 윤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진리의 단면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보기 위해 태양 빛이 필요하듯 주관적으로 눈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이 인간이 실제로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배우고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식의 씨앗들은 본성적으로 인간 안에 내재하며 모든 지식은 신앙에 기초하며 모든 논증은 원리를 전제한다. 사고 법칙, 수 이론은 어디에서나 동일하고 모든 사람이 선과 악을 구별하며 종교와 신 지식이 없는 민족은 없다. 종교에서 인간은 종교적 씨앗으로 돌아가야 하며 성경은 이 점에서 우리의 예를 보여준다. 성경에서 인간은 자연과 은혜에 나타난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에 가능한 강력히 묶지만 동시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소생이며 하나님의 작품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자신의 정신 가운데 가지고 자신의 마음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모든 것은 보편적 관념들의 본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달려 있으며 하나님은 인간이 성인으로 세상에 들어오지 않게 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린 아이로 태어나게 한다. 이 아이는 도움이 필요하지만 이 아이 안에는 이미 미래의 성인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선천적 신 지식은 인간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충분한 지식을 갖추었기에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가르침 없이 심겨진 본성에 의해 신 지식에 이르는 잠재력과 경향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신 지식이 인간 자신으로부터 자연적으로 학문적 추론 없이 생겨난 것을 말하는 것이며 구체적 내용을 갖지 않는 백지상태의 서판으로 태어난다는 이론에 대한 반대로 이해되서는 안된다. 이 표현들은 우리 내부의 타고난 원리들을 통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한 신 지식은 우리 안에 있는 본유적인 것이라고 불리는 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본유관념이 지식의 능력으로만 이해된다면 모든 지식은 본유적이라고 불린다는 로크의 지적은 잘못되었다. 신 지식은 선천적, 본유적으로 불리는 면에서 반드시 그 지식에 모든 사람이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신 지식을 본유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한편으로 신 지식은 그에 반하여 인간이 완전히 구비한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계시의 내적 작용으로 그의 의식에 발생한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경험론에 반하여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고유하고 본유적인 것으로 불리는 것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신학은 단지 성경만이 아니라 심리학과 역사도 정당히 취급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는 모든 작품들에 있으며 사람 외부만이 아니라 그의 내부에도 있으며 인간 자신은 하나님이 알려지는 자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하나님 자신은 그 어떤 사람에게도 자신을 증거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26 하나님의 가지성(획득된 신 지식)

 

선천적 신 지식과 획득된 신 지식은 대립되지는 않지만 구별된다. 전자는 인간의 본유적인 것이며 후자는 외부로부터 전자의 증대를 의미한다. 그러나 어떤 지식도 외부로부터 인간에게 들어오는 것이다. 지식에 대한 능력은 내부와 외부 세상의 영향을 통해 비로소 활동하고 행동한다. 기독교 신학은 선천적 본유적 신 지식을 인간이 태어날 때 갖는 의식적 신 지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성장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신 지식을 가지며 선천적 신 지식 획득은 획득된 신 지식과 대립하지 않으며 전자 또한 획득된 신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계시는 신 지식보다 선행한다. 하나님은 영원한 권능과 신성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인간 외부와 내부 모두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이유로 과거의 선천적 신 지식과 획득된 신 지식 사이의 구별은 저절로 자연스럽게 획득되는 것으로, 원인의 방법, 탁월함의 방법, 부정의 방법을 따라 추론과 논증, 숙고와 증명을 통해 얻어지는 것으로 말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신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의 전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어떠한 인상과 관념만을 가지는 사실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으며 어떻게 왜 알고 있는지 설명하려고 애쓰는 존재이다. 신앙은 과학에 오르고 선천적 신 지식은 획득된 신 지식으로 완전해지는 것이다.

선천적 신 지식과 획득된 신 지식의 구분은 일반적으로 자연신학에만 적용되는데 자연신학은 계시신학과 구별되어 대립한다. 하지만 이 구분은 인간이 모든 계시를 떠나 세상에 사유할 수 없기에 모순되는 것이다. 자연신학에서 말하는 신 지식은 하나님이 직접 자신의 손으로 만든 작품 가운데 자신을 계시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인간이 자연적 이성의 빛으로 이런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고 아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전제된다.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면 신자들도차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지 못한다. 자연적 신 지식은 성경 자체에 포함되며 그리스도인이 자연신학의 취급에 있어 성경 안에 있는 특별 계시와 성령의 조명을 제거하고 기독교적 전제없이 자연신학을 논한 후에 계시신학을 논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은 특별계시의 토대 위에 선다. 이런 토대에 근거해 성경의 안경으로 세상을 해석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한다. 그러므로 선천적 신지식과 획득된 신지식은 특별계시 없이 이해될 수 없다. 우리는 은혜언약 안에서 태어나며 우리가 가진 신 지식을 형성한다. 자연과 은혜는 결코 대립명제가 아니다. 한분의 하나님은 자연과 은혜 모두의 기원이시며 그를 통하여 그에게 돌아간다. 이것은 선천적 신 지식과 획득된 신 지식 모두에 적용되며 이 모두를 가지게 하는 것은 성경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전제하며 하나님의 실재를 믿지 않는 자를 예외적으로 다룬다. 성경은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의식에 호소하며 분석하거나 논증하지 않고 하나님이 행한 사역을 보인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지 않는 곳은 세상에 없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의 증거와 계시로 호소하면서 논증 가운데 변증법적으로 전개될 모든 것을 배아 상태로 포함한다. 성경은 변증법적 방식이 아니라 증거의 언어로 마음과 양심 윤리적 의식 전체에 호소한다.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증거한 이는 하나님 자신이며 각 사람의 이성, 도덕은 이 본성의 지원을 받는다. 논증과 철학적 증명이 없다하더라도 그 증거에서 힘이 발생하는데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이 증거에 동의해야 하는 것이다. 이 태도를 견지할 때에 증명의 과대평가와 과소평가에 빠지지 않게 된다.

 

고대 철학자들로부터 신의 실재를 보이는 증명을 발견하게 된다. 기독교 신학은 이들의 증명을 전수받아 호의적으로 취급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보편적 개념으로 도출한 논증을 덧붙인다. 기독교 신학은 이교도 학문의 제공을 멸시하지 않고 이원론적 영지주의를 거부함으로 자연을 하나님의 작품으로 여긴다. 기독교 신학에 있어 자연은 교회 내에 침투한 모든 금욕주의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재창조와 구주로 계시했던 동일한 하나님의 창조였다. 기독교 신학은 자연종교의 진리들이 수학과 논리학과 같은 의미에서 증명 가능한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으며 사실상 그것들이 신앙의 조항이 아닌 제전제가 되었다. 자연신학에서 학자들은 신앙 이전에 신앙과 상관 없이 합리적,과학적 바탕 위에 기초했다. 로마교의 신학은 여전히 동일한 합리적 입방에 서 있으며 자연신학을 고수한다.

종교개혁은 이 자연신학을 증명들과 더불어 전수받았지만 신앙에 대한 교리로 취급하지 않았고 신앙에 관한 교리에 포함시킨다. 칼빈은 종교의 씨앗은 모든 사람에게 제거할 수 없이 심겨졌지만 모두에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신앙을 필요로 하며 개혁파 신학자들에게 있어 자연신학은 동일한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개신교 신학은 곧 합리적 방법을 취하면서 자연신학이 합리적 신학이 되었으며 후기 신학자들에 의해 가속화되어 합리주의가 입성하게 되고 자연신학이 참되고 학문적 증명이 가능한 신학이 되었으며 이에 반해 계시신학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형이상학적 증명, 물리적 증명, 역사적 증명, 도덕적 증명, 수학적 증명으로 자세히 나뉘어 전개된 것이다.

자연신학의 이러한 자기 충족성은 칸트에 이르러 증명들을 엄격히 비판하고 이론적 이성이 반드시 분명하지 않다고 결론지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 이후 증명은 불신의 대상이 되었으며 하나님은 증명의 근거들에 의존하는 하나의 결론이 되어버린 것이다. 학자들은 신 존재 증명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교의학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신학과 철학에서 신론을 증명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는데 결국 그것들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논증할 뿐이었다. 헤겔 철학에서 증명은 인간 정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기 증거로 높이 평가하고 존재론적 증명에 큰 가치를 부여한다. 존재론적 증명은 인간 정신의 관념들과 규범들에서 파생된 증명으로 옹호하려 시도한 것이다. 우주론적 증명은 신의 실재가 세상의 실재로부터 증명되어야 한다면 이 설득력에 대해서 절대적 원인에 이르지 못하고 본질에 대해 어떤 빛도 비추지 못한다. 목적론적 논증은 모든 목적을 부정하는 다윈주의의 영향에서 의도 논증으로서 진화 과정 자체에 기초할 때에 힘을 얻고 있다. 진화 과정이 세상에서 관찰되고 점차적 목표,의지,목적을 보인다는 것이다. 윤리적 논증은 자연에 대립한 정신의 자율성은 문화 전체와 도덕적 의식과 생활 가운데 드러나는데 도덕적 세계 질서의 실재만 증명하든지, 인격적 하나님의 실재도 증명한다. 보편적 승인에서 비롯된 논증은 종교에 대한 역사적,심리학적 철학적 연구를 통해 의심 없이 수립된 인간의 종교적 본성에서 자신의 설득력을 도출하고 신의 실재,계시,가지성을 전제한다. 결국 모든 증명이 귀결되는 것은 유물론과 범신론으로는 세계 문제를 풀 수 없고 모든 세계의 기원,본질,목적은 유신론의 관점에서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명들은 이름과 형태가 다르더라도 사실상 동일하다. 우주론적 논증과 목적론적 논증은 세계 전체로부터 출발하여 그 기원으로 목적으로부터 신에게 이러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동일하다. 존재론적 논증과 윤리적 논증은 인간 본성, 이성적 본성과 도덕적 본성 위에 수립된다. 보편적 승인의 논증과 역사적신학적 논증은 역사에 기초하여 인류의 일치된 증거와 역사로부터 신의 실재를 결론짓는다. 우주론적 증명은 다양한 형태들에도 불구하고 결과에서 원인을 추론하는 데 귀착된다. 이것은 자명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확실하지 않은 다양한 전제에서 출발하며 우주 전체가 역시 우연적이고 유한하고 상대적이며 불완전하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 모든 전제들이 정당하다면 우주론적 증명은 설득력을 지닐 것이다. 하지만 이 증명은 원인과 속성과 본질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며 무한한 일련의 원인들은 생각할 수 없고 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절대적 근거, 최초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나 절대자 실체나 힘, 물질이나 의지든지 그 존재를 인정한다. 이런 전제가 옳다면 우주론적 증명은 세상의 원인에 이르게 하며 이런 맥락에서 초월적인 것이 단지 내재적인지 인격적인 것인지 무의식적인 것인지 전적으로 결정되지 못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우주론적 증명에서 무언가를 도출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이 논증이 부딪히는 반대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일종의 유출로 임의적으로 여겨지고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 하나님은 물질적 육체적 존재 부정한 존재여야 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존하고 절대적인 원인은 인격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논증하게 되며 이에 대해 최초 원인의 내적 속성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인과법칙을 부여할 권한이 없고 아무것도 규정할 수 없다는 반론에 마주하게 된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무한 연속의 원인들은 불가능하고 우주론적 증명은 최초의 자존하는 절대적 세계원인으로 인도할 뿐이라는 것이다.

목적론적 증명은 피조계 가운데의 미와 조화의 목적에서 출발하여 지성적 원인을 추론한다. 그러나 목적론적 해설은 유물론자들에 의해 사물 안에 어떠한 목적도 없고 자연에 대한 목적론적 해설은 기계론적 해설에 양보해야 하는 것이 되다. 범신론은 세상에 질서와 목적이 있다는 것으로 의식적 지성적 원이늘 수용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무의식적인 것은 세상 전체에도 의식적 숙고와 의도적 타산보다 더 지혜롭고 확실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증명은 세계 조성자를 보여줄 뿐 세계 창조자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게 된다. 성경은 어디서나 창조의 목적이 있음을 말한다. 목적론적 세게관은 고대 헬라 철학자들에게 옹호되고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목적은 구체적 현상 가운데 식별되며 원자들은 하나의 법칙에 순종한다. 우주가 우연히 생성되었다는 것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심지어 목적을 제시할 수 없는 사실도 그것을 관찰 할 때에 바르게 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자연과학자들은 최근 목적론으로 되돌아 온다. 다원주의적 유전론의 특징은 어디서나 목적을 원인으로 교체하려고 하지만 목적론적 관점이 필수 불가결함을 드러내고 자연선택 이론은 목적 적합성을 해설하고자 목적했기에 물질과 힘과 운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반드시 방향이 있으며 이 방향은 목적 적합성 없이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목적론과 인과론은 상호 배제하지 않으며 목적을 세운 자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사용하며 목적론적 세계관 내에 기계론적 인과론을 위한 자리도 존재한다. 만약 질서와 목적이 확립되고 논증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면 목적론적 증명이야말로 미와 조화로부터 의식적 존재를 추론할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된다. 무의식적 목적은 존재하지 않으며 무의식적인 것이 목적을 가지고 활동할 수는 없다. 본능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지만 그럼에도 본능의 무의식 가운데 인지되는 목적이 존재하며 목적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목적은 반드시 앞서 착상 되었어야 하는 거싱다. 심지어 목적론적 증명을 통해 세계 조성자에 도달하는 것이 사실이라도 그 증명이 작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증명이 한 분의 지적 존재를 시사하지 못하지만 함께 세상을 산출하는 많은 신적 존재들의 실재에 대한 가능성을 연다면 목적론적 증명은 여전히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최초의 원인은 세상의 수립을 통해 지성을 필요로 했고 증명은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한다. 모든 것은 세상 안에 목적이 있는가에 의존한다. 그래서 이것이 확실하다면, 최고 존재의 실재와 의식은 당연히 내포된 것이다.

 

존재론적 증명은 (1) 인간 정신의 보편 관념들과 규범들, 우리 개개인의 이성과 세계 전체를 초월한 이성으로부터 절대적 이성, 규범들의 총체, 즉 하나님을 추론한다. (2) 최고의 절대적 관념, 하나님에 대한 필연적 사유로부터 출발하여 관념의 실재를 결론짓는다. (3) 존재론적 증명은 신 관념의 본유를 하나의 사실로 여겨서 이 관념을 인간에게 심어 넣은 하나님의 실재에 의해서만 해설된다.

형태는 다르지만 증명은 단 한가지, 사유로부터 존재를 추론하는 것이다. 피조물들은 우연적으로 존재하며 논리적 모순 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유와 존재는 다른 범주에 속하며 전혀 없는 것이다. 존재는 사유의 산물이 아니며 존재론적 증명으로 이것을 말하지 않는다. 신 관념에 있어서 사유로부터 존재를 추론하지 말하야 한다는 것이 정당하느냐에 대해서 묻는다면 첫째로 만일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정당하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본질과 존재는 동일하며 이 조건은 무엇보다 증명되어야만 한다. 둘째로 신 관념에 대한 우리의 사유로부터 우리의 필연적 사유로부터 신의 실재를 도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의 존재는 신 관념에 대한 우리 사유의 산물이 아니고 산물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신 관념을 포함한 관념들과 규범들의 세계는 하나님과 동일시될 수 없다. 우리 안에 이런 관념들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신의 실재가 추론될 수 있지만 신의 실재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며 포함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증명은 엄격히 말해 증명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1) 관념들과 규범의 세계 최고 관념도 자의적이 아닌 필연적으로 고려해야 하며, (2) 우리가 관념들과 규범들의 세계, 신 관념을 생각하는 순간에 참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여겨져야만 하는 것이다. 신 관념에 대한 필연적 사유는 참된 실재로서의 관념에 대한 필연적 사유를 수반하며 존재론적 증명은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존재론적 증명은 사유에서 존재로의 협곡을 건너게 해주지 못하며 관념들로서의 관념들로부터가 아니라 우리 안의 관념들의 존재로부터 우리 안에 관념들을 창조하고 보존하며 스스로 최고 관념이 되어야 하는 하나의 존재가 추론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증명이 갖는 가치는 인간 증명이 제시하는 필연성에 따라 신 관념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실재하는 분으로 생각하고 이 필연적 증거를 신뢰하든지 자신의 의식을 의심하든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윤리적 논증은 인간과 인류 가운데 나타나는 도덕적 현상들, 양심, 책임 등으로 주목하여 도덕적 세계 질서를 창조하고 보존하는 도덕적 존재를 도출한다. 이런 맥락에서 최고의 주권적 입법자를 추론하는데 전도덕적 세계 질서가 자연 질서와 내적으로 연관되고 그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고 그로부터 도덕적 질서를 창조하여 자연의 질서 위에 설정한 존재를 추론한다. 그러나 이 논증은 인간 세계의 윤리적 현상들에 기초하여, 이를 통해 최고의 도덕적 존재인 하나님에게 이른다. 이 증명에 대해서 첫째로 진화론은 인간의 의식적 생활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생활도 독자적 질서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하나의 과정을 통해 발생하기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인간의 도덕적 의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원시적으로 동물에게도 나타나는 경향이 발달한 것으로 점차적으로 인간 의식 가운데 동기는 행동 자체와 분리되고 행동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래서 도덕은 사회의 산물이자 환경은 이난을 도덕적 존재로 만든다. 둘째로 독립적 도덕론의 옹호자들은 윤리적 논증에 있어 인간의 도덕적 의식은 하나님이 아니라 도덕적 세계 질서, 선을 위한 자리와 선을 유지하고 선이 승리할 기회가 있는 세계 질서를 보장할 뿐임을 말했다. 셋째로 선의 능력과 도덕적 세계 질서의 능력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미덕이 항상 보존되는 것은 아니며 악이 징벌되는 것도 아니다. 자연은 무죄한 자에게 재난을 준다. 마지막으로 도덕적 세계 질서가 있다손치더라도 아무도 그것을 자연 질서와 연관된다고 증명할 수 없으며 도덕적 세계 질서가 자연 질서를 정복할 것이라는 사실은 증명될 수 없으며 두 질서가 나란히 병존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게 되어 다신론을 주장하게 된다.

이러한 모든 반론들은 타당한 근거로서 논박될 수 있다. 진화론적 반론은 인간의 도덕 의식의 기원과 본질을 설명할 수 없으며 설명의 시도에서 선한 것을 유익한 것과 혼동했다. 또한 인격적이며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과 관계 없는 도덕적 세계 질서를 이해할 수 없으며 추상적인 선의 능력을 신격화하는 것에 그친다. 또한 도덕적 세계 질서를 비실재적이거나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는 없으며, 다신론으로의 복귀는 궁여지책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들은 신의 실재에 대한 윤리적 논증이 증명이라 부를 수 없음을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윤리적 논증이 많은 동정을 받아 다른 증명들이 이 논증 앞에서 완전히 뒷전으로 물러난다면 자신의 논리적 증명의 힘이 아닌 인간의 도덕적 의지의 증거로서이다. 비록 우리 주변 세상에서 도덕적 질서를 자주 찾아보기 힘들더라도 사람은 자신의 지성과 이성이 사유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양심이 그 질서에 매여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온 세상이 이 질서에 저항하고 지적 이해가 수많은 반론을 제기하더라도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도덕적 존재로 주장할 것이며 도덕적 실재의 패권에 대한 믿음 가운데 인내하고 이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다시금 만물을 다스리는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보편적 승인에 나온 증명도 비슷한 힘을 가지는데 모든 종교학자들은 종교 없는 민족은 없다고 말한다. 종교의 기원을 찾는 역사연구는 어느 시대나 장소에서도 종교를 갖지 않는 인간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인정한다. 인간은 가장 종교적 존재였기에 역사적 방법으로는 종교의 기원을 찾을 수 없다. 심리학적 연구는 종교를 비종교적 요소들의 결합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 본성 자체에 근거한다는 결론을 말한다. 종교철학자들은 종교의 씨앗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반면 최근의 학자들은 객관적 타당성 수립을 시도하기 위해 종교적 형이상학의 필요성을 다시 말한다. 이 형이상학은 신의 실재,계시,가지성에 대한 믿음으로만 수립이 가능하다.

누구나 보편적 승인 전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 있고 종교를 망상과 환상 오류처럼 생각하길 선호하기를 포기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보편적 승인은 여전히 매우 중요한 사실로 이를 통해 종교가 개인적이거나 특수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 현상이며 인간 본성 자체에 근거함을 알기 때문이다. 만일 그 인간적 본성이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면 모든 면에서 확실성을 상실한 것이며 논리적 설득력이 없다면 환상이나 현실 사이의 선택에 있어 결정은 의심스러운 것이 될 수 없다. 또한 이 증거에 역사적, 신학적 증명이 첨가되는데 역사가 밝혀주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증명에 기초를 둘 수 있다. 이로서 인류 가운데 인류의 문명과 문화, 과학과 예술, 학교와 사회에서 발견되는 지속적인 발전에 호소하며 역사 가운데 하나의 관념과 계획이 실현되고 하나의 목적이 추구되는 하나의 과정이 있으며 모든 것이 지혜롭고 전능한 세계 통치자를 가리침을 결론 짓는 것이다. 이 모든 추론들에 대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은 다른 토대에 기초할 수 없다면 그 신앙을 흔들 수 있는 중대한 논증이 제기될 수 있으며 역사는 매 순간 반복되는 의문을 남기고 그 답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재적인 것은 합리적인 것과 일치하지 않아서 역사에 호소하고 자기 주장의 논증들을 도출할 수 있다. 지적 발달과 문화의 진보가 있더라도 인류가 종교적 도덕적으로 진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견 차이는 많이 있으며 이를 결정할 통계는 없다. 진화론이 환대를 받는 것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인데 진화의 개념이 가지는 맥락에서 역사가는 자신의 사관에서 인도,계획,목적의 개념이 증명한다. 항상 역사는 특정한 목적에 의해 인도된다는 신념은 동일하며 인간의 사유는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더라도 결코 쉬지 않고 발견되길 시도하는 것이다. 세상은 단지 멸망되기에 마땅하다는 것을 선호하는 이는 누구든지 지적 반증으로도 설득될 수 없지만 역사 가운데 있는 인도와 목적에 대한 신념은 인간의 마음에 근절되지 않고 심겨 있으며 역사철학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이 주목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원리적으로 무신론과 유신론 사이의 선택에 직면하게 되며 이 선택에 있어 결정적인 것은 지성이 아니라 믿음이다.

 

신학에서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논증들이 증명이라고 불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증명이 하나의 명제에서 다른 명제를 도출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이유로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증명이 형용모순인 것은 아니다. 하나의 증명에 의존한다는 것은 실재에 의존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지적인 원인은 본질적 원인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삼단논법에서 하나님의 실재가 결론이 되더라도 현실에서 하나님의 실재는 존재의 시작과 근거이지 결론이 아니다. 이러한 논증은 증명이라고 불릴 수 없는데 윤리적 종교적 특성을 빼앗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신앙은 증명들에 기초하고 그 증명들과 더불어 생사를 같이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 증명은 분명히 하나님에게 기도하기 전에 반드시 그를 증명해야 하는 신앙이 된다. 하지만 어떤 실재도 오로지 증명을 근거로 우리에게 확실한 것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그 실재를 자연스럽게 수용하며 하나님의 실재를 수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소위 증명이 더 명확하고 선명하게 밝힐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실재에 대해 확신하는 최종증거는 아닌 것이다. 이 확신은 단지 신앙에 의해서만 자발적 증거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신앙은 각 사람이 자신의 영혼에 소지하는 종교적 인상들과 감정들을 해설하려고 애쓰며 지성과 인상들과 개념들에 질서를 부여한다. 이러한 인상들은 우주론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 윤리적 증명, 보편적 승인과 역사적 증명으로부터 온다. 이것들은 결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낸 유일하고 분리된 증거들로 여김 받아서는 안되고 반대로 만물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전 세계가 하나님의 미덕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지극히 작은 곳조차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비추어지지 않는 곳이 없으며 하나님의 증거는 우리의 안팎에서 다가오며 자연이나 역사, 마음이나 양심, 이생이나 미래에 자신을 증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는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에 대한 인류의 응답이다. 하나님에게서 나와 온 세상을 통해 인간에게 향한 이 증거들은 증명들 가운데 질서 정연하게 배열되는데 이는 증명으로서는 약하지만 증거로서는 강하다. 불신자의 지성을 강요하는 논증은 아니지만 각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표지이자 증거이다. 그것들이 전파되어 반대와 의혹을 만나더라도 그로 인해 그것들이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더라도 모든 것에 의심을 일으키기에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철머 모든 사람은 선험적으로 하나님의 실재를 확신하는 것이다. 사람은 증명으로 신앙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파선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유는 자신이 인지한 현상들을 설명할 수 없고 모든 반대에 대해 변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숙고는 실재에 대한 확신은 주지 못하더라도 명확함과 선명함을 제공하며 반대자의 공격을 물리칠 무기를 제공해준다. 따라서 창조와 재창조, 자연과 윤리는 이원론적으로 병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동일하게 비춰지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계시이다.

 

 

30 비공유적 속성들

 

하나님의 본성은 삼중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하나님의 완전에 대한 교리에서 취급된다. 삼위일체의 성부, 성자, 성령이 동일한 신적 본성에 참여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신적 본성이 자신 안에 무엇을 포함하고 모든 피조물의 본성과 다른지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을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보다 먼저 더 선명하게 가르친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알려주는 첫 번째 사실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과는 구별된 고유하고 독립적이며 자율적인 존재와 생명을 지닌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에 해당하지 않는 고유한 이름들을 지니며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의 동일한 분으로 자기 백성과 연관하여 영원히 동일하게 계시는 분으로 지칭된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며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모든 사물의 존재와 발생의 최종적 근거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위해 자신의 명예를 위해 모든 것을 행하며 만물의 근원이며 풍성한 원천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율성은 모든 사람에 의해 인정되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의 이러한 미덕은 자충족성, 자존성, 전충족성, 독립성 위대성으로 불려지는데 하나님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에게는 존재한다는 말로 요약되는 것이며 그 존재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으며 그것에서 더하거나 뺄 수 없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하나님의 자존성에 대한 논의에서 변화를 초래하지 못했다. 루터는 하나님을 여호와로서 절대적 존재로 정의하며 추상적인 묘사가 아니라 감춰진 하나님에서 계시된 하나님으로 묘사한다. 개혁파는 자존성이라는 용어가 독립성이라는 용어와 대체되어 사용되더라도 이러한 하나님의 완전은 더욱 강하게 전면에 부각했다. 자존성은 하나님의 자율성만 표현하지만 독립성은 더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모든 존재 미덕 등에서 독자적임을 포괄한다. 과거에는 주로 여호와라는 명칭에서 출발했다면 나중에는 하나님의 독립성이 비공유적 속성 중 첫째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이 자존성을 자신에게 속하는 것으로 묘사할 때에 하나님은 이를 통해 자신을 절대적 존재, 절대적 의미에서의 존재자로 알린다. 이러한 완전으로 본질적으로 완전하게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되며 모든 피조물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존하고 스스로 존재하거나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실재 미덕 모든 사역 가운데 전적으로 독립적이며 궁극적 목적이 되신다. 단지 스스로 있는 존재로만이 아니라 충만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자존성 안에 다른 모든 미덕들이 포함되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존재 가운데 자기 존재를 견지하는 자기 보존의 욕망을 가지며 존재의 사실로 인하여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는 독립적이며 불변하는 존재에 대한 그림자이다.

 

하나님의 자존성으로부터 하나님의 불변성이 흘러나온다. 불변성은 성경의 지지를 거의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성경의 하나님은 세상과 중요한 연관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행위는 변화하고 감정과 의지가 변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이 그 모든 상황 가운데 동일한 분이며 계속해서 동일한 분으로 머문다는 것을 증거한다. 모든 것은 변하지만 하나님은 계속 존재하며 항상 자신의 모습으로 그대로 머무른다. 하나님의 실재와 본질은 변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 모든 계획과 작정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거짓말하거나 후회하지 않으신다. 기독교 신학의 하나님의 불변성 교리는 이런 근거 위에 세워졌는데 만약 하나님이 변하는 분이라면 그는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그의 이름은 존재이며 불변하는 이름이다. 변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에 어떤 것이 될 것이지만 변하지 않는 존재는 진실로 존재하며 현재 존재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불변성은 이신론과 범신론에 많은 반대를 받는데 이들에게 신성은 세상의 영속적 변화 가운데 있는 세상의 내재적 원인으로 수용되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반대는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하나님의 지식과 의지 불변성을 반대하여 하나님의 의지를 인간에 종속시키고 인간의 행위에 따라 변하게 만드는 것이다. 단순하고 불변한 하나님의 본질과 모든 것이 영원하며 동일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유인 하나님의 의지를 구별하는 것이다. 범신론은 생성의 관념을 하나님에게 적용하여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선을 지우게 했다. 이들의 근본 사상은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되는 것이며 시초의 하나님은 알 수 없는 심연이며 추상적 존재요 절대적 자연이라는 것으로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실재화시키신다. 그는 자신의 창조주이며 자신을 산출시키며 자신의 원인이 되어 인격, 자의식, 정신에 이른다. 절대적 생성에 대한 철학적 관념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불변성은 최근 신학에서 거부되어 하나님을 자신의 원인 자기 실현의 능력으로 부르기 선호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변성 교리는 종교적 의미를 지니는데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차이의 존재와 생성의 대립에서 모든 피조물은 생성되어 가는 중에 있다는 것이다. 피조물은 창조주 안에서만 그 안식을 발견하고 하나님은 성경에서 자주 반석으로 묘사되어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며 순수한 존재로 등장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지만 자신에 의해 생성되거나 산출된 것은 아니다.

이후 데카르트에 의해 하나님의 의지가 지성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고 하나님의 실재조차 의지의 산물로 삼게 되었다. 개혁파는 이러한 자신의 원인, 자신에게서 나온 존재라는 표현을 부정적인 의미에서만 이해하는데 이는 긍정적 의미에서의 자기 원인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생성에 대한 관념은 신적 존재에 대한 적용에 도움이 되지 않는데 성경은 하나님을 불변하는 존재로 묘사할 뿐 아니라 동일한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생성은 원인을 전제로 하여 원인 없는 생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 의미에서 존재는 더 이상 원인에 대한 질문을 허용하지 않으며 절대적 존재가 존재하는 것은 절대적 존재이기 때문이며 신 관념은 자연히 불변성을 수반한다. 하나님에게 있어 증가나 감소는 상상할 수 없으며 선악 간에 변할 수 없는 분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이며 완전하며 참된 존재로서 생성은 피조물의 속성이고 시간과 공간 변화의 한 형태이다. 이러한 불변성은 고정된 부동성이 아니라 다채롭게 변화하며 피조물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인간적 방식으로 말한다. 스스로 불변하신 하나님이 변하는 피조물들을 존재하게 할 수 있으며 스스로 영원하신 하나님이 시간 속에 들어와 자신의 존재와 더불어 모든 공간에 침투해 올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성에는 한순간의 시간이 없고 생성의 요소도 발견되지 않는다. 반대로 피조물을 전제하는 것은 하나님이며 시간은 영원성에 공간은 광대함에 생성은 존재에 가변은 불변에 전제한다. 이 두 범주 사이에 중간 다리는 없으며 하나님의 존재와 모든 피조물의 존재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으며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내려오며 내재하시면서도 불변을 유지하면서도 관계할 수 있는 것이 신적 위대함이다. 이러한 진리를 밝히기 위해 사람들은 다양한 예시를 제시하는데 이러한 비교와 대조가 서투르고 불완전하더라도 본질상 동일하지만 관게에 있어서 변할 수 있다는 일종의 개념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전적으로 고유한 질서와 법칙을 지닌 변화는 생성을 자기 외부에 두고 자기를 위해 무대에서 활동하도록 하는 것이 불변하는 존재 자체인 것이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시간이 관점에서 영원성 공간의 관점에서 편재성으로 불린다. 하나님의 무한성이라는 것으로 요약되는 이 개념은 불분명한데 첫째로 끝이 없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무한다다고 불리는 것은 끝이 있을 수 있더라도 사실상 끝이 없다는 것이다. 지성이 추상 작용을 통해 유한 존재로부터 획득한 가장 보편적인 공통분모가 무한한 것과 동일시된다는 것에 놓여 있는데 하나의 과정을 통해 보편적인 것에서 툭수한 것을 불특정한 것에서 특정한 것을 무한한 것에서 유한한 것을 산출하는 동일 철학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 무한한 능력이며 자신의 계시인 피조물들 가운데 유한하고 인격적인 규정적 존재가 된다. 하지만 무한은 부정적 개념이 아니라 긍정적 개념으로 하나님이 피조물들과 구별된 고유한 존재라는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유한한 것들과 피조된 것들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하나님의 미덕들이 무한하며 하나님의 각각의 미덕이 절대적 방식으로 현존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 무한성은 완전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이며 범위를 갖지 않으며 수효의 무한성이 아니라 단순하신 것이며 철저히 질적이고 긍정적 의미에서 무한한 것이다. 시간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무한성은 하나님의 영원성이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지만 그러더라도 성경은 동시에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하고 시간의 척도를 따라 측정되거나 한정되지 않음을 말한다. 시간과 영원희 차이는 질적인 것이 아니라 양적인 것이며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다.

범신론도 영원과 시간을 혼합한다. 영원이란 시간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방식, 우연적 사정이다. 하나님 자신은 시간의 흐름 속에 당겨 시간 속에서 충만한 자기 실현이 되었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완전에서 이신론과 범신론 둘 다를 반드시 거부한다. 영원과 시간 사이의 차이란 시간이 시작과 끝을 가지거나 최소한 가질 수 있는 반면 영원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영원 개념은 시작과 끝과 순간의 연속을 배제한다. 하나님은 태어나지 않았고 썩지 않고 변하지 않는 분이시다. 영원과 시간 사이의 차이는 양이나 정도가 아니라 질과 본질에도 있다. 시간은 외적 시간과 내적 시간으로 구분되는데 외적 시간은 우리가 움직임을 측정하는 척도를 의미한다. 내적 시간은 이와 다르게 측정되고 계산되는 부분들이 갖는 사물들의 존재 양식이다. 측정되고 계산된 것보다 큰 척도와 수가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시간의 본질은 순간들의 연속을 포함하고 시간 안에 과거, 현재, 미래가 담겨 있는 것을 말한다. 모든 유한한 것들의 본질적 속성의 사실이 흘러나온다. 하나님에게 시간은 있을 수 없으며 스스로 있는 자이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한다. 하나님에게는 변화도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 그는 생성이 아니라 영원한 존재이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현재이며 오늘은 영원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원은 부동의 시간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그 영원은 하나님의 본질과 동일하며 존재의 충만함이다. 하나님은 영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영원이다. 지옥에는 영원이 없고 시간만이 있고 피조물이 시간의 불완전을 벗고 영원에 다가갈수록 하나님과 친밀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주장에는 진리가 담긴 것이다. 영원과 시간은 본질적으로 구별되더라도 그들의 유비와 유사성이 존재하기에 영원은 시간에 내주하며 활동하며 시간은 사물들과 더불어 창조되고 그 자체 안에 기원을 갖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으로 매 순간 시간 속에 침투하며 하나님은 시간과 연관을 가진다.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자신의 영원한 작정과 미덕들을 계시하기 위해 시간을 사용하고 시간을 영원에 봉사하게 하여 만세적 왕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 무한성은 하나님의 편재성이다. 하나님의 편재성은 성경에 드러나는데 창조주 하나님에게 모든 실재는 그의 소유이다. 그는 하늘과 땅의 주이자 소유주이자 높이 계신 분이다. 하나님은 공간에 배제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임재로 채우는 분이시다. 성경 전체는 하늘이 피조물이라도 그것이 존재한 이후 하나님의 거처요 보좌라는 생각에 기초한다. 이교도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능력의 편재성은 인정하더라도 실재적 편재를 인정하지 않는 견해가 있었다. 신인동형론자들에게는 형상과 장소가 없는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고 이러한 진술은 역동적 편재성은 인정하지만 본질적 편재성은 하늘에만 제한시키는 것으로 나아갔다. 항변론은 영원성 교리에서 명확한 결정을 보류하고자 했다. 데카르트파는 하나님의 편재는 자기 본질과 동일한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고 합리주의는 하나님의 본질적 임재를 하늘에 제한시키고 이신론으로 나아갔다. 스토아학파는 신성이 만물에 스며드는 것이라고 했으며 스피노자는 세상의 존재와 부합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말했으며 헤겔과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공간을 규정하는 하나님의 절대적 무공간의 인과율로 말했다. 비더만은 하나님은 세상의 근거로서 세상에 내재하지만 이러한 존재의 근거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이신론과 범신론적 입장을 거부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공간을 초월하지만 한정되거나 결정될 수 없음을 말한다. 영원과 시간 사이의 본질적 차이와 같이 하나님의 광대성과 공간에도 본질적 차이가 있다. 공간과 장소는 모든 유한한 존재의 속성이자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유한한 존재는 공간에 속한다. 유한 존재는 어디에 항상 존재하고 동시에 다른 장소에 존재할 수는 없다. 영적 존재라도 마찬가지이다. 제한적 장소적 존재는 항상 모든 피조물에게 고유하다. 공간은 지각 형태가 아닌 모든 피조물의 존재 양식이다. 시간과 공간 모두 유한한 존재의 내적 존재 방식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공간은 초월하셔서 어떤 공간이나 장소에 의해 포함되지 않으며 하나님은 만물 안에 만물은 하나님 안에 있다. 어떤 공간과 장소가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은 공간은 유한한 존재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광대성에는 하나님은 모든 공간과 장소를 벗어나 초월하는 사실이 포함된다. 하나님에게 장소는 적용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편재성은 자신 안의 하나님의 존재를 표현할 뿐 아니라 세상과 더불어 창조된 공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도 가리킨다. 하나님은 공간 안에 존재하기에 무한한 자로서 모든 공간을 채우고 자신의 광대성으로 그것을 유지한다.

하지만 이 사실이 범신론으로 이해되기를 거부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본성과 본질로서가 아닌 능력을 통해 편재한다는 이신론도 거부해야 한다. 존재의 각 부분과 공간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광대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장소에 존재하고 거기서 자신의 전능을 통해 만물을 다스린다는 이신론적 개념은 하나님의 본질과 모순되며 이 개념은 사실상 하나님의 모든 미덕들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사역은 따로 떨어진 행동이 아니며 공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비록 편재하더라도 그것은 피조물의 본질과는 다르기에 하나님의 신성은 손상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시간과 장소 안에 있다기 보다는 더불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물리적 내재와 윤리적 내재는 구분되는데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지만 그것들이 각기 고유하게 행동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내재는 무의식적 내재가 아닌 모든 피조물 가운데 자기 존재의 의식적 현존이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 모든 각기 다른 피조물에 거하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 핒도물들 모두가 다양한 정도와 측면을 따라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성의 충만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적으로 거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을 통해 거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편재성을 부인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과 양심으로 이것을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에 계신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하며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한다. 하나님은 인간 자신의 내면보다 더욱 내면적이시며 어디로 도망하더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하며 피한다면 그에게로 피해야 할 것이다.

 

비공유적 속성 중 마지막은 단일성으로 이는 유일성과 단순성과는 구분된다. 하나님에게는 단 하나의 신적 본질이 있으며 그 본질로서 하나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으며 그 외의 모든 존재들은 그로 말미암아 실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신론에 반대하는 수적 단일성을 말하는 것이며 선지자들은 윤리적 일신론의 형태의 새로운 종교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과 더불어 여호와의 선택과 언약의 동일한 토대 위에 서서 그 백성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종교로 돌아오라고 성경은 증언한다.

학자들은 이스라엘 종교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가설들을 내세우지만 여호와의 성격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난처함을 표한다. 고대 근동의 신이라고 말하더라도 근동의 다신론이 윤리적 일신론으로 나아갔다면 그 과정이 밝혀져야 하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의 윤리적 일신론은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되었고 그 원칙과 근원이 오래 전에 잠재되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선지자들 시대 이전에 일신론이 모세와 아브라함의 시대에 존재했다고 말하는데 이 일신론이 고대 근동의 신앙에서 발견되어 영향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어찌하던지 학자들은 미리 전제된 발전 개념에 의해 구약 초기부터 일신론을 부인하거나 일신론을 후기로 설정하도록 강요받지는 않는다.

성경은 초기에서부터 일신론적이다. 기독교회는 이러한 유일한 참된 하나님을 고백함으로 이방 세계에 등장한다. 다신론은 정치적 사회적인 면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철학적, 종교 혼합주의적 경향도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기독교회는 처음부터 심각한 투쟁에 휩싸였다. 교회의 대변자들은 교회를 보호하면서 다신론을 공격했다. 이들은 성경에 호소할 뿐만 아니라 진리에 대한 논증을 온 세상으로부터 도출한다. 이들은 피조계를 통한 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에 호소한다. 그들은 다신론과 함께 미신, 황제숭배, 쾌락주의를 공격한다. 이러한 힘겨운 투쟁의 결과 다신론은 정복되었고 모든 세력을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힘을 잃게 하였다. 하지만 다신론적 사상들은 여전히 지속되고 최근 강력하게 고개를 들고 있다. 다신론과 투쟁한 단일성이 지성과 감정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세상과 인류 도덕성과 진리의 단일성을 옹호하지 못하고 자연과 역사는 파산되고 온갖 미신과 우상숭배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단일성은 단지 유일성만이 아닌 단순성을 포함하는데 성경은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지시하기 위해 모든 속성은 절대적 완전으로 하나님의 본질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피조물들에게 있어서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단 한가지이다. 한편 하나님의 이 속성을 단호히 거부하고 반대하기도 하는데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되지 않은 것과 동일하다고 결론짓는 것이다. 신인동형론자들은 하나님의 단순성을 반대한다. 아라비아의 철학자들은 삼위일체론을 비판하기 위해 하나님의 단순성을 가르쳤으며 유명론은 속성들 사이의 실재적 구별을 수용하였으며 소시누스는 하나님의 단순성이 성경을 딸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으며 항변파의 경우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와 성향의 변화는 하나님의 단순성과 일치될 수 없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범신로은 하나님의 단순 교리를 인정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세상을 동일시하며 스피노자는 하나님에게 심지어 연장의 속성까지 부여한다. 현대신학에서 하나님의 단순성은 거의 사라졌으며 심한 반대를 받는다.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의 단순성을 다른 속성들과 동일선상에 두지 않으며 삼위일체론과 모순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단순성은 신 지식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하나님이 빛, 생명, 사랑 등으로 나타나실 뿐 아니라 다른 속성들과 더불어 필연적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성은 복합성의 반의어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며 아무것도 자기 위에 두지 않는다. 하나님은 지혜, 은혜 사랑 등과 완전히 동일하시다. 하나님은 몸처럼 부분들로 복합된 분이 아니신 것이다. 피조물에게 있엉서는 실재, 존제, 생명 등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한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속성들은 신적이며 무한하고 자기 존재와 동일한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단순한 본질로서의 하나님은 그를 피조물에게서 차용한 이름들로 묘사할 수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자신 안의 고유하고 무한한 복된 생명을 가진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존재는 어떤 실재와 상응하지 않는 추상과 개념으로 더 자세하게 규정될 수 없다. 신학이 가리키는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포함하는 존재, 절대적으로 충만한 존재로서 당야한 이름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닌 요구하는 존재이시다.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풍성함에 대한 개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다양성 가운데 단순하고 단순성 가운데 다양하다. 이것들은 부정이 아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식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단수성은 삼위일체와 모순되지 않아서 각각의 위격은 그 존재와 위격들의 특성으로부터 복합된 것도 아니며 단 하나의 동일하고 단순한 존재는 삼위로 존재하고 각 위격과 속성은 존재로부터 구별이 아닌 이성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며 실재적 관계이지만 본질에 실재적인 것을 더하지는 않는 것이다. 위격의 속성들은 복합하지 않고 오로지 구별하는 것이다.

31 공유적 속성들

 

하나님의 영적 본성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가운데 하나님의 단순성은 하나님의 영적 본성을 취급하도록 한다. 성경이 하나님을 육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몸을 갖고 계시지 않으며 하나님을 영으로 언급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적 본성은 다양한 사조에 의해 정당하게 취급되지 못했는데 범신론은 하나님의 영적 본성을 실체의 연장이라고 말하거나 정신으로 관념화하거나 무의식적인 것으로 치부하게 되었다.

기독교회와 신학은 이런 모든 경향에 반하여 하나님의 영적 본성을 확고히 견지한다. 이는 하나님의 단순성 아래 논의되었고 하나님이 세계와 구별된 실체이며 복합이나 연장을 지니는 것이 아니며 인간은 비물질적 실체의 본성에 대해 자기 안에서 영적 본질의 유비로서 희미한 개념을 형성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고유한 영혼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알 수 없으며 자신 안의 것들을 관찰하고 그 현상들을 운반하는 영적 실체를 도출하며 영혼의 본질 자체는 인간의 관찰을 벗어난다. 영으로서의 하나님은 단지 영들의 아버지만이 아니라 가시적 사물들의 창조주와 아버지이기도 하는데 그 기원이 영이신 하나님 안에 있으며 영적 본성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비추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정적으로는 비물질적이고 비가시적 존재이지만 긍정적으로는 모든 피조물과 영적 존재의 숨어있고 단순한 절대적인 근거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천사들의 영과 사람들의 영혼을 육체라 부르기 위해 하나님만 전적으로 영이라고 제안했으며, 하나님에게는 육체라는 명칭도 육체가 아니라는 것도 적용되어서는 안되며 초월한 존재임을 말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육체로서 명칭을 적용해서도 안된다는 것은 거부되어야 하는데 모든 신 지식이 유비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유비가 다른 집단에서보다 한 피조물의 집단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범신론은 이러한 하나님의 영적 본성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 알지 못하기에 그것을 비실재적인 말로 만들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적 본성은 하나님의 비육체적 실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견지되어야 하며 인격성, 자의식, 자기 규정이 자연적으로 포함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단순한 본질이며 자의식과 자기규정은 지성과 의지의 속성들에서 취급되어야 하는 것이다. 영적 본성에서는 하나님의 영적 본질을 주장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며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 모든 성경이 기초하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적 본성에 기초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영적 본성으로부터 하나님의 불가시성이 직접적으로 뒤따르는데 만일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영혼의 눈으로서만 가능한 것이 된다. 그러나 피조물을 통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가능하느냐에 대해서 어쨌든 오로지 영광의 상태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 가르침이었다. 그러므로 논의의 주제는 영광의 상태에서 본질을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 되었으며 교부들은 본질을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이들은 본질을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은 부인했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아래 하나님을 보는 것에 대해 그가 자신 안에 있는 것처럼 자신의 본질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보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내려오지 않지만 인간은 초자연적 은사로서 하나님에게 올라가고 신격화 되며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에서만 아니라 자신의 본성 가운데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스콜라주의는 자연적 은사들을 지닌 인간이 이러한 하나님을 볼 수 없으나 자연적 은사들을 보충하고 높이 올려주며 완성시키는 신적 도움이 필요함을 가르쳤다. 초자연적 도움은 영과으이 빛으로 지칭되었으며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본질과 분리될 수 없는 모든 것, 속성들과 위격들을 본다는 사실이 보편적 교리가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본다는 것에 대한 반대는 지속되었으며 하나님 안에서 독특하게 존재한 것들도 그러한지에 대해서도 의견 차이가 발생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철저한 깨달음이 아니고 구원받은 자의 공로에 따라 다르게 주어진다고 했으나 결국 이러한 교리는 인간의 신격화를 낳았으며 피조물인 인간이 초자연적 은사에 근거해 자신의 공로를 통해 자신을 더 높은 단계로 올려 하나님과 같이 되게 했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을 보는 것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취했는데 루터파는 정신적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본질을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을 수용하려 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빛을 비추고 이를 통해 육체의 눈으로도 본질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다. 일부 개혁파에서도 본질을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류 개혁파는 본질을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성경은 복 있는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본질에서 완전하게 알려질 수 없고 불가해한 분이라면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에 있어 보일 수 없으며 본질을 통해 보는 것과 철저한 깨달음은 전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대상은 무한하더라도 인간 의식의 표상은 항상 유한하기에 하나님을 보는 것은 본질을 통해 보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낮추심으로 계시로서만 가능하다. 로마교에서는 이 사이에 인간의 초자연적 은사로서 자신의 본성을 초월하여 높아짐을 말하여 초자연적 인간을 제시하지만 개혁파는 영광의 상태를 얼마나 높이 하던지간에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며 언제나 제한되고 본성이 감당할 수 있는 그러한 바라봄의 단계에서만 가능함을 말한다.

 

지성적 속성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의식과 지식을 가진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어두움이 전혀 없는 빛이며 자연과 은혜 가운데 있는 모든 빛의 근원이다. 이 빛은 하나님이 스스로를 완전히 인식하고 모든 존재를 아시며 그 존재 안에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음을 말한다. 이 빛은 어두움이 가지는 무지와 오류 부정과 부패 고통과 비참 등과 대비된다. 빛은 또한 지적 의미와 연관되는데 어두움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성적 의미는 자연스럽게 도덕적 의미가 된다. 죄로 오염되었을 때에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게 되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비출 때에 다시 우리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빛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아시고 그분이 전혀 죄가 없으심을 말하며 삼위일체적 생명도 전적으로 의식적인 생명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식하고 모르시는 것이 없다. 하나님은 자신 존재 밖의 모든 것을 의식하신다. 자신과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은 성경에 분명히 가르쳐졌기에 기독교회에서 항상 인정되었다. 하지만 범신론은 이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을 세계과 구분시키길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사유를 말하면서 특정한 사유 방식으로서의 지성을 구분하여 모든 사유하는 방식들이 모두 하나님의 영원하고 무한한 지성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결국 무의식을 하나님의 의식으로 지정하고 이 무의식적 존재가 변별과 통찰을 가진 초의식적 지성을 소유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의식은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기에 의식이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자신의 형체를 잃고 무의식이 된다. 특히 자기의식은 절대적 존재에게 속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없는데 이는 주체와 객체의 구별, 절대자의 자신의 반성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신론은 하나님의 세계 의식, 내적 자기의식 등 모두를 거부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아는 것이지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실로 무의식은 동물과 인간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 외연의 무의식의 능력이 하나님의 지성을 전제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는 질문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대에서부터 세상에서 목적을 관찰하는 것은 신적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신성은 사유, 정신이며 자기 자신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생각의 내용을 자기 밖에서도 도출할 수 없고, 오로지 최선의 것만 생각할 수 있으며 그는 이런 식으로 자신을 생각하고 사유에 대한 사유를 하는 거싱다. 세계 안에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자의식의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유물론에 머문다. 하지만 목적론적 세계관을 변호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 안에 의식이 있음을 수용하는데 이 의식은 무의식으로 해설할 수 없다. 피조물 가운데 있는 완전은 하나님 안의 완전을 지적하며 이성적 존재가 다른 모든 존재보다 귀하다면 인간이 약하더라도 생각한다는 사실로서 그가 다른 피조물보다 더 고귀한 존재라면 하나님은 무의식적 존재로 여겨질 수 없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인격적이고 자의식적인 하나님을 전제하는 종교는 무의식적 신을 반대한다. 신적 자의식은 인간의 자의식과 다르고 하나님을 초의식으로 말하는 것은 신적 지식이 인간의 자의식적 한계에서 도출 할 수 없음을 밝힌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순수한 존재로 자기 지식의 내용은 완전하고 영원한 신적 존재 자체이며 존재와 지식은 하나님 안에서 동일하다. 하나님의 세계 의식은 자신의 자의식과 구별되어야 한다. 절대자는 단지 논리적으로 잠재적으로만 세상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세상은 전적으로 설명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자의식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하나님 안의 자의식과 세계의식은 분리되어 나란히 양립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고 자기의 모든 미덕들과 완전을 계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것들을 선택한다. 자유로운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피조물의 방식으로 드러내어 실현하는 적합한 개념을 포함하며 자연적 지식은 피조물에게 전달하기에 부적합한 것이다.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알 듯 그 내용과 범위와 방식에서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자유로운 지식은 하나님의 미덕들을 피조물 가운데 계시하기 위하여 실현 가능하고 적합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자유로운 지식이 자연적 지식에 대해 갖는 관계는 모형적 지식이 원형적 지식에 대한 관계와 같으며 이 자유로운 지식에 있엉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지식은 피조물 안에 있는 지식과 다르며 이 자유로운 지식이 전달 가능하더라도 그 지식은 하나님과 이성적 피조물에게 있어 범위만이 아니라 성격과 본질에 있어서도 크게 차이가 난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식이 모든 존재를 포함한다고 가르친다. 어떤 것도 하나님의 전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물의 관찰로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모든 것을 아신다. 인간의 지식은 후험적이지만 하나님은 선험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영원부터 단번에 동시에 아신다.

 

사실상 하나님에게 있어 예지란 불가능하다. 그분에게는 시간의 구별이 없다. 하나님의 전지를 예지, 통찰, 기억으로 구분하는 것은 인간적인 표현일 뿐이다. 성경은 종종 하나님의 전지를 시간적으로 표현하여 사물에 선행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 결과 전지가 자유의지와 상충되는냐는 질문과 하나님의 전지에 대한 부인에 대해 주장하는 자들이 있어왔다. 이들은 하나님은 미래의 사건이 인간에게 달려 있다는 범위에서 그것을 안다는 것이지 확실하고 오류가 없이 미리 안다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자유의지가 보호되고 하나님이 죄의 저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전지에 대한 제한은 성경과 대단히 모순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오리게네스는 예지와 예정 사이를 구분하여 하나님은 사물을 미리 알지만 이 예지는 그것들이 발생한 원인과 근거라기보다는 하나님이 그것을 단지 확실하게 미리 안다는 것을 의미하여 시간 가운데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 장차 발생할 것을 안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에지와 자유의지 모두를 견지하고자 하여 하나님이 안다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며 인간의 의지는 자신의 본성 전체와 그 모든 결정들과 더불어 예지에 포함되어 그 의지는 예지로 말미암아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전제되고 견지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이 원하고 예지하는 만큼 효력을 지니며 우리의 의지는 어떤 효력을 가졌던지 확실한 효력을 지닌다. 확실한 예지를 지닌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가 수행할 능력을 가지고 수행하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회는 이러한 입장의 변화를 초래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지성을 인간의 자유와 조화하기 위해 반펠라기우스주의와 동일한 입장에서 필연적 지식과 자유로운 지식 사이의 중간지식을 삽입한다. 이 중간지식을 작정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하나님의 지식, 조건적 미래의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긍로 이해한 것이다. 이 지식의 대상은 결코 실현되지 않을 단순히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으로 분명히 발생할 것이 아니라 조건적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상황을 미리 알고 준비하시어 그 가능성을 미리 보시고 그 가능성을 고려하여 자신의 방칙과 결정을 내리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조건적 사건들에 대한 지식은 미래의 절대적 사건들에 선행하며 인간이 매순간 전적으로 자유롭게 독자적으로 결정하더라도 하나님은 어떤 결정에 놀라거나 계획이 무효화될 수 없다. 이러한 중간지식 이론은 어떤 조건이 충족되거나 충족되지 않을 때 하나님이 무엇이 발생할지를 알고 있다는 것을 보인다. 이러한 중간지식 이론은 칼빈주의와 얀센주의에 대한 두려움으로 로마교에 의해 옹호되었고 점차 주류 입장이 되었다. 루터파와 항변파도 중간지식에 대해 비우호적이지 않는데 현대 학자들은 대체로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실재적으로 지식의 수단인 세상으로부터 지식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모든 경우에 대한 적합한 행위를 아시고 세상 개요를 수립했으나 완성하는 것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개혁파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공허한 예지와 중간지식을 거부했다.

중간지식은 자유의지에 대해서 펠라기우스적 하나님의 전지와 조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의지는 그 속성상 중립적이며 그 의지는 자기 본성에 의해 다양한 환경으로 결정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대로이다. 이러한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작정과 조화될 수 없고 독립적이다. 하나님은 내버려두지만 모두 알고 있기에 기다리는 입장을 취하며 이와 부합된 자신의 결정을 내리고 은혜를 수용하면 생명으로 아니면 유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하나님의 예지가 사건들에 선행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임과 모순된다. 하나님은 세상이 아닌 자기 자신의 작정을 통해 만물을 아신다. 중간 지식 이론에서 우연하고 자유로운 사건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되는데 하나님의 예정만이 아닌 예지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사물들이 장차 존재할 것이기에 미리 아시고 필연적 지식, 통찰의 지식, 창조할 작정의 순서가 아닌 필연적 지식, 중간 지식, 창조할 작정, 통찰의 지식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를 자신의 존재, 작정이 아니라 피조물의 의지로 알며 하나님은 세상에 의존하고 획득할 수 없는 지식을 세상으로부터 얻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지식에 있어 독립적인 절대적인 하나님이 될 수 없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의지 없이도 어떤 것은 존재하게 된다. 하나님은 중간지식에서 결국 사람의 종이 된다. 하나님은 지켜보고 인간이 결정한다.

중간지식은 또한 목표한 것을 이루지 못한다. 중간 지식은 자유의지를 중립적 의미에서 예지와 조화시키고 인간의 행위를 필연적으로 만들지 않고 전적으로 자유롭게 한다. 하나님의 예지와 자의적 의지는 서로 배타적이며 문제 해결은 반드시 아우구스티누스와 더불어 다른 방향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자유의지는 중립이나 자의나 우연이 아니라 합리적인 자기결정에 존재하며 이 합리적 자기결정은 하나님의 예지와 거의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이 예지에 의해 전제되고 옹호된다. 인간의 의지는 그 본성 동기 결정과 결과와 더불어 하나님에게 확실하고 하나님의 예지가 옹호되는 원인들의 질서에 포함된다. 사물들은 하나님의 지식 가운데 현실로 발생하게 될 바로 그 동일한 연간 가운데 서로 관련되며 사물들이 현실로 발생하는 것은 예지가 아니라 모든 결정과 행동은 선행하는 것에 동기부여를 받는다. 그런 맥락에서 그 결정들과 행동은 하나님의 지식 안에 포함되며 세상 역사 가운데 점차적으로 드러나는 원인들의 질서에 연관된다.

 

하나님의 지식은 지혜이다. 일반적으로 이 두 개념은 동일하지 않고 지식은 연구를 지혜는 통찰을 추론을 직관을 통해 얻는 것이다. 지혜는 윤리적 성격을 지니며 올바른 삶의 기술이다. 구약의 지혜는 하캄에서 파생된 호크마로 표현된다. 하지만 이것은 계시를 돕고 봉사하는 것으로 참된 지혜는 인간의 지성의 열매가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 뿌리르 두고 여호와의 율법에 따라 살고 도덕적 생활 가운데 드러내는 도덕적 견실함을 말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는데 이스라엘의 정신은 창조의 능력과 위엄에서 점차적으로 경배받기 합당한 지혜를 칭송하게 되었다. 신적 말씀과 신적 지혜에 대한 이러한 성경적 가르침은 이데아들에 연관되어 이로서 삼위일체에 대한 로고스론의 기초가 놓아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지성 안의 이데아들은 자신의 자기 지식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로고스와 동일한 것도 아닌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구별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자신으로 있다. 하나님은 만물을 이데아에 따라 창조했는데 이 하나님의 지혜는 이 가운데 나타났으며 만물은 하나님의 지해로 의해 이성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견해가 항상 견지된 것은 아닌데 그 이데아들은 다시금 유형들과 양식들로 나타나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비로서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이 이데아들은 형태들이나 종류들보다는 이성들이라는 번역으로 선호되어서 이 이데아들은 내재적 이성들로 인하여 움직이고 이 작인은 항상 하나님의 뜻에 의해 중재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은 사물들이 존재하는 실재적이고 궁극적 원인이 된다.

이 이데아론은 교의학에서 거의 사라졌고 현대 철학에서 의미상 변화를 겪었다. 과거에 이 이데아를 하나님의 창조정신의 사물들의 양식으로 이해했지만 현대 철학에서는 감각적 관찰이 아닌 순수 사유를 통해 획득되는 개념들에 대한 명칭이 되었다. 이 개념들은 오직 이성으로만 인식된다. 하지만 이데아라는 용어는 하나님께 적용될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혜로 만들고 지혜는 하나님의 행하심의 시작이고 창조의 근본임을 표현한다. 하나님은 인간 예술가와 다르게 절대적으로 독창적이고 자신의 본질에 취해진 것으로 영원하며 불변하다. 하나님 안의 개념들은 하나님의 본질 자체로 유한한 피조물들 가운데 표현되고 모방된다. 각 피조물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신적 존재에 참여한다. 피조계에 실현된 하나님의 이데아들의 다양함과 풍성함으로 하나님의 지혜는 다양하며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단 하나이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개념은 단 하나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만물의 창조 인도 통치 가운데 드러난다. 이는 창조자이며 만물의 장인이며 항상성을 가진다.

 

하나님의 지성적 미덕들 가운데 하나님의 진실성이 포함되는데 이는 히브리어 에메트, 에무나이며 형용사로는 에이문, 아만에서 파생된다. 이는 확고히하고 신뢰하고 확실하게 한다는 것으로 주관적으로 어떤 것을 확실하게 붙잡는 믿음을 가리키고 객관적인 확고함 신뢰성 진리를 가리켜 하나님의 미덕을 표현한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여 그는 불변의 확고함으로 자기 백성에 도움을 제공하며 모든 전적으로 신뢰하는 피난처가 된다. 그는 신약 성경에서 참된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 참되고 실재하는 하나님으로 불린다. 그가 계시한 모든 것은 순전한 진리로 인간과는 대조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 믿음의 변하지 않는 대상이 될 수 있다. 성경은 진리라는 용어를 본질의 진리, 표현의 진리, 지식의 진리라고 혹은 형이상학적 진리, 윤리적 진리, 논리적 진리로 나누어 구분한다. 형이상학적 존재적 진리는 자신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 어떤 대상, 사람, 관계된 일이다. 이는 거짓 위조 비존재와 상반된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헛된 우상과 대조되어 참된 분으로 일컬어진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윤리적 의미에서도 진리인데 윤리적 진리는 본질과 말이나 행위로 나타난 계시 사이의 일치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논리적 의미에서도 진리이다. 진리는 오류와 상반된다. 하나님이 진리인 까닭은 하나님이 만물의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만물을 아시고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식으로서도 진리 자체인 것이다. 지식은 하나님의 본질에 동일하고 실체적 진리이며 하나님의 말씀 율법 복음은 순수한 진리다.

진리는 의미상 다르게 구분되더라도 그 의미들은 또한 동일하다. 이러한 통일성은 사유와 존재, 이상적 존재와 실재적 존재의 일치이며 하나님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진리며 사유와 존재의 통일이시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신을 의식하여 자기 안의 신 관념에 온전하게 상응하는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이며 윤리적 의미에서도 논리적 의미에서도 진리가 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제일의, 본래의, 모든 진리의 근원으로서 진링다. 그는 모든 진리의 이상과 원형이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진리를 아는 근원과 기원이다.

 

도덕적 속성들

하나님의 선하심은 자연을 통해서도 알려진다.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와 신성은 동일시 되는 것이었지만 선은 다양한 의미를 가진 것이며 소크라테스에게 선은 상대에게 유익한 좋고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절대적 선은 존재하지 않고 상대적 선만 말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 윤리는 최고선을 추구할 때 행복의 추구를 말했으며 선은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이었다. 니체는 이러한 선의 의미에서 출발하여 우수한 강한 유능한 아름다운 것과 동일한 것을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미덕의 의미도 달라지는데 선은 일반적 의미에서 심미적 윤리적 선을 포함하여 상대적으로 만물이 추구하는 것을 지시한다. 그러나 선은 이런 의미보다 더 포괄적이며 선 자체로 존재한다. 도덕적 선은 이롭고 해로움과 관계 없이 그 자체로 선한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완전함의 총체라고 말한다. 모든 미덕은 절대적 의미에서 하나님 안에 현존하며 이 선의 미덕은 절대적 의미에서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함은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과 동일하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받지 않고 주기만 하며 어느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절대적 완전보다 못한 것에 만족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선, 완전의 총체이므로 절대적으로 복되다. 하나님 스스로 선한 것은 다른 것을 위해서도 선하다. 완전하고 복된 분으로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위한 최고선이며 추구하는 모든 선의 극치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최고선으로 묘사하는데 그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이 있고 모든 피조물이 필요로 하는 것이 있는 분이었다. 피조물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추구의 대상 갈망의 대상이다. 그래서 피조물은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을 발견하고 최고선인 하나님은 흘러넘치는 모든 선의 원천이기도 한 것이다. 성경은 주로 주의 선하심에 대한 찬송을 말하는데 그의 선하심으로 창조가 이뤄지고 모든 생명과 복이 흘러나오고 지속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심은 대상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비참한 자에게 나타날 때 자비가 되며 이는 인자이며 오래 참으심이며 구속사를 통해 드러난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선한 것이 없고 악을 행한 자에게 더 풍성히 드러난다. 은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며 성경의 주된 주제이다. 이는 인간의 모든 공로를 전적으로 부정한다. 이러한 은혜론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들은 은혜를 하나님의 미덕으로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말미암아 교회에 부여한 유익들로 여겼고 하나님의 속성들 가운데서는 취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은혜는 넓은 의미로 취해져 나중에 교의학의 구원론에서 반드시 논의되어야 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랑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온전히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신구약을 통해 드러나며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안에서 자기 자신을 준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우열이 있을 수 없지만 사랑은 매우 확실히 신적 본질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순환 가운데 선하심으로 인하여 선하심으로부터 선하심 안에서 선하심을 향해 회전하는 원과 같이 지속된다.

 

선하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다. 이 거룩함은 종종 하나님의 선하심과 구별되어 정의되었다. 이 거룩함은 윤리적 완결 순결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연결되고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연결되었다. 현대 모든 학자들은 신구약의 거룩의 개념은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거룩이 하나님의 어떤 속성을 가리키는가에 대한 견해차가 있었고 이 개념이 전적으로 내적이고 본질적 성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만 지시하기에 순전히 관계 개념일 뿐이라고 여겼다. 히브리어 카다쉬는 자르다 분리하다는 것에서 파생되어 단절 격리를 표현한다. 거룩한이라는 단어는 일차적으로 일반적 사용에서 구별되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봉사하는 모든 사람들과 관련된 일에 사용되었다. 거룩한이라는 개념은 내적이고 도덕적 속성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연관되어 사용되는 하나님의 일에 봉사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거룩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이나 관련된 일은 저절로 하나님에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으며 이러한 계시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거룩이었다. 이스라엘이 거룩한 것은 하나님이 소유로 삼아 관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룩해진 것은 독특성을 가지는데 일반적 삶과 구별된다. 그리고 접촉하는 모든 것들을 거룩하게 한다. 거룩하게 하는 것은 단순한 구별 이상의 것이다. 이는 피조물의 부정과 죄됨을 제거하게 되며 순수하다는 것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구약에서 율법에서 거룩하다는 것은 외적 내적 순결만이 아니라 새로운 상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이 이유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을 받고 언약을 맺었고 그 방식대로 살기 때문이다. 이는 전반적 의미에서 종교적 윤리적 의식적 내적 외적 의미에서의 완전함이다.

이 거룩의 개념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에게 적용되는지 검토할 때 완전히 선명해진다. 거룩은 일차적으로 위로의 관계가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의 관계를 지시한다. 피조물은 자체로 거룩한 것이 아니며 그렇게 할 수 없으며 하나님에게서 모든 거룩이 비롯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율법의 원리는 여호와의 거룩이고 그 백성의 거룩 가운데 목적이 담겨 있는 것이다. 백성은 율법에 응답할 때 거룩하며 여호와는 거룩한 자로서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주고 그 가운데 거하거나 언약에 충실하여 이스라엘을 반복하여 건지고 구원한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기 백성을 통해 거룩한 자로 감사와 찬양을 받는다.

동시에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은 징벌과 징계의 원리이기도 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고 하나님의 거룩을 거부할 때 징계를 촉구한다. 하나님의 거룩은 이스라엘의 거룩을 촉구한다. 거룩은 그러므로 질투, 두려운 것, 영광과 동의어가 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원인이며 종국에는 열방에 여호와를 제시하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는 신약의 의미와 연관되는데, 헬라어 호시오스와 하기오스로 하나님의 거룩이 사용되고 이방의 신들에게 사용되던 셈노스와 히에로스 하그노스는 하나님에 대해 사용되지 않는다. 여호와는 전적으로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주고 백성을 온갖 방도로 자기 소유로 하고 유지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나타날 때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더 이상 징벌과 징계의 원칙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원리로서 그 이름을 가지며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께 영원히 바쳐지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교회에 주고 교회를 모든 불의에서 건지고 정결하게 했다는 사실에서 그 절정을 계시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연관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이다. 히브리어 차다크 체덱 처다카는 법을 준수하는 사람의 상태를 말한다. 이에 반의어인 히처디크 히러쉬아는 토론이나 논쟁의 정당한 사람에 대한 용어이기도 하는데 이로서 의라는 명사는 주장이나 선언의 정확함이나 진실함을 지시할 수 있다. 이 용어는 하나님에게만 적용된다. 하나님의 공의는 온 세상의 심판자로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여 취급하는 것응로 나타난다. 그리고 보복의 정의가 의인들을 승인하는 공의의 측면보다는 훨씬 적게 부각된다. 후기 교의학에서 보복의 정의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죄 있는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으신다. 성경의 공의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의 원리로 등장하며 하나님의 진노, 불을 일으킨다. 이러한 분노는 두려운 것이며 징벌하고 파괴한다. 이 분노는 증오 복수 질투와 연관되어 죄악된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이며 질투의 하나님은 신부인 이스라엘의 이방 신을 내쫓는다. 이 모든 속성들과 하나님의 의는 좋은 의미로 이해되어 의인을 옳다고 인정하고 영광과 구원으로 들어올이는 것으로 묘사한다. 의인은 반드시 의롭다고 하고 악인은 반드시 정죄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상황에서 법도에 전혀 상응하지 않았는데 선지자들은 그러한 현실을 불평한다. 경건하고 의로운 자가 정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서 오해받고 압제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를 기대하며 메시아의 판단은 멸시와 압제를 받는 상황에서 헛되이 공의를 부르짖는 궁핍한 자를 돕고 건지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적용되어 원리적으로 여호와는 재판장으로 공의로 판단하는 분이셨다. 여호와의 의는 그의 분노처럼 그의 자비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연관된 동의어였다.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은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의 나타남이다. 이스라엘이 진실로 범죄한 백성이며 심한 징벌을 받더라도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 대조적으로 의로우며 자신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의로운 명분을 갖기에 궁극적으로 의로운 자들이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죄인이고 비참한 백성이지만 그들은 의로운 일을 변호하고 주를 신뢰하며 하나님이 그들을 변호하고 싸움을 싸우고 구원으로 승리의 면류관을 씌울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 구원은 번영과 안식의 외적 복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고 자기 영을 부어주고 새로운 마음을 주고 자신의 율법을 써서 면전에서 온전히 행하도록 한다는 것에 있다. 구원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에게만 해당하지 않으며 메시아를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자기의 의를 부여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자기의 의를 주는 것이다. 의는 호의 긍휼 은혜와 같은 것이 아니라 법정적 개념이다. 그러나 압제당하는 약자의 불의와 핍박에서 보호하는 것은 의의 일차적 의무로 표현된다. 압제당하는 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이 땅의 재판장과 왕의 일차적 과제인 것이다. 구약 성경의 의의 개념은 신약으로 옮겨져서 하나님의 의는 메시아가 자기 백성에게 의를 베풀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의 수단을 제공하여 이를 통해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며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을 베푼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분노와 질투 미움과 복수도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구속하기 위한 것이 된다. 신약은 하나님의 분노가 현재 이미 악인들에게 드러날 것이라고 말한다.

정의의 개념은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완전이나 거룩을 포함하기도 한다. 정의는 미덕 자체이며 모든 미덕들의 총체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각 사람이 자기에게 소유한 것을 소유하는 미덕이라고 말한다. 정의는 일차적으로 입법자에게 주어진 어떤 권리가 주어지는 것을 전제하는데 그 권리들은 약조와 계약들로 상호 존중된다는 것이다. 또한 정의는 존재하는 권리들을 옹호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분배적 정의가 있는데 이것은 포상을 통한 보상적 정의 징벌을 통한 보복적 정의를 포함한다. 모든 경우에서 정의는 각자에게 속한 자신의 권리를 부여하려는 끊임없고 영속적인 의지이다. 이 모든 것들일 하나님께 적용되어 정의의 개념은 교의학에서 넓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교의학에서 하나님의 의에서 취급하는 내용은 모두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며 넓은 의미에서 정의가 취급될 때 장점을 가지고 하나님의 전체적 공의의 차원을 반대자들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과 말시온은 정의의 하나님과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사이를 대조시킨다. 그리고 하나님의 징벌하는 공의가 사랑과 상충한다고 여겨져 학자들은 하나님에게 공의를 돌리기를 부정했다. 하나님보다 더 높이 초월하여 존재하는 법과 하나님이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법은 전혀 생각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최고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조물은 하나님에게 권리를 주장할 수 없으며 마땅히 할 일을 하더라도 무익한 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성에서는 억지로 징벌할 수 없다.

정의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의 속성이 아니라 도덕적 근간에 기초한다. 피조물이 하나님에 대해 권리를 가지지 못하고 호혜적 정의를 논하지 못하더라도 자기 피조물에게 권리를 준 이는 하나님 자신이 된다. 피조된 것은 법칙과 규칙이 있다. 존재하는 권리들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실존과 본성에 담겨 있다. 전체 공의의 질서가 하나님의 은혜로 자연과 은혜의 영역에서 수립되었는데 그 질서는 하나님 자신이 유지하는 규례, 법도 율법을 포함한다. 이러한 규례들과 권리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거룩과 은혜에서 유래된다. 입법적 정의는 하나님이 최고의 입법자이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전체 정의의 질서가 하나님에게 근거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권리의 근원이다. 하나님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정의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정의 자체이며 모든 권리의 근원인 하나님이 또한 정의의 재판장이며 수호자다. 정의의 질서는 죄와 상관없이 존재했을 수도 있으며 피조물이 자원하여 사랑으로 그 질서를 순종할 수도 있다. 법이 필요한 것은 죄 때문으로 법은 폭력과 강요를 통해서라도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죄로 인해 필연적이된 것은 법이 지니는 강요적 성격 때문이다. 이는 우연하거나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서 그런 성격 없는 정의는 상상할 수 없으며 도덕적 질서는 정의의 질서와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주장하고 요구하고 지지한다. 정의는 도덕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며 정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유지되고 승리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의는 반드시 사법적 정의를 포함하고 보상적 정의와 보복의 정의여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 자신이 수립했던 정의 자신의 이름과 명예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악인들을 징벌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정의만이 통치하고 승리할 수 있다. 성경은 세상이 구원받도록 정의가 반드시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더 부각시킨다.

 

주권적 속성들

하나님은 창조자이며 소유자인 주이다. 하나님 없이 어떤 것도 존재하거나 소유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절대적 권세를 가진다. 하나님의 뜻이 만물의 존재와 그처럼 존재하는 것의 최종적 원인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된다. 창조자의 뜻은 피조물의 본성이다. 그러나 철학은 사물들에 대해서 다른 해설을 추구하는데 플라톤은 이데아를 가시적 세계에서부터 도출하려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성을 모든 산출을 배제하는 사유에 대한 사유로 말했다. 이것은 스토아 학파에 의해 범신론이 되어 하나님은 세상의 이성, 정신, 영혼인 반면에 세상은 하나님의 몸, , 나타남이 된 것이다.

현대 철학은 이러한 합리주의로 회기한다. 데카르트는 사유를 정신의 본질과 존재의 보증으로 여겼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헤겔은 동일철학에 이르게 된다. 절대성은 순수 사유지만 이데아의 세계가 아니며 참된 실재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내용이 없는 사유이며 존재가 아닌 생성이다. 이는 실재적으로는 공허하지만 잠재적으로는 모든 것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논리적 추상에 지나지 않고 설명을 필요로 했다. 헤겔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이는 개념들의 유희에서 나온 것이며 헤겔도 이 절대적 사유를 수수 가능성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적 가능성이 변증법으로 실재적 능력, 절대적 잠재력으로 진실로 우주 만물을 산출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합리주의는 그 유용성을 상실하고 관념론은 존재를 설명하지 못했기에 의지의 수위성을 시도하게 이른다. 쉘링은 뵈메의 신지학으로 되돌아가서 신플라톤주의로 돌아간다. 신플라톤주의는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원인이며 자신의 의지와 능력의 산물이며 의지가 궁극적 존재이며 지성에 선행한다고 말한다. 쉘링도 의지가 무한한 존재와 유한한 존재의 실재에 대한 궁극적 원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피조물들에게 있어 실재하는 존재와 실재의 유일한 근거인 존재는 구별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자기 실재의 유일한 근거인 존재는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자기 실재의 근거는 자기 안에 하나님 자신과 구별되는 본성에 있는 것이다. 이 본성은 영원한 단일자가 경험하는 갈망으로 자신을 생성하는 의지이며 여기에는 지성이 배제된 것이다. 하지만 의지의 지성은 의지 안에 있어서 지성의 갈망과 욕망이 되며 이는 의식적 의지가 아닌 육감적 의지로 지성에 속하는 것이다. 만물은 하나님과 다른 것들이지만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사물들은 자신들의 근거를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하나님 안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의 근거 안에 두며 하나님의 무의식적인 뜻에 둔다. 쉘링은 전체적인 세계 과정을 영원 전부터 하나님 자신 안에 공존하는 자연과 정신, 어두움과 빛, 실재적 원리와 이상적 원리의 대립 명제들로부터 도출한다.

쉘링은 이러한 입장으로 헤겔의 합리주의를 극복하고 후기 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인간 자유에 대한 연구에서도 유신론적 의미에서 발전시켰지만 의지의 수위성을 계속 옹호했다. 이를 따르는 자들에게 의지는 참된 의미에서의 의지가 아니라 무의식적 욕망, 모호한 본성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식을 의지의 발현이라고 여기 의지와 현상 세계 사이에 사물들의 영원한 형상과 양식인 관념을 삽인한다. 폰 하르트만도 무의식을 주체와 초의식으로 표현하여 사물들의 실재는 의지에 의해 결정되지만 본질은 지성에 결정된다고 말했다. 그들의 철학은 유신론에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합리주의적 범신론과 관념론적 범신론이 옹호될 수 없음을 드러냈다. 의지, 자유, 능력 없이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으며 이러한 모든 의지는 욕망이고 하나님에게 있을 수 없는 불완전 불만족 불안의 증거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반론은 의지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 기초하는데 의지는 안식하는 것도 활동의 영역으로 삼는다. 피조물은 그가 도달할 수 없는 복이 주어질 때에 그 가운데 행복을 누린다. 그것이 의지가 아니라면 그 복은 피조물을 압제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범신론적 신비주의는 영혼이 하나님 안에 해탈에 잠기고 용해되는 것을 복으로 말했다.

성경과 신학은 이를 거부한다. 복은 의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최상의 상태로 만든다. 사랑은 의지의 가장 풍성하고 강력한 에너지이다. 하나님에게도 의지가 존재하며 이 의지는 하나님 스스로 충족하신 복된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최고선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 외에선 안식할 수 없으며 절대적 신적 사랑 안에서 자신을 의지하며 그의 의지의 최상의 신적 에너지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의지 대상은 하나님 자신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족의 의지로 자신을 영원히 마음에 의지하고 영원히 자신을 신적 사랑으로 사랑하여 자기 안에 완전히 복되게 한다. 하나님의 의지는 최고선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지혜로운 마음의 경향이며 하나님 안에 있는 잠재력이나 힘이 아니다. 성경은 피조물과 관련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언급한다. 하나님의 지식이 필연적 지식과 자유로운 지식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유로운 지식은 피조물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본질로부터 자신에게 알려진 것처럼 피조물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의지도 자기 자신의 본질을 대상으로 삼는 의지와 나란히 이원론적으로 놓지 않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을 의지하고 피조물과 연관해 자신의 의지를 거듭 언급한다. 창조는 하나님을 떠나 대립하는 존재로 생각할 수 없으며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피조물들을 의지하는 것은 그들 안의 어떤 것 때문이 아닌 자신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 목적이며 하나님은 자신에게 출발해 자기에게 되돌아간다. 하나님의 자기 사랑은 자기 안에 있는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고 그것들을 통해 자신에게 되돌아오며 피조물에 관해서도 하나님의 의지는 획득해야 하는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자기 즐거운 완전한 복 신적 안식을 의미한다. 안식과 노동은 하나님 안에서 일치한다. 하나님의 자기 충족은 동시에 절대적 활력이다.

그러나 다양한 대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구별은 범신론에서 불가능하다. 성경은 피조물들이 독립적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존재와는 구별된 고유한 존재를 가지며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와 더불어 대상 자체인 것처럼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의지 대상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의도하는 하나님의 의지는 목적으로서 자신을 향한 경향이며 피조물들을 대상으로 삼는 의지는 수단으로서 피조물을 향한 경향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모든 자의성을 초월하더라도 매이거나 강요햐지 않으며 자유와 필연성은 여기서 일치하며 피조물들을 대상으로 하는 하나님의 뜻은 전혀 다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시며 자기 행위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으시며 하나님 손 안의 인간은 하나님께 어떤 권리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침묵하게 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성령은 교회에서 자신의 원하는대로 은사를 나누어주며 인간은 하나님의 자유에 대해 아무런 반론을 제기할 수는 없다. 기독교 신학에서 피조물들을 대상으로 삼은 하나님의 의지도 이런 근거에서 통찰의 지식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자유로운 의지를 말한다. 이 하나님의 자유는 선택과 유기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선택과 유기에 대한 어떤 피조물도 근거를 주장할 수 없으며 여기에서 호혜적 정의는 존재하지 않고 보상적 정의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적인 것이 의지에 선행하는 한 우연이란 하나님의 지성 안에 놓일 수 없고 지성은 순전히 자연적으로 필연으로 깨닫는 것이며 지성은 반드시 의지에 놓여야 한다. 신적 의지는 자신의 본질과 상관없는 대상으로서 다른 것을 필연적으로 고려하지 않으며 이 의지는 다른 것들에 대해 우연히 존재하고 반대 입장에 설 수 있다. 하나님의 지식은 의지에 선행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개념들은 자신의 본질과 구별되더라도 자신의 작정보다 앞서 존재한다. 의지는 모든 가능한 개념들로부터 어떤 것들이 실현될 것인지 선택하고 결정한다. 의지는 모든 실재의 원인이며 이러한 의지의 결정에 따라 지성도 무엇이 실현될 것이지를 안다. 비록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는 작정을 영원부터 가지더라도 하나님은 절대적 자유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한다.

의지는 어떤 것에도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선이나 낮은 선을 선택할 수 있다. 의지 자체가 유일하게 자기 행동의 완전한 원인이다. 의지는 지성에 선행한다. 비록 지성이 자신의 추구하는 바를 의지에 제공하더라도 지성으로 그 대상을 집중하게 하는 것은 의지이며 북됨은 형식적 지성이 아닌 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성육신은 죄와 상관없이 발생할 수 있고 죄의 상태에서도 전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충분한 것으로 수용하신다.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 자체로는 그리스도의 공로 없이 구원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지에 선행하는 하나님 안의 개념들을 인정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필연적이며 자연스러우며 자연적 지식 세계 질서 자연법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유명론은 기독교 신학으로 자신을 방어하게 하였는데 신론에 있어서 기독교 신학은 출발점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 두었으며 단순히 지성의 지식이 논리적으로 통찰의 지식에 선행하고 필연적 의지가 자유로운 의지에 선행하며 자기 지식과 자기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피조물들을 대상으로 삼는 지식과 의지는 전자와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지 않고 전자와 가장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사실상 하나님 안에는 모든 가능성들이 포함된 단순한 지성의 지식은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 안에는 단지 의지를 따르는 통찰의 지식만 존재한다. 사물들의 실재는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고 사물들의 본질은 하나님의 지성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절대적 권한을 제한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이 완전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으신 것이며 규정된 권한에 있어서 다시 전적으로 일치한 것이다. 도덕법은 현재 내용 외에 다른 것을 가질 수 없으며 죄에 대한 징벌은 필연적이며 성육신과 속죄는 하나님의 정의에 기초하며 하나님의 권세는 모순적인 것들을 행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유명론은 기독교 신학에서 완전히 극복되지는 않았지만 제한되었다. 만일 자유로운 의지가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서 피조물들에 대한 경향으로 정의 되었다면 여기에는 절대적 자의로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원리적 반대도 담겨 있는 것이다. 수단의 특성은 목적의 성격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며 그런 이유로 신학이 하나님의 뜻을 중요히 여기고 그 뜻을 주시하더라도 언제나 그 의지에 대한 동기들을 추구한 것이다. 실재로은 세상을 단 하나의 조화로운 통일체로 이해하려 하는데 그 어느것도 자의적이지 않고 죄를 포함하는 모든 것이 위치를 가지며 통일체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데 기여한다. 학문의 속성이 사물들의 원인들을 탐구하는 것이라면 신학도 그러한 연구에서 나아가 신학자에게도 겸손과 ᅟᅵᆫ중함이 의무가 되며 모든 학문은 대상에 매여 있는 것이다. 신학은 하나님이 자연과 성경에서 알리는 것에 매여 있으며 반드시 이것들을 있는 그대로 두고 훼손하면 안된다. 그리고 무지를 고백해야 한다. 결국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에 기초하는 것이며 범신론의 유혹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필연적 의지와 자유로운 의지는 구별되며 어떤 것이 선인 이유는 하나님의 원하심으로 인함이다. 우연은 피조물에게 해당하는 것이며, 하나님 안에서만 실재와 본질이 하나며 우연한 피조물은 고유한 속성으로 인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의지로 피조물이 우연적이기를 원했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보다 더 높은 것에 이르려는 것은 불가능하고 심지어 허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시도들이 하나님의 본질 안의 피조물의 근거를 추구하며 피조물을 필연적이며 영원하고 신적으로 만들어 피조물의 성격을 제거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는 하나님의 다른 속성들을 배제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자유는 그것이 의존하는 원인을 가지지 않으며 비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과 머리는 그 뜻에 기초할 수 있으며 전능한 자비로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무제한적 능력의 주권이자 지혜와 은혜의 주권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교리에 관해 다른 많은 어려움을 제공하는데 하나님과 세상이 구별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자기 자신에 대한 경향과 피조물들에 대한 경향으로 세상의 피조물들은 온갖 종류로 구별된다. 이 구별은 하나님이 자기 본질 지식과 의지로 맺은 다양한 관계에 기초하며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의도한 반면 자신의 영광을 위해 더 직접적이고 적합한 수단의 정도로 더 원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지만 자기 자녀들의 아버지이며 자신이 창조한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은 교회에 대한 애정보다 못하며 교회에 대한 애정은 그리스도에 대한 것보다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는 온 세상처럼 풍성하며 이 자유로운 의지는 신적 에너지 창조가 보여주는 풍성한 생명의 원천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대한 교리에 관하여 어려움은 윤리적 의미에서 물리적 의미에서 죄과의 악과 형벌의 악 문제인데 악이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더라도 선과 동일한 의미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의지의 대상이 될 수는 없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뜻 자체 안에서 구별해야 하며 성경이 이를 보인다. 우리는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두 종류로 등장함을 보게 되는데 하나님은 명령한 이후에도 그것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기도 하고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않도록 금지하더라도 예수님을 심판에 넘기신다. 하나님은 죄를 의도하지 않으나 죄는 존재하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초기 신학에서는 이에 대해 감추어진 뜻, 높거나 작은 뜻으로 구분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자신의 선한 뜻을 인간의 악한 뜻을 통해 성취한다고 말했다. 드러난 뜻이라는 명칭은 이 뜻이 우리에게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무엇이 우리의 의무인지를 보여주는 사실에서 유래하게 한다. 이는 표지들로서 규정, 금지, 권고, 허용 사역으로 알려졌으며 개혁신학도 이를 유지한다. 이와 함께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선행적 뜻과 결과적 뜻의 구별이 이루어졌고 절대적 뜻과 조건적 뜻, 유효한 뜻과 무효한 뜻으로 구별하였다. 루터파는 개혁파적 의미에서 기뻐하는 뜻과 드러난 뜻의 구분을 거부한다. 아르미니우스도 마찬가지고 로마교는 명칭상으로는 구별을 사용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선행적 뜻과 결과적 뜻으로 나뉜 기뻐하는 뜻이고 드러난 뜻은 그 뜻이 부분적으로 계시된 것이라고 구별하여 설명한 것이다. 믿는 자에게 구원을 믿지 않는자에게 멸망을 결정하며 결과적 뜻은 인간의 결정을 뒤따르고 참되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것이 영원 불변한 규정이자 규범이 된다.

신구약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은 영원하고 독립적이고 유효하고 불변함을 말한다. 기독교 신학은 이에 부응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아래로 이 뜻의 의미를 가르쳤다. 선행적 뜻은 사실상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은유적 뜻이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이런 가르침을 버리고 하나님을 힘 없는 욕구 수준에 머물게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 전체를 부당하게 취급하며 세상 통치 전체는 하나님의 섭리와 결별되며 하나님의 의도와 세상 역사의 결과 사이는 조화될 수 없는 이원론이 생겨나게 되며 결국적으로 사탄이 승리하게 된다. 성경은 기뻐하는 뜻을 일차적으로 내세우더라도 동시에 하나님이 무슨 방식으로 죄를 원하지 않는지에 대한 드러난 뜻을 주장한다. 하나님은 표지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하나님은 자신의 이성적 피조물에게 죄를 금하면서도 자신은 그것을 사용할 수 있고 실재적으로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기뻐하는 뜻과 드러난 뜻은 일반적으로 반대하듯 서로 모순되지 않고 드러난 뜻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우리 행위의 규범으로 하나님의 명령과 규정이 된다. 하나님은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말하지 않으며 그 뜻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법이 아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행해야 할 거을 규정하지 않고 우리가 반드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말하는 우리의 행위 규범이다. 그러므로 드러난 뜻은 진실로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과 조화된다. 드러난 뜻은 하나님이 우리로 행하기를 원하는 것을 가리키고 드러난 뜻과 기뻐하는 뜻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드러난 뜻만이 아니라 기뻐하는 뜻도 역시 거룩하고 지혜로우며 마지막에 법과 정의의 길로 같은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둘 사이의 구별은 유지되어야 한다. 정의와 사실, 개념과 역사, 도덕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문제이며 누구든지 드러난 뜻을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거룩, 도덕법의 위엄, 죄의 심각성을 부당하게 취급하며 누구든 기뻐하는 뜻을 부정하는 자는 하나님의 전능 지혜 독립성 주권과 상충되는 것이다. 유신론은 매순간 역사에서 합리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의 노선들이 서로 교차하고 단절됨을 본다. 하나님의 신적 주권은 하나님이 인간의 어리석음 가운데 자신의 지혜, 인간의 약함 가운데 잣니의 능력, 인간의 죄 가운데 자신의 정의와 은혜를 영화롭게 함에서 밝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전능에서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능력은 결코 어디에서도 제한되지 않으며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그 백성을 다스리고 보호하고 구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은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서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능력은 힘이 있어 천지를 창조하고 법칙들을 보존하고 구원도 멸망하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만물에 절대적이며 하나님께 저항할 수 없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은 피조물들의 모든 능력과 권세 강력의 원천이 되시고 권능은 하나님의 것이며 힘과 능력은 하나님께 속한다. 유명론자들은 하나님의 의지와 자유에 대해 하나님의 전능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하며 원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그들은 절대적 능력과 규정된 능력을 구분하면서 하나님은 절대적 능력으로 순전히 자의적으로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원리적으로 의지의 우위를 옹호하는 자의 입장으로 기독교만이 아니라 이슬람에서도 등장한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단지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할 수 있으며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다. 실재가 되지 않는 것은 또한 불가능한 것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완전히 드러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이 두가지 입장 모두를 정죄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많은 것들을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는 그분이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본질과 동일하고 절대적 능력은 헛되고 용납될 수 없는 분리인 것이다. 또한 성경은 가능한 것은 실재적인 것보다 훨씬 멀리 미친다고 말하여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은 그의 본질과 분리되지 않아서 하나님에게 있어 하나님의 소유가 무엇이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은 동시에 가지며 의지와 행위를 동시에 가지신다. 그는 자기르 부인할 수 없으며 정의는 불의를 원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참되고 완전한 전능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죄를 지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무능이며 하나님은 발생한 사실을 취소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발생한 사실을 인간의 의식에 취소함으로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신다는 의미에서는 하나님은 발생한 일을 취소할 수 없으시다. 개혁파는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과 규정된 능력 구별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데 유명론이 이러한 주장으로 화체설 교리로 나아간 것과 다르게 칼빈은 하나님이 실재적으로 행한 것보다 더 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순이 있을 수 없다는 면에서 절대적 능력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서 범신론은 하나님과 세상은 연관되어 구별된 의지를 가지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범신론은 지성 가운데 무한한 혼동을 초래하고 세상은 우리의 사고가 그 우연적 특성을 배제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닌다. 세상의 비실재에 대한 개념은 최소한의 논리적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의 기원을 논리적으로 전능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말할 수는 없으며 하나님은 세상 가운데 몰입되지 않고 영원은 시간에 자신을 완전히 비우지 않고 무한은 유한의 합이 아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세상에 계시된 무제한의 능력을 무한히 초월한 것이다.

 

완전, 복됨 그리고 영광

취급된 모든 하나님의 속성들은 하나님의 완전, 최고의 완전함으로 요약된다. 하나님의 완전은 모든 완전의 총체이며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한 개념에 상응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피조물은 완전하지만 피조물의 규범인 개념이 온전히 실현될 때에 피조물의 유한한 방식으로 그러하다. 하나님의 완전도 하나님에 의해 설정된 개념에 따라 그 권위에 맞는 규범으로 존해함으로 인함이다.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자신에게 유래하며 하나님은 또한 자신에 대한 인식을 피조물에 심어주었으며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소휴하고 가능하다는 모든완전을 적용한다. 하나님의 각 속성은 신자에게 소중한데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신 참된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고 그분의 공유적, 비공유적 속성 모두 갈망하며 찬양하게 된다. 하나님에게 최고의 완전을 돌리면서 피조물로부터 부정적으로나 긍정적으로 아는 모든 완전이 최상의 의미에서 탁월하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된다. 하지만 모든 완전이 하나님에게 동등한 방식으로 돌려질 수 없음을 포함하며 피조물들 가운데 발견되지 않은 영원 단순성의 속성들은 형식적으로 고유한 의미에서 하나님에게 속하게 된다.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완전하기에 성경에서 하나님은 복된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복된 것은 절대적 완전을 표현하며, 절대적 완전을 알고 사랑함이 포함되며,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을 즐기고 안식하고 충족함을 포함한다.

내적으로 복됨의 근거인 하나님의 완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외적으로 드러낸다. 성경은 하나님의 현존을 알리는 피조물적 형태를 마음에 두고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자주 비교되고 반복적으로 표현되는 빛과는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빛으로 나타나시며 자신이 순전한 빛의 아버지이신 것이다. 이 빛은 교회 안에서 충만한 빛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빛이 실재적 의미인지에 대해 루터파에서는 논쟁이 있었고 동방교회는 하나님의 존재와 구별되지 않은 피조되지 않은 신적 빛에 대해 공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는 거부되어야 하는데 성경은 하나님의 영성과 불가시성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존재와 구별된 장소로 말하는 것은 그의 단순성과 모순되며 그분의 모습은 상징적으로 말해지며 그 영광은 피조물에게 나타나며 전달 가능한 것이다. 피조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어렴풋이 알게 되며 그것은 유비이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각 행위 가운데 발견되는 것은 종류별로 정해진 찬양할만한 수량과 배열로서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자연적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들은 전체의 아름다움에 기여하는데 그 아름다움은 덧없고 가변적이지만 자신의 아름다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더 높고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관여하는 것이다. 그것들의 아름다움은 자신들의 고백이며 모든 피조물들이 가리키는 최상의 아름다움은 자신의 고백이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가리키는 최상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이며 그의 아름다움이 모든 아름다움의 원인이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은 위대하심과 높아지심으로 불리는데 이는 피조물에게 합당한 경탄과 경배를 일으킨다. 이는 하나님의 존엄과 피조물의 복종을 요구한다.

 

 

32 거룩한 삼위일체

 

위격의 이름들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속성들의 이름보다 높은 단계에서 신적 단일성 가운데 존재하는 구별이 있음을 알려준다. 삼위일체적 계시는 이미 구약 성경에서부터 시작하며 구약에서 이 계시는 아직 완전하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삼위일체적 계시가 구약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는 것은 아니고 구약은 점진적으로 생성되어가는 삼위일체론을 말해준다. 먼저 엘로힘이라는 명칭은 삼위일체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신성의 충만함과 생명의 풍성함을 지시한다. 하나님은 차조 사역에서부터 자신의 말씀을 선언하고 영을 보냄으로 창조하며 하나님과 그 말씀은 하나님과 구별되어 나중에 지혜로 인격회돤다. 창조와 보존의 사역은 말씀과 지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수립되는데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내재하고 만물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장식한다. 구약의 가르침은 이미 창조에서 나타나며 엘로힘과 세상은 이원론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객관적 원리로서 하나님의 영을 주관적 원리로 가진다. 세상이 그 실재를 받으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 다랩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지속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구약의 삼중적 원인은 특별 계시의 영역에서 재창조의 사역에 더 분명히 나타나는데 이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더 나타난다. 그는 언약과 맹세, 계시와 역사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고 알린다. 하지만 그는 직접적으로 즉각적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알리고 백성을 구원하고 보호하는 말씀으로 나타난다.

주의 천사라는 표현은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는 로고스의 현현으로 여겨졌다. 이로서 성부는 알 수 없지만 성자는 계시 인식 가능하다는 대조를 말했다. 하지만 성부와 성자의 대조는 후기에 바르게 거부되는데 성자 또한 참 하나님으로 불가시적이며 구약의 하나님의 현현은 천사들을 통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개신교는 천사의 현현에 대한 구절을 로고스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고 고대 교회의 견해를 옹호하는 것은 로고스가 인간의 모습을 취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피조된 천사가 로고스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함응ㄹ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주의 천사가 언급되는 구절은 모두 동일한 의미로 이해될 수는 없으며 여호와의 사자라는 이름 가운데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독특한 방식으로 임재함을 말해야하 한다. 분명히 이 천사는 여호와와 구별되지만 이름, 능력, 구원, 경배, 영광에서는 여호와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여호와가 재창조에서 객관적으로 자신의 말씀으로서 자신을 계시하듯 그는 주관적으로 영안에서 영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며 하나님의 영은 계시 영역에서 모든 생명과 구원 모든 은사들과 능력들의 원리가 되신다. 창조와 재창조의 근거이자 구약 성경 계시의 삼중적 신적 원리는 엘로힘과 같이 동일한 방식으로 해설 될 수 있는데 그것은 신적 존재 내의 자기 구별을 지적하며 신적 존재 내의 삼중적 자기 구별이 표현된다. 특히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천사는 하나는 로고스이며 두 천사라는 주장과 함께 셋 다 피조된 천사이지만 그들 가운데 여호와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계시 임재하심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에서 나타나는 이런 사상은 유대 묵시 문학에서 전수되어 발전되었다. 지혜는 실체화되어 신적 속성들과 사역들이 지혜에 돌려지고 지혜는 하나님과 확연히 구별되었지만 반면에 하나님과 가장 긴밀한 연관을 맺고 하나님과 함께 살며 그와 실행할 개념들을 선택하며 모든 것을 창조하고 다스리고 새롭게 하는 존재 자체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영이시다. 헬라철학의 영향이 유대의 지혜서에서 나타나는데 플라톤의 견해와 지식 사이의 구별과 대조에서 추론하면 지식은 이데아를 대상으로 삼아야 하고 이로서 형이상학적 원리들로서 이데아가 높아지고 이를 따라 우주가 형성되고 모델과 원인들이 된다. 이러한 지적, 영적 원리가 만물의 근거라는 사상이 헬라 철학에서 상존했으며 스토아학파는 배아적 이성을 강조하며 이것이 나중에 내제적 이성과 계시된 이성의 구별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데아 정신, 로고스에 대한 헬라 철학의 가르침은 구약의 가르침과 연관되어서 하나님은 특정한 속성이 없는 존재이며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만 말할 수 있을 뿐 하나님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물질과 직접 접촉할 수 없으며 감각적 세계 이전에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사유 가운데 만물의 모델과 능력들인 정신적 세계 이데아들을 그리며 하나님은 이 능력들을 통해 세상에 일하며 이 이데아들은 신적 사유 가운데 존재하는 생각들로 묘사된다. 이 이데아들은 로고스와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정신 체계 안에서 자신들의 일치를 발견하고 이 로고스가 신적 이데아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동일한 방식으로 한 속성으로서 때로는 구별된 존재로서 묘사된다. 로고스는 하나님처럼 피조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 그림자이며 하나님의 장자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래서 로고스는 중간적 존재이자 한 속성이지만 인격이고 비인격적, 인격적 실체 사이를 왕래하고 하나님과 세상의 적합한 중보자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중간적 존재들에 대한 가르침이 유대교에서 발전하여 유대교는 초월자인 하나님과 관계하기 위해 중간 존재를 더욱 필요로 하였으며 지혜서에서는 천사들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혜서는 구약의 사상에서 탈선하는 철학의 영향을 보인다. 먼저 원리상의 차이가 드러나는데 중간적 존재들의 교리는 유대교에서 하나님과 세상의 플라톤적 대립에서 생겨난 것이며 그러한 대립은 구약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세상 사이를 중재하는 중간적 존재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편에서 속하여 피조 세계의 원리이지만 헬라의 중간 존재는 인격이거나 피조물도 아니고 실체도 아니다. 이는 영지주의의 등장을 준비한다. 또한 말씀과 지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중간 존재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로고스의 일차적 의미는 하나님의 이성, 사유, 개념과 같고 그와 같은 것으로 하나님 안에 내재하는 속성이 된다. 구약에서 말씀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이성과 개념이 아니고 이상적 세계도 아니다. 선언된 말씀으로서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만물을 창조하고 보존하며 인격이자 창조의 협력자이다. 또한 중간존재는 유대교에서 구원론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이는 깨달음과 지식을 주지만 메시아와 관련되지 않아서 진리의 계시와 구원의 성취자로서의 메시아에 대한 교리를 배후로 물러나게 하며 로고스의 성육신은 불합리한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중간존재는 완성되지 않았고 경계가 없어서 신적 이데아들을 로고스 안에 요약하여 그들의 통일성은 결여된다. 중간적 존재의 수효는 영지주의의 아이온들과 같은 유출이 되며 사실상 세상은 하나님 밖에 머물러 하나님과 대립하며 하나님의 영의 중요성은 이해되지 않으며, 구약이 갖옺하는 성령은 유대교 신학에서는 전적으로 무시되었으며 창조와 재창조를 완성하는 것에 배제된다. 이처럼 묵시문헌과 필로, 유대인들에게 발견되는 구약 성경의 삼위일체적 사고 발전과 신약의 삼위일체적 개념 발전 사이에는 원리적 차이가 있다.

 

신약성경은 구약의 삼위일체적 개념들의 순수한 발전을 포함한다. 하지만 이 개념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추상적 추론들이 아니라 말씀의 행위로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 나타난다. 신구약은 모두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하는데 하나의 하나님은 신약의 경륜, 성육신과 성령을 부어주신 사실 가운데 성부, 성자, 성령으로 자신을 계시한다. 이 원리들은 창조와 구약 성경의 경륜 가운데서 활동한 동일한 것이다. 신약은 구약 연관되지만 그것을 더욱 초월한다. 신약은 언약의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고 삼중적 원리가 구속 사역 전체에 드러남을 명시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삼위일체적이며 사도들 또한 이 세분을 반복해서 서로 나란히 동일 선상에 놓는다.

성경은 구별된 세 주체들 상호간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성경은 가장 먼저 성부의 이름을 말하는데 이는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을 일반적으로 가리킨다. 성부는 성자의 아버지로서 성자는 성부에 대한 자신과 다른 유대인들의 관계를 전적으로 부인한다. 예수는 성부를 친아버지로 부르고, 일차적으로 아버지라는 이름은 이스라엘과 신자들과 연관된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임을 성경은 드러낸다. 이 성부와 성자의 사랑이 성부로부터 나와 성자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며 성자에 대한 성부의 이런 관계는 시간 안에서가 아니라 영원부터 있었으며 하나님은 사도들에 의해 거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이다. 성자에 대한 부성은 성부의 특별한 위격적 속성이며 성부만이 스스로 존재하고 존재 질서에서 첫 존재가 된다. 그는 창조와 재창조의 아버지이며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나온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은 예정, 기뻐하심, 창조와 구원, 능력, 공의 등 모든 신적 속성의 주권자가 되며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 또한 성부를 자신의 하나님이라 말한다. 아리우스파는 이런 사실에서 성부만이 하나님이고 성자와 성령은 신적 존재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성부와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은 신적 영광이 돌려지는 존재임을 성경은 말하며 성부만이 참 하나님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고 유일한 하나님으로서 다른 이방 신과 구별되는 것이다. 성부만이 지혜롭고 선하다고 불릴 수 있는 것은 그가 모든 것을 소유하는 신성의 원천이지만 성자와 성령은 교통을 통해 동일한 존재와 동일한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성부 하나님에게 돌려지는 것은 그가 신적 경륜에서 첫째이기 때문이다.

성자가 성경에서 지닌 명칭들을 통해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를 알게 되는데 이 명칭들은 수효가 많으며 주로 그리스도의 역사적 출현과 관계되기에 추후에도 논의되게 된다. 하지만 그 명칭 가운데 성육신 이전에 성육신과 관계 없이 그에게 속한 로고스라는 명칭이 있다. 이 출발점은 하나님의 창조와 재창조의 말씀 계시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리스도이시다. 신약성경은 로고스가 인격이라고 말할 뿐 아니라 태초에 있었음을 명백히 말하며 로고스가 된 것이 아니라 창조 때부터 영원부터 로고스였으며 그 자신이 하나님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아버지의 품 속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로고스에 전달하고 로고스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전달하며 이 로고스가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이며 하나님이 영원부터 자신의 모든 충만함을 로고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이름은 신정적 의미를 지녀서 하나님이 그 백성을 선택하고 부르고 수용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영원부터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와 그 본체의 형상으로 태어났다고 해석되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부활로서 증명된다. 그는 메시야로서 영원부터 통치자로서 존재했으며 역사에서 이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스도에 있어 이 이름은 중보자와 왕으로서 신정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양자론적으로 신성으로 출생하며 인성으로는 입양의 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는 본성상 영원부터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아들이라는 이유로 죽음의 정죄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에 있어서 절대적 의미에서 적용된다. 그리스도는 성육신 이전에 로고스와 아들로서 존재하고 자신의 부활과 승천으로 그 상태로 되돌아가시는 분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그때와 지금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자 본체의 형상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과 비교하여 먼저 나신 자이며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존재하는 분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되며 그리스도를 피조물들 가운데 포함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피조물들로부터 제외시키며 그리스도는 독생자이자 먼저 나신 온전한 로고스의 형상으로 영원전부터 성부와 특별한 관계를 가진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자신이 아버지께 가는 것이 기쁘다고 하시는데 아버지가 자신보다 크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권능의 영역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낮아진 자신의 상태에서 아버지와 관계를 고려한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찬양받으시며 그리스도가 신적 본성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그에게 돌려질 수는 없다.

 

성경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에 대해 통찰을 제공하는데 성령론은 옛 언약과 새 언약에서 동일하다. 성령은 성부, 성자와 다른 특별한 위격이며 자신의 특별한 실존 양식으로 이 명칭을 지닌다. 성령은 하나님으로서 모든 피조물들 안의 내재적 생명 원리이며 성령이 거룩한 까닭은 자신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만물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도록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온다고 말해지는데 오순절에서 이 일이 드러난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과 구별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동등한 선상에 놓여지며 하나님께 올려지는 대상으로 언급된다. 성령의 인격성처럼 그의 신성도 신약에서 선명히 드러나는데 온갖 신적 속성이 하나님의 영에게도 돌려지며 이는 본질상 성령이 성부와 동등함을 전제한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성부에 갖는 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그리스도와 맺으며 성자가 성부로부터 모든 것을 받는 것처럼 성령도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취하며 성자가 성부를 증거하듯 성령은 성자를 증거하고 영화롭게 한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성취하신 유익들을 제공하며 성자와 성부 자체와 직접적 즉각적으로 교제하며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 되신다. 모든 생명과 능력은 성령에 속하며 성령은 우리 기도의 주님이자 근원이다. 교회는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고 경계를 받으며 성령을 훼방하는 신성모독은 용서받을 수 없다.

 

성경은 삼위일체에 대한 완전한 교리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라는 단일한 명칭이 성부 성자 성령에서 비로소 충분히 전개됨을 가르친다. 성경은 이 삼중적 원인이 서로 위격적 관계를 가지는 구별된 세 주체라고 선언하며 이런 맥락에서 성경은 신학이 삼위일체 교리를 수립하는 모든 요소들을 포함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신성, 기독교의 절대성, 하나님의 계시, 죄의 구속,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것이었다. 속사도들에 있어도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리스도에게는 특별한 명치이 주어진다. 하나님으로서 지상에 보냄을 받은 거룩하고 이해할 수 없는 로고스이며 하나님이다. 영지주의가 등장할 때에 그리스도의 신성은 교리적 중요성을 획득하고 명백하게 선언된다. 하지만 성부와 성자의 내재적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명백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그래서 아리우스주의적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이와 반대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유스티누스 마터에게는 헬라 철학이 기독교 신학에 미쳤던 영향이 드러난다. 내재된 말씀과 계시된 말씀의 구별, 두 번째 하나님으로서의 성자, 숨어계신 하나님에 대한 교리, 성자를 신적 본질 밖에 둔 사실 가운데 그러하다. 이러한 결함들은 후속 변증가들에 의해서도 회피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적 신 개념과 세계 관념으로서의 로고스에 대한 반대를 말했으며 로고스 이해에 있어서 피조물이 아닌 본질적 하나님임을 말했다. 하지만 이레니우스에 있어서 어떻게 단일성 가운데 셋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드러나지 못했다. 이는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해 성부와 성자를 보이지 않는 가시적 하나님과 가시적 하나님으로 구별함을 통해서 극복되었다. 그에게 있어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 발생, 성육신의 단계를 거쳐 완전한 아들됨과 독립적 인격성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는 위격들의 삼위일체를 성부의 위격이 아닌 하나님의 존재에서 도출하려 하였다. 그러나 존재론적 삼위일체를 우주론적 과정에서 해방시키지 못했고 이러한 삼위일체를 전적으로 하나님 존재 자체 내의 영원한 과정으로 이해한 것은 오리게네스였다. 성자의 발생은 영원한 출생이며 성부 없이 성자는 존재할 수 없으며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는 없으며 성부는 성자가 존재하기 이전에 성부가 아니라 아들을 통해 성부이다. 이 단일성과 동등성 가운데 삼위 간의 구별을 주장하기 위해 오리게네스는 종속론으로 치우쳐 성부의 위격엥서 삼위일체를 도출한다.

 

교회는 오리겐을 따르지 않았고 그의 종속론을 거부하며 니케아 회의를 통해 완전한 성자의 신성을 선언한다. 이는 전적으로 종교적 성격을 가지면서 기독교의 구원론적 원리를 견지한다. 하지만 삼위일체론의 의미는 달라졌는데 성부 성자가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단일으로부터 삼위성에 이르는 것에 대한 문제에서부터 삼위성부터 단일성에 이르는 것이 문제가 되엇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가 생명을 같이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삼위일체야말로 이방 종교와 기독교를 구별하는 핵심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존재론과 우주론의 철학적 혼합을 추방하며 삼위성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혼합이 아니라 완전히 전적으로 신적인 것이며 영원한 것이라고 말했다. 삼위성은 영원하기에 비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항존하는 것이다. 성부의 관계는 자신의 본성에 속하며 성자 성령의 관계도 그러하다. 이 삼위는 단일한 전체의 세 부분이 아니며 동시에 단일한 대상에 대한 세 이름도 아니며 모든 삼위는 동일본질이고 단 하나의 실체이며 동일한 속성을 지니며, 성부는 신성의 근본원리이며 원천이며, 삼위는 서로 안에 존재하고 자신들의 사역에서 일치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은 더 사색적으로 심오히 취급하는데 초기 교부들의 말을 이어가면서 독자적으로 중요한 수정을 시도한다. 먼저 아우구스티누스는 출발점을 성부의 위격에서 잡지 않고 하나님의 본질에서 본다. 그래서 그는 가장 하나님의 절대적 단일성을 선언한다. 위격들의 차이는 한 위격은 소유하지만 다른 위격은 소유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의 관계가 다를 뿐이며 성부가 첫 위격이며 그렇게 불리는 것은 성자와 성령에 대해 특별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형성된 대조를 반드시 거부한다. 성자는 참된 하나님으로서 성부와 동등하며 종속된 존재가 아니며, 성부가 원래의 하나님이라는 의식에서 탈피하여 하나님의 본질에서 출발하여 신성이 논리적으로 먼저 성부 안에서 존재했다가 성자와 성령으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성부만 그렇게 일컬어지는 것은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위격으로서 성자에 대한 성부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하나님의 현현은 로고스의 계시로만 이해되었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이를 성부와 성령에게도 돌리며 이것을 분리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삼위일체의 이미지, 유비, 흔적들을 추구하며 전체로서의 신론과 우주론의 연관성을 밝힌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따라 표현된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서방교회에 수용되었으며 종교개혁자들도 이에 동의되어지고 있다. 하지만 개신교의 수용 태도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신앙이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삼위일체로 계시한 하나님 자체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 구원이라고 말하는 점에서 다르다.

 

이 교리는 외부의 적들인 유대교와 이슬람주의자들의 반대를 받았고 내부적으로도 많은 이들의 저항을 받았다. 삼위일체교리는 기독교의 심장으로 모든 오류는 삼위일체론의 이탈에서부터 귀렬되는 것이다. 이 교리의 역사는 진리를 포함한 교회의 공식적 입장만이 마땅히 지켜져야 하는 문제를 순수하게 보존하는 것이며 이 교리의 큰 문제는 본질의 단일성이 위격의 삼위성을 소멸시키지 않고 위격의 삼위성이 본질의 단일성을 없애지도 않으며 사벨리우스주의나 아리우스주의의 오류에 빠질 위험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아리우스주의는 그리스도가 초자연적으로 태어나 자신의 사역을 위해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능력을 갖추고 주로 높여진 인간으로서 신성과 선재를 부인한다. 이러한 양자론적 기독론은 그리스도를 성부로부터 인한 산출로서 중간적 존재로서 이해한다. 이 로고스에서 성령이 산출되며 더 낮은 단계가 된다. 로고스는 성부와 동일본질이 아니라 전적으로 분리되어 변하며 선과 악을 택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완전한 피조물로서 선을 택하여 하나님이 되었고 진리를 선포하여 구원을 이룬 존재라는 것이지만 경배의 대상은 아니게 된다. 아리우스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에서 다양한 논증들을 차용하여 하나님의 단일성과 불출생을 주장하며 니케아 회의의 기독론에 속한 약점과 모순을 지적하고 성자가 출생했더라면 불출생한 하나님으로부터 본질적으로 구별되고 시간 속에서 발생했다는 논증이 중요하게 되었다. 사벨리우스는 성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태어나 고난을 받고 죽으며 성부와 성자는 다양한 관계들 가운데 동일한 위격에 대한 이름이며 그리스도 안의 신적 본성은 성부이고 인성, 육신은 성자임을 말한다. 이러한 양태론은 동일한 존재에 세 가지 이름이 있음을 말하였고 하나님은 먼저 성부의 위격, 출현, 양태로 창조자와 입법자가 되시고 성육신부터 승천까지 구속자가 되시고 성령의 위격으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사벨리우스는 성령을 하나님의 존재에 포함시키고 성자와 성령을 성부와 동일선상에 둔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 안에 역사적 연속, 하나님 자신 안에 생성이 있음을 가르친다.

 

이러한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는 오랫동안 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존재했다. 아리우스주의의 핵심은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을 보인하는 것이며, 성부의 위치를 보호하기 위해 여러 여지를 허용하여 하나님과 성부의 격차와 같이 여러 격차들이 존재하며 피조물들 천사들 인간들의 옆자리가 다양하게 등장한다. 여기서 종속론의 형태는 성자는 피조물이나 무로 태어난 것이 아닌 성부의 본질에서 태어나서 성부보다 열등하고 성부에 종속되는 것이며 성자는 성부의 유사본질이 된다. 또한 아리우스주의는 종교개혁 이후 영국 신학자들에 의해 부활하여 성자와 성령은 성부의 자유로운 뜻에 의해 창조 전에 피조되고 그 직분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또한 아리우스주의는 소시누스주의로 등장하는데 성부는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이고 성자는 하나님에 의한 초자연적 수태를 통해 피조된 인간으로 수태되지 전에는 존재하지 않고 인류에게 새로운 율법을 전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이 임무 이후 승천하여 신적 은혜에 참여하고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이 소시누스주의는 유니테리언으로 변화한다. 이들은 초자연주의를 유지할 수 없어서 예수는 평범한 인간이 되고 기독교는 그의 인격에서 분리되었으며 합리주의와 현대신학이 일어났으며 여기에는 더 이상 삼위일체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는 성령은 거의 언급되지 않으며 그의 인격성도 부인된다. 사벨리우스주의 역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신적 존재의 삼위성을 공통적으로 부인하여 하나님의 단일성을 얻으려고 한다. 이로서 삼신론이 등장한다. 고대에는 단성론자들에 의해 삼신론이 등장했다. 플라톤의 실재론적 의미에서 삼위일체가 이해되면 이는 사실상 사신론으로 변화한다. 성자와 성령은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 속성들은 단지 창조와 재창조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독립적이고 인격적 존재가 된 것이다. 로고스는 내재적 말씀으로서 영원하며 성부는 결코 로고스 없이 존재하지 않고 로고스는 시간 속에서 계시된 말씀이 되어 시간 속에서 성자와 성령으로 확대되었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태론적 단일신론이 태어나서 삼위를 단지 한 신적 존재의 세 계시 양식으로 여기게 된다.

 

기독교회는 이와 다른 길을 걷는다. 삼위일체론은 교회의 교리이며 탁월한 신비로서 기독교의 본질은 오직 삼위일체로서 전달된다. 이 표현이 성경에 나타나지 않지만 예수와 사도들은 성경을 사용하여 추론을 통해 진전된 결론들을 도출한 것과 같이 성경은 근본 원리로서 삼위일체를 드러낸다. 이 용어들은 그리스도인의 독자성, 신학의 정당성과도 연관되어 이단에 대항하여 성경의 진리를 주장하기 위해 사용된다. 교회는 위격들이 신적 존재 내에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들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를 위해 휘포스타시스의 용어를 사용한다. 바실리우스는 하나님의 본질을 우시아로 삼위를 휘포스타시르로 말하면서 용어 사용의 통일성에 기여했다. 휘포스타시스는 고유한 실재, 개별적 존재를 가지며 형태들을 통해 다른 실체들과 구별하는 것이다. 라틴어에서는 본질과 위격에 대해 수브스탄티아와 페르소나의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삼위일체는 본질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위격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본질과 위격 사이에 상호 관계가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한다. 본질의 개념에 대해서 우시아는 삼위와 단일 본질에 처음에 사용되었지만 점차 사물의 존재, 본성, 본질을 가리키게 되어서 본성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 본질:푸시스는 신학에 적응되어 하나님의 단일 본질, 일반적 신성에 대한 지속적 명칭이 되며 신적 본성이 삼위에 공통된 것처럼 신적 본성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다. 이 신적 본질과 하나님 안의 삼위 사이의 구별은 피조물들 가운데 그 유비가 드러나는데 이 유비에서 본질과 개인들을 구별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 이중적 위험이 있어서 유명론은 본질, 보편적인 것을 단지 이름이자 개념으로 이해해서 삼신론에 이르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실재론은 본질을 위격들 배후에 그 위의 실체로 여겨서 사신론으로 이르게 한다. 신적 본질과 인간의 본성 사이에 유비가 있고 이 유비로 우리도 하나님의 본질을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유비는 중요한 차이를 전제하는데 인간의 본질에 대한 개념은 하나의 일반적 개념으로 인간 본성은 물론 실재적으로 실재하고 인간 외부나 인간 위에가 아니라 각 사람 안에 현존하여 인간 본성은 각 사람 안에 고유한 방식으로 유한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다양한 사람들 가운데 있는 인간 본성은 전체적으로 동일하지 않고 양적으로도 동일하지 않으며 인간은 단지 구별될 뿐만 아니라 분리되는 존재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적 본성의 위격들 안에 있고 각 위격 안에서 전체적으로 양적으로 동일하며 본질에서도 단일하고 동일한 존재다. 위격들은 무엇에도 분리되지 않으며 동일한 신적 본성과 미덕들을 소유한다. 하나님 안에는 한 분의 영원한 하나님이 있다. 그래서 본질은 성경에서 전면에 부각되고 일신론에 포함되고 하나님에 대한 단일성의 진리를 보존한다. 신적 존재 안에 어떤 구별이 있어도 단일한 본성을 부당히 취급해서는 안된다. 피조물들 가운데 모든 다양성은 분리와 분할을 포함하며 시간과 공간의 형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영원성, 편재성, 전능은 모든 분리와 분할을 배제하여 하나님은 복합이나 분할이 아닌 절대적 단일성과 단순성을 가지신다. 이 단일성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본질에 동일한 것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의 영광은 이 단일성이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고 포함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다양성 가운데 최상의 단일성을 전개하는 존재의 풍요함, 충만이다. 신적 존재의 자기 구별은 위격이라는 용어로 지칭되었다. 페르소나라는 단어는 서방 신학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상당히 유동적인 개념으로서 프로소폰이나 휘포스타시스에 의해 대체되었을 때에도 유지되었고 표현상의 차이로 페르소나는 동방에서는 프로소폰으로 라틴에서는 수브스탄티아의 의미에서 이해했다. 표현상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용상으로는 전적으로 동일한 것을 삼위는 표현 양식들이 아니라 실체들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페르소나는 보에티우스에 의해 합리적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로 정의되었으며 실체와 합리성으로서 표현되게 되었다. 하지만 현대 철학과 심리학에서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서 이들에게 인격성은 유한하고 제한된 존재의 실존 양식이며 하나님에게 있어서 인격성은 언급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자의식과 자기 결정도 언급될 것 없다고 여겨진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는 전능하고 편재하고 무의식적인 힘과 욕구 충동이다. 또한 심리학에서 학자들은 인간의 인격성조차 독립적 실재를 포함하지 않으며 자아 영혼은 실체가 아닌 심리적 현상들에 대한 유명론적 총체이며 인격성은 인간이라 불리는 개별적 존재의 실존 양식이며 인격성이 인간 존재의 전성기와 최고의 발전으로 추구할 목표이며 언젠가 획득할 최고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발전의 정상에 이르러 인격성을 소유한 자들에 대한 영웅 숭배와 인간의 신격화를 희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인격성 개념은 인간에게 있어서 영향을 주지 않아서 인격성이 심리적 현상들의 총체와 다른 그 이상의 것이라서 이 인격성 개념을 삼위일체론에 적용하기 어렵고 이 정의는 개별적 실체를 말하고 위격을 신적 본성의 비공유적 존재라고 정의하게 되며 칼빈은 위격을 단지 하나님의 본질 내의 실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에서 위격이 가리키는 것은 신적 존재 안에 있는 삼위란 양식들이 아니라 고유한 방식의 존재라는 사실만 가리킨다. 그리고 합리성과 자의식은 강조되지 않는다. 위격이라는 단어가 말하는 것은 신적 존재의 단일성이 삼중적 실재로 드러나는 것이며 위격들은 신적 인격성의 세 가지 계시 양식들이 아미녀 신적 존재는 삼위적으로 절대적이고 신적인 인격성이 된다. 인간 가운데 신적 인격성에 대한 유비를 발견하는데 인간의 인격성이 존재하는 것은 한 주체, 자신을 객체로 삼으며, 다시 자기 자신으로 요약하는 것으로서 가능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간이나 공간, 연장, 분리가 없기에 단일하고 동일한 존재의 세가지 존재양식이 된다. 그러나 인간 인격서의 이런 유비는 다른 방식으로 보충되어야 하며 인류 가운데 충만한 발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적 존재도 삼위 안에서 그 충만함을 전개하지만 삼위는 서로 나란히 분리된 개별자가 아니라 신적 존재 안에 있는 삼중적 자기 구별이다. 이런 자기 구별은 존재의 발전을 인격성 안에 취해 세 인격으로 만들며 인간 본성의 전개는 사람 안에서 인격성으로 전개되는 것과 인류 안에서 많은 개인들로 전개되어서 통일성으로 한 인격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인격성으로 전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위격들로 전개하는 것과 상응하며 삼위는 존재 안에서 존재로부터 존재를 통해 존재 내부에서 완전한 자기 전개를 이룬 하나의 신적 인격성인 것이다.

 

삼위는 하나의 실체 하나의 상태 하나의 능력을 지닌 한 하나님이다. 삼위는 상태가 아닌 정도에 있어서 셋이며 실체상 하나이지만 위격상 한분이 아니다. 구별과 구분은 있을 수 있지만 모순과 분리는 없으며 따라서 존재와 위격과 위격들 상호 간의 차이는 상호 관계에 놓여 있으며 성부,성자,성령 안에서 서로에 대한 상태 성부됨 아들됨 거룩함의 속성 가운데 놓여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를 성부로부터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단일성 신성에서 도출하며 삼위일체가 하나님에게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위격성은 존재 자체와 동일하다. 각 위격은 존재 전체와 동일하고 다른 두 위격의 합이나 세 위격 모두의 합과 동일하다. 하지만 피조물들의 경우 한 사람은 세 사람과 동일하지 않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전부가 홀로이지만 하나의 위격과 동일한 것이다. 각 위격이 각 위격 안에 있고 모든 위격이 하나의 위격에 있으며 하나의 위격이 모든 위격에 있고 모든 위격이 모든 위격 안에 있으며 모두가 하나이다. 삼위일체 자체는 그런 점에서 각 위격만큼 큰 것이다. 존재와 위격 위격들 간의 상호 간의 차이는 어떤 실체에 있을 수 없고 단지 상호 간의 관계에만 있을 뿐이다. 동일한 삼위일체 내에서 특별히 각 위격에 대해 언급된 것은 결코 자기 자신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서로에 대해 피조물에 대해 언급된 것이며 상대적으로 언급된 것이다. 구별은 실체상의 구별이 아니라 관계상의 구별일 뿐이며 이 구별은 실재적으로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며 존재와 위격은 실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도 실제로 다르며 차이가 실존 방식에 있더라도 그것은 실재적인 차이다. 위격은 존재들의 존재하는 방식이다. 존재와 위격과 상호 간의 차이는 성경이 일신롡덕이라고 하더라도 성자와 성령의 신적 본성과 완전을 인정하고 동일선상에 놓는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이며 동일한 신적 본질 안에 있는 구별된 주체들이다. 위격들의 차이는 위격적 속성들 특성들에 놓여 있으며 아버지 됨 능동적 출생 능동적 내쉼 아들됨 발출 이런 속성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실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더하지 않는 것이다. 위격들 상호 간의 차이는 한 위격은 성부 다른 위격은 성자 세 번째 위격은 성령이라는 사실 뿐이다. 인간 사이에서도 아버지와 아들 됨 역시 하나의 관계로서 그 관계를 지닌 인격적 개인적 주체를 전제하지만 그 외에 아버지됨과 아들 됨과 상관 없이 존재한다. 아버지 됨은 우연한 속성일 뿐이며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되지 못한다. 인간됨은 아버지 됨이나 아들 됨 가운데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적 존재에서는 신성과 위격성은 완전히 일치하며 신적 존재는 삼위의 각 위격 성부됨 성자됨 성령 됨 안에 완전히 포함되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는 삼중적 본성의 전개가 시간과 공간에서 나누어지지만 하나님에게는 분리나 나눔이 없으며 그의 존재가 인격성으로 전개되는 것은 그의 존재가 위격들로 전개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의 존재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표현되는 내재적 관계들로 전개되는 것을 즉각적으로 완전히 포함한다. 인류 안에서 시간과 공간으로 나뉘고 병립하고 전개되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는 영원하고 단순하게 현존한다. 삼위는 각기 구별되지만 다르지 않으며 삼위성은 단일성에서 말미암고 단일성 안에 있고 단일성을 위한 것이다. 존재의 전개는 그 존재 내부에 발생하고 존재의 단일성과 단순성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삼위는 구별된 주체들 실체들 실재들이며 이를 통하여 존재 자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전개시킨다. 이 삼위는 상호 간에 출생과 내쉼으로 절대적 방식으로 서로 연관된다. 그들 셋 모두가 하나님이므로 단 하나의 신적 본성을 소유하며 영원토록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한분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첫 번째 위격은 성부이며 그 위격적 속성은 성부됨 또는 태어나지 않음이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태어나지 않은 것들로 부르고 아리스토텔레서는 물질이라고 부르고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태어나지 않은 심연으로 말한다. 아리우스파는 이 용어로서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동일본질이 아니라고 말했다. 아겐네시아는 모든 피조물과 대조적인 하나님의 참된 본질을 표현한다. 그러나 성자는 독생자로서 그는 하나님일 수 없으며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헬라어에는 낳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게넨토스와 게네토스가 있는데 후자는 전자보다 광범위한 것으로 태어나 존재의 시작을 가진 모든 것을 가리킨다. 삼위 모두는 아게네토스라고 불릴 수 있다. 그들 중 어느 위격도 피조물의 형태로 산출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아겐네시아는 이것과 구분되어야 했는데 이것은 성부만의 속성인 것이다. 성자가 겐네토스로 불리는 것은 피조물처럼 태어난 것이라서가 아니라 영원한 성부의 존재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위격에 속하는 것이지 존재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삼위 안에서 하나이며 동일하지만 아겐네시아는 위격에 속하는 것이지 존재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아겐네시아는 성부가 출생을 초월한다는 것을 말할 뿐 하나님의 본성에 관하여 부가적인 것을 전혀 말하지 않으며 이 명칭은 성부의 위격을 가르키지 않고 태어나지 않음과 성부 됨은 동일한 것이 않기에 성부의 명칭이 아겐네토스에 선호된다. 성부의 성격적 명칭이 첫째 위격의 속성을 더 낫게 한다. 성부 됨 안에 두 번째 위격과의 적극적 관계를 함의한다. 신약의 아버지라는 명칭은 구약의 여호와라는 명칭과 같이 하나님의 위격적 속성을 지시하는 고유한 명칭이며 아버지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일컫는 인간의 은유적 표현 방식이 결코 아니며 지상에서의 아버지 됨은 하나님의 아버지 됨에 대한 멀고도 희미한 비유인 것이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아버지이며 오로지 아버지이자 본성상 아버지이다. 따라서 출생도 반드시 영원한 것이어야 하며 성자는 성부와 마찬가지로 영원하며 성자가 영원하지 않으면 성부도 영원할 수 없다. 하나님을 성부라고 부르는 자는 그 가운데 자동적으로 성자도 부르게 되는 것이며 이로서 성부는 스스로 태어난 자생적인 스스로 기원인 자신의 기초원리이며 성자와 성령 신성 전체의 기초원리 원인 뿌리 등으로 불린다.

 

두 번째 위격은 아들 됨이다. 이를 지칭하는 말씀 지혜 로고스 아들 맏아들 독생자 하나님의 형상 형상 실체 흔적 등이 있다. 오리겐에 의한 영원한 출생 교리는 인간적인 방식, 불완전하고 완벽하지 못한 방식으로 말하는 것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을 촉구한다. 하지만 인간의 출생 역시 성부가 성자에게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주는 신적 행위에 대한 유비와 모양이다. 인간의 출생은 불완전하고 결함이 있지만 하나님에게는 신적 존재의 출생이 있어서 충만한 생명으로 열매맺는 자이다. 추상적이고 이신론적 신개념이 아니다. 삼위일체 없이 창조는 이해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자신을 전달할 수 없다면 그는 어두운 빛이 된다. 이 출생은 신적 방식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일차적으로 영적인데 유출과 분할 없이 일어나며 신적 존재의 구별, 구분, 모순, 분할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출생의 가장 현저한 유비는 사고와 언설에 있으며 성경 자체가 성자를 로고스라 말할 때 이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말을 필요로 하는데 그 말들은 감각적이고 물질적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유일한 로고스 안에서 자신의 존재 전체를 표현하고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을 로고스에게 주는 것이다. 둘째로 이 출생은 니케아 회의에서 확정된 것처럼 성부가 성부의 본질로부터 하나님에게 나온 하나님 빛에서 나온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하나님 성부와 동일 본질인 성자를 낳는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출생은 창조와 다르게 태어난 자가 낳은 자의 본질로부터 본질상 유사하게 태어난 것을 의미한다. 성자는 피조물이 아니라 영원토록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다. 그래서 그는 성부의 뜻에 의해 무로부터 시간 가운데 태어나며 오히려 그는 성부의 본질로서 영원 가운데 출생한다. 출생은 성부의 참된 사역 활동이 아니지만 성부에게 낳는 본성을 돌리며 성부의 출생은 그의 참된 본성들과 독특한 본질들에 대한 계시이며 그의 지식, 의지와 능력, 그의 모든 미덕들에 대한 계시이다. 셋째로 기독교회는 출생을 영원한 것으로 고백한다. 아리우스파는 성자가 존재하지 않는 때가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성자가 영원하지 않았다면 성부도 영원한 아버지가 아니게 된다. 그는 성부이기 이전에 하나님이시고 나중에서야 시간 가운데 성부가 되신 것이다. 영원한 출생에 대한 부인은 성자의 신성을 정당히 다루지 않을 뿐 아니라 성부의 신성도 정당하게 취급하지 않는 것이며 이런 부인은 성부를 변화하는 분으로 신성을 강탈하며 영원성을 빼앗는다.

 

삼위일체의 세 번 째 위격은 성령이며 그는 위격적으로 발출 내쉼 이다. 성령에 있어서 논쟁은 주로 그의 인격성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인격성이 인정된다면 그의 신성은 그에 따르는 것이었다. 성자의 신성과 더불어 성령의 신성은 반드시 수용되어야 했다. 나지안주스의 고레고리우스는 성령에 대한 견해 차이를 설명하는데,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은 성부와 성자의 인격성과 신성처럼 객관적으로 우리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이 지닌 이름은 성부와 성자의 인격성과 같은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경륜 즉 성화는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은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며 우리 가운데 거주하는 경륜 가운데 산다. 그러므로 성령에게 향한 우리의 기도는 성부와 중보자에 향한 것보다 덜하며 성령은 기도의 대상이라기 보다 기도의 주제이다. 성령은 기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도의 주제이며 성령의 인격성은 교회에서 논쟁이 되었던 것이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성부와 성자와의 교제는 불가능하다. 성령이 피조물이라면 진실로 성부와 성자의 모든 유익들을 우리에게 부여할 수 없다. 그는 개별적인 그리스도인과 교회 전체의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될 수 없다. 성령은 피조물이 아니고 성자가 성부와 긴밀하게 연결되듯 성령은 성자와 긴밀히 연관된다. 성령은 본질상 성자의 소유이며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교회를 거룩하게 하며 성령 안에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모든 유익들을 교회에 부여한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을 주는 성령은 반드시 참된 하나님이어야 한다.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없이는 성부와 성자의 참된 하나 됨이란 불가능하다. 삼위일체가 성령의 신적 위격 안에 포함될 때에 삼위 가운데의 단일 존재와 단일 존재 가운데 있는 삼위가 존재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성령의 관계를 내쉼으로 가장 선호해서 말한다. 이는 반드시 출생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영원한 전달로 여겨지는 것이다. 성자는 오로지 성부로부터 나오지만 성령은 성부봐 성자로부터 나오거나 성령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으로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성령은 성자의 아들이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이 특별히 지적되는데 그럴 경우 셋은 무한수가 될 것이며 하나님 존재 내의 생명의 움직임은 끝나지 않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출생과 내쉼의 차이에 대해서 출생은 지성의 방식으로 발생하고 내쉼은 의지의 방식으로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는 로마교에 의해서 출생을 사고하는 것에 성령을 사랑으로 제시하게 되었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출생과 내쉼의 분명한 차이를 수용한다. 하지만 차이들의 정확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더라도 확실하게 말하지 않고 그것이 충분히 온당하지 못하다고 여긴다.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론은 현저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성자에 대한 성령의 의존을 명백히 가르치더라도 성령이 성부 그리고 성자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하지는 않았다. 세 캅바도기아 신학자들은 동일한 맥락에서 성령은 성자가 성부에게 대한 것처럼 성자에 대해 관계를 가지며 성령은 순서상 성자를 따르고 우리에게 성자와 성부를 수여하고 성부로부터 나오며 성자와 더불어 성자 이후에 이해되고 성령은 성자를 통해 성부에게 나오고 오로지 삼위 상호 간의 관계가 각자에게 고유한 이름으로 나오며 삼위 상호 간의 관계가 각자에게 고유한 이름을 부여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동방의 삼위일체론은 서방과 다르게 발전했다. 키릴루스는 그리스도를 성령에 의존하게 만들어 위격들의 순서를 바꾼 네스토리우스에 대항하여 성령이 성자를 통해 성부로부터 나온다고 가르쳤다. 동방교회는 교부들의 신학에 머물렀지만 서방교회는 그보다 더 나아갔다. 터툴리아누스는 이미 삼위일체를 성부가 아닌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도출했으며 힐라리우스는 성자가 성부에 대해 갖는 관계처럼 성령이 성자에 대해 똑같은 관계를 갖는다고 설정하고 성령은 성부에게 나오고 아들에 의해 보냄을 받아 분배되고 진실로 성자가 그 저자라고 말한다. 아우구스티스는 그리스 교부들의 생각을 초월하여 삼위를 단 하나의 단순한 신성 안에 있는 관계들로 이해하고 성령을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와도 연관시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은 성부 성자와 관련되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 간의 형언할 수 없는 교제라고 가르쳤다. 성부와 성자의 이름 가운데 오로지 상호 관계만 표현되며 성령에 대한 관계는 표현되지 않는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선물이라고 불리며 성령은 그 둘을 원리로 삼는다. 성부와 성자는 성령의 하나의 원리이며 성자도 자신으로부터 성령이 나오게 하는 것을 성부에게서 받으며 성자는 자신이 성자라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성부와 구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발출 교리는필리오크베를 삽입한 신조들에서 나타난다. 서방교회는 필리오크베를 반복해서 변호했으며 종교개혁도 이에 동조한다. 하지만 동방교회는 옛날 입장을 고수했다. 그리스 신학잗르은 종속론을 가르치지 않고 삼위의 완전한 동일본질을 인정한다. 그들은 성령을 보내고 분배하는 그리스도에 대해 성령이 일정한 관계를 갖는다고 말한다. 성령이 성자를 통해 성부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서방교회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의 발출은 두 가지 내쉼 가운데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한 원리에서 나오는 원리로 한가지 내쉼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 신학자들은 성령이 성자로부터 나온다면 신성에는 두 원리들이 있다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다른 가르침과 다른 종교적 실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필리오크베 논쟁은 그리스 교회에 여전히 남은 종속론의 마지막 잔재이다. 삼위가 완전히 하나이며 동등하더라도 그 단일성과 동등성은 오로지 성부에 의해서만 성자와 성령에 속하며 성부는 신성의 원천이며 원리다. 따라서 만일 성령이 성자에서도 나온다면 성자는 성부와 나란히 서며 통일성은 깨지며 이신론이 생겨난다. 그리스 학자들에게 성부는 유일한 원인이며 삼위는 신적 존재 안에 있는 세 관계들 신성의 자기 전개가 아니며 자기의 존재를 성자와 성령에게 부여하시는 분은 성부이다. 하지만 그 결과 성자와 성령은 이제 나란히 서며 같은 방식으로 성부 안에 그들의 원인, 원리를 가진다. 성부는 그 둘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며 성자는 성부를 알게 하고 성령은 성부를 즐거워하게 한다. 성자는 성령 안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성부를 계시하지 않고 성령은 성자를 통해 성부에게 인도하지 않는다. 이 두가지 모두 성부에게 이르는 길을 연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 신학은 정통주의와 신비주의 지성과 의지는 나란히 선다는 특징을 가진다. 교리는 생활 밖에서 생활 위에 서 있으며 교리는 단지 머리만을 위하며 신학적 사변을 위해 적합한 대상이다. 그와 나란히 삶을 위한 다른 근원이 성령의 신비주의 가운데 있으며 이 신비주의는 지식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기원을 갖고 마음을 육성한다. 그래서 이 둘 사이는 개념과 감정이 분리되고 윤리적 연계가 부족해진다.

 

신적 존재 안의 삼위의 내재적 관계는 계시와 사역 가운데 외부로 드러난다. 외부로 드러난 사역들은 삼위에게 공통적으로 속하며 항상 하나이며 동일한 하나님이 창조와 재창조에서 활동하지만 그 통일성 안에서 삼위의 순서는 보존된다.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자신을 반영하는데 삼위 각각에 특별한 속성들과 사역들이 속하지만 다른 두 위격들을 배제하지 않고 존재론적 삼위일체 가운데 있는 위격들 사이의 순서가 드러난다. 이 속성들은 그들 각 위격에 해당되는 고유한 것들이 아니라 귀속들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부에게 권능을 성자에게 지혜를 성령에게 선, 사랑을 돌린다. 성부 성자 성령 모두 동일한 신적 본성과 동일한 신적 속성들을 지니지만 경륜적 의미에서 삼위에게 돌리는 것이다. 여기에 외부로 드러난 사역들의 경륜적 구별도 상응하는데 모든 외적 사역은 물론 한 존재의 사역이더라도 삼위의 각 위격은 이 사역에서 신적 존재 안에서의 자기 존재의 순서에 상ㅇ응하는 자리를 차지한다. 하나님은 성부로서 만물 위에 있으며 성자로서 만물을 통하여 있으며 성령으로서 만물 안에 있으며 성부가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만물을 창조하고 재창조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모든 외적 사역은 단 하나의 원리를 갖지만 삼위의 협동 사역으로 이루어진다. 이 삼위는 창조 사역과 구속과 성화에서 고유한 위치를 차지하고 성취한다. 모든 것은 성부로부터 나오고 성자를 통해 성취되고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외적 사역들도 삼위일체 전체의 사역이다. 하지만 경륜적 의미에서 창조는 구체적으로 성부에게 구속은 성자에게 성화는 성령에게 돌려진다. 존재론적 삼위일체에서 성부가 순서상 첫째이고 성자는 둘째고 성령은 셋째이다. 하지만 이런 시간 가운데 보내심은 하나님 존재 내의 삼위의 내재적 관계에 대한 반영이고 출생과 내쉼에 근거를 가진다. 교부들은 시간 속에서 인간의 눈에 드러난 삼위들 간의 관계들로부터 그들의 영원한 내재적 관계들을 도출했다. 성자가 육신으로 나타난 것은 성부와 성자에 의해 이루어졌기에 육신으로 나타났던 분이 보냄을 받았다고 말하고 육신으로 나타나지 않았던 분이 보냈다고 말하는 것은 합당하다. 우리의 육체적 눈 앞에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영적 본성의 내적 구조로부터 나오기에 보냄을 받았다고 언급되는 것은 적합하다. 성령은 누군가에게 주어지기 전에도 이미 은사였으며 주어지기 전에도 있을 수 있으나 주어지지 않는다면 주어진 것이라고 불릴 수 없는 발출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 성자와 성령이 성육신과 부어짐에서 가시적 형체로 나타난 반면에 이런 나오심은 보이지 않는 모든 신자들의 마음 가운데 성자의 교회와 성령의 전에 오심으로 완성된다. 성자와 성령은 성부로부터 영원히 나오며 이는 성부 자신이 그들을 통해 그들 가운데 자기 백성들에게 다가오고 결국 하나님이 만유 가운데 모든 것이 되기 위함이다.

 

삼위일체론은 인간 이해를 뛰어넘기에 그 실례를 밝히거나 추론으로 논증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첫째로 성경에서 3이라는 숫자가 풍성하고 깊은 의미를 가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만이 아니라 성경 밖에서도 이 숫자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이방의 유비들로서 다신론적이기에 기독교적 삼위일체론과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학자들은 물리적 유비들이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학자들이 추적하는 논리적 유비들은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여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적한 사실은 각각의 사물은 반드시 하나의 존재 단일성 크기 양식을 지녀야 하고 다른 사물들과 구별될 수 있는 특정한 형태를 지녀야 하며 그러한 일반적인 것과 특별한 것 사이의 어떤 관계나 상관성 질서를 지녀야만 한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 구별 조화에 있어서 각기 다르다. 중세 신학은 이를 여러 방식으로 발전시키고 어디서나 삼위일체의 흔적을 추적하는데 철학적 과목에서 그러하다. 현대 철학에서 삼중성은 형식상 지배적인데 관념은 반드시 살아 활동하며 산출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오로지 관념이 항상 관념 자체와 그 관념이 행하는 것 사이 모순되고 이러한 모순이 조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삼위일체의 도식 가운데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의 영향으로 삼중성은 많은 철학적 체계들과 신학적 체계들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대한 유비들을 여러 방식으로 추적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았으며 삼위일체 자체를 긍정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시도들도 있었는데 필연적인 것으로서 사유의 본질이나 사랑의 본질로부터 도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는 정신과 로고스로서 서로 연관된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내적 이성적 인간 안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발견하는데 첫째로 존재 인식 의지, 본질 지식 사랑, 정신 지식 사랑 의 삼중성에서 발견하는 것이었다. 둘째로 그는 영혼의 능력들 대상인 사물 자체, 시각, 영혼의 의도를 통해 형성되는 감각적 인식 가운데서 삼위일체에 대한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는 정신 지식 사랑 또는 기억 지성 의지로서 삼위일체를 부른다. 첫째 정신은 기억으로 다른 사물들과 자신에 대한 의식이다. 그리고 이 지식은 심사숙고 사유로서 기억으로서의 정신으로 산출된다. 정신은 이 지성 가운데 자신에 대한 적절한 상을 형성하고 자신을 이해하고 알고 바라본다. 그래서 지성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낳는다. 이것이 의지 또는 사랑에 의해 연합된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모든 피조물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크든 작든 삼위일체의 흔적들과 증거들을 드러낸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에게 피조 세계는 하나님을 비춰주는 거울로서 인간과 하나님에게 있어서 셋은 셋 모두가 하나이며 동등하고 각각이 다른 둘에 있고 둘은 다시 그 하나에 있어서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모든 비교들이 유비들과 이미지들이며 그들 사이의 유사성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는데 인간 내의 삼위일체는 인간 자체가 아닌 인간 안의 어떤 것 인간에 대한 어떤 것이 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삼위일체는 하나님 자신이고 삼위가 한분 하나님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유비와 이미지로 삼위일체를 선험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는 후험적으로 자연 가운데 증명하고 밝히고자 했다. 사유에 의한 이러한 삼위일체에 대한 논증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전수된다. 하지만 사유에 근거한 이러한 삼위일체에 대한 논증 제시와 관련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영역 즉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을 사용한다. 이러한 삼위일체에 대한 사변과 다른 구성도 시도되었는데 이는 신지학으로 사물들의 무엇은 이성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으나 사물들의 존재는 이성으로 해설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신론과 범신론도 거부하며 하나님은 추상적 단일성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단일성, 다수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 완전한 정신 인격적이고 자의식적인 개체로 하나님을 말하게 된다. 여기서 완전하고 절대적 정신은 즉자, 대자, 의식을 지닌 정신이 된다. 이 정신은 자유로운 정신이며 자신을 외부로 계시할 수 있고 정신이 자신 안에 지닌 세 목적들은 신적 존재가 아닌 능력들이 된다. 이 세 능력들의 분리와 연합으로부터 전체 피조계, 신화론, 계시를 도출하게 되는데 그것들은 모든 가능성의 형태들의 원리들이다. 여기서 절대적 인격성은 성부라고 불리면서 창조자만이 아니라 자기 사니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 존재 첫 능력으로 두 번째 능력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둘째 형상은 성자로 그의 출생은 성부 밖의 성자의 존재와 관련해서 창조 순간에 시작하는 것이고 세 번 째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래서 이 삼위는 셋으로 구별된 신들이 아니게 된다. 현대철학은 이런 사변으로 삼위일체의 교리를 사유하는데 특히 정신, 자의식, 인격성의 본질로부터 수립하려고 시도한다.

 

교회와 신학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런 철학적 수립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신비로서 자연과 이성을 초월하고 특별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피조계 안의 삼위일체 흔적들을 수용하고 후험적으로 추론하려 한다. 그는 위격들의 삼위일체를 자연적 이성으로 증명하는 것은 첫째로 보이지 않는 것을 대상하는 신앙의 가치를 손해하게 하고 둘째로 약한 토대에 기초한다고 하여 다른 이들의 신앙에 손해를준다는 점에서 손해라고 말한다. 칼빈은 자연과 인간으로부터 제공된 삼위일체에 대한 유비들과 증명들이 거의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삼위일체론을 합리적 근거들 위에 기초하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 대해 이 교리에 대한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특별 계시에 비롯된 것임을 주장해야 한다. 성경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유일하고 최종적인 근거다. 이성은 이를 후험적으로 사유로서 어느 정도만 설명할 뿐이다. 후험적 추론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확실히 증명할 수 없다. 그리고 신앙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사유하는 지성은 삼위일체론을 자연과 인류의 풍성한 삶의 중앙에 놓는다. 모든 존재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인도되고 고백할 때에 기독교적 사유는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첫째로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신 분임을 알려준다. 이신론은 종교의 죽음으로 이끌고 범신론은 하나님을 피조물과 동등히 이끌어 경계를 지워버린다. 하지만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세상과의 구별과 함께 복된 생명을 소유하는 분임을 말한다. 삼위일체에 대한 철학적 구성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반드시 하나님의 의지에서 나온 구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사랑으로부터 삼위일체를 도출하는 것은 성령의 발출을 밝히지 못한다. 삼위일체를 떠나서 그 속성들은 단지 이름이며 공허한 개념이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존재의 충만, 생명, 아름다움임을 알려준다. 또한 하나님 안에는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 통일성 가운데 다양성이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모두 동일 본질을 소유하고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면 피조물이 된다. 둘째로 삼위일체는 창조론에 가장 중요하다. 창조론은 오로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 가운데서만 주장될 수 있다. 창조는 우연이 아니며 신적 존재의 자기 발전도 아니다. 이는 반드시 하나님 안에 근거를 두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내적 생명의 과정 가운데 어떤 단계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생명은 신적으로 풍성하고 생산적이어서 그 안에는 활동, 산출이 있다. 이는 창조와는 다른데 내재적인 관계이며 하나님은 창조를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니다. 하지만 창조는 이러한 하나님의 생산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신적 존재가 산출할 수 없고 전달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외적 계시에서 하나님의 전달은 언급될 수 없게 된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성자와 성령에게 상대적으로 세상에게도 자신을 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신적 존재 안의 자기 전달이 창조의 모델이다. 모든 생명의 원리는 성령 안에 있으며 신적 존재 내의 출생과 발출은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로서 이 행위들은 창조와 하나님의 외적 계시를 가능하게 한다. 이는 하나님의 모든 외적 사역이 삼위의 삼위일체적 실재가 이해될 때 비로서 충분히 알려진다는 사실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창조가 삼위일체의 흔적들은 드러내준다는 것은 이 흔적들이 인간 안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나고 인간은 심지어 삼위일체의 형상이라고도 할 수 있기에 내재적 충동에 의해 어디서나 이 흔적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피조계의 완성성 미의 조화는 오직 삼위성 안에서 드러난다. 셋째로 삼위일체는 기독교에서 최고의 비중을 지닌다. 기독교 전체 특별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더불어 흥망성쇠의 운명을 같이 한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 모든 교리의 근간이자 새 언약의 실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세가지 원리들을 돌이켜 지시하는데 우리는 성자에 의해 구속되고 성령을 통한 두분과의 교제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며 우리의 모든 구원과 복의 근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인 것이다. 우리는 그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 이름은 우리 마음의 안식이자 우리의 양심의 평화를 발견하게 한다. 비록 우리가 이 신비에 대한 참된 신앙을 요구하는 지식의 크기를 정하지 못하더라도 현세와 내세의 구원은 삼위일체론과 연관된다.

53 하나님의 경륜

 

그의 계시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창조와 더불어 비로소 일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은 영원부터 영원까지이다. 하나님의 위격적 속성들은 하나님의 내재적이고 영원한 사역들이다. 성부는 자신 안의 생명을 영원히 성자에게 주어 그 안에 있게 하고 성자와 더불어 그 생명을 성령에게 주어 그 안에 있게 한다. 그래서 세 위격들 사이의 교통은 절대적으로 활동하는 생명이다. 이 모든 하나님의 사역들은 내재적이다. 하나님은 자기 완전을 위해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내적 사역과 외적 사역들은 나누어지지만 모두 하나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것들은 세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로 하나님 작정 안에 포함되어 하나님의 존재 밖에서 실현되도록 정해진 모든 생각들은 하나님 안에 영원히 현존하는 충만한 지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들 모두가 현실 가운데 발생한 것은 아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기초하여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하여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께는 무한한 존재와 하나님의 작정 대상의 사이는 논리적으로 구분된다. 셋째로 작정의 개념 가운데 포함된 것은 때가 되면 실현될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 안의 생각과 의지로 세상의 창조와 보존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이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 제시된다. 선택과 유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영원한 작정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모든 페이지에서 역사적 사실로 등장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만물에 관한 그의 확고한 생각, 작정이다. 그 경륜은 감추어져 있지만 역사 가운데 실현된다. 모든 것은 그 경륜으로 발생하며 그 경륜은 영원히 존재하며 아무것도 그것에 저항할 수 없고 악인의 도모는 무너진다.

 

신약은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을 더 밝게 비추어준다. 의지 자체를 가리키는 델레마와 달리 신약 성경의 용어 불레는 경륜과 협의에 기초한 하나님의 뜻을 가리킨다. 이는 만물에 선행하며 심지어 죄악된 행위도 그러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특히 구속 사역에 연관되는데 그로서 계획이나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에서 확고한 계획과 목적으로 일하는 것을 가리킨다. 선택은 불변하는 목적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에 따른 계획이나 목적이며 이에 따라 많은 사람이 구원 얻음을 가리키는 것이고 예지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하는 뜻 가운데 대상인 사람들에 관심을 두어서 단순한 예지의 대상이 아닌 하나님의 실재적 기쁨의 대상인 것이다. 예정은 하나님이 사용하는 수단보다 더 관련되어서 하나님이 아신 자들을 확정된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다. 역사는 이미 존재했떤 목적을 지속적으로 확고하게 만든다. 절대적 권리의 입장에서 피조물은 자신의 창조자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고 반대자들의 논박에 대해서는 선택이 의롭고 정당하다는 사실로서 논박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권리에 호소해야 한다. 신약은 또한 영원한 선택에 대해서 개별적이고 인격적으로 이해한다. 신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특별한 개인들로서 택자들이라고 말한다. 이 선택의 목적은 지상적 삶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늘의 복됨에 있다.

 

기독교 밖에서도 예정과 자유의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따. 철학은 범신론적 결정론이나 이신론적 자유론에 이르렀고 유대인은 죄 상태의 인간도 자유의지가 있닫고 말한다. 이슬람은 하나님은 절대적 독단이고, 인간은 절대적 수동이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자유의지를 변호하여 예정을 논박하거나 전능이 아닌 정의를 하나님의 본질로 말하기도 했다. 초대 기독교는 이교의 숙명론과 영지주의 자연론에 대항하기 위해 도덕적 본성과 자유와 책임을 중시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정당하게 다루기 어려웠다. 펠라기우스는 원죄, 죽음 등과 같은 교리적 요소들을 경시했다. 그의 출발 전제는 하나님이 선하시기에 피조물도 본성상 선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본성은 사악한 것으로 바뀔 수 없으며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자 인간 안의 하나님의 참된 형상을 구성하는 자유의지에 해당된다. 선악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수여받았으나 원하고 실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능력이다. 자유의지가 상실될 수 없는 고귀한 본성이어서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의 본성은 손상되지 않는다. 이런 개념에서 아담의 타락이 그의 후손들에게 전혀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아담이 창조된 도덕적 상태에서 태어난 원죄가 없는 존재이며 죽음은 죄의 형벌이 아니고 보편적이고 자연적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이런 견해에서 은혜는 자유의지를 선용하는 사람들에게 신적 도움을 제공한다는 사실에만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예정은 공로에 대한 하나님의 예견과 상응하는 보상과 형벌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은혜나 구원을 위한 하나님 편의 예정은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펠라기우스에게 유아세례는 공로 없이 주어지는 것이었고 그는 이를 위해 비논리적인 것에 호소했다. 펠라기우스의 교리는 반펠라기우스주의에서 어느정도 온건하게 되었지만 인간은 죽은 것이 아니라 병든 것일 뿐이었다. 죄 있는 사람은 은혜를 받을 자격은 없지만 은혜를 받을 수는 있으며 은혜의 도움으로 인내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을 할 것이라고 미리 본 자들에게는 은혜를 보류하신다. 이것이 예정과 유기가 된다. 이는 주어진 은혜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관한 하나님의 예지에 달려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지와 예정을 구별한다. 예지가 예정보다 더 넓은 범위를 가져서 예정은 하나님 자신이 장차 행할 것을 예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예정은 공로나 가치가 아닌 순전히 은혜에 따른 것이며 믿음 때문이 아니라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예정의 유일한 원인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주권에 있다. 그래서 예정과 나란히 유기가 언급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예정은 구원으로서의 예정이고 은혜로의 예정이다. 이 수효는 확정되어 변하지 않으며 견인의 은사를 받아 이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끝까지 인내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의 예정과 유기의 이유는 신비이며 부당한 것이 아닌데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어떤 빚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정이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인 것처럼 유기는 공의의 행위다.

 

펠라기우스는 정죄를 받았지만 한편으로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죄로 인해 쇠약해지고 빈약해졌지만 모든 세례 교인들은 신실하게 노력한다면 세례 가운데 받은 은혜, 그리스도의 도움과 협력으로 구원에 필요한 것을 성취할 수 있으며 성취해야만 한다고 언급될 뿐이었다. 그리고 절대적 예정, 불가항력적 은혜, 은혜의 특이성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 결과 로마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바울에게서 멀어졌다. 트렌트 회의는 (1) 자유의지는 죄로 인해 그 능력이 미약해졌지만 사라지고 제거된 것이 아니며 여전히 자연적인 것들을 할 수 있다. (2) 원죄로 말미암아 추가된 선물들을 상실한 자연적 인간은 초자연적 의미의 선을 얻을 수 없다. 이를 위해 신적 은혜, 성령의 선행적 영감을 필요로 한다. (3) 이런 신적 은혜는 세례 가운데 주어지고 복음을 통해 객관적으로 부르고 성령의 조명으로 주관적으로 감동한다. 이 은혜는 공로 없이 주어지고 값없이 주어진 선행적 은혜다. (4) 이 은혜는 불가항력적이지 않고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 이 은혜를 수용할 때 일곱가지 준비들로 칭의를 위해 예비하면 적정공로에 의해서 받게 된다. (5) 칭의로 주입된 은혜는 저항을 받고 상실될 수 있고 은혜가 수용되고 보존된다면 사람으로 재량공로에 따라 영생을 얻게 한다. (6) 아우구스티누스의 절대적 예정론을 단호히 거부한다. 트렌트 공의회는 예정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선택을 가르치는 듯 하지만 한편으로는 은혜는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고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하며 유기를 거부한다. 로마교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선행적 의지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했고 그리스도 역시 모든 사람을 위해 구속했다고 가르쳤다. 이 선행적 의지는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아이들과 이방인들까지 포함한다. 예정은 처음부터 예지에 의존된다. 온전한 예정과 제한된 예정 적절한 예정과 부적절한 예정 사이의 구별이 점차 일반적으로 수용된다. 이런 구별은 은혜로의 예정과 영광으로의 예정이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은혜로의 예정에 대해 이것은 공로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특정한 순서를 따르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중간 지식으로 거듭 제공된 은혜를 선용할 것을 미리 알고 은혜를 나누어주기로 결정했고 적정공로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은혜를 얻으리라는 것을 보고 은혜를 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유기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파와 토마스주의자들은 나누어지는데 유기의 작정을 원죄와 원죄만을 뒤따르게 하여 유기는 동일한 집단 가운데서의 정당한 유기라고 주장하거나, 소극적 유기 즉 죄에 선행하는 절대적 주권적 작정을 거부하고 하나님은 선행적 의지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한다고 말하면서 적극적 후행적 유기 즉 어떤 사람의 죄와 불신앙을 미리 보고 영원히 징벌하는 하나님의 작정만을 수용하는 두 형식으로 나눠진 것이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한 고백에서 예정을 가르치고 변호한다. 루터의 예정은 철저한 죄의 부패와 인가의 무능에 기초한다. 그래서 루터는 갈수록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 숨어계신 하나님을 회피하고 은혜와 연관된 말씀과 성례의 시행을 고수하고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 뜻, 드러난 뜻을 점점 더 부가시킨다. 예정은 독자적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이차적 중요성을 지닐 뿐이었다. 일치신조는 노예의지를 가르쳤지만 절대적이고 특별한 예정은 언급하지 않고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보편적이고 엄숙한 뜻을 지적한다. 선택과 예정을 동일시하고 유기를 예지에 의존시킨다. 보편구원론에 대한 논쟁에서 루터파는 하나님은 선행적 의지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지만 결과적 의지로 자신이 믿음과 구원을 미리 보았던 자들의 구원만을 원한다고 말한다. 예정과 선택은 같고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하며 유기의 원인은 인간의 죄에 놓여 있다. 하지만 루터파는 점차 항변파에 기울게 된다. 도르트총회에서 항변파가 정되될 때 항변파 가운데 자기의 교리가 정죄되었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17세기 루터파는 항변파적 신앙고백에 근접하는데 하나님의 선행적 의지를 가르치면서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어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기에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제공된다는 것이다. 그 뒤에 결과를 의지를 가르치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끝까지 믿으라고 예지한 자들에게 구원을 실재적으로 주고, 은혜를 거부한 자들에게 멸망을 준비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정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작정이라고 이해되게 되었다.

 

루터파가 루터와 종교개혁 전체의 본래 입장을 점점 포기했던 것과 달리 개혁파는 그 입장을 충실히 고수했다. 츠빙글리는 인간론적 근거만이 아닌 하나님의 존재에서 도출한 신론적 근거로 예정을 가르친다. 칼빈은 인간의 노예 신분과 하나님의 선택에 관하여 고백하며 예정론은 칼빈에 의해 모든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수용된다. 그러나 이 교리의 표현 방식은 신학자들 사이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예정론의 악용을 두려워하여 후험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취급한 신학자들이 항상 있었다. 신앙과 회개로부터 선택을 결정하고 선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예정과 선택을 도출하는 것보다 이 선택을 위로와 확신을 위해 적용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하지만 이는 본질이나 원리상 차이가 아니며 모든 신학자들이 명백히 칼빈주의적 예정론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 교리를 조심스럽게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헛되게 낱낱이 캐묻는 것에 대해 경고했으며 초기 이 선택 교리를 신론이 아닌 구원론에서 취급했기에 선험적으로 선택에서 모든 구원의 유익들을 도출한 바울처럼 종합적 방법은 점차 분석적 방법을 대신했다. 신앙생활이 선택에 대한 고백이 일어나는 조건이더라도 선택의 사실은 모든 구원의 근원이다. 예정은 체계적 질서와 신학적 중요성으로 신론에서 취급되기를 요구했으며 모든 개혁파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예정은 하나님의 속성이거나 삼위일체 다음에 독립적 논제로 취급되는 순서가 되었다. 이런 차이는 근본적이거나 근본적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개혁파 신학자들이 선험적 순서를 따른 반면 루터파, 항변파, 로마교는 점차 예정을 구원론의 시작이나 중간에 취급하는 후험적 순서를 사용한다. 개혁파는 예정을 선험적 사변적 결정론적 신 개념에서 도출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인간론, 구원론적 의미만이 아니라 신론적 중요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예정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지 인간의 구원이 아니다. 이 순서 때문에 예정론이 생명력 없는 교리를 제공하는 것은 전혀 아니며 참되고 구원하는 믿음은 선택 교리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교리들을 고백하는데 필요하다. 오로지 종합적 방법만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종교적 관심을 충분하게 견지한다.

 

개혁파 내부에서도 타락전, 타락후 선택설의 차이가 생겨났다. 이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쟁에 뿌리를 두는 것이다. 인간 창조의 작정, 예지되었으니 예정된 것은 아닌 인간 타락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며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게 하며 그들 모두에게 구원 받기 충분한 은혜를 주려는 작정, 한편으로 예지된 신앙과 인내, 예지된 불신앙에 근거한 영생의 선택과 영벌의 운명에 결정한 작정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유기를 예정에 포함시키거나 예지를 수동적인 것이 아닌 능동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뜻은 결국 사건의 필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어 발생하는 것은 그의 뜻과 상관없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허용은 반드시 긍정적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유기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라는 타락 전 선택설의 사상은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타락과 관련해 하나님의 예지와 허용을 언급하는데 그래서 창조와 타락에 대한 허용의 작정이 첫 번째이며 그 다음 선택과 유기의 작정이 뒤따른다. 선택과 유기 모두가 타락한 인류를 전제한다. 따라서 작정의 순서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해는 일반적으로 타락 후 선택설이다. 그는 유기를 하나님의 공의로 여긴다. 하지만 선택과 유기의 작정을 더 앞으로 놓지도 않는다. 원죄만이 선택과 유기의 작정 앞에 선행한다. 원죄는 유기에 대한 충분한 근거이며 자범죄는 형벌의 정도를 정하는데 있어 고려되더라도 유기의 작정에서는 고려되지 않는다. 그러나 원죄가 유기의 근거라도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궁극적이고 가장 큰 원인은 아니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유기에 대한 질문은 하나님의 뜻 밖에는 다른 답이 없다. 유기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죄 가운데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행하시며 죄의 섭리자로서 죄가 있어야 하는 것을 좋게 여겼고 죄를 죄로 벌하셨지만 유기를 소극적으로 무과하고 내버려두는 것으로 제시하여 예정에 속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예정을 선택과 동일시하여 선택과 유기 둘 다를 섭리 아래 둔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예정, 선택은 항상 영광으로의 예정이며 은혜로의 예정을 수반한다. 따라서 선택은 예지된 신앙이나 예지된 선행 때문에 발생하지 않고 그리스도 때문에 발생하는 것도 아니라 궁극적 목적을 위한 선택이자 실현을 위한 방편들의 선택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추종자들은 이중예정에 나아간다. 사망으로의 예정이 영광으로의 예정과 나란히 서게 되었고 이는 소극적 유기와 적극적 유기로 구별되었다. 소극적 유기는 타락에 선행하며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며 이는 응보 때문이 아니라 버려움의 원인이다. 이러한 타락적 선택설의 유기는 전적으로 소극적으로 일부의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고 그 사람들의 타락을 허락하여 그 타락 후 영벌의 운명에 처하게 하는 하나님의 작정으로 이해된다. 본질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은 이를 가르쳤다. 종교개혁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의 가르침에서 수정한 것은 구원의 확신 교리 외에 부차적인 것으로 문제의 본질은 손대지 않았다. 선택은 예정된 공로 때문에 발생한 게 아니라 신앙와 선행의 원천이며 영광으로의 예정은 반드시 은혜로의 예정을 수반하여 소극적 유기는 하나님의 공의와 행위로 해석될 수 없고 죄에 선행하는 주권적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소극적 유기는 결과적으로 죄를 허용하고 어떤 이들을 타락에 내버려두는 작정을 포함하고 적극적 유기는 이 죄와 연관된다. 하지만 예지와 허용의 개념들은 순전히 피동적으로 이해될 수 없고 그럴 경우 최소한의 해결도 제공하지 못하기에 소극적 유기와 적극적 유기의 구별은 가치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선택과 유기의 작정은 타락, ,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에 관한 작정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로 여겨져야 했다. 칼빈은 타락후 선택설의 방식으로 추론하면서 구원과 저주의 직접적 원인들을 주목한다. 유기된 자는 자기 징벌의 원인을 하나님의 작정엥서 찾지 말고, 자기 자신의 잘못인 자기 본성의 부패함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은 저주 받은 후손 가운데 선택하고 유기하길 원한다는 것에 대해 칼빈은 신앙의 훈련에 더 적합하다는 신학적이고 더 적합하고 교육적이라고 말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칼빈은 죄가 유기의 가까운 원인일 수 있지만 궁극적 원인은 아니기에 예지와 허용은 해결을 제공하지 못하여서 하나님은 인간을 타락을 미리 알고서 그것을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하나님은 자원하여 타락을 허용하고 하나님이 이를 좋게 여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과 모든 악은 하나님이 예지했으며 하나님이 원하고 결정하신 것이다. 왜 하나님이 타락을 원했는지에 대한 원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서 칼빈은 타락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감추인 계획이 있따는 피기우스의 결론을 부인하지는 않았으며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의 견해가 그에게 번갈아 가며 나타나게 된다. 타락전 선택설을 주장하는 후기 신학자들도 마찬가지로 타락 후 선택설을 대신하는 타락 전 선택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 후 선택설과 더불어 자신들의 견해의 정당성을 변호했다. 타락 전 선택설에 의하면 모든 가능성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 단순한 지성의 지식이 모든 작정에 선행한다. 이는 첫 번째 작정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심을 확정한다. 두 번째 작정에서 비탄과 비참에 빠진 인류가 존재하는 것이 확정되고 세 번째 작정에서 사람이 창조되고 그 사람은 유효한 허용으로 타락하여 모든 후손이 그에 이끌리는 것이 되고 네 번째 마지막 작정에서 하나님은 그의 자비가 선택된 자들에게 중보자의 제공, 신앙의 은사, 마지막까지의 보존을 통해 나타나는지 한편으로 유기된 자들에게 나타나게 되는지를 지시하는 것이 된다. 이런 작정의 순서에서 선택과 유기는 신앙과 불신앙 갱신과 강퍅함에 선행할 뿐만 아니라 타락과 창조에도 선행한다. 하지만 타락전 선택설의 순서에서 교회의 선택은 창조와 타락의 작정을 통해 그리스도의 선택과 분리되고 그리스도와 결별된다. 콤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택자들이 창조와 타락의 작정 이전에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선택되었다고 가르쳐서 이 연합은 내적이고 깰 수 없어서 작정된 대로 택자들이 타락할 때 교회의 머리로 선택된 그리스도는 화해의 중보자로 선택되기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선택과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의 선택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교회는 타락전 선택설의 견해를 반대했기에 어떤 개혁주의 고백에서도 타락전 선택설이 등장하지 않는다. 도르트회의에서 두 진영이 공존했기에 그 표현에서 모두가 만족할만한 것을 사용하길 바랬기도 했지만 전체적인 판단은 타락후 선택설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타락전 선택설을 의도적으로 정죄하지 않았다만 칼빈, 피스카토르, 퍼킨스, 홈미우스, 보허만 같은 신학자들은 혹톡한 표현들을 사용했다. 총회는 혹독한 표현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는 것에 그쳤다. 따라서 타락전 선택설은 고백서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정죄되지도 않았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도 이 문제를 의도적으로 결정하거나 어느 편도 선택하지 않았다. 결국 타락후 선택설은 공식적으로 고백서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온건한 형태의 예정론 역시 반대되었는데 소시누스파는 예정 전체를 부인했고 하나님의 전지를 인간의 자유의지에 희생시키기까지 했다. 아르미니우스는 예정을 선행적 은혜로 말미암아 믿고 결과적 은혜로 인해 인내할 하나님의 예지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지만 믿지 않거나 인내하지 않을 다른 이들은 징벌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이 은혜는 항상 저항받을 수 있는 것이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봎녀적 제공에도 불구하고 누가 믿을지 말지에 대한 것에서 확정된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반대는 갈수록 더욱 사람에게 해당하게 되었다. 항변파는 합리주의의 길을 마련했다. 이들은 소뮈르 학파에 의해서 지지를 받았따. 소뮈루의 아미랄두스는 이중 작정을 가르쳤는데 먼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구별없이 구원받도록 작정했으나 아무도 스스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예지를 통해 알고서 보편적으로 조건적인 첫 번째 작정에 어떤 이들에게 믿음의 은혜를 주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특별하고 절대적인 두 번째 작정에 덧붙인다. 첫 번째 보편적 작정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면 두 번째 작정은 전적으로 무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입장은 스위스 교회 합의서에서 정죄되었지만 유효한 은혜를 부인하게 되거나 모든 개혁파 교회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적 경향은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19세기의 자연, 역사, 인간에 대한 이해는 이신론적 펠라기우스의 견지를 불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범신론, 유물론보다 자연적 경향을 가진 결정론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결정론과 예정론은 원리적 차이가 있는데 범신론과 유물론에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여지가 전혀 없이 무의식적 운명이 있다. 하지만 교회의 예정론을 이러한 결정론적 의미로 이해하고 해석한다. 슐라이어마허도 이런 관점과 일치하여 시간의 관점에서 선택과 유기를 구별하기 때문이며 그에게 엄밀한 의미에서 유기된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와 후기의 모든 사상들은 현대신학에서 재현되어서 첫째로 영원은 시간 이전의 시간이 아니며 하나님의 작정은 오래전 준비되고 마련된 것으로 여겨질 수 없으며 선택과 유기의 예정 전체는 시간 속의 하나님의 내재적이고 영원한 행위라고 하면서 예정론 전체를 회피하려고 하는 작정이 역사 사실 자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작정의 시행을 역사적으로 수행한다. 한 민족과 한 사람의 선택은 다른 사람들을 희생하여 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모든 사람이 첫 번째일 수는 없다. 유기된 자는 나중에 내세에서라도 참된 회심에 이르게 된다. 이런 입장은 모두 영원에 대한 결정이 인간의 뜻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설명하려 하는데 교육학적 지도, 세례, 설교 등의 선행하는 은혜, 자연적 능력 사용과 말씀연구 등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시간 속에 존재하고 발생할 모든 것에 대한 영원한 작정으로 이해된다. 모든 존재와 발생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의 실현이자 그 근거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하나님의 경륜의 실재에 대한 의견 차이는 있을 수 없다. 오직 범신론만이 이에 반론을 제기한다. 하지만 범신론도 로고스를 인정할 경우 하나님의 의지도 수용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만일 피조계가 하나님의 지성과 지혜로 기인하지 않았다면 피조계안에 생각은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저성의 행위인 동시에 하나님의 의지의 행위이다. 성경은 경륜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작정과 수행은 구별된다. 하나님의 작정은 내적인 사역인 신적 존재 안의 영원한 시간 밖의 사역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내재적 사역으로 오로지 하나님 자신에 의해 결정되고 시간 속에서의 하나님의 사역과 구별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의 내용과 대상은 시간 속에 존재하고 발생하게 되는 모든 것이다. 즉 세계 관념과 정신적 세계다. 세계 관념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세계 의식이 하나님의 자기 의식에 대해 갖는 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갖는다. 하나님의 자기 지식은 그의 능력이나 미덕들 중 드러나지 않는 것도 있는 것처럼 피조계에 다 드러나지 않지만 세상은 하나님의 모든 미덕들을 피조적 방식으로 계시할 수 있는 적합한 도구이다. 세계 자체에 관련한 하나님의 경륜은 유효적 원인이자 예시적 원인이며 명백히 하나님의 작정과 의지를 통해 결과로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만사의 모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은 단수의 작정으로 여겨져야 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자기 착상을 점차적으로 수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기 경륜의 단일한 생각을 시간 속에서 자기 피조물에게 펼쳐 보이신다. 그리고 피조물들 가운데 피조적 방식으로 모든 미덕들을 길이와 넓이 깊이와 높이의 형태로 계시한다. 하지만 인간적 방식으로 하나님의 많은 작정들이라고 복수로 말할 수 있다. 불가분의 연관이 견지되고 인정된다면 말이다.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작정이 구별될 수 있다. 이는 섭리로서 명칭되었다. 섭리는 미리 내다봄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작정들로 여겨지고 의지에서 논의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자신의 확정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영원부터 만물을 정돈한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의 행위로 정의된다. 그래서 초기 많은 학자들에게 하나님의 작정으로 이해되었다.섭리는 하나님이 계획이나 작정을 따라 시간 속에서 만물을 보존 통치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섭리는 보존과 통치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사용되었다. 예정은 그 자체로 격리된 것이 아니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과 연관되었고 작정의 특별한 적용일 뿐이다. 섭리란 마치 예정의 부모와 같다는 츠빙글리의 말과 같이 영원한 운명에 관한 예정은 섭리 그 자체이다. 이를 성경적 용어를 따라 경륜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하나님의 경륜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세상 전체와 관련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을 비이성적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한 대부분 일치된 견해를 가진다. 하지만 이성적 피조물들을 위해 특별한 의미로 수용될 때에도 상당한 의견 일치가 있다. 근본적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피조물이 취할 태도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기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경륜이 도덕적 세계로 확대되자 반론이 제기되었다. 모든 형태의 펠라기우스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도덕적 세계를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이다. 이 시도는 거부되어야 하는데 첫째로 이러한 시도는 성경과 모순된다. 둘째로 그러한 분리는 사실상 불가능해서 세계 관념은 유기적 단일체로 자연과 도덕은 매순간 긴밀히 연관되고 서로를 포함하는 것으로 구분은 있으나 분리는 없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주의적 이원론은 하나님의 경륜이 아닌 우연과 독단으로 넘겨주는 꼴이 되게 했으며 하나님의 경륜과 의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식조차 세상으로부터 배제되게 하였다. 펠라기우스주의는 결국 하나님을 세상으로부터 내쫓아 무신론과 이신론에 이르게 하며 인간의 독단을 등극시킨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세상은 그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통해 피조물의 독립성과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고 유지하는 방향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펠라기우스주의가 일반섭리와 특별섭리를 모두 반대한 것은 아니고 어느정도 인정하기는 하지만 이성적 피조물들의 영원한 상태인 예정의 특별한 작정이 논의될 때에는 반대하며 등장하게 된다. 자연적 세계와 도덕적 세계가 분리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이성적 피조물들의 일시적 상태와 영원한 상태 사이의 경계선을 지적할 수 없음에도 펠라기우스주의는 예정을 예지로 대치하고 예정을 하나님의 작정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에 의해서, 종교적 경험과 신학적 사유에 의해 부정된다. 첫째로 성경은 신앙과 불신앙, 구원과 멸망이 하나님의 단순한 예지 대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와 작정의 대상이기도 함을 분명히 가르친다. 예지는 수동적으로 미리 아는 것이 아니라 예지 대상과의 특정한 관계를 형성하는 하나님의 자기 결정이다. 예지는 계획이나 목적, 예정, 선택과 매우 밀접히 연관되는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의 행위다. 둘째로 신앙은 자연인에게서 나올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고 선택에 선행이 아닌 이를 전제하고 그 열매의 결과인 것임을 성경이 가르친다는 점이다. 셋째는 구원은 객관적으로 주관적으로 모두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모든 종교적 기독교적 경험이 만장일치로 증거한다. 넷째로 하나님의 예지의 성격은 그 대상을 미리 절대적으로 확실히 아는 것이며, 예지는 예정과 같은 것이다. 예지의 대상이 전적으로 우연적이고 자의적이라면 예지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불변성이 부정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한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회의 고백은 모두 구원받을 자들의 수효는 형식적으로 실질적으로 양적으로 질적으로 논쟁의 여지 없이 확정되어 있다. 하지만 예지는 섭리와 예정과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은 누가 믿을지 미리 알고, 그 사실을 영원히 변함 없이 안다. 예지는 예정을 포함한다. 만약 하나님은 우연한 것을 우연으로 미리 알았다고 말한다면 자유를 예정과 잘 조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우연하고 자유로운 것이 확실하고 틀림없이 영원부터 알려질 수 있었는가이다. 그럴 수 있다면 예지 교리 전체는 필요 없게 되고 세상 역사는 전적으로 우연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회는 이런 결론을 수용하지 않았다.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와 예지를 고백한다. 모든 기독교회와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영원부터 아는 것처럼 모든 것이 존재하고 발생하며 결말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들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개혁파는 성경을 손에 들고 이차적 원인에 머무르지 않고 일차적 원인인 하나님의 뜻으로 올라가 거기서 사고와 삶의 안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주의가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은 인류의 삶과 역사의 매 순간 현실과 부딪히게 되는 것이며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피상적인 겉치레가 된다.

 

펠라기우스주의가 일반적으로 견지될 수 없다는 것이 이미 드러났지만 예정론의 모든 요점들은 다시 공격했다. 첫째로 펠라기우스주의는 타락한 모든 인간에게 구원에 충분한 은혜를 제공하는 하나님의 선행적이고 조건적인 의지 또는 작정을 수용한다. 그러나 이 작정은 현실과 곧바로 상충된다. 사실상 인류 역사 가운데 은혜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것이었다. 그래서 펠라기우스주의는 자연법 가운데 구원의 길을 발견했다. 로마교는 은혜가 자연 본성의 빛과 능력을 선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고 믿었고, 옛 루터파는 아담, 노아, 사도시대에 보편적이었지만 인간의 죄로 인해 다시금 제한되었다고 지적했다. 현대신학자들은 은혜의 복음이 사후에 모든 결핍적 불신자들에게도 여전히 선포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비성경적이며 은혜가 특정하다는 사실을 무효화시킬 수 없다. 그렇지 않고 확실하다면 왜 어떤 사람은 기독교 국가에 태어나고 아닌지에 대해서 묻게 되는데 이런 질문에 대해서 펠라기우스파는 이러한 첫 번째 은혜로의 예정에 있어서도 인간의 자연적 공로들과 인간 자신의 자연적 능력의 사용을 고려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이들은 그런 공로가 없이 어떤 아이들으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는다는 점에서 자연적 의지에서 나온 공로에 대한 예지에 근거한 첫 번째 은혜로의 예정을 단호히 논박한다. 로마교는 그래서 선행적 은혜를 견지하면서 첫 번째 은혜를 과분하다고 말했다. 첫 번째 작정에서 예정은 오로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여겨져야 한다. 둘째로 펠라기우스주의는 유효한 은혜로의 예정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려 한다. 복음을 들어도 모두 참되게 수용하는 것은 아닌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펠라기우스파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은혜는 그 자체로 충분하고 사람의 의지가 그 은혜가 유효할것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상 은혜의 보편적 제공에 대한 작정 이후 더 이상 어떤 작정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모든 기독교 신앙고백은 펠라기우스주의적 입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모두 유효한 은혜, 신앙의 선물을 가르치고 예정의 두 번째 작정을 구별한다. 오로지 제기된 질문은 이 유효한 은혜 즉 참된 신앙이 누구에게 주어졌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 혼란이 있으나 신앙의 은혜는 첫 번째 은혜, 즉 복음의 설교, 성령의 조명 등을 잘 사용하고 자신 안에 있는 능력의 범위 내에서 해야 할 것을 행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교리가 로마교, 루터파, 항변파 등에서 발생했다. 이것이 재량공로는 아니더라도 적정공로가 된다. 후속적 은사들로서의 예정은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 또는 공평한 작정이다. 하나님이 최선을 다한 자에게 신앙과 사죄를 베푸는 것은 공평한 일이지만 이는 역시 성경과 현실 둘 다에 모순된다. 인간은 너는 해야만 한다로부터 너는 할 수 있다를 결코 도출할 수 없다. 이 능력에 대해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된 충분한 은혜를 지지하는 자들은 답하지 못한다. 성경은 인간은 전적으로 원하지도 않고 원할 수도 없으며, 신앙은 은혜의 선물이고, 구원은 주관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임을 말한다. 자연과 은혜가 서로 연관되기도 하지만 둘 사이에는 본질적인 구별이 있어서 점차적인 전이는 없다. 적정공로는 성경에서도 현실에도 언급되지 않고 그 역전이 일어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셋째로 펠라기우스주의는 영광으로의 예정에서 자기 입장을 고수하려고 한다. 진리를 믿어 죄 용서를 받더라도 그가 보존하여 구원을 얻을지 전적으로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세 번째 작정이 필요한데 신앙 안에서 끝까지 인내할 것이라는 하나님이 영원부터 미리 보았던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는 작정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가 제시되는데 하나님은 수동적으로 지켜보고 대기하는 자세를 취하고 인간이 결정하고 자유재량을 가지며 신자들에도 마지막 결과는 불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신실함을 가르치는 성경과 위배된다. 논리적인 순수 펠라기우스주의는 모든 기독교와 종교를 완전히 전복시킨다. 예정은 실질적으로 기독교 전체가 수용하는 교리이다.

 

그러나 예정이라는 용어는 넓은 의미로도 좁은 의미로도 다양하게 쓰였다. 펠라기우스주의에게 예정은 작정이며 불신앙은 예정에 선행한다. 여기서 예정은 가장 좁은 의미이다. 그래서 이 예정은 불확실하기에 예정이라는 명칭이 어울리지 않는다.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사이의 차이는 예정을 넓게 보느냐 좁게 보느냐의 차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이중적으로 제한하는데 예정의 작정을 창조의 의미로 취하여 예정을 선택과 동일시하고 유기의 작정을 예지라는 명칭으로 지시하기 선호한다. 예정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선을 말하는 것으로 예지는 인간이 행하는 악을 가리킨다. 이런 용례는 스콜라주의, 로마교, 루터파의 고백서에 표현된다. 개혁파 가운데 타락후 선택설자들은 동일하게 창조와 타락의 작정을 선택과 유기의 작정에 선행시킨다. 그러나 타락 이후의 이중 예정을 반대하지 않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예정을 선택에 제한하고 유기는 예정과 다른 별도의 명칭 아래 취급하는 것이 낫다고 한다. 유기가 하나님의 의지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면 명칭상 차이일 뿐 내용 자체의 차이는 아니다. 타락후 선택설 입장에서 특징은 창조와 타락의 작정이 선택과 유기의 작정에 선행하는 것이며 예정을 매우 확대시켜서 창조와 타락을 궁극적 목적, 이성적 피조물들의 영원한 상태에 이르는 방편들로 포함시킨다.

이 두 견해,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은 지속적으로 동등하게 인정되었다. 두 견해 모두 개혁파적 견해이다. 두 견해 모두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닌 반면 죄의 원인은 인간의 의지에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전능자로서 타락을 결정할 수 있고 죄 가운데 죄를 통하여 자신의 통치를 행사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운 분인 반면 인간은 자신의 잘못으로 죄에 빠져 범죄한다. 칼빈은 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으로 타락전 선택설에 이른다. 그는 철학적 사변이 아닌 말씀에 따른 진리를 가르친다. 타락후 선택설 지지자들은 하나님은 단순한 예지를 통해 타락과 죄 그리고 많은 사람의 영원한 형벌을 미리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작정 가운데 포함시키고 결정한 것이다. 따라서 작정 자체와 내용에 대해 전혀 차이가 없다. 두 견해 모두 자유의지를 부인하고 신앙이 선택의 원인이며 죄가 유기의 원인임을 거부하면서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한다. 단지 차이는 작정의 순서에 대한 것이다. 타락후 선택설은 인과적 순서를 타락전 선택설은 목적론적 순서를 선호한 것이다. 전자는 예정을 좁은 의미로, 후자는 예정을 넓은 의미로 포함시킨다. 전자는 작정의 다수성과 모든 작정의 독자성을 후자는 작정의 통일성과 최종적 작정에 종속됨을 강조한다. 각각의 견해가 특정 그룹의 구절들의 지지를 받으나 다른 그룹의 구절들을 충분히 정당히 취급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 두 견해가 일방적인 것임을 증명한다. 타락후 선택설은 역사적이고 인과적 순서에서 실재적 요구를 고려한다는 장점이 있으나 유기가 선택처럼 하나님의 공의로운 행위로 이해될 수 없기에 약점을 가진다. 신앙과 선행은 선택의 원인이 아니고 죄 역시 유기의 원인이 아니게 된다. 유기의 원인이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 기뻐하는 뜻에 있어서 유기의 작정은 죄 허용의 작정에 선행한다. 이 허용에 대한 질문을 말할 수 없으며 반드시 타락을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작정에 포함시켜 미리 결정된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하지만 타락을 왜 유효한 허용으로 작정했는가에 대해서는 타락전 선택설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유기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행위로 설명할 수 없는데 죄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타락후 선택설은 역으로 추론해서 다시 타락전 선택설에 이른다. 그렇지 않으면 타락후 선택설은 예지를 주장하게 될 것이다.

타락후 선택설이 유기의 작정을 타락 후에 두는데 어디에 두느냐에 대한 것은 아르미니우스에 의해 원죄의 발생 이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유기된 자들의 자범죄 이후에 놓여지는 것이라고 주장되었다. 그는 예지된 불신앙도 죄도 유기의 작정 아래 포함시킽다. 그러나 개혁파는 유기는 단순한 예지인 인간에 의존하고 그것이 최종적인 원인이 된다. 그래서 임의적으로 유기의 작정을 타락 직후에 두었다. 그렇기에 타락후 선택설은 모든 자범죄와 관련해 타락전 선택설과 완전히 동일한 내용을 가르치고 유기는 원죄에 선행하지도 않더라도 모든 다른 죄에 선행한다. 타락전 선택설은 하나님을 정당화시키려는 헛된 시도들을 버리고 유기와 선택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근거를 둔다. 타락전 선택설은 하나님의 모든 미덕들의 계시가 하나님의 모든 행하심의 최종 목적이며 구원과 멸망도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미덕들을 피조적 방식으로 계시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모든 구원 가운데 자신의 영광을 계시할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오로지 유기된 자들의 영원한 상태에서 자신의 공의를 택자들의 영원한 상태에서 자신의 자비를 계시한다는 것도 올바른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도 그의 공의가 계시되고 멸망의 자리에서도 형벌의 정도가 있고 어떤 식의 자비가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궁극적 목적은 자신의 영광이자 그의 영광이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결정 되었고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창조되고 타락할 사람들만 대상으로 삼는 선택과 유기는 실재적인 작정이 아닌 단지 임시적인 작정일 뿐이다. 타락전 선택설은 반드시 타락후 선택설의 순서로 진전한다. 먼저 가능한 사람들이 선택되고 유기된 후에 가능한 사람들은 실재적으로 창조하고 타락하게 하는 작정이 뒤따르며 다시금 그것이 더 이상 가능한 생각으로 개념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생각으로 작정 안에서 사람들을 부분적으로 선택하고 유기하는 작정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타락전 선택설의 논리적 순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나님의 의식 가운데 장차 존재하지 않을 가능한 사람들은 무한히 많으며 선택과 유기의 작정은 비실체에 대한 대상으로 한다. 타락전 선택설은 영원한 형벌을 영원한 구원처럼 동일한 방식과 의미에서 하나님 의지의 대상으로 삼고 영원한 형벌에 이르는 죄를 그리스도의 구속이 영원한 수단인 것처럼 동일한 방식과 의미에서 수단으로 삼는다.

죄와 형벌이 하나님에 의해 의도되었다고 결정되는 사실에 대해서 개혁파는 차이는 없으며 하나님은 왜 모든 것을 미리 알았어도 막지 았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하나님이 어떤 것을 예지하고 허용한다면 그것을 기꺼이 하는 것이다. 이는 유효한 허용이며 하나님의 의지의 행동이다. 이 허용은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라는 비난을 모면할 효력이 없다. 하지만 비록 죄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존재할 수는 있으나 그 상반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견 차이가 없다. 죄는 하나님 창조 세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전적인 퇴보이다. 그리고 허용, 예지, 간과, 유기의 용어를 거부하더라도 그보다 좋은 용어를 제시하지도 못한다.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고 인간은 파멸되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고 유기 가운데서 하나님의 공의의 엄정함은 드러나고 유기는 죄의 원인이 아니라 우연적 원인, 원리와 상관없음이며 죄는 유기의 유효한 원인이 아니라 충분한 원인이다. 그래서 타락전 선탤설은 비논리적으로 잘못된 발판에서 시작ㄷ하지만 다시 타락후 선택설로 되돌아온다. 타락전 선택론자들은 모두 유기를 전적으로 제한 없이 죄 앞에 선행시키기를 주저한다. 토마스주의자들은 소극적 유기와 적극적 유기를 구분한다. 전자는 창조와 타락에 선행하고 후자는 그 뒤를 따른다. 모든 학자들은 유기의 작정이 실행인 시간에서 발생하고 죄가 원인으로 작용하는 작정 실행인 시간 속에서 발생하고 죄가 원인으로 작용하는 파멸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타락전 선택설도 타락후 선택설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성경의 다방면을 정당히 취급하지 못해서 두 견해의 일방적 성격으로만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첫째로 만물의 궁극적 목적을 택자들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의 계시와 유기된 자들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의 계시로 정의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진실로 하나님의 영광과 완전이 드러나는 것이 모든 것의 최종 목적이다. 그러나 구원과 저주의 이중적 상태는 최종 목적에 포함되지 않고 목적을 위한 수단인 것이다. 이 이중적 상태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최종 목적과 더불어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증명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이 외적 사역들을 행할 때 하나님은 이로써 자기 이름의 영광 외에 다른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른 방식이 아닌 이런 방식으로만 영광을 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것으로 이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공의는 오로지 유기된 자들의 저주의 상태에서 계시되고 하나님의 자비는 오로지 택자들의 구원에 계시되는 것도 참되 것이 아니며 하늘에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이 피치고 지옥에서도 하나님의 어떤 자비와 선하심이 있는 것이다.

둘째로 유기된 자들의 저주를 예정의 목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죄는 하나님의 단순한 예지와 허용에서 비롯된 것일 수 없으며 타락과 죄 영원한 형벌은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포함되었고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특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고 은혜와 구원 가운데서 즐거워하는 것과 다르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죄를 사용할 때 그는 자신의 전능응로 사용하시며 이는 죄의 본성과는 상반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악인을 징벌할 때 그는 그들의 고통 자체 가운데 기뻐하지 않으며 그 징벌 가운데서 자기 미덕들의 승리를 기리며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포괄하고 불변하는 하나님의 경륜 관점에서 이중 예정을 말하는 데 전혀 반대가 없더라도 다른 한편으로 선택과 예정은 유기의 예정과 동일한 성격이 아니며 예정은 목적의 확립과 그 목적을 위한 수단들의 배치인 것이다. 영원한 저주는 인간의 목적이 아닌 최후이며 유기의 형태는 본래 예정으로서 확립될 수 없고 목적으로 정하는 것과 저주로 정하는 것은 서로 상충하는 것이다. 목적으로 정하는 것과 저주로 정하는 것은 서로 상충하며 모든 목적은 성격상 최선의 것이며 사물의 완전인 반면에 저주는 극단적인 악과 최대의 불완전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저주로 예정했다고 언급되는 것은 부적절하며 계획이나 목적 예지 예정과 같은 용어들은 오로지 영광으로의 예정에만 사용되는 것이다.

셋째로 영원한 사마응로의 예정을 영원한 생명으로의 예정과 동등하게 만들고 전자를 후자와 마찬가지로 최종적 목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것은 선택의 대상이 유기의 대상처럼 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새로운 머리인 그리스도 아래 있는 인류이며 그래서 인류로 말미암아 소수의 개인들만이 아닌 인류 자체가 전 우주와 더불어 구원될 것이ᅟᅵᆨ 때문이다. 이러한 인류와 세상의 구원 가운데 단지 하나님의 몇몇 미덕들만 계시되어 이러한 구원과 나란히 그의 공의를 계시하기 위해 영원한 파멸이 필요한 거싱 아니라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모든 미덕들과 완전인 그의 공의와 은혜 주권과 자비가 드러난다. 따라서 영광의 상태는 비록 그의 영광에 종속되는 목적이더라도 하나님 자신의 창조 가운데 의도한 참되고 직접적인 목적인 것이다.

넷째로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은 최종 목적에 선행하는 모든 것을 수단으로 삼아 상호 종속적 관계 가운데 놓음으로 오류를 범하는데 수단들은 당연히 최종 목적에 종속죄지만 그렇기에 서로에게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창조는 타락에게 타락은 은혜와 인내에게 은혜와 인내는 다시 구원과 저주의 단순한 수단이 아니다. 작정의 내용들은 풍성하며 세계 역사는 그 작정들의 전개인 것이다. 후속하는 것이 성취될 때 선행하는 것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상호 간에 종속될 뿐만 아니라 대등하게 연관되어서 창조는 단지 타락이 유입되도록 발생하는 것만이 아니라 영광의 상태에서도 계속 존재하게 될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타락은 비참한 피조물이 존재하도록 하는 것만이 아닌 산출된 모든 결과들과 함께 의미를 가진다. 그리스도는 속죄의 중보자만이 아닌 교회의 머리이다. 세계 역사 전체는 마지막이 이를 때 사라지는 수단만이 아니라 계속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를 남긴다. 선택과 유기 자체는 지상에서처럼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 아니라 유기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 불신자에 많으며 선택으로 발생하지 않은 것이 신자에게도 많다. 한편으로는 선택과 유기 둘다는 죄를 전제하는 자비와 공의의 행위이며 한편으로는 신적인 주권의 행위이기도 하다. 아담은 타락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한 모형이더라도 성육신은 언제나 성경에서 인류의 타락 위에 수립되었고 성경은 유기가 선택과 동등하고 형벌이 구원처럼 하나님에 의해 목적으로 의도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영원한 죽음은 미래에 대한 묘사 가운데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마지막은 장차 하나님 나라의 승리로서 하나님이 장차 만물 가운데 모든 것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자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만물은 교회에 복종하며 유기는 전적으로 선택에 종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예정에 대한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모두 충만하고 풍성한 성경의 진리를 포함하지 못한다. 타락전 선택설이 지닌 올바른 요소들은 모든 작정들이 합해져 통일성을 이루고 모든 것이 종속되어 사용되는 최종 목적이 있으며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을 하나님이 생각하지 못했거나 예기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고 결정했으며 창조는 이미 곧바로 재창조를 의도하고 타락 이전의 아담에서 이미 그리스도가 고려되었다는 것이다. 타락후 선택설이 지닌 올바른 요소들은 작정들이 단일하더라도 그 대상들에 대해 구분되고 그 작정들 가운데 단지 목적론적 순서만이 아닌 인과론적 순서도 드러나고 창조와 타락은 단지 최종 목적을 위한 수단들로만 여겨질 수 없고 죄는 일차적으로 창조의 파괴였고 하나님은 단지 그 자체만을 원한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만물의 최종 목적에 대한 표현 즉 하나님이 유기자들 가운데 자신의 공의를 계시하고 택자들 가운데 자신의 자비를 계시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단순하고 소박한 것으로 장차 하늘의 상태는 형용할 수 없이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인류 회복된 피조계 죄로 말미암아 더는 장애를 받지 않는 지속적으로 전진하는 발전을 기대하는 것이며 창조와 타락 아담과 그리스도 자연과 은헤 신앙과 불신앙 선택과 유기 모든 것은 함께 그리고 각자가 나름대로 이것에 협력하여 서로 나란히 협력하는 것이다. 현재의 세상은 그 역사와 함께 이미 그 자체로 하나님의 미덕들에 대한 지속적 계시이며 현재 세상은 장차 다가올 더 높고 풍성한 계시의 수단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며 미래 세대에서도 계속 영향을 미치고 진전하며 새로운 인류에게 하나님께 경배와 영광을 돌리도록 재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정들 가운데 인과적 순서와 목적론적 순서만이 아니라 유기적 순서도 있는데 인간의 한계로서 단지 하나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으로 결국 인과적 세계관과 인생관의 옹호자들은 목적론적 세계관과 인생관의 지지자들은 매 순간 충돌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체를 내려다 보시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식에서 영원히 현존하여 하나님의 경륜은 단 하나의 단일 개념이며 모든 특별한 작정이 갖는 관게는 역사적 사실들이 후험적으로 현재 우리에게 부분적으로 드러나고 장차 언젠가는 완전히 드러나는 관계와 동일한 것이다.

이 관계는 풍성하고 복잡해서 타락전 선택설이나 타락후 선택설의 하나로 표현할 수 없으며 인과적인 관계인 동시에 목적론적 관계로서 선행하는 것이 후속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고 미래의 것이 과거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며 풍성하고 다면적인 상호 작용이 있는 것이다. 이성적 피조물들의 영원한 상태와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들을 미리 정한다는 일반적 의미에서 예정이란 용어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것을 미리 정한다는 일반적 의미에서 예정이란 용어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자기 안에 담고 있는 하나님의 단일한 작정이 아니다. 예정은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중요하지만 경륜 자체는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주된 개념으로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 경륜은 과거 현재 미래의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단일한 뜻이며 하지만 예정은 이성적 피조물들의 영원한 상태와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들을 취급하면서도 세상에 존재하고 발생하는 모든 것을 그 수단들 아래에 포함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섭리는 예정과 분리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작정으로서 위에서 별도로 논의된다. 일반은총은 하나님의 경륜 교리에서 정당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과 이에 상응하는 세계 역사는 타락전 선택설이나 타락후 선택설이 하는 것처럼 앞뒤를 가진 단일 직선, 원이과 결과, 수단과 목적으로만 묘사되어서는 안되며 이는 심오한 모든 존재의 근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물들이 나란히 병존하고 서로 협력하는 전체인 것이다. 유기체 안에서 모든 지체들이 서로 연관되고 호혜적으로 서로 규정하듯이 세상은 모든 부분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된 하나님의 예술 작품으로 세상의 길이와 넓이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은 영원한 이데아인 것이다.

 

이러한 논의로부터 유기가 어떤 의미에서 예정 가운데 고려해야 하는지 분명해졌으며 하나님의 경륜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주의한다면, 이중 예정을 충분히 말할 수 있다. , 불신앙, 죽음, 영원한 형벌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속하며 사람들이 예정보다 예지와 허용을 선호하여 언급하는 것은 유익이 없으며 성경은 단호히 예지와 허용을 증거한다. 성경은 유기를 영원한 작정으로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맞는 말이며 하지만 성경은 더더욱 유기를 역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로 표현한다. 하나님은 가인을 거부하고 가나안을 저주하고 이스마엘을 쫓아내고 에서를 미워하신다. 심지어 특별계시의 영역 내에서조차 여호와가 자기 백성과 특정한 사람들을 거절햇다는 것이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이런 소극적 거절 가운데에서도 적극적인 행동이 드러나는 것으로 미워함, 저주, 강퍅하게 함, 어리석고 완고히 함,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함을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기에 인간의 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며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고 사탄을 통해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수하게 하는 등 사람들의 정욕대로 자기 죄에 넘겨주고 눈먼 자에게 자신이 영광을 계시하신다. 모든 하나님의 사역들 가운데 인간 자신의 죄가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데 예수께서 비유로 말하신 이유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에서만이 아니라 그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유에서이기도 한다. 하나님이 이 사람들을 죄와 거짓에 넘겨준 까닭은 그들이 이것을 자초했기 때문이며 신자들이 원수들의 악행 가운데 여호와의 다스리는 손을 보는 것은 후험적이 것이다. 이 모든 것 가운데에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계시되어서 하나님이 이 모든 것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전능한 주권을 드러내신다.

성경의 이러한 다양하고 강한 표현들은 인류 역사 가운데 확증되는데 유기를 옹호하는 자들은 항상 역사 가운데 비극적 사실들에 호소한다. 세상 가운데 있는 수많은 부당한 일들과 기쁨과 슬픔의 대조를 숙고하고서 염세주의적으로 세상을 악한 신의 맹목적 의지로 설명하든지 성경을 근거로 신앙 안에서 주권적이고 전능하신 이해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이를 비추실 분의 지혜로운 거룩한 뜻에 기초해야 한다는 두 선택의 여지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유기의 작정을 수용하든 수용하지 않든 그 원인은 사랑과 동정심의 크고 작은 정도에 잇는 것이 아니다. 그 차이는 전자가 성경 전체를 수용했고, 또한 성경 안에서 유기의 교리를 수용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들은 유신론자들이며 항상 그렇게 되기를 원했고 이러한 삶의 심금을 울리는 상황 가운데서도 여호와의 뜻과 그 다스리는 손을 인정하고 모든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반대로 펠라기우스주의는 세상을 가능한 최선의 세계로 여기지만 칼빈주의는 삶의 충분한 심각성을 수용하여 여호와의 권리를 위해 나서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 앞에 겸손과 경배를 드린다. 그 결과 칼빈주의가 펠라기우스주의보다 근본적으로 더 자비로운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칼빈은 소름끼치는 작정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칼빈을 변호하는 용어가 될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작정이 계시된 그 실재가 끔찍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재는 성경과 역사가 가르치고 이성을 지닌 사람이 펠라기우스를 추종하든 아우구스티누스를 추종하든 그에게 여전히 전적으로 동일하며 어떤 망상으로도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칼빈주의는 이런 끔찍한 현실 가운데 그에게 해결이 아닌 위로를 제공하는데 이는 모든 발생한 사건 가운데 전능하신 하나님이자 자비로운 아버지의 뜻과 손을 인정하는 것이다. 칼빈은 거기에 안식하여서 나의 양심이 증거하는 주님이 나의 증인이 되실 것이기 때문에 그의 이러한 판단들을 매일 묵상하는 것이 나를 놀라게 하므로 그 어떤 호기심도 나로 하여금 알아야 할 어떤 것 이상 알도록 동요하게 하지 못하며, 그 어떤 나쁜 의심도 그의 비교할 수 없는 정의에 대해 나에게 살며시 다가오지 못하며 그 어떤 불평하는 욕망도 나를 전적으로 자극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유기가 정당하게 예정의 한 부분으로 고려되어야 하더라도 선택과 동일한 의미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작정한 것이 아니다. 이중 예정 옹호자들은 하나님의 주권, 확실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들 무시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들이 문제시되었을 때 그들은 사도 바울처럼 불요 불굴의 의지로 양보나 타협을 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어떤 무죄한 자를 저주하기로 원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비난받을 수 없다고 했다. 개혁파 가운데에서도 동일한 생각을 표현했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피조물의 미천함을 인식하는 자는 이에 대해 문제삼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권리가 문제라면 무로부터 창조한 자에게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개혁파는 불의한 자로 하나님을 비난한다는 절대적 통치를 분개하며 단호히 거부했는데 하나님이 왜 이것을 원하고 다른 것을 원하지 않았는지 다른 것을 선택하고 버렸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은 항상 지혜롭고 거룩하고 선하며 모든 일에 하나님의 정당한 이유들이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공의와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우선적으로 인정될 때에 모든 개혁파는 예정의 교리를 가장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다룰 것을 충고했으며 헛되이 묻지 않으라고 한다.

그들 모두는 죄는 비록 하나님의 뜻에 배제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의 뜻에 상반되는 것으로 물론 죄가 유기의 작정에서 유효하고 충동적 원인이 아닌 까락은 죄 자체가 시간 속에서 영원한 작정을 따르며 죄 자체가 원인이라면 모든 사람은 반드시 유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죄는 충분한 원인이자 영원한 형벌의 응보적 원인이다. 유기의 작정은 유기 자체와 다르며 유기의 작정은 최종적이고 궁극적 원인이 하나님의 뜻에 있으나 유기 자체는 죄와 연결되는 것이다. 유기의 작정은 사람 자신의 죄를 통해 실현된다. 그래서 이 작정은 인간의 의지와 상반되게 몰고 가는 운명도 아니고 인간의 머리 위에 달려 위협하는 것도 아니며 현실에 대한 신적 관념 자체이다. 원인과 결과, 조건과 성취는 작정 안에 있으며, 사물들의 전체적인 연관은 우리가 현실 가운데 바라보듯이 서로 연관된다. 작정 가운데의 죄, 죄책, 비참, 형벌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 자체와 동일한 성격이 동일한 상호 관계를 지니며 이전에 계시되지 않은 작저잉 점차 역사 가운데 충분히 전개되는 것을 보게 된다. 유기의 작정은 전체적인 죄로 가득한 현실 사건들이 서로 연관된 세상 역사 전체는 그 궁극적 원인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하나님의 생각과 뜻에 있는 것이다. 작정은 현실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으며 작정은 신자로 하여금 이런 끔찍한 세상 역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존재하며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 안에서 행하게 하며 언젠가 마지막 날에 모든 피조물 앞에 자신의 의를 입증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반 경륜과 유기의 특별 작정이 어떤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단일하고 적나라한 신적 의지의 결정이라는 개념은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며 어떤 결말이 결정 되었기에 그가 무엇을 하든지 어쩔 수 없이 거기 끌려가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작정은 실재로 마찬가지로 헤아릴 수 없이 풍부한 것으로 모든 존재의 원천이며 단일 개념 가운데 목표와 방편들 목적과 수단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작정은 마음대로 현실 위에 개입하여 정해진 목표로 끌고가는 초월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내재적이며 영원한 개념으로 그 충만한 개념을 시공간의 형태로 펼치고 하나님에게는 단일하지만 우리의 제한된 시각에서는 다른 모든 작정과 떨어져 나란히 있는 것도 아니고 선택의 작정과 따로 독립된 것도 아니다. 죄와 은혜, 형벌과 복, 공의와 자비는 유기된 자가 오로지 죄와 형벌을 받고 택자는 오로지 은혜와 복을 받는 것처럼 현실에서 이원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들의 이러한 죄들이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그 죄들은 합력하여 부름 받은 자들에게 선을 이루며 이 죄들은 그 목적을 위해 그 자체로부터 나오지 않고 본질상 적합한 것도 아니고 전능한 하나님이 악으로부터 선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며 죄는 중생이나 신앙과 같은 구원의 수단이 아니고 은혜로의 준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은혜의 부정이다.

그러므로 유법은 여전히 신자들에게 중요하고 신자들에게 일시적 강퍅함과 유기가 언급된다. 그러나 유기된 자들이 많은 복을 누리기도 하는데 이는 유기의 작정이 아닌 하나님의 자비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오래 참음으로 관용하시고 그들에게 은혜의 복음이 선포되게 하며 그들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방편들이 유기된 자들의 구원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하며 이 은혜의 방편들은 그 자체로 유기의 작정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고 이 방편들은 유기를 위한 것으로 잘못 쓰일 수 있다. 이것들은 본래 성격 상 유기의 방편들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은혜의 방편들인 것이다.

선택과 유기는 전적으로 분리되는 반면에 이 땅에서 지속적으로 교차한다.

선택과 유기 모두가 그 자체를 위한 최종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최종적 원인이 아니며 이 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이며 하나님의 영광은 궁극적 목적이자 만물의 가장 심오한 근거이다. 모든 존재의 시작과 끝, 이유와 목적은 선한 것이며 하나님은 결코 죄와 형벌을 그 자체를 위해 원한 것이 아니라 죄와 형벌은 하나님의 본성과 모순된다. 하나님은 악과 거리가 멀고 재앙을 즐거워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비록 재앙을 내리더라고 그것을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며 죄와 형벌은 하나님이 오로지 더 좋고 위대한 다른 선을 위한 수단들로 원하신 것이며 선택과 유기 사이에는 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뜻을 위한 것으로 선택의 원인과 목적도 오로지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선택을 통해 성취하는 사역 가운데 기뻐하는 것이다. 사역 가운데 자기 자신의 미덕들이 빛나며, 새로운 창조는 자신의 완전을 비추는 거울인 것이다. 하나님의 유기의 작정에 따라 시행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본래 자신이 기뻐하는 대상이 아니고 죄 자체가 선이 아니라 죄를 거슬리는 것으로 쓰일 뿐이다. 죄는 간접적으로 선한 것인데 왜냐면 죄가 종속되고 다스려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데 쓰이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선을 위해 악을 다스리고 교회의 구원, 그리스도의 영광, 자기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예정은 결국 선택에 이른다. 예정은 선택에서 그 정점에 도달하고 충만한 현실에 이른다. 예정의 최상 형태는 자신의 이성적 피조물들의 영원하고 영과스런 상태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들의 확립에 나타난 미덕들의 계시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이다. 유기라는 어두운면의 배경에서 선택 자체는 밝게 빛난다. 선택은 언제나 유기를 토대로 유기와 나란히 존재하며 세상은 노동과 보상의 법칙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요 공로와 부요는 서로 상관이 없는 것이다. 모든 작정들과 마찬가지로 선택의 궁극적 원인은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에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작정 가운데 햇빛과 온기, 파종과 추수, 게으름과 가난, 지식과 권세 등의 사이의 연관을 맺었고, 죄와 형벌, 불신앙과 저주, 신앙과 구원 사이에도 그렇게 하신다. 현실 세계의 현상들과 사건들 사이의 조화는 완전한 하나님의 생각과 작정들의 세계 가운데 존재하는 조화의 사본이다.

성경은 이러한 이차적 원인들에 국한했고 개혁파 신학자들도 그 의미를 충분히 인정했지만 이 두 번째 원인들은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원인이 아니며 사람은 궁극적인 원인에 대한 탐구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사물의 본성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다. 과학은 사물들의 존재 사실을 확증할 수 있으나 그 실재적 존재를 가정하지만 그것이 왜 그와 같은지는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성적 피조물들 사이에서 마찬가지로 왜 어떤 천사들은 영광으로 타락과 멸망으로 예지되었는지 왜 그리스도가 취한 인간의 본성이 이런 영광으로 존귀하게 되었는지 등 그 어떤 피조물도 이런 질문들에 답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작정들은 사람의 노력과 공로에 따라 시행되는 하나님의 공의의 행위로 이해할 수 없으며 천사에 있어서 그들의 선택과 유기는 궁극적 원인이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이 반드시 드러나는데 그들의 창조에 선행하는 예지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에 기초하는 유기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선택은 그 자체로 자비의 행위나 그와 같은 것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선한 천사들의 선택에서 죄가 언급되지 않고 자비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럴 경우에 모두에게 자비로워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기는 공의이지만 공의로만 설명되지 않는데 모든 사람이 유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정들이 서로 연관되어도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작정들 자체는 조건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의 절대적 행위들이다. 하나님은 죄와 형벌 사이의 인과관계를 수립하고 이 관계를 각 사람의 양심에서 주장한다. 유기의 작정의 궁극적 원인은 죄와 불신앙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있으며, 신앙과 구원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으나 선택의 작정은 예지된 신앙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선택이 원인이다. 그리스도조차도 선택의 원인으로 여겨질 수 없다. 그리스도는 행위나 작정으로서가 아닌 목적과 목표로서, 혹은 선택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된다는 점에서 선택의 원인이다. 그러나 중보자인 그리스도가 아직 선택의 작정에서 충동적 원인 공로적 원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 자신은 예정의 대상이자 에정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는 성부의 사랑의 은사이며 이 사랑은 성자의 파송에 선행하는 것이다. 성경은 모든 작정의 원인을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는 뜻에 달린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선택 교리는 불신자와 신자 모두에게 풍성한 위로가 된다.

예정이 정의와 공로에 기초한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예정이 은혜를 따라 역사하므로 가장 비참한 자에게도 희망이 있다. 선택을 고백하는 것은 가장 무가치하며 타락한 사람을 여전히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영원한 사랑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아무도 자신을 유기될 자라고 믿을 권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모두에게 그리스도를 믿을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자신이 유기될 자라고 믿을 수도 없는데 그의 삶 자체가 그가 누리는 모든 거은 하나님이 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인 것이며, 누구도 자신이 유기된 자라고 실제로 믿지 않는데 그렇다면 그는 이미 이 땅에서 지옥을 경험한 것이다. 선택은 위로의 힘, 겸손과 온유, 신뢰와 확고함의 원천이며 인간의 구원은 흔들릴 수 없이 확고하게 은혜롭고 전능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있다.

 

선택의 대상과 목적을 고려할 때 선택의 영광은 더 아름답게 드러난다. 성경은 개인적 선택을 가르치며 집단적이거나 구체적 제한이 없는 것을 선택의 대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서 택자들은 원자적으로 여겨지지 않고 단일한 유기체로 이해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자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교회 모두는 예정의 작정에 포함되었다. 루터파는 예정을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원에 이르는 선택으로 이해해서 이를 부인한다. 하지만 개혁파는 강하게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에 의해 작정되고 교회와 더불어 함께 하나님의 선택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단지 예정의 대상인지 아니면 선택의 대상인지에 대해서도 차이가 있는데 개혁파는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속한 자드르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중보자로 정해졌으며 사람들의 선택은 논리적으로 그리스도의 중보자 예정에 선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개혁자들은 그리스도 역시 선택의 대상으로 여겨서 그리스도가 단지 중보자로만 정해진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로 정해졌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선택이 교회의 선택에 앞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중보자로 정해졌으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긍휼로 죄와 비참에서 영광과 구원으로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도 확실하다. 하지만 성경은 메시아와 관련해 자주 하나님의 선택을 언급한다. 이 선택이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불리는 것은 정당한데 성자는 성부에 의해 영원부터 중보자로 지정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인성은 순전히 은혜로서 어떤 공로도 없이 로고스와의 연합과 중보자 직분에 예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로서 그리스도만이 예정의 대상인데 예정은 선택과 달리 무엇보다도 목적을 위한 수단들의 정돈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선택되었다고 동일하게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단지 중보자로 예정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로 예정되었으며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선택의 근거와 기초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이는 교회의 선택은 교회에 주어진 첫 번째 유익인 것이다. 심지어 이런 유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이미 발생했으며 중생, 신앙 등 다른 모든 유익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주어지는 것은 교회의 선택에 대한 근거가 아닌 목적이다. 그리스도의 선택은 논리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앞서며 이런 논리적 순서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모든 개혁파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함께 신비적 그리스도가 선택의 고유한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선택은 선택이 죄와 비참의 상태를 항상 전제하는 것은 아님을 가르치는 것이며 성경에서 선택이 민족들로부터의 구별이며 택자의 수효가 작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이 교회 가운데 구원을 받는 것이다.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 하늘과 땅의 만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되고 성자로 말미암아 피조된 세상은 만유의 후사인 성자를 위해 예정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 안에서 알려지고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구원받는 대상은 우연하고 자의적인 집합이 아닌 유기적 전체이다.

선택의 대상은 완전한 유기체이므로 선택 자체가 확고하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작정이 아닌 다른 것으로 생각될 수 없으며 전체 집합에서 부분들의 수효는 전적으로 중요하지 않는다. 유기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크기와 수효에 기초하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해 교회의 머리로 선택되었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선택되었다. 그들은 반드시 각 지체가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온전한 사람으로 함께 자라야 한다. 선택은 신적 개념이자 성전의 영원한 청사진이며 하나님은 이 성전을 온 세대를 거쳐 지으며 친히 이 성전의 설계자이자 건축자이다. 모든 것이 성전 건축에 종속되고 사용되며 하나님의 모든 작정들이 하아님의 영광의 작정에서 귀결되듯, 세상과 인류 역사는 하나님 나라 도래를 위해 협력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 나라 백성이 아닌 자들도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 태어난다. 창조와 타락, 보존과 통치, 죄와 은혜, 아담과 그리스도는 그 나름대로 하나님의 건물을 세우는 데 협력하며 이 건물 자체는 하나님의 영광과 영화를 위해 건축된 것이다.

 

 

 
반응형

'에세이 > 책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휫필드 흑인 노예 설교  (0) 2023.06.16
emile - Jean-Jacques Rousseau  (0) 2020.10.15
노예의 길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0) 2020.07.20
인생의 중요한 7인  (0) 2019.02.01
인간관계 정리  (0) 2019.01.3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