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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나보면 다시 보이는 것들이 있다.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대로 하지도 못하긴 한다. 그 상황에 다시 들어가면

그래도 벗어나보니 매우 좋은 것들이 많이 있다. 

내가 주 앞에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방해하는 많은 것들 

그리고 그것들이 나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것들 

 

헛소리들을 지껄이고 있는가 하면 

헛소리가 아니기도 하다 

 

벗어나 보니 더 많이 보이지만 결국에는 벗어나는 것은

가서 들어가기 위해서 벗어나는 것 뿐이다 

 

나는 존재로서 실존하기 위해 다시 그곳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고 

나의 존재로서 의미하기 위해 다시 그곳에 전해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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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가 생기지 않는 것은 관계가 형성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계에 있어서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다. 

 

나는 왜 관계에서 실패하는가에 대한 수년간의 고민이 있다. 

아니 이 문제에 대해서 연구하고 몰두한 경험은 없었던 것 같다. 

관계의 문제에 대해서 나는 왜 실패하는가? 

10년이 넘는 문제의식에서 무엇을 통해 내가 이룰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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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장 1-16절

포도원의 품꾼들에 대한 비유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일꾼들을 모집한다. 

일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고 하루 열심히 일해 달라고 말한다. 

 

그런데 오전 9시 정도에 나가보니까 장터에서 일이 없어서 놀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도 지금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해달라고 한다.

 

그런데 또 점심때 12시에도 나가보고 오후 3시에도 나가보니까 놀고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이 12시에도 사람들을 데려오고 3시에도 사람들을 데려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도 오후 5시에 나가보니까 거기 장터에서 서서 하루 종일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인은 물어보았다. 왜 이렇게 하루 종일 놀고 있는거요! 

놀고 있는 사람들은 말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하루를 날리고 있습니다. 하고 말한다.

주인은 이 사람들에게도 말했다. 우리 포도원에 들어가라. 

 

이제 오후 6시 7시쯤 되어서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가장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돈을 주라고 말한다. 

그런데 오후 5시에 왔던 마지막 사람들이 1데나리온의 돈을 받는 것이다. 

처음 새벽 일찍부터 온 사람들에게 약속한 돈이었던 1데나리온을 받는 것이다. 

 

그러자 뒤에 가장 먼저 온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기대하기 시작한다. 

저렇게 늦게 와서 일도 몇시간 안한 사람들에게 1 데나리온을 준다면 

우리에게는 3 데나리온 정도는 주지 않을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청지기가 가장 처음 온 사람에게도 똑같이 1 데나리온씩을 주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화가 났다. 그래서 주인에게 쳐들어가서 말한다. 

12절 - 우리는 하루 종일 더운 여름날에 힘들게 일했는데 저 사람들이랑 똑같은 돈을 준다는게 말이 됩니까?

저 사람들은 1 데나리온이 아니라 0.1 데나리온을 줘야 맞는거 아니요. 

저 사람들에게 1 데나리온을 준다면 우리에게는 3-4데나리온은 주는 것이 맞지 않소!!

 

하고 매우 화가 나서 싸우는 것이다. 

 

주인이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말한다. 

친구여.... 나는 너한테 잘못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너랑 처음에 1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을 하고 오늘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해 준 것이 아니냐. 

너에게 준 이 한 데나리온을 가지고 집에 가라. 내가 이 마지막에 온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내 뜻이야. 

 

이 주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매우 공정하고 공평한 사람인가요? 

여러분이 느끼기에 이 주인이 공평하고 공정한 사람처럼 느껴지나요? 

 

아마도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해서 뻘뻘 땀을 흘린 사람들에게 주는 일당이랑

밖에서 하루 종일 놀고 있다가 일이 없어서 하루를 날리다가 겨우 1-2시간 정도만 일한 사람들에게 주는 일당이랑

어떻게 같을 수가 있나요? 당연히 한 데나리온을 주면 안됩니다. 반 데나리온을 주더라도 엄청 많이 준 것이지요. 

 

여러분 누가 나쁜 사람인가요? 일꾼들인가요? 아니면 주인인가요? 

 

성경은 불공평한 사건을 다룹니다. 매우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건을 다룹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이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가 천국에 대한 비유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원리가 적용되는 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여기 일하러 온 모든 사람들은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 앞에 수고 한 사람이든지 나중에 겨우 수고한 사람들이던지 간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을 공평하게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하나님은 공평하고 정의로운 분이신데 이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혹시 불공평한 분은 아닐까요? 

 

우리는 분명하게 면밀하게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 사람들 모두에게 나누어주신 분이십니다. 

이 일꾼들이 손해를 본 것이 아닙니다. 이 일꾼들은 모두 포도원 주인이 주는 일할 기회를 얻은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손해는 누가 본 것인가요? 손해는 하나님 자신이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포도원의 그 누구에게도 품삯을 주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일거리가 없어서 하루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거져 하나님의 품삯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영생을 스스로 나누어주시는 것이지, 이 포도원 품꾼들이 잘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14-15절은 말합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농장 주인은 선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마땅히 반 데나리온도 받지 못할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기심으로 긍휼히 여기심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데나리온을 나누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일할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손해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에게 불공평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시려고 스스로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히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입으신 가장 큰 손해는 무엇인가요? 

 

그분이 입으신 가장 큰 손해는 그의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

 

눅 3: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거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아무런 자격없는 자들인 

1-2시간도 일하지 않은 사람들인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마땅히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이분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는 선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선물로 예수님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 나가 일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마지막 1시간 포도원에 들어가 발만 담근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 구원의 선물을 허락하시는 천국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손해가 있습니까? 이와 같은 불공평함이 있습니까? 

 

이번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 하나님의 불공평하심을 온 몸으로 온 존재로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어떤 불공평함을 당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마음에 어떤 손해를 받으셨나요?

 

성경은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합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어떤 손해를 받았다고 말하나요?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한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분은 자기를 비워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탄생 자체가 손해셨고 모욕이었고 크나큰 비하였습니다. 

마치 우리 사람이 벌레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병균과 같은 것이 바이러스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자기를 그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위치로 가십니다. 

 

그분은 탄생에서부터 그를 받아주는 방이 없어서 마굿간에서 짐승취급을 받으며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고결한 분이셨지만 선생들 귀족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 병든자들, 더러운 자들, 귀신들린 자들, 외로운 자들, 가장 약한 자와 죄악된 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분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섬기고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배신 당하십니다. 철저하게 외면 받으십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배신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맹세하던 자들에게서도 완전히 배척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홀로 외로이 십자가를 지십니다. 십자가에 못이 박혀 말라 죽으십니다. 그분은 지옥의 고난을 당하십니다. 

신이신 분께서 죽으실 수 없으신 분께서 죽음이라는 죄인만이 당하는 형벌을 당하십니다. 

 

예수님의 전 생에는 손해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큰 불공평함을 당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불공평 당하심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 불공평함을 억지로 당하시고 강제로 당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기쁘게 그 손해를 불공평함을 당하십니다. 웃으며 그 불공평함을 당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을 배신하고 자신을 배척한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그들로 하나님 안에 거하도록 기회를 허락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의 손해 때문에 예수님의 불공평함 당하심 때문에 이곳에 서 있습니다.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 은혜 안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17: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참된 기쁨을 주시려고 천국의 기쁨을 주시려고 스스로를 희생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손해 앞에서 그분의 희생 앞에서 우리가 설 수 있는 곳이 있습니까? 우리가 비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전혀 손해본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혀 불공평함을 당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손해를 보신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난 주간은 예수님이 고난 당하신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고난 주간만이라도 예수님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하고 그분의 고난을 알고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그 고난에 동참하는 시간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이번 한주만이라도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그분이 얼마나 큰 괴로움을 당하셨는지에 대해서

이 한주만이라도 따라 생각하고 따라 행동해보는 시간이 되길 권면하고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그분에게 큰 손해를 입혔지만 용서함 받고 은혜 받은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벧전 4:12-14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혹시 우리에게 손해를 보는 일이 생깁니까? 불공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들이 생깁니까? 손해가 생깁니까?

그렇다면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그 불시험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들처럼 적게 일한 사람들도 한데나리온을 준다고 억울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기회입니다. 우리가 손해 입을 수 있는 기회 우리가 불공평함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갚을 수 없는 그분의 손해받으심에 

동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손해 받는 일을 고통 받는 일을 즐기라고 합니다. 기뻐하라고 합니다. 

심지어 치욕까지도 우리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것 같은 배신도, 절망도, 모욕도 모두 우리에게는 복이 됩니다. 

우리에게 영광이 됩니다! 우리의 영광이 바로 예수님 때문에 받는 손해입니다. 그분을 따라서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손해 보나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골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예수님은 그분의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우리에게 갚을 수 없는 손해를 받으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없습니다. 그분에게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분에게 우리가 손해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바울은 그분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라고 말하십니다. 

 

그분의 교회가 무엇인가요? 이 건물을 장소를 말하나요? 아닙니다. 

교회는 그분의 피로 사신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 옆에 있는 우리 안에 있는 이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불공정함을 스스로 자원해서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더욱 억울하고 더욱 하기 싫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손해를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영광스럽게 우리의 육체 가운데 그 고난의 흔적을 세워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재정을 사용하십시요. 우리의 마음을 쓰십시요. 우리가 가진 것들을 사용하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십시요. 

서로를 위해서 중보하십시요. 기도하십시요. 여러분의 시간을 기도의 시간으로 사용하면서 손해를 기꺼이 보십시요. 

 

이번 한 주간에 예수님의 불공평함 억울함을 생각하면서

그분을 따라 자발적으로 기쁨의 영광의 불공평함을 당하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보는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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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두 가지 사이

내가 원칙적인 것들 앞에서 충실하게 나아가야 함과 동시에

내가 그 원칙적인 것들을 잘 풀어 설명해주어야 하는 것

 

나는 뭔가 빠져있는지 모른다. 둘다가 빠져 있다. 

 

하나님은 나를 더욱 풍성한 세계로 인도해가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내가 알지 못했던 더 큰 세계로

그리고 그런 곳에서 나는 하나님을 더욱 발견한다. 그리고 나에게 요구하시는 그분의 은혜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여유가 생기고 관조함과 통찰력이생겨나듯이

그러한 배움의 과정을 가지면서 더욱 여유가 생기고 관조와 통찰이 생겨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과 무모함을 가지고 실천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방언으로 기도하든지 아니던지 육성으로 기도하던지 아니던지 가식적으로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가장 싫어하신다. 

나는 중언부언하지 않게 정확하게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고 싶다. 

내가 정확하게 기도할수도 없는 사람이지만 되도록 그분을 향해서 정신 차려서 기도하고 싶다. 

 

하나님은 나의 인생을 인도해가신다. 하나님은 나의 삶의 부침을 통해서 나를 인도해가신다. 

결국에 나의 오염된 생각과 왜곡들에서부터 벗어나 하나님을 향해 이번주에 다음주에 다음달에 더욱 가까이 가도록

한걸음씩 그렇게 인도하신다. 

 

세상을 크게보고 세상을 크게 느끼자 세상이 내게 보여주지 못한 것들을 더욱 누리자

과거의 실패와 죄악으로 인하여 그러한 실수들로 인하여 나의 한계를 축소하려고 하지 말자

나의 과거는 지나갔으며 내게 지금도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 운명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나는 내 운명에 대해서 자유롭게 더 크게 나아갈 자유와 권리가 있다. 

 

32세가 되었다. 적지 않은 나이 예수께서 그 공생애를 적극적으로 행하시던 그런 나이 

나의 것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 나이 

그리고 이제는 조금 급한 마음을 조급함을 벗어버리고 뭔가 이룰 수있게 차근차근 쌓아나갈 수 있는 시기

20대의 방황에 대해서 아깝게 생각하는 그때 좀더 빨리 쌓는 방향으로 나갈것을 하는 생각을 가지는 시기다. 

 

이목은 분명 내게 좋은 영향을 끼쳤고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큰 도움을 주셨고 하나님을 향해 정통적으로 나아가도록

길을 열어주셨다 그분에게 감사하고 그분을 만나게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과거에 그분을 선택한 24의 나에게 칭찬과 격려를 보낸다.

 

그러나 나는 이제 25 26이 아니고 32다. 

나의 단계에서 내가 발견한 소명을 향해서 그렇게 나아가면 된다. 

할수만 있다면 여행을 떠나고 싶다. 여행 - 답사를 떠나고 싶다. 새롭게 시작하는 모든 것들을 준비하기 전에 

좀 여유를 부릴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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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2년이 혼자 삽질하다가 끝나는 것이 되어버리면 어쩌지?

 

30대가 되어서 개혁주의가 삶으로 더욱 다가오는 것 같다. 내 삶의 전문성과 앞으로의 삶의 관을 구성하는데 

깊은 뿌리가 되어준다. 철학

 

객관적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과 그렇지 못한 길을 구분하고

결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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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매를 맞아본 경험이 있나요? 매를 맞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매가 얼마나 아픈지를 잘 기억합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매를 많이 맞아 본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매를 많이 버는 사람이었습니다. 잘못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매를 덜 맞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선생님에게 매를 안맞기 위해서 애교를 떤다던지 그런 것을 할줄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굳은 표정으로 매를 맞고 혼이 나곤 해서 본의 아니게 반항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매를 벌었습니다.

매를 맞아본 사람은 매 맞을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매를 많이 맞을 수록 매를 더 세게 맞을수록 그 매가 주는 고통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매를 왜 맞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대가가 매우 혹독하다는 것에 대해서 매를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저는 차라리 매를 맞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많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하면 매를 맞고 벌을 서면 됩니다. 그러나 장성한 이후에는 더 이상 매를 맞을 수 없습니다. 장성한 이후에는 신체적 고통을 주는 매를 맞지 않습니다만 그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매를 맞습니다. 그것은 기회의 박탈이라는 매입니다. 인생의 낭비라는 매입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좋은 것들을 얻지 못한다는 매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잘못에 대해서 책임을지지 않습니다. 다만 매를 맞고 그런 잘못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뿐입니다. 그러나 장성한 이후에는 더 이상은 돌이킬 수 없는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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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되는 시기가 오면 

운동을 해라

헬스를 끊어라 아니면 새로운 운동을 배워라

 

몸이라도 건강해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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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교회 목사님 만나서 동네 전도 상의하기 권면하기

 

청년들 만나서 갈등일으키기 권면하기

 

그루터기 돕기 스마트스토어 등

 

성찬식 하게 권면하기 3개월 한번이라도

 

센터 아이들 만나서 전도하기 

 

매일 독서 챕터 하나씩 끝내기

 

계속 설교 준비하기

 

통성 기도를 왜하는가 노래방 비유로 설교하기

 

사차원의 영적세계 설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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