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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4장 

하나님의 준비된 일꾼

 

1.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일꾼

 

2. 30부터 50세까지

 

3. 배워야 준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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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아마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메시지는

새벽기도 해라? 무튼 기도해라

기도로 하나님을 더 만나라. 

 

그리고 

욕심 내려놓고 

한걸음씩 반걸음씩 가라. 

그러다 보면 조금씩 닿는다. 

 

아니다고 하면 내려놓아라 그럴 준비를 항상 하라

확신에 차있되 그 확신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어라.

그러니까 항상 기도하며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감사하라. 

다시 기도하라. 

 

나는 한 고비를 넘겼다. 스스로의 고비를 

다시 이게 오지 않게 적어도 이건 넘길 수 있도록 고비를 넘기라. 

나를 포기한 것. 미래를. 그것 하나 정도는 또 올 수 있겠다만

중요하게 넘기라. 넘겨보라. 계속 그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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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답. 

스위스제2신앙고백서에서

중세에서 가져올 것이 있는가? 

중세 이단이 들어가 있을지 아닐지. 중세 이단이 들어가 있는. 

중세에 신학적 정리가 되지 않은 점에 대해서. 다른 신앙고백서와 비교해서 내용적 차이가 없다. 

 

특징적인 것들을 빼고 . 불링거는 충실하게 성만찬에 대해서 consensus tigurinus 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다. 

그런 부분들을 빼고 다른 신앙고백서와 실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중세에 대한 건전한 입장들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이 기준 속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제시한 것이다. 

트리엔트 종교회의 끝 무렵 작성된 것이므로 이 측면에서도, 그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신학적 입장을 소개할 때에 정통 개혁주의자라고 말한다. 

개혁주의자랑 정통 개혁주의는 무슨 차이가 있냐? 

종교개혁과 17세기를 고려한 신학적 입장에 서 있다는 것. 

그런데 개혁주의자라는 말에는 19-20세기를 거쳐서 이성주의 영향을 받아서 있찌만 그 범주에서는 개혁파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분리하고자 하는 말이다. 

정통 개혁파를 추구한다고 했을 때에 연속성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어느날 갑자기 개혁파가 생긴 게 아니라 전체 신학적 주제를 따라 체계화된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방법론에 따라서 정통주의가 형성되었고, 연속성의 문제. 종교개혁의 어느시점. 

그 시점을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에서부터 교파주의가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모든 종교개혁자들이 공유하는 것들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루터파 일치신조를 보면 개혁파와 근본적으로 다르냐? 많은 부분 공통되고 특징적 부분만 다른 것이다. 

교파주의의 신학적 독특성으로 갈라지는 것이지 그 외는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개혁파의 정통성이 가미된 연속성을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의 신학과 이후의 신학이 달라질 수 있겠는가? 17세기 이전까지 그 내용과 개혁파의 독특성과 그 입장이 지금도 계속되고 면밀하게 논의되지 않는 것들이 세분화된 주제들이 있을 때. 

시대적 이슈와 관련해서는 창조론과 관련해서 대두되는 것. 

종말론에 대한 이슈들. 

이런 것들이 16-17세기의 기본적 틀은 있으나 세분화도니 것들이 확대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원리에 있어서는 근본적 변화는 없다. 

그런 기준에서 이단의 기준도 확인해야 한다. 

 

신론과 기독론 이단은 -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그냥 이단이다. 

구원론 교회론 이단은 -

불링거가 17세기 초 도르트총회 이후 신앙고백서를 보았다면 알미니안을 넣었을까? 문제는 우리 입장에서 교파적 차이 문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예민한 부분이다. 

오늘날 항론파 교회가 여전히 있는데 구원론에 대해서, 세미펠라기안인데. 그런 교파들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냐는 문제가 있다. 

혹은 과연 거기게 구원이 없느냐는 근본적 질문이 있는데. 

개혁자들의 RCC에 대한 해석적 논의가 신론과 기독론에 대한 이단이 아닌 이상. 기준이 되어줄 수 있다.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의 선명성을 더 드러내기 위해서 , 대척점의 사람들에 대해서 너무 공격적으로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고민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자. 다른 점에 대해서 경계를 하되 그것을 가지고 구원이 없다는 식의 표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원리 - 모든 것이 논리적 체계로 하는 신학. 그 전에는 주제별로 약간의 간격과 연결성이 모호하는 것이 두가지가 공존한다. 

베자의 타플라 - 모든 것을 논리적 체계로 정립하는 것. 

멜랑히톤은 주제와 주제 사이에 느슨한 것이 있다. 

이런 두가지 식이 공존해야 하는 것이다. 

 

타블라적 체계를 가지고 모든 것들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는데 . 장점이 있지만 단점은 타블라 중 어느 한것을 오류로 빠지면 전체가 오류에 빠진다는 것. 두 가지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차이가 있는 이들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 보편 교회에 대해서는 쭉정이만 남아 있는 듯 하는 상황에서 종교개혁자들의 측면을 이야기하면서 . 개혁에 대상이고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소개할 의무가 있다는 것. 

 

문제는 개혁파가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들어보고, 수용하면서 대화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개혁파적인 것을 강조하니까 개혁파만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보편 교회를 위한 신학이어야 하는 것이다. 

왜 가장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검증된 신학이기 때문에. 그 기준과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위스의 현 상황.

스위스3일치신조 - 스위스 개혁파 전체가 알미나안에 대항하는 것. 프란시스 튜레틴. 

하인리히 호팅거. 하이데거, 중심들. 

작성을 했지만 오래 못갔다. 왜? 그 시대가 죽으니까 다음 세대가 완전히 다 이성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서 신학 안에 이성주의가 들어온다. 초기 정통주의 중기정통주의 후기정통주의라고 할때에

우리가 인정하는 것은 초기와 중기 17세기 중후반. 

개혁파라고 해도 이미 이성주의 영향을 받아서 점점 자유주의로 흐르게 된다. 

개교회 안에서 신앙의 전통을 이전의 틀들을 유지는 하지만 

지금은 선택적이다. 현대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된다는 식. 이런 현상이 이미 100년 전부터. 교회와 국가가 영역이 완전히 구분된 것이 18세기 후반이다. 그리고 그 형태가 강화되면서 신앙교육이 약화되고. 

학생이 세례를 받고 14살 정도에 입교 교육을 의무적으로 하는데. 교회를 나가든 아니든 입교를 하려면 의무적으로 목사에게 가야 한다. 얼마전까지는 신앙고백서를 가르치는데 지금은 가르치지 않는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교단차원의 결정은 고백을 요구했는데 지금은 고백을 요구하지 않는다. 

 

화란

국가와 교회가 분리. 신앙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체제를 유지한다. 

지금 학생들이 부족해지고. 보수 신학들이 다 없어진다. 캄펜. 레이든은 자유주의화. 보수주의는 아벨도른밖에 없다. 

학생수부족으로 유지 자체가 안되는 문제. 그런데 화란은 교단 교회들은 국가와 독립된 교회다. 

보수성이 남아 있지만. 독일과 스위스는 국가교회지만ㅇ 화란은 \중립적이고. 미국,캐나다는 교파교회다. 

영국성공회는 국가교회. 자유교회는 독립. 

화란 개혁파가 통합과 분리의 과정을 거쳤지만 왕실은 기본적으로 개혁파를 추구하지만 특성이 완전히. 

그러나 기독교 국가니까 우리와는 다른 분위기. 

미국, 캐나다, 호주는 완전히 다른 교파주의의 교회여서 교단이 어떤 신학적 입장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신학의 색이 달라진다는 것. 

국가교회는 17세기에 분명히 신학자들, 교단을 이끄는 지도자들이 어떤 신학적 입장을 추구하느냐가 교단의 색이 달라진다. 

 

한국

총신은 교단직영. 장단점은 같이 갈 수 있고, 안정되지만 지도자들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서 색이 달라진다. 

합신은 교단인준으로 지원은 받지만 신학적 정체성은 교수들이 확보할 수 있는 것. 

교단이나 노회가 신학적 정체성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개교회중심으로 가서. 

 

유럽은 그래도 공교회적 특성을 가지는데. 목회자 사례 체계가 개교회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한국은 완전히 개교회적. 그 노회나 총회를 주도하는 자들의 신학적 입장을 보면서 공교회적 원리로 인해서 신학이 타락할 수 있는 것. 

개교회 중심이라면 개교회별로 지켜질 수도 있는 것. 하지만 보편교회적 시스템은 아주 부족함. 

 

그나마 이상적인 것은. 

화란 아펠도른속한 교단, 캐나다 해밀턴 신학교. 그랜드레피드 보수적으로 하는 곳. 개혁신학. 

 

공교회성의 부재에 대한 문제 진단.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문제. 교육의 부재. 한국교회지도자들의 책임. 

태생적으로 약한 공교회적 인식. 

 

미국 호주 캐나다 장로교회들이 대부분 교파주의다. 

유럽의 개혁파가 왔다면 좀 달랐을 수도 있겠다는 것.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은 교파주의 신학교의 선교사들이었다. 그럼에도 선교사들은 연합하면서 했었다. 

분명한 소속과 체계가 있었다. 이런 부분을 고려하지 못함. 

그런데 다른 면에서 부흥에 있어서는 이정도로 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긍정적 측면도.

그런데 이런 부흥의 급진성이 정말 긍정적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이 있다. 

 

연대 해야 할 필요. 같이 공부하고 하는데 생각 차이가 있어도 앞으로의 교회 방향을 위해 서로 연대해야 하는 것. 시대적 파도를 넘는 방법이 된다는 것. 

 

스위스신앙고백서 구조적 특징 

1-16 신학적 

17-30 실천적

 

신론에 앞서서 성경론을 모든 주제들에 앞서서 논의한다. 

 

칼 바르트가 불링거의 성경론을 재해석하는 측면에서 계시와 성경을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다르다. 바르트가 재해석하는 것임. 

우리는 계시 기록으로서 성경이지 성경은 계시 기록으로서 성경이기에 분리해서 이해하지 않는다. 

불링거는 바르트가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것. 

불링거 자신은 신앙고백서에서 종말론적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 

 

설교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냐? 앞에서 말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런 것이 아니라 성경이 계시의 내용이고 잘 담아서 설교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혹 설교자가 문제가 있어도 선포된 말씀이 바르다면 그 설교를 듣고 순종해야 함을 말한다. 

 

종교개혁 시대에 목사에 대한 3부류 1. 말씀 생활 잘 . 2. 말씀잘 생활은 아닌 3. 말씀도 아니고 생활도 아니고

3번째는 설교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목회자에 대해서 이런 내용들은 2번은 권면해서 개선하도록. 바른 말씀이 가장 중요 -> 교회의 표지이기에. 

 

성경에 충실한 내용을 설교자들이 잘 해석하고 담아내서 설교하는 것이 교회의 표지인데. 그것이 목회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교리적 이해 속에서 성경이 해석되고 설교되는 것을 바른 설교라고 하지 그것 없이는 바른 설교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고민이 많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완벽하게 정의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으며. 성경의 기록된 내용에 충실히 설교해야 하는 것. 

 

이단들에 대해서 말하는데 프락세아스 아리우스 터키인들 세르베투스 등. 당대에는 현대적 이단들.  

 

불링거는 스위스제2신앙고백서 - 성경에 기록된 것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대한 지식. 삶에 대한 지식. 

믿는 것과 행하는 것. 교회의 성숙과 사역, 경건의 모든 의무들에 대한 가르침 교리의 변증 변호 모든 오류들에 대한논박과 권고.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분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도록 하는 것에 대해서 

 

설교자가 윤리적 문제가 있으나. 설교와 설교자를 분리시키는 것. 스위스2신조. 

불링거 ; 우리는 설교된 말씀 자체에 주목해야 하며 그것을 선포하는 설교자를 주목해서는 안된다. 그가 죄인이라도 선포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자를 절대로 완벽한 사람으로 낙관적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잘 권면해서 개선해나가도록 개선하도록 함. 

불링거 취리히만이 아니라 제네바에서 원리가 적용되어서. 제네바는 더 구체적으로 윤리적 규범. 3달마다 살피도록. 1년마다 신앙점검. visitatio.  치리 모범을 통해서 개선하고 경고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설교자의 윤리적  부분이 공적으로 드러날때에는? 심사를 했으나 . 칼빈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걸렸다면 실질적으로 면직했다. 칼빈은 5명을 면직하다. 프랑스에서 치리복원 회의록 자체가 필사되었기에 현대화하지않으면 읽을 수 없다. 이 문제에 있을 때 면직한다는 기준을 두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그랬는지 확인하지는 못함. 제네바에서는 있었다. 

 

제네바의 목사 2명도 면직 당했는데 다른 지역에서 목회를 함.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 40-50-60대인데 그렇게 면직이 되었으나 다른 일을 찾을 수 있도록 다시 목사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돕는 제도가 있다면. 

화란 계열의 개혁파는 중간에 그만 둘 때에는 노회가 일정 시간동안 돌봐준다. 이 과정을 거치는 것이 쉽겠는가? 

해벌의 기회는 주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근신하고 하면 다시 회복하도록 하는 제도를 주어야 한다. 

가장 쉬운 것은 교단을 탈퇴하는 것이다. 개교회차원에서도 혼란을 줄이기 위해 타협점을 주는 것이다. 

 

기독교를 규정할 때에 윤리적으로 완벽함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도 잘못하는데 다시 일어서서 반성하고 나아가는 방향성을 보는 것이다. 연약함과 함께 . 자유로움에 대한 성숙함을 가지기가 힘들다. 

강제로 가게 한다고 해서 효과가 있겠는가. 가정을 개방해야 한다. 하지만 

목사가 거의 신선 느낌. 신비주의. 훈련을 어떻게 하느냐가 쉬운 문제가 아니다. 겉에서 단정하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모범적인 것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런 교회는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도들도 그렇게 된다. 교회가 경직된다. 교회는 자율적이고 실수도 있고 그러나 경건한 곳이어야 한다. 경건을 추구하되 너무 무겁지 않은. 사람 냄새가 나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성격이 안좋고. 결혼한 미망인의 아들과 딸. 아들은 떠나고 - 아마 카톨릭의 용병으로 갔을 것이다. 딸은 치리법원에서 치리를 받음. 칼빈은 죽을때 의붓딸들을 돌봐달라고 부탁. 가정에서 어려움이 있었던 것. 

노력하는 것이지 이상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설령 설교자가 나쁜 사람이더라도 선포된 것이 성경과 다르지 않다면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가 설교를 보고. 자괴감이 있어도.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서 서야 한다는것. 

 

사도들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사도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을 가르치지 않은 것처럼 사도적 교부들도 사도와 반대되는 것을 제시하지 않았다. 

모순되는 것을 전달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성모독적이다. 

어떤 기준으로 신학을 규정했는지에 대해서. 사도와 사도적 교부들에 대한 연속성. 

 

불링거의 교회론 : 정통교리의 기준. 모든 종교개혁자들이 공유하는 정통교리의 기준. 하나님의 교회는 그분의 말씀에 근거하여 확고하고 지속적 사명을 감당하기에 선지자적 사도적 정통신학적이다. 선지자적이고 사도적인 것은 처음부터 교회가 그 사역으로 세워졌고 그들의 가르침으로 오늘날까지 보존되었고 끝날까지 확장될 것이다. 정통신학이라는 것은 참된 가르침을 소유하기에. 이런 표현들이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신학적 기준을 가지고 종교개혁의 사상을 정립했다. 그것을 통해 로마교의 문제를 비판하며 종교개혁을 이루고자 함. 

 

50편의 설교에서 이중예정을 정확히 하고 이중예정의 성격을 그리스도 밖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 

 

예정론이 칼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스위스제2신앙고백서가 출판될 때에 제네바에도 검토하도록 선제후가 보내다. 베자와 콜라독이 검토해서 보내다. 이것과 관련해서 어느것도 지적하지 않은 것들. 내용적 수정은 아니고 예정론과 그대로 수용되었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장키우스가 예정론과 관련해서 이의가 있을 때에 개혁파가 하는게 뭔지 질문서를 하자. 버미글리가 작성했지만 불링거와 협조하면서 정리를 했다. 이와 관련해 장키우스는 칼빈의 에정론에 충실히 서 있엇고 이 답변서에 동의하다. 불링거는 타락후택론적이고 유기에 대해 extra christum인데 장키우스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불링거는 그래서 목회적이다. 

칼빈이 신학자로서 예정론을 지식적 체계적으로 하면, 불링거는 교회적으로 목회적으로 신자들을 고려해서 다루다. 

엄밀한 예정론을 주장하는 칼빈과 장키우스를 포용하다. 구원의 설명에 있어서 다양성이 있었다. 

 

알미니안이 등장하면ㅅ서 이를 구체화 할 필요가 있어서 도르트신조에서 개혁파가 정리되었으나 종교개혁초기에 그렇지느 ㄴ않았다. 후대의 시각에서 모두를 ㄷ재단해서는 안된다. 교회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중예정의 방식으로 풀어가도록 전제하는 것이다. 

 

스위스신앙고백서

공교회 통일성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통치와 관련해서 

교회의 질서를 위해 필요한 2가지 기능 로마교의 계급적 성직제도와 감독정치를 대응해서. 교회직분과 정치의이해를 가지게 된다. 1. 직분. 2. 정치

 

장로정치 원리는 로마교의 독재를 극복하며 사도적 이상적 정치를 위해 장로정치를 제시한 것이다. 

교회를 통해서 통치하시는 그리스도. 

교회정치를 로마교의 사제를 없애고 무질서를 야기하는 것이 아닌, 이상적으로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정치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가정법원 -

1525년 가정법원 .취리히. 

어떻게 성도들의 권덕을 살필지에 대한 것. 그래서 정부 참여적인 교회법이다. 

제네바에 영향을 미침. 

치리히 법원으로 발전하는데 제네바의 치리 법원 형태로 해석하지만 작동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취리히 가정 법원이 제네바의 법원에 아이디어를 제공하다. 목회자 감독 관리 기관 . 

감독이라는 

목회자들의 신학의 건전성을 살핀다. 이런 기구를 통해서 목회자의 신학과 생활의 건전성을 유지했다는 것. 

이런 면을 볼때에 노회 관련해서 노회를 회의로 보기 때문에 노회는 임시적 위험적인데 노회장은 의장의 개념이 있을 때 회의체로서는 없지만 누군가는 행정적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기에. 

 

칼빈은 감독 개념이었다. 계급적인 것이 아니었던 것이지 목회자를 관리감독하고 실질적으로 회의를 주제하는 역할을 했다. 대표목사 개념이었다. 개교회 안에서도 대표 목사라는 개념이고 부목이라는 개념을 없애야 한다.

보편교회의 원리에서 보면 담임목사라는 말은 없어야 한다. 

관리감독하는 기구의 대표자다. 중재의 역할을 하고. 회의의 의장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원리들이 노회는 회의체만 있냐? 아니다. 회의체로서는 그렇지만. 노회는 치리회의 개념이다. 상설 기구로서 역할을 해야 하는데 대표가 있어야 한다. 어떠한 항존성이 있는 것이다. 

 

치리는 그러한데 집사에 대해서. 집사를 교회 자체에서 세워서 명칭을 집사라고 하지만 실제로 복지사로서 종합구빈원을 세워서 구빈원의 제정담당과 그 사람들에게 집사 직을 주었다는 것. 

이것이 화란과 스코틀랜드에서 개교회로 들어가는 것이다. 

상회와 하회의 개념으로 가는 것. 

제네바는 도시 자체가 국가 개념이지만 프랑스나 화란은 범위와 인구수 자체가 다르다.  상회와 하회 속한 목사 개교회를 관리하는 것에서 노회와 총회 개념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교회사적 이해가 없으니 장로정치 원리와 이해하기 어렵다. 

 

상회와 하회가 청교도들에 의해 발달했다. 

원리는 같지만 각 지역에서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확인해야 하는데

우리 한국에서는 프랑스개혁교회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시절부터 국가와 분리된 교회였기에 개교회의 원리. 건전성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는 과도기적 형태에서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고 총회를 하면서 하나씩 정리가 되었다. 

스코틀랜드 1치리. 2치리 발전된다. 

 

피택에 대해서 .

2년 기한으로 1년은 하고 1년은 쉬고 하는 식으로. 연달아서 연속되도록. 

집사, 장로. 당회에서 논의해서 투표를 따로하고. 등등. 

 

장로직, 집사 직을 시키는 것이다. 직분에 적합하게 장로들은 치리를 하고 집사는 봉사하는 것이다. 

직무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표지와 관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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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스라

 이스라엘노예였음기억해. 하나님은 레위기를 시내산에공식적으이스라엘을 자신백성으삼으셨다. 

 하지이들습성여전노예였. 사람은 아침변하않는. 이스라엘노예습성가지노예적응되있었. 하나님이들에게 민수기를 통하일상생활변하하시것이. 

 

2. 질서의 하나

 하나님자신백성하나님백성답만들위해이들숫자하신. 우두머리하시고 그들 가운데 질서를 세우시것이. 

 하나님은 자유민인 백성에자유민으로서품위갖추하시것이. 노예품위. 단지 생존과 쾌락과 눈치만뿐이. 하지만 자유인인 하나님백성질서품위와 품격을 성장해것이. 

 

3. 정확한 하나님
 하나님은 레위인으로 하여백성의 맏아들을 대신하하신. 레위인의 숫자자 그 숫자만큼속전하신. 하나님정확자신백성자신것으삼으신.

 가운질서없, 자라고 하더라도 반드성 삼으시고 반드를 계획하시는 모습대형성하시고마시것이. 그것이 하나님의지이. 하나님뜻이아버지로서사랑이. 마음에 동감하며 순종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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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의 향후 10년은 결정할

그래서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이 될 지 모르는 결정을 최근에 내렸다. 

 

나는 이 결정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만.

결정을 내린 것 자체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던졌다. 나의 인생. 야망. 소망. 계획. 같은 것들 말이다.

 

룻과 같이. 나는 간다. 확실하지 않고 답이 안보이는 그 길을 간다. 

그래서 룻과 같이 나는 실패할 수도 있느나

하나님은 지금 이 내 마음을 아신다. 

그래서 이 길을 선택한다. 하나님을 선택했기에. 그건 확실하기에. 

 

진보에 대한 확신은 없으나

그분을 향한 사랑에 대한 확신은 있다.

그리고 종말에 나를 완성하실

내 인생을 영광스럽게 하실. 

지금의 실패도 의미있게 하실 더 큰 스토리가 되게 하실.

그분에 대한 확신이 있다. 

그래서 갈 수 있다. 딱 반보 앞으로.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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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 안나와도 가야 하는 이유.

 

기쁘게 반보 앞으로.

 

(1: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1:7)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1: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1: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1: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1: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서론

 

나오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원래 유다지파의 사람이었습니다. 유다는 몇째아들? 4번째 아들입니다.

나오미는 엘리멜렉이라는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말론과 기룐이라는 두 아들입니다.

유다 지파의 땅인 베들레헴에서 살다가 갑자기 이 땅에 기근이 생겼습니다.

 

예전에 한국이 아주 못살았을 때 6.25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 한국 사람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일본으로도 많이 갔습니다. 변호사, 사업가 잘 나가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미국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거기서 쓰레기를 뒤져도 산다. 세탁소를 해도 산다.

우리 친척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으로 가면 산다. 너무 풍요로우니까 우리나라와 비교가 안되게 너무 좋은 땅이니까 미국으로 간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이와 같이 나오미의 가족들도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이라는 지역으로 이사를 갑니다. 도저히 살지 못합니다. 모압이라도 가서 밥이라도 먹고 살아야겠다고 한 것입니다.

 

거기서 잘 살았습니다.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성장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모압 지방에서 그곳의 처녀를 구해다가 두 아들 모두 결혼을 시켰습니다. 결혼을 해서 아들도 낳고 딸도 낳고 하면서 나오미는 잘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갑자기 자기 남편 엘리멜렉이 죽어버립니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어버립니다.

 

나오미는 졸지에 과부가 되었고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을 먹여 살려야 하는 처량한 신세에 처하게 됩니다.

얼마나 막막했을까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나오미가 갑자기 모든 상황을 감당해야 하는 신세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에게 한 소식이 들려 옵니다. 원래 자기가 살던 땅인 베들레헴 땅이 유대 땅에 기근이 그치고 예전처럼 어떻게든 먹고는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는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 모압 땅에서 사는 것보다, 여기서도 못 살지만, 내 고향 땅에라도 돌아가서 살아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유다 땅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결심합니다.

 

그러니까 나오미의 신세는 어떤 신세였습니까? 그녀는 이판사판. 이래도 거지꼴, 저래도 거지꼴입니다. 남편도 없고 두 아들도 없습니다. 너무나 외롭습니다. 외로움만이 아닙니다. 앞으로 그녀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일을 해야 먹고 사는데 여자 혼자의 몸으로 얼마나 일을 잘 할 수 있겠습니까?

나오미는 이제 나이가 차서 다시 결혼하지도 못합니다. 그녀는 정말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가장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두 며느리에게 말합니다. 얘들아. 나는 이제 내 고향 유다 땅으로 가려 한다. 너희는 아직 어리고 젊으니. 원래 너희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다시 결혼을 하고 남편을 맞이해서 그래도 먹고 살수는 있지 않냐. 나를 따라와서는 나 혼자서도 살 수 있을지 죽을지 알지 못하는 상황인데, 너희가 나를 따라와서는 안 된다. 집으로 돌아가라. 지금까지 나와 함께 있어준 것만으로도 고맙고. 하나님이 너희를 축복해주시길 원한다.

나오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로서 이 두 며느리를 축복해주고 떠납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이 웁니다. 여성들이 잘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슬픈 상황에서 함께 잘 웁니다. 이 세 여인들도 그랬습니다. 답이 안나오는 상황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여인들의 장기가 뭐냐? 우는 것입니다. 울면서 말합니다. 어머니, 아닙니다. 어머니와 함께 가겠습니다. 어머니 혼자서 어떻게 가시려고 하십니까?

며느리들도 참 착하지요. 심성이 곱습니다. 시어머니를 향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며느리들을 정말로 위하고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도 가라고 해야 합니다. 자기가 책임질 수 없고 능력이 없습니다. 가라. 가야한다 며느리들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너희를 보면. 오히려 내 마음이 더 아프다. 죽은 내 아들들이 생각나서 내 마음이 더 찢어지는 것 같다. 그냥 가다오. 제발 가다오.

나오미가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둘째 며느리 오르바가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입을 맞추고 작별의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눈물을 훔치며 시어머니 곁을 떠납니다.

 

하지만 첫째 며느리 룻은 여전히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1: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은 아주 강력하게 시어머니를 설득합니다.

뭐라고 말하냐? 어머니 죽는 곳에서 나도 죽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실 것이다!

 

나오미는 룻의 결심을 보고. 큰며느리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룻과의 동행을 결심합니다.

둘이 함께 유다 땅으로 베들레헴으로 돌아 가게 됩니다.

 

본론

룻은 왜 그랬을까? 룻은 왜 그랬을까?

룻이 말하는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더 나아가

우리는 이 룻의 말에서 이 룻의 마음에서 무엇을 배워야할까가 오늘의 말씀의 주제입니다.

 

첫째로 알아야 할 것은 룻은 분명히 나오미를 따라가서는 답이 안나온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룻은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시어머니 나오미가 처한 상황을 알았습니다. 이미 고향을 떠나 모압으로 와서 정착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도 거기서 경작할 수 있는 땅이 있는지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지도 못하고 자신은 외국인으로서 어떤 차별을 당해야 할지도 잘 아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모든 것이 부정적인 결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알아야 할 것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에게 굴복했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작은 며느리 오르바를 설득하는 것에는 성공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인정으로는 오르바도 좋은 며느리였습니다. 그러나 오르바가 나오미를 떠나는 것은 결코 나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첫째 며느리 룻은 착하고 둘째 며느리 오르바는 나쁘다는 그런 단순한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 차원이라면 오히려 룻이 더 나쁜 며느리일 것입니다. 이전의 과거를 다 잊고. 자신이 생명보다 더 사랑했을 두 아들 기룐과 말론을 기억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무의식하면서 살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게끔 하는 존재 자체로 함께함 자체로 얼굴을 보는 것 자체로 자기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존재가 룻이었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 어린 시절의 친척들 친구들과 그나마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고 살 수 있을텐데, 저 처녀는 누구요? 하고 물어보면 반드시 자신의 고통을 말해야만 하는 그런 존재가 상처를 다시 상기시키는 존재가 바로 룻이었습니다.

 

룻도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오미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룻은 나오미를 굴복시켰습니다. 무슨 말로 굴복시켰습니까?

룻은 모압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압은 그모스신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룻은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말론과 결혼해서 사는 그 시간에 하나님을 알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룻은 그 하나님을 따라 가는 /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가려고 하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환

우리가 이 지점에서 발견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그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착하든 나쁘든. 능력이 있든 능력이 없든. 그가 어떠한 사람이던지 간에.

그는 하나님을 따라 그 길을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룻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간 것입니다. 사실 시어머니를 따라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따라 간 것입니다.

 

룻이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 잘 알았을까요?

그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세월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아마도 룻은 하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랄론가 기룐을 키우면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가르쳤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룻은 모압 사람이었고 어려서부터 하나님에 대해 배우지 못한 이방인이었습니다. 룻은 고작해야 몇 년 정도만 하나님에 대해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경험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룻은 그녀의 신앙적 지식의 연약함과, 여성이라는 노동력이 없는 신체적인 연약함과, 이방인이라는 신분적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룻은 그의 동서인 오르바와 다르게 뭔가를 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시어머니 나오미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서 뭔가를 본 것입니다. 얄팍하게 어림직하게 얕은 지식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는 분명히 본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씨앗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답이 나오지 않는 길을 자처한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의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바른 것. 옳은 것. 더 나아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역사는 많은 부분. 의리로 이루어지더라.

이것은 인간적 의리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의리다.

 

답이 안 나오는데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이유는 그 자리를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순종이다.

 

진보에 대한 확신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은 있다.

그 약속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하시고 완전하게 하시고 회복시키실 그 하나님의 뜻. 그 날이 우리가 이 두 눈으로 맛보지 못할 날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룻과 같이 세상이 던져주는 답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영적 세계를 바라본다. 희미하게 바라볼 수 도 있고 아직 잘 모를 수도 있고 확신이 100프로가 아닐 수 도 있다.

연약할수도 있고, 모자랄 수도 있고.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어떤 자들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그분 곁에 머문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 곁에 머무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진보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알고 그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위해서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모두가 예수님에 대해서 죽으심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 예수님의 무덤 곁을 누가 지켰는가?

남자 제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도망갔다. 능력있고 힘이 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은 답이 나오지 않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보고서 모두가 다 도망갔다.

그러나 연약하고 모자라고 부족한 그 눈물 많은 나약한. 쓸모 없는 그 여인들이 그 무덤 가를 지키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 여인들의 후손들이다. 우리의 영적 스승은 베드로나, 바울이나, 안드레나, 요한과 같은 잘난 선지자와 뛰어난 학자와 능력 있는 설교자가 아닐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닮은 사람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우리의 영적 계보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이 연약한 여인들이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이 여인들의 마음을 아신다. 그를 사랑하여 그를 사랑하기에 의리를 지키는 그 여인들을 아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찾아오신다.

세계 역사의 가장 놀라운 비밀. 세계 역사를 바꾼 최상의 사건. 부활의 역사가 가장 먼저 이 연약한 여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 의리를 지키라. 능력 없어도 괜찮다. 걸리적 거리는 사람이라도 괜찮다. 좀 천천히 느리게 가면 됩니다. 다만 예수님 앞에 의리를 지키라 그분 곁을 떠나지 말라. 그분과 함께하라 그분을 사랑하라.

 

답이 나오지 않아도 그 길을 걸어가라.

 

적용

이제 우리의 이야기로 나아옵시다.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이고 우리는 왜 여기 모여 있으며, 우리는 뭘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이곳은 영광에서도 가장 시골인 대마면입니다.

여러분 이곳에서 뭐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곳에 남아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답이 되는 잠재력이 있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영광 읍내라도 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룻은 모압에 남지 않았습니다. 답이 나오는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모스 신을 섬기는 남편을 만나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과부로 평생을 살 각오를 하고 하나님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시골에 사느냐 도시에 사느냐 그 문제를 가지고 누군가를 비하하고 누군가를 높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문제는 내 마음이 향하는 것이 하나님이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향하는 것이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십니다. 하지만 내가 향하는 것이 세상이라면 세상이 말하는 가치라면 그것은 하나님과 다릅니다.

 

착하고 나쁘고가 아닙니다. 오르바냐 룻이냐. 그것을 결정짓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느냐. 그리고 그 하나님과 의리를 지키느냐입니다.

 

의리라는 것은 답이 나오는 걸 보고 지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의리는 답이 안나올 때 무모하게 도전하는 것을 뜻합니다. 비현실적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을 고수하는 것에서 나오는게 의리입니다.

하나님과 의리를 지키십시오.

하나님과 의리를 지키는 것은 멀리 있는게 아닙니다. 약한 사람과 함께 하십시오.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과 함께 하십시오.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순종하십시오.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무모하게 어리석게 나아가보십시오. 그렇게 함께 조금씩 나아가는 축복있으시길

그 의리로 살아가는 우리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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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설교 > 역사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상 10:1-10 11:1-5  (1) 2023.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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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 전 심방에 대해. 점검의 측면, 성찬 전 심방을 하면 검열 차원은 아니지만 성찬의 치리적 성격을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세속화가 많이 들어와서. 1) 인본주의 2) 개인주의-교회는 공동체, 다른 사람과 관계가 어려움 그 안에서 안정감이 있어야 3) 다원주의

 

교회가 공동체성을 회복하게 도와야 한다.

교회가 혜택을 많이 주나 국가가 혜택을 주나? 국가가 해준다.

교회가 뭘 할 것이냐? 국가와 교회의 세밀한 틈새를 살피면서 공동체를 견고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필요하다. 아애 간섭을 안한다. 

 

공예배의 경우. 참석을 해야 하는게 의무이고, 참석을 하지 않으면 양해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이고 어떤 일이든 나눌 수 있고 해결할 수 있고 삶의 위기가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복지에 대해서 필요하다. 그러나 선거철이 있을 때마다.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는 것처럼 공약을 한다. 

물질주의적 측면에서는 국가를 더욱 의존하게 된다. 좌파우파를 떠나서 강화되는 형태이다. 교회가 이런 면에서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그 원리에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고민해야 할 것이냐에 대해 답을 가져야 한다. 

 

공동체가 중요하다.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디까지 관여할 수 있겠는가가 중요하다. 목회자도 간섭받기 싫어한다. 이중적 의미 - 자기 삶에 대한 오픈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 너무 힘든 것. | 성도와 목회자가 어느정도 거리가 있으면 존경받고 가릴 수 있지만, 공동체성에 대해 목회자가 얼마나 다가가는가. 치리의 성격에 있어서 얼마나 서로를 살피는가. 그런 삶을 사는가에 대해서. 

 

종교개혁시대에 시민이며 교인이었기에 개별 교회 문제가 아닌 국가 교회였다. 

그것이 화란에서는 개교회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변환. 

집사회를 통해서. 종교개혁시대에는 집사회가 개별 교회의 집사가 아닌 국가적 차원이었고 모두를 살피다. 

 

여성에 대한 정의가 완전히 바뀐다. - 중세시대에는 사람과 짐승의 중간 정도였다. 남성에 종속된 존재로. 

종교개혁시대에 남성과 여성을 동등히 말하다. 가정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달라지다. 

 

목회적 돌봄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 초대교회 쓰여진 글을 보면, 성도들의 삶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  공동체성에 대해서 어떻게 보는. 츠빙글리가 전쟁에 나서는 것은 목회적 돌봄을 위해 간 것. 

 

왈도파가 850년을 유지해왔다. 아미쉬 500년. 그 원리가 무엇이냐? 재세례파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한국교회 139년 동안에 여러 상황에서 내부적 여러 문제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을 다 종합해서 대입을 한다면. 

 

목사들이 절대로 힘을 주면 안된다. 강압 무게로서 오면 안된다. 성도의 교제가 함께함이 좋고 연약도 있으나 같이 뭔가 움직이는 신앙과 삶의 안정감에 대해서. 개혁교회의 많은 목회자들 가운데 위에서 찍어 누르듯 . 교회가 너무 경직된. 그런 것들을 주의해야 한다. 주님의 마음을 봐라. 죄인들을 포용하고 책망하시지만 모두가 비난하는 그 죄인들을 품으면서 같이 함께하는 것이다. 개혁교회가 규범적 원리만 남아서 그것을 적용하는 것에만 기계적으로. 이 간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서 고민이 필요하다. 

 

예정론에 대해서 칼빈과 불링거간의 의견 차이가 있었다. 

이중예정의 개념에 대해서 말했다가 이후에

1556년 summa religion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중예정의 개념을 말하지 않고 선택만 예정으로. 유기는 extra christicum 으로 

그렇다면 둘 사이에 의견 일치가 있나? 

스위스 제2신조에 대해서 베자가 의의 제기를 해야 하는데 안했다. 

찬키우스가 예정론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 버미글리와 불링거가 답변서를 정리하고. 

찬키우스는 이중예정을 강하게. 버미글리도 이중예정을 수용. 

불링거는 자기 목회적 입장 속에 예정론을 드러낸 것임. 

 

아우구스부르크 제국회의와 관련해서

불링거의 신앙고백서는 12개의 언어로 120판 정도 출판된 것. 여전히 개혁파 안에서 중요한 신앙문서로 남아 있다. 

 

도르트총회에서 어느 한 편에서 이중예정을 강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과 관련해서 오해된 것. 

알미니안적 입장을 / 알미니안이 자기 의견을 말할 때 불링거에 대해 가져온다. 이것에 대해 해명했지만. 

불링거가 죽으면서 그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칼빈의 영향력이 강화된 것과 관련해서. 칼빈의 입장이 더 선명히 드러난 신앙고백서들이 대두되는 것. 

 

예정론과 장로정치가 강하게 드러나 있는 것. 이 측면에 대한 이해가 드러난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칼빈 오페라가 작성될 때 대부분의 연구가. 루터 츠빙글리 칼빈 연구가 중심이었다. 

후기 연구 그 외의 연구들은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불링거가 한국에서 실제로 소개되지 않은 것. 영미권에서 자료가 없었고 자료는 다 독일권이었던. 

 

개혁파의 예정론과 장로정치 원리와 관련해서 칼빈과 관련된 신앙고백서적 특징과 교리적 특징으로 칼빈에 대한 중심 속에 개혁파가 소개된 것이다. 그래서 스위스제2신조도 강조되지 않은 것. 

책 한권이다. 사실 너무 방대함. 

 

불링거는 요한계시록 100편 설교를 하면서 주석하다. 

초기 정통주의의 입장으로 정리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분의 말씀에 근거하여 지속적이고 / 사도적 선지자적 정통신앙적이라고 명칭될 수 있다. 

교회가 처음부터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사역으로 세워졌고 그들의 가르침을 통해 오늘날까지 보존되었으며 

세상 끝날까지 확장될 것이다. 정통신앙적이라 명칭되는 것은 교회가 참된 바른 신앙을 소유한다. 

 

정통신학이라고 할 때에는 계승되어온 신앙 정신에 대한 정통신학이라는 개념이 . 

교파주의가 시작될 때에 신앙고백서는 독특성이 들어가는 것. 

17세기 철학적 개념이 정리되었을 때에는 사도적 가르침에 근거한 것들. 

 

종교개혁이 하나의 종교개혁이고 루터든 츠빙글리든 칼빈이든 사도적 가르침에 근거해서 면면히 계승되어온 정통을 추구했다. 종교개혁사상은 이 개념을 전제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왜 사도적 가르침. 정통이라는 개념이 왜 중요한가. 이게 없으면 보편교회도 깨지고, 개신교 내의 연합도 깨지고, 이단 대응의 기반도 무너진다. 

 

멜랑히톤이 종교개혁 사상이 무엇인지 종합적으로 정리한 것. 초판을 유심히 봐야 한다. 이 영향을 대부분의 개혁자들이 받는 것이다. 

루터파와 개혁파는 같으면서도 다르지. 본래 다르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사를 잘못배우니까 공교회성이 다 무너지는 것이다. 이단문제 대응 등에 명분이 다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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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기도드린다

눈물이 난다

왜인지 모르겠다

도와달라고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기도드린다

다른 기도할 때는 눈물이 나지 않는데

왜 이상하게 나라를 위해 기도할때는

막 눈물이 안에서부터 벅차오른다

 

아마도 하나님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을 

찾고 계시지 않을까 

나라를 위해 울어줄 사람을 찾고 계시지 않을까

 

어쩌면 이 나라가 정말 망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먼저 울게 하시는건 아닐까

하는 두려운 생각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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